이 시집을 읽으며 '성(聖)과 속(俗)'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성스러움과 속됨이라고 하기보다는 어쩌면 구름 따먹는 소리와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시인 약력에 보니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2003년에 나온 시집이니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들이 꽤 있다.

 

  그리고 그 시들이 바로 속됨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현실에서 초월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충실한 사람만이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이상의 세계, 초월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이상을, 초월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결국 구름 따먹는 소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냥 허공 중에 흩어지는 말을 할 뿐이니까.

 

농사를 짓는 사람,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다.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현실을 초월할 수도 있다. 그런 현실에서 초월의 모습을, 속(俗)에서 성(聖)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집에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는 시들이 많다. 시인은 서로 다른 존재들에게서 비슷한 점을 발견해 낸다. 이런 표현들이 바로 속(俗)에서 성(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어떤 장기 기증자'라는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는 사람을 연상한다. 하지만 아니다.이 시에서 말하는 장기 기증자는 낡은 트랙터다. 자신의 부품을 다른 기계에 주는 낡은 트랙터를 장기 기증자에 비유하고 있다.

 

농사 기계들과 함께 지낸 경험이 이렇듯 시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삽'이라는 시도 그렇다. 심고 캐내는 일. 씨앗을 심거나 울혈을 빼내는 역할을 하는 존재로 삽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성화(聖化)'란 시가 있다. 성스럽게 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속된 존재가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무엇일까? 시의 맨 마지막에 알려주고 있다. '결론은 / 똥이올시다'(118쪽)라고.

 

이렇듯 속된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 것들을 이상적인 자리로 끌어올리는 시들이 많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 삶이 바로 성스러워야 한다. 성스러움은 특정한 공간에 또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삶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시인이고 시다. 이런 시들을 만나면 현실이 더 성스러워진다. 우리들 일상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한 시를 더 보탠다. 명심해야 할 시. 현실을 이상으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히나 읽고 가슴에 새겨야 할 시다. 이 시는 그래서 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씨앗을 심는다. 그런데 그 씨앗을 품지 못한다면 파내어버린다.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

 

논을 간다, 논을 간다는 것은 단단하게 뭉쳐 있던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 치밀했던 조직망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

다시 작은 토립자(土粒子) 하나하나의 위치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이제

그 느슨해진 조직 사이사이로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은 그 뿌리를 통해

또다시 일 년 동안 결연한 의지를 키우며 지상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묵은 땅은 갈아엎기 힘들다

쟁깃날이 튄다 부러져나간다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 마치

콘크리트 밭에 사람들 우거지듯 늘 점령군 같은 잡초만이 빼곡히 자랄 뿐이다

그건 우리를 비웃는 땅의 조용한 테러이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장기집권체제의 황량한 황무지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흙이, 사람의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

 

이덕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 2003년. 105쪽.

 

땅을 갈아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 잘 갈아엎지 못한 땅은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자신이 '묵은 땅'인지, 그래서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황량한 황무지'로 남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한 해 농사를 망치지 않듯이 우리들 삶을 망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들 삶이 현실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즉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

 

한 시만 더 이야기하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시, '물 위의 발자국'(74쪽)이라는 시. 한번 읽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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