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서 구입한 시집. 시집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장 많이 가질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다.
새책을 파는 곳 서점에는 시집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턱없이 작다. 그리고 시집도 적다. 오래된 시집은 아주 잘 팔리는, 유명한 시인이 쓴 시집이 아니면 있지도 않다.
그러니 최근에 나온 시집들은 쉽게 볼 수 있어도 오래된 시집, 예전에 나와 구입해 읽고 싶은 시집은 서점에서 구하기 힘들다.
이럴 땐 헌책방에 가야 한다. 오래된 시집들이 옛집을 나와 다른 집으로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많은 시집들이 있는데, 그중에 시집을 펼쳐서 다 읽고 사기는 그러니까, 친숙한 시인이거나 알고 있는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을 우선 고른다. 그 다음에는 어쩌다 마음을 끄는, 자연스레 손이 가는 시집을 구하게 된다.
김혜순의 첫시집이다. 시인이 그동안 발표한 시들을 모아놓은 시집이다. 시인은 자서에서 '내 시집이 나오길 기다란 몇몇 분들이 조금씩만 실망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금씩만 실망하지 않았나 보다. 실망보다는 시집에 대해서 인정을 했나 보다. 재판을 찍지는 않았지만, 헌책방에서 만난 이 시집이 초판 10쇄인 걸 보면 최소한 10번은 다시 찍었다는 얘기니, 그만큼 사람들에게 많이 다가간 시집이다.
초창기에 '창비' 시집들이 강한 사회성을 띠고 있었다면 '문지' 시집들은 강한 예술성을 띠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 시집도 어떤 의미보다는 언어를 통한 예술성을 드러내고 있다. 시집의 뒤에 해설을 쓴 오규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퍽 일관성 있는 방법론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시적 대상을 어떤 관념으로 파악하거나 재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주관적으로 왜곡시켜 언어로 정착시키는 작업을 통해서 대상을 새롭게 드러냄과 동시에, 그 새롭게 드러난 대상을 있게 하는 언어의 존재 또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 앞에 내보임-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 우리가 어떤 분명한 메시지를 읽고자 하면 그가 노리고 있는 세계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빚는다.' (오규원, 방법적 드러냄의 세계. 97쪽)
오규원 시인이 누구던가. 날이미지시를 주장한 시인 아니던가. 의미보다는 이미지를, 그것도 살아 있는 이미지를 언어로 드러낸 시인.
그가 김혜순이 쓴 시에서도 자신이 쓰는 시들과 비슷한 시들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해설을 해놓았다.
그러니 읽으면서 시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자. 시를 읽으며 언어가 주는 아름다움을 느끼던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즐기도록 하자.
고층 빌딩 유리창닦이
사람들보다 하늘과 구름이 더 가깝게 보인다.
술을 마신다.
한 잔 마시고, 두 잔 마시고가 아니라, 스물 일곱 잔 마시고, 스물 여섯 잔 마신다. 유리컵 안에는 종이와 싸우는 사람들이 떠돌고 있고 가끔씩 수초들이 흔들거리는 것도 보인다. 스물 다섯 잔째 술을 마실 때 지상에서 올라온 새들이 유리창에 부딪쳐 머리를 깬다. 낮달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내려갈수록 취기는 올라온다. 마시는 나를 누군가 또 마신다. 네 잔 마시고, 세 잔 마시고, 두 잔 마시고, 한 잔 마신다. 더욱더 취기가 올라온다. 어느덧 사람들이 하늘과 구름보다 가깝게 보인다.
나는 배를 움켜잡고 스물 일곱 장의 대형 유리를 토하기 시작한다.
김혜순,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10쇄.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