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바른 나쁜 인간 - 도덕은 21세기에도 쓸모 있는가
이든 콜린즈워스 지음, 한진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예의 바른 나쁜 인간'이라는 제목.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 한 자리에 있어,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나쁜 인간이라는 말에는 도덕적이지 않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도덕적이지 않다는 말과 윤리적이지 않다는 말이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음을 이 책에서 거듭 말하고 있는데... 도덕은 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고, 윤리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한 사람도 도덕적으로 수치심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고, 윤리적으로 옳은 일을 한 사람도 도덕적으로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리와 법은 어떤가?

 

윤리가 관습으로 지켜야 할 규범이고,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는 있지만, 꼭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닌 반면에, 법은 지키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윤리보다는 법이 더 강제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강제성 면으로 보면 법이 우선이고, 다음이 윤리이며, 마지막으로 오는 것이 도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과연 도덕은 무엇일까? 도덕적 행동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그렇다고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도덕이고, 또 어떤 것이 도덕이 아닌지는 지극히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나쁜 인간을 숱하게 만나는 것이다.

 

이첵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에게서 도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그들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행동이 도덕적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도덕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어느 곳에서 도덕인 것이 다른 곳에서는 도덕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그에 대한 판단 기준도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이라는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상대적인 것이 도덕이지만, 절대적인 도덕이 있지 않을까? 우리 인간들에게 모두 도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것을 추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읽다 보면 도덕이 지니는 함의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변해왔음을, 그리고 계속 변해감을 알 수는 있지만, 자칫하면 그들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변했으니, 사회가 변했으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도덕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도덕을 느끼게 하는 것은 윤리다. 사회가 지니고 있는 규범이고, 이 규범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변하면 도덕도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절대 도덕은 없는가? 아니다. 있다. 변할 수 없는 무엇.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에서 온다.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것, 그것은 비도덕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빌려 오면  '정리 31 어떤 사물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선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서광사. 2006년. 233쪽.) 라는 말이 있다. 선을 도덕과 같은 의미로 쓴다면,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도덕이다.

 

이런 도덕에서 벗어났을 때 수치심을 느낀다.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젊은 사람들이란 정념으로 살고 따라서 과오를 많이 저지르지만 수치로 말미암아 이를 억제하는 까닭에 모름지기 염치심을 잘 길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염치심이 있는 젊은 이들을 칭찬하지만, 나이를 먹은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 안다고 해서 그를 칭찬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나이를 먹은 사람은 부끄러운 느낌을 가지게 할 일을 전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부끄러운 느낌은 좋지 못한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에게는 속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최명관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1984년. 서광사. 141쪽.)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몸에 배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리스토텔레스, 최명관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1984년. 서광사. 202쪽.)

 

이 구절을 우리나라 국회에 적용한다. 젊은이들보다는 늙은이들이 훨씬 많은 우리나라 국회. 다른 곳은 정년이 있는데, 정년이 없는 국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치심을 모르는 국회.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제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치심을 가지면 그것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때문에 수치심을 못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아예 무얼 잘못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

 

수치심도 몸에 배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니 이들은 '예의 바른 나쁜 인간'에 해당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은 늘 옳다는 그런 신념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는 오로지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밖에는 없는 그런 인간들.

 

언론에선 이런 수치심을 모르는 군상들이 주로 나온다. 자연스레 우리 사회는 개인의 도덕은 권력(경제, 정치, 법조 등등)의 힘에 의해 가려진다. 윤리가 실종된다. 오로지 법이 전면에 나서는데, 법은 권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도덕은 삶에서 점점 밀려날 뿐이다.

 

'예의 바른 나쁜 인간'들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지금보다는 나아질 세상을 꿈꾼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선은, 도덕은 지금보다는 나은 나, 나은 사회를 추구한다.

 

어떻게?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과 실제 적용해야 할 것을 위도와 경도로 표현하고, 이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도덕이 발견될 것이라는 저자의 말(310쪽)을 명심해야 한다.

 

'예의 바른 나쁜 인간'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사회가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여전히 도덕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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