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해설을 읽어도 과연 그런가 하는 시집이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 시집.
내용을 이해하기 힘드니 감동을 받기는 더 힘들다. 반어니, 역설이니 이런 해설을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을 하지만, 반어는 우선 상황을 공유해야만 존재하는 것.
상황을 공유하지 못하면 반어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이 반어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반어임을 알기 위해서는 시인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반어임을 알고 아하, 하는 감탄을 내보낼 수가 있지. 역설 또한 마찬가지다.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소리라고만 생각하고 만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반어니 역설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오지 않은 것은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를 잘못 만난 탓도 있지만, 그래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시를 쓰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그냥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파고드는 시가 있었는데, 그것은 '내 똥구멍 속 송아지'라는 시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드는데, 아버지의 삶에 자신에게 쏟아부은 송아지들, 이는 아마 대학이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불린데서 기인할 것이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소를 팔았다고 하니... 그러니 시의 화자 똥구멍 속에는 얼마나 많은 송아지들이 들어 있을 것인가.
그 송아지들은 부모의 사랑에 다름 아니다. 부모 사랑이 자식 몸 속에 깊이 깊이 들어와 있는 것. 그러나 자식은 그 사랑을 다 소화시켜내지 못한다. 그래서 똥구멍 속 송아지 아니던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인데...
이 시집에서 단 한 편의 시를 고르라고 하면 '수구적인 목재 집에 대한 단상'이라는 시를 고르겠다. 그만큼 이 시는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마음에 와닿기도 한다.
수구적인 목재 집에 대한 단상
서른 해 가까이 장씨 일가를 품고 있는 목재 집이
나무 벌레 구멍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질 못한다
같은 해 뿌리를 내린 뒷마당 밤나무보다
자꾸만 작아지던 목재 집은 이젠
처마 끝에 쥐고 있던 동태 꾸러미까지
고양이에게 낚아 채이는 허리 굽은 몸이 되었다
문틈에 깊게 고인 겨울 바람에 빠져본 사람들은
저마다 손이 미치는 곳만 골라
집 좀 바꾸라는 불평을 잠깐씩 박아보지만
가슴을 뒤덮던 푸른 나뭇잎 다 떨구어
산밭 일구듯 늘린 나이테
목재 집 기둥에 가득 채운 아버지에겐
열릴 때마다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대는
부엌문도
아랫목만 까맣도록 편애의 손길을 주는
외골수 구들장도
지켜야 할 전통일 뿐 결코 수구가 아니다
나는 아예 나무 벌레 하나라도 넘겨 볼 허점이 없는
보일러의 온기가 이 방 저 방을 편견 없이 넘나들
새 집을 지으려 하지만 목재 집은
온갖 벌레들을 불러들여 나의 설계를 방해하며
마음 한쪽에서 좀처럼 터를 내주지 않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한군데 반듯하게
햇살에게 손을 내밀 창틀 하나 없는 목재 집이
뒷마당 밤나무만큼 땅 속 깊이 자라
대문 밖 내 풍경들의 배후에까지
도도히 뿌리를 뻗고 있다
장무령, 선사시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세계사. 2005년. 초판 2쇄. 57-58쪽
삶의 역사가 있는 집이다. 함부로 없애버릴 수구가 아니다. 이는 전통이다. 삶의 뿌리를 뻗고 있는 집. 그런 집은 불편하긴 하지만 자신들 삶이 녹아있기에 함부로 부술 수가 없다.
전통은 그렇게 가볍게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수구적인'이라는 말을 썼나 보다.
과거를 지켜야만 하는,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적인 것이 아니라, 삶이 녹아 있는 집을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수구적인 것이다. '수구' 얼마나 변하기 힘든 단어인가. 그래서 시인은 전통이라는 말보다 수구라는 말을 써서 우리에게 목재 집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내 삶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시. 비록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목재 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 삶이 켜켜히 쌓여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