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생각한다. '배움'이 사라져 버린 교육. 그런 교육이 판치는 곳이 바로 학교, 소위 공교육이라고 하는 제도권 교육이 아닌가 한다.
'배움'은 없고 '두려움'만 넘치는 곳, 학교. 배움은 두려움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두려움'이 학교를 온통 감싸고 있으니, 여기서 어떤 배움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두려움'이 어떤 대상에게 일어날까? 학교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교육의 3주체... 학생, 학부모, 교사... 우습다. 우리나라 교육의 주체는 교육관료들이다. 국가다. 다 정해놓고, 너희들은 따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니들이 교육주체니 자발적으로 좀 하라고 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학교에서 '두려움'을 가장 많이 느끼는 존재는 '교사'다. 불행하게도, 어떤 학부모도(부모라는 말과 학부모라는 말은 엄연히 다르게 쓰인다고 하니) 교사를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시장 논리가 학교에 들어온지 오래. 교사는 자식에게 지식과 진학이라는 상품을 파는 존재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상품을 팔지 않으면 당장 항의가 빗발치듯 날아온다. 제대로 하라고. 왜 아이를 학교에 보낸 줄 아냐고. 교사는 학부모의 항의에 '두려움'을 지닌다. 단지 항의가 아니라 툭하면 민원을 제기하겠다느니, 소송을 걸겠다느니 하니... 어찌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학부모도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 말하고 있는 '나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부모. 아이가 자신처럼 힘들게 살까봐 두려움에 차 있다. 학교 교육을 잘 받아 자신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현실이 녹록치 않다. 학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학원에도 보내지만 두려움은 가시지 않는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승욱, 부모의 현재가 아이들의 미래다. 34-41쪽)
교사도 부모도 두려움에 차 있다. 아이들이 만나는 어른이 두려움에 차 있다면 어떤 아이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이들 역시 두려움에 차 있다. 학교에 있는 아이건, 학교 밖에 있는 아이건.
학교 밖에 있는 아이는 함께 할 사람을 잘 찾지 못해, 또 나만 떨어져 나온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사람, 함께 가는 사람이 있으면 이들은 학교 안에 있는 아이들보다는 두려움을 덜 느끼게 된다.
한번 두려움의 벽을 깨고 나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현병호, 탈학교운동을 돌아보며. 48-61쪽)그런 이들에게 힘을 주는 단체도 있다. (홈스쿨러를 위한 플랫폼 '홈스쿨링 생활백서'. 88-96쪽) 두려움을 조금 덜어줄 수 있다. 두려움이 덜어지면 배움이 시작된다. 배움은 두려움을 떨쳐내는 데서,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서 시작한다.
두려움을 이겨내면 학교 안이든, 학교 밖이든 구분할 필요가 없다. 이때부터는 모든 것을 '배움'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민들레가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배움'을 시작하는 것.
'배움'은 수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이다. 배움은 질문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그런 배움에는 '두려움'이 함께 할 수 없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민들레 120호를 읽으며 기획 주제가 '부모, 교육 주체로 서다'인데... 부모는 늘 교육 주체였다는 생각을 한다. 부모는 지식을 준다는 의미에서 교육 주체가 아니라 자식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주는 존재이기에 교육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나처럼 살지 마라'는 말은 교육 주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삶을 잘 살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보여준다기보다는 잘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먼저 교육 주체가 되는 존재는 부모다. 그 다음, 부모 역할을 대신해주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친척이든, 이웃이든, 교사든, 친구든.
교육 주체가 된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는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아니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자식과 함께 하는 사람이 훌륭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자식을 교육하라고 맡길 수가 있단 말인가.
상대에 대한 인정이 있어야 교육 주체로 설 수 있다. 시장 논리로 교육에 접근해서는 교육 주체가 될 수 없다. 부모가 교육 주체이듯이, 교사도 교육 주체이고, 학생 역시 교육 주체이다. 이들은 모두 관계를 맺으며 '배움'을 만들어 간다. 그렇게 만들어 가는 '배움'에 '두려움'은 함께 할 수가 없다. 함께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현실은? 대안학교들이 20년 넘어가면서 정체되고 있고, 혁신학교 운동이 제자리 걸음하고 있으며, 수능이라는 벽은 점점 더 공고해져 가고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나라에서 '배움'은 일어나고 있는가. '두려움'이 없는 배움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 그것이 바로 교육 개혁이리라. 민들레는 그 과정에 하나의 화두를 던져두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치열하게 이 화두를 잡고 놓지 말아야 한다. 교육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아니 우리 모두는. 모두가 교육과 관련이 없을 수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