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인하의 아니메 미학 에세이
박인하 지음 / 바다출판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지금은 좀 멀어졌는데 한때 애니메이션, 아니 아니메라고 하는 일본 만화영화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무슨 매니아처럼 일부러 찾아 보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본이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상당히 앞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웹툰이 인기를 끌자 이를 영화로 만든 경우가 많은데, 강풀 만화라든지 최근에 '신과 함께'와 같은 경우와 같이 웹툰으로 먼저 연재가 되고 인기가 많아지자 영화로 만드는 경우가 꽤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일본은 우리와 달리 만화로 인기가 있는 작품을 영화가 아닌 아니메(애니메이션)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이 연기하는 것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했을 때 좀더 풍성한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만화에서 표현된 내용을 애니메이션이 좀더 잘 옮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영화로 만들었을 때 등장인물이 지닌 성격으로 인해 많이 제약되는 경우를 보아 왔기 때문이 아닌가 하기도 하고.
하여튼 일본과 우리는 좀 방향이 다르지 않나 싶은데... 아니메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이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도 계속 아니메가 만들어지고 있고 나름 인기도 끌고 있고.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애니메이션 하면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보는 장르로 치부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드물다는 생각을 하고.
이 책은 15년쯤 전에 나온 책이다. 이때쯤만 해도 애니메이션이 꽤 인기가 있었을 때고, 이 책에는 구체적인 분석은 없고 그냥 이름만 언급되고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런 일본 아니메에 대해서 분석한 책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미학을 8가지 코드로 정리해주고 있다.
종(끝), 영원, 하늘, 바다, 우주, 검과 피, 테크놀로지, 히로인과 섹슈얼리티
이렇게 여덟가지다. 이 중에 종(끝)이 처음에 나온 것은 일본 아니메가 패전과 관련이 있다는 것. 어쩌면 일본은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욕망을 아니메에 투사한 것은 아닐까 한다.
종말이 다가오는 지구, 인류, 그들을 구원하는 영웅. 그 영웅이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결코 패망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것이다.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들지 않게 만든 작품들이 바로 아니메가 아닐까.
이런 아니메는 그래서 영원을 추구하고, 광활한 하늘, 바다, 우주를 누비게 된다. 섬나라라는 특성을 지닌 일본이 섬을 벗어나는 환상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니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섬을 벗어나게 해주는 기술이 바로 테크놀로지다. 일본은 이런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다. 테크놀로지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지도 모르지만 인류를 구원해주는 것 역시 테크놀로지다. 다만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점이 일방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라는 것은 명심해야 한다. 사무라이 전통이 강한 일본에서 검과 피가 아니메의 한 코드를 장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여성 캐릭터들을 섹시하게 포현하는 것 역시 상업성을 살리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고. 결국 아니메의 여성 캐릭터는 처음에는 남성들의 성적 환상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여성 주인공들이 등장했고.
이 책에서는 '쇼타콘'이라고 해서 여성 관객들의 관심을 끄는 어린 남성 캐릭터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일방적으로 한쪽만의 성적 환상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점들에 대해서 설명을 한 다음 1990년대 아니메의 새물결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지는 장르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지속되고 있음을, 아니메가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어린이물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렇게 아니메는 영화의 한 종류로써 계속 살아남고 변화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미술에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진학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애니메이션 분야는 아직도 가능성이 열려 있는 분야일지 모른다.
아직은 일본에 비해 많이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니까. 수많은 인기 만화들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해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많으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림 실력만이 아니라 기술과학에 대한 지식 못지 않게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 아니메에서 보여주는 선과 악에 대한 해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이 책에서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이 영화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으려면 아동-청소년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왜 일본 아니메가 인기를 얻었는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이 책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또 책을 읽으며 과거를 여행하는 듯한, 예전에 봐왔던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그런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