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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ㅣ 라임 틴틴 스쿨 9
설흔 지음, 유준재 그림 / 라임 / 2017년 9월
평점 :
소설이다. 책을 펴낸 목적으로 보면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임에 분명한데, 읽으면서 과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현세자의 진짜 공부라고 하면, 우선 소현세자부터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두 가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소설은 그냥 헛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책 속에 갇힌 글들, 사건들, 인물들.
소현세자를 알기 위해서는 병자호란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존(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는데, 무더위가 극성인 현재에 나타난 소현세자를 소설의 서술자는 존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말을 건, 알고 있는 존재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찾아야 한다. 이것도 작가가 제시한 공부다)은 조선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몸은 검게 변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211쪽)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을 찾아 더 공부하라는 의미, 즉 소설로 끝내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전쟁, 그리고 그 뒤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공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래서 이 소설의 말미에 있는 말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 아픔을 청소년들이 이해한다면 이 소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리라.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치욕의 역사를 깨끗이 잊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실패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반복된 슬픔의 역사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니까요. (214쪽)
소설은 이중의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에 만난 두 사람이 있고, 이들 중에 존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이 슬픔은 어떤 슬픔인가?
소설에서는 강화도 앞 바다의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 장면을 통해 서술자인 내게 일어난 비극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싫은, 그러나 꼭 기억해야만 하는 그날의 사건을.
병자년 전쟁 때 강화 앞바다에는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둥둥 떠다녔다지요. 머릿수건의 주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창과 칼에 찔리거나 화살과 포탄에 맞아 죽었는데도 머릿수건들만큼은 가라앉지도 않고 강화 바다를 오랫동안 둥둥 떠다녔다지요.
나는 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종이배에도 의지하지 못했던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211쪽)
바다와 가족, 죽음... 침몰... 하지만 작가는 내가 겪은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비극을 통해 소현세자를 등장시키고, 병자호란에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이름없는 민초들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불을 내기도 하고, 나라를 탈출하기도 하는 등 얼마나 그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러나 국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잘 살게 되었는지, 결국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백성들이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소현세자는 그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
청나라에 반대한 신하를 낙점해 청나라로 보내는데 인조가 결정한 신하는 겨우 홍문관 교리와 수찬에 불과한 윤집과 오달제였다고 한다. (소설 175쪽)
이들이 어떻게 주범이 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과연 왕을 움직일 만큼 권력이 있었을까? 소설 속 소현세자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을 지목했을 거라고 한다. 이들은 그 직위로 보아 충분히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지목해 청나라로 보내면 국내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해야 할 인조가 신하들에게 계속 충성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그러니 인조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않은, 아직은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한 신하들을 지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니 전쟁의 참화는 위로 갈수록 적어지고 밑으로 내려올수록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이런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 그것에 대한 공부,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공부가 현실에 적용이 되어야 진짜 공부가 되는데, 소현세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
소현세자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되지 못했습니다. (중략)
아,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나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역사의 죄인일 뿐입니다. (208쪽)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지... 소설에서 서술자를 죽임을 당한 나로 설정한 것이 그 한 이유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실을 고발했지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심양장계》,《소현동궁일기》,《소현심양일기》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어떤 이의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까지만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하겠지만 제 입으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 스스로 찾아낸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5쪽)
소설을 읽으며 소현세자가 하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찾고, 또 소현세자와 짝이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가 나와 있는데, 이것이 힌트다.
아마도 요즘 청소년들의 검색 능력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나'를 서술자로 택했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소설 속 현재에서도 진실은 가려져 있으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세상이나 필요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역사에 흥미를 느껴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면 작가의 목적이 성공한 것이리라. 단지 관련 자료를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보고,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더더욱.
그렇다면 소설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죽음,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보자... 검색했더니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정명수가 임금을 모독하고 조선 관료들을 업신여기며 횡포를 부리자 1639년 세자시강원 필선 鄭雷卿이 조선에서 바친 은자와 배, 감 등 세폐 물품을 정명수와 김돌시가 몰래 횡령했다는 혐의로 청으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결국 근거 없는 모함으로 몰려 정뇌경은 처형당하고 이후로는 청역들이 일마다 말썽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병자호란 직후(1637~1644) 朝淸 관계에서 ‘淸譯’의 존재 김 남 윤 25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