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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두꺼운 책이다. 요즘에 500쪽이 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 힘든 일이다. 시간을 내기도 힘들고, 우선 두께에 질려 책을 펼치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끝까지 읽게 된다. 중간에 그만두기가 힘들다. 읽으면서 계속 명작이군! 명작이야!라는 말을 하게 됐다. 흥미진진하게, 다음에 어떻게 전개될까, 결말이 어떻게 될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한 사회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공간은 정신병원이다. 정신병원하면 미쳤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미쳤다는 말, 보통에서 벗어났다는 말, 다른 말로 하면 독특하다고 하는 말로 바꾸면 이들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정신병원에 사람들을 가둬두고, 미쳤다고만 하면 그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사실 그들은 미쳤다기보다는 조금 다를 뿐인 경우가 많은데... 물론 아주 심한 경우야 치료가 필요하지만, 그 치료란 것이 격리나 어떤 물리적 절제술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콤바인이라고 불리는 정신병원. 이 정신병원에 있으면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진다. 나빠져서 그곳에서 나올 수가 없게 된다. 나오는 경우는 죽어서 시체가 되는 길 뿐이다.
이런 곳에 아주 독특한 사람이 온다. 아니, 기존 관념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은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주로 세 사람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브롬든(그는 추장으로 불린다. 인디언과 백인의 혼혈이다)의 눈으로 맥머피와 랫치드 수간호사 사이의 갈등이 펼쳐진다.
랫치드 수간호사. 아마도 우리 사회로 치면 수구쯤 되는 사람.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람. 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모두 정신이상자이며 이들은 자신을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독재자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폐인으로 만들어버리니까 말이다. 전기충격요법에 이어 전두엽 절제술까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수간호사. 하다못해 의사들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으니...
치료라는 이름으로 전횡을 일삼는 사람이 바로 이 랫치드 수간호사라면 이 수간호사에 맞서는 사람이 바로 맥머피다.
정신병원에 들어올 때부터 활달하게 들어오는 맥머피... 그를 브롬든은 특이하게 본다. 그런 특이함 속에서 그는 병원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응, 오로지 수간호사의 명령에 따르도록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람이 아니라 환자만이 있는 병원... 사람이 아니라 국민만이 있는, 그것도 충량한 국민만이 있는 독재자의 나라와 비슷한 상황.
이런 사회에서는 웃음이 없다. 맥머피가 우스운 이야기, 행동을 해도 처음에 이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웃지를 않는다.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웃음을 빼앗긴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환자로 살아가게끔 강요받고 있는 현실. 그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맥머피다. 수간호사의 부당한 처사에 맞서 하나하나 고쳐가려 하는 그의 모습은 환자들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환자들은 자신들이 수동적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가 아니라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달아 간다. 그 깨달음 속에서 그들은 작은 일탈도 감행하고... 하딩 같은 사람은 그 의식을 끝까지 지닌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하찮은 존재, 너무도 작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던 브롬든이 서서히 자신의 힘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맥머피가 비록 전두엽 절제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되지만 그가 한 행동들이 패배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식물인간이 된 맥머피... 그것을 볼 수 없는 브롬든. 브롬든은 베개로 맥머피를 질식시킨다. 랫치드 수간호사에게 반항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표본으로 그를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롬든은 정신병원을 탈출한다.
이제 그는 무기력한 환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맥머피라는 사람으로 인해 자각해 가는 과정, 결국 자기 삶은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맥머피가 병원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병원에서 퇴원한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병원은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지만 수간호사의 힘이 많이 줄어들었고, 또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 병원을 사회로 치환하면 독재자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독재자에게 대항해서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 역할이 끝나면 퇴장해야 한다.
만약, 맥머피가 계속 살아서 수간호사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면 다른 환자들에게는 자신들에게 명령하는 사람만 바뀌었을 뿐이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독재자만 쫓아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독재자를 물리치자고 한 사람이 계속 있어서도 안 된다. 독재를 물리치는 화살을 어떤 한 사람이 쏠 수는 있지만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어야 사회가 변한다.
그 점을 이 소설은 말해준다. 소설 제목이 "뻐꾸지 둥지 위로 날아간 새"다. 여기서 뻐꾸기 둥지는 속어로 정신병원을, 맥머피는 뻐꾸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521쪽 해설에서)
정신병원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바꾸어 놓은 맥머피... 이 소설을 사회로 치환해서 읽으면 참으로 생각할 것이 많다.
어쩌면 독재자들은 또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작고 여린 존재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지, 당신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자격이 없다고, 나만을 따르라고 하지 않았는지... 우리 주변에도 랫치드 수간호사 같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지... 우리 역시 이 소설 속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처럼 그냥 환자로 머물지 않았는지...
맥머피와 같이 외부에서 온 사람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맥머피를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모두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