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부리 아래의 돌 - ‘재일교포 간첩단 조작 사건’의 피해자인 아버지들을 위한 비망록
김호정 지음 / 우리학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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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일이다. 국가조작 사건들이 밝혀지지 않은 것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읽으면서 분노가 치솟고, 그러다가 한숨이 나오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에 가슴 한 쪽이 꽉 막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1977년에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 우리나라에 간첩 사건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특히 재일교포들을 대상으로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있는 등,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있었고, 많은 사건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무죄로 판명되었다.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역사는 진실을 말한다고, 역사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지만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이 하는 말. 브레히트 시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가 있는데, 그 시에서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구절 다음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는 구절이 있다.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지 결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간첩조작 사건들이 무죄로 판명되고, 국가 폭력으로 인정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그들이 살아남았다고 강한 자가 되었을까.

 

많은 국가 폭력 피해자들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결코 강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틀린 삶을 살아야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떨어져 버렸고, 사람들을, 국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면 자기 가족들이 당하는 피해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니. 이들이 어떻게 강하단 말인가. 이들은 살아남아서 더 약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약한 사람이 된 그들에게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의 힘이다. 진실의 힘이다. 역사는 진실을 배반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비록 오랜 세월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이 책 역시 이런 사건을 다루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간첩이 되어 버린 사람들. 그냥 사람답게 살고자 할 뿐이었는데... 그냥 친근한 사람들끼리 어울렸을 뿐인데...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이들은 간첩이 된다. 누구는 거물급 간첩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이 사람과 어울린 사람들은 그에게 동조, 방조, 협조한 사람이 되어 모두 실형을 받는다.

 

석방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만 지병으로 숨진 사람,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지 못하자 자살한 사람까지... 얼마나 힘든 세월을 보냈을까? 이들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흘러가다...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이 책을 엮은 김호정 선생이 자신 아버지의 일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억울함을 해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 기록들을 찾아보고 진실을 밝히고 결국 재심에서 무죄를 받아내기까지의 과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해나가고 있다.

 

어려운 재판 용어보다는, 또 막연히 억울하다는 심정 토로보다는, 어떻게 간첩으로 조작이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자료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드는 고문과정과 그것을 용인하고 실적만 쌓으려는 검찰들과 진실을 밝힌다기보다는 정권 눈치만 보는 법원까지.

하나 더 추가하면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적극 협조한 검찰에서 파견된 조사관도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속한 조직이 한 일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이들은 간첩이 맞다고 항소까지 하는 검찰들도 있고, 또 고문이나 조작에 관계되었던 사람들이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까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게 한 그런 내용도 이 책에 잘 드러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억울한 사연들, 나중에 밝혀진 진실, 그러나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 40년 가까이 지나 현재 판사가 과거 판사들의 잘못된 판결에 사과를 하지만, 이들의 억울함을 밝혔다고는 하지만,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이제 이런 조작 사건은 있어서는 안 됨을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는데.

 

그런 기억을 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은 나왔다. 더 이상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우리가 걷는 발부리에 이들을 기억하는 표지 하나 세우기 위해. 그래서 막 달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우리가 걸어갈 길을 살펴보라는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그런 희생을 우리가 모르쇠 하면 안 됨을. 또 잘못한 역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늘 기억하기 위해서, 이 책은 그렇게 발부리에 하나의 돌을 놓는다.

 

덧글

260쪽에 아주 사소한 오타... 용비어천가가 나오는 장면에서 책에 나오는 구절은 용비어천가 1장이 아니고, 2장이다. 1장은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 고성이 동부하시니’라고 하고, 2장이 바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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