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시들이다. 표정을 읽지 않고 자세만을 보려 하는 시에서 자꾸 표정을 보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표정을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기를 쓰고 그 사람의 표정을 읽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표정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 새 그 사람이 지닌 자세를 놓치고 만 경우가 많음에도, 나무만 보다가 산을 보지 못한 경우가 많음에도 여전히 나는 나무만을 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김소연이 쓴 시집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를 읽다가 떠올랐다.

 

  자꾸만 그림자를 이야기하는데, 그림자는 이데아가 빛에 의해 보여주는 허상일 따름이라는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그림자를 이야기하는 것은 허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본질을 이야기하는 철학자와는 달리, 현상을, 현상이 비친 그림자를 노래하는 시인들은 공화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와는 달리, 시인은 철저하게 그림자를 추구하고 있다.

 

그림자, 빛을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상태 아닌가. 그렇다면 빛으로 인해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놓쳤던 것을 그림자는 다시 생각하도록 한다.

 

플라톤과는 반대로 그림자는 우리의 삶이 지닌 다른 면을 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앞면만 보는 것이 아니다. 빛만 보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뒷면을 보여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시인이다. 김소연은 이 시집의 뒤에 실린 '그림자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 역시 그림자와 같지 않을까. 빛의 방향과 사물의 모서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계에 현현해 있는 모든 현란한 것들의 표정을 지우고, 그 자세만을 담으려 한다는 점에서. 시 쓰는 일은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이다. 빛은 어깨 뒤에 있고 그림자는 내 앞에 있을 때에 시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김소연, 그림자론, 이 시집 111쪽)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추구해야 할 것은 빛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자를 추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빛의 모퉁이에서

 

어김없이 황혼녘이면

그림자가 나를 끌고 간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

 

이따금 나는 무지막지한 덩치가 되고

이따금 나는 여러 갈래로 흩어지기도 한다

 

그의 충고를 따르자면

너무 빛 쪽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불빛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茶山)은 국화 그림자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었다지만

내 그림자는 나를 완상하는 취미가 있는 것 같다

 

커다란 건물 아래에 서 있을 때

그는 작별도 않고 사라진다

 

내가 짓는 표정에 그는 무관심하다

내가 취하고 있는 자세에 그는 관심이 있다

 

그림자 없는 생애를 살아가기 위해

지독하게 환해져야 하는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지금은 길을 걷는 중이다 순순히

그가 가자는 곳으로 나는 가보고 있다

 

김소연,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년. 14-15쪽.

 

내 삶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것, 보지 않았던 것, 그것을 보라고 시는 말하고 있다. 그래, 앞만 보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빛을 내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것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