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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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게만 대하기에는 뭔가 이야기를 덜 한 느낌이라 개운하지 않았다. 꺼내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잘 듣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자주 접하고 싶기도 했다. 나와 내 가족이 경험하게 될 어떤 장면을 미리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조금 다른 의미로 보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죽음이 내가 알던 것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했다. 그 죽음의 다양함을 확인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겠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살아가는 곳곳의 의미를 누군가의 죽음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내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사람이 만든 냄새가 가져다줍니다. 그 냄새를 극적으로 없앴을 때 내 비즈니스는 성공하지요. 대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급합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6페이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죽은 자의 시간은 멈췄으니,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를 보내는 일과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자리를 정리해야 한다. 보통은 그 일을 가족들이 맡아서 한다. 장례를 치르고, 죽은 자가 살았던 방(집)을 정리하고 청소한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 죽는 사람은 누가 정리해줘야 할까.


여러 가지 사연으로 고독사하는 이들이 머물다 간 곳을 청소하는 사람. 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 처음 일반청소로 시작했던 일이 점점 찾아주는 사람이 많아지고, 청소의 범위나 사연이 다양해지면서 어느새 그는 특수청소의 전문가가 되었다. 일이 다양해지고 힘들겠지만, 그만큼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깨끗해졌다. 그리고 그 특수청소 안에서 그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청소하면서 읽은 그 공간의 주인들 삶이 조금씩 전해진다. 일명 고독사. 그 공간에 혼자 머물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보인다.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서 일하면 안 되겠지만, 인간인지라 보이는 것들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공간의 시간이 느껴지면서, 덩달아 연결되는 또 다른 생각들까지 같이 읽게 된다. 죽음이 우리 삶, 우리 사회와 절대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누군가는 죽고 우리는 그 누군가를 애도하며 살아간다. 언젠가 나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의 애도를 받기도 하겠지.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다가 죽은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나도 저자와 같은 특수청소업자의 마지막 인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떤 고독사의 얼굴들을 만났을까. 비슷한 죽음 같았다. 죽음 이후의 청소하는 것도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달랐다. 죽은 지 며칠, 몇 달 후에 발견되었다는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죽은 자리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고, 마치 오늘 아침에도 청소한 것처럼 분리수거를 해놓고 죽은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청소 가격을 문의하기도 했다. 읽으면서도 의심스러웠는데, 결국 그 의뢰인(?)은 자기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데 얼마의 돈이 드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던가 보다. 보통은 죽은 이의 가족이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고, 세입자가 머물다 간 장소를 청소하고 복구해주기를 바라는 집주인이나 부동산 중개업자의 의뢰도 있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죽은 이가 머물던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지만, 애도의 색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 떠나서 슬픈 마음 담은 정리와 재산 보호에 목적을 둔 이들의 의뢰가 완전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가끔은 경찰이나 검찰에게 의뢰받는 범죄 현장 정리도 있다. 범죄 피해자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장소에 다녀오기도 한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현자가 있어, 이 생각이 그저 가난에 눈이 먼 자의 틀에 박힌 시선에 불과하다고 깨우쳐주면 좋으련만. (죽은 자의 집 청소, 47페이지)


TV 뉴스에서나 보던 소식을 저자의 입으로 듣는 느낌이 달랐다. 혼자 살던 노인이 죽은 지 며칠 후에 발견되었다는, 세입자의 월세가 안 들어와서 가봤더니 벌써 죽은 지 몇 달은 되어 백골 형태로 남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저자가 방문하는 장소들의 사연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혼자 살다 죽은 자연사에 더해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사연도 겹쳐 있다는 것이다. 고독사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확인하게 되는 건,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다. 자기 존재를 죽음의 냄새로 먼저 알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씁쓸했다. 죽음의 현장에서 맡아지는 냄새를 온갖 수식어로,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도 적당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지만, 죽은 상태로 오래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냄새로 알리는 듯하다. 방호복과 신발 위로 신은 덧신, 방진 마스크와 방독마스크, 의료용 장갑과 청소 소독 용품까지 챙긴 저자의 발걸음 무게를 알 것 같다.


세대를 가리지 않은 쓸쓸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죽음이 어느 사람인가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죽음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목숨을 내려놓기 바로 직전까지도 살아보려고 했던 흔적들이 집안 곳곳에서 발견된다. 죽은 이들에게서 나온 피와 오물, 여러 가지 유품에서 죽은 이들의 생전 일상을 유추하기도 한다. 대개 가난한 이들이 혼자 죽었으며, 가족이 아닌 채권자들이 안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유품이나 쓰레기에서 죽은 자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죽음에 다다르게 된 이유를 유추하게 되는 증거이기도 했다. 방바닥에 놓여있던 자기계발서에서 위로받고자 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병원 처방전에서 죽은 자의 몸이 어땠을지 그려보면서, 신문광고 속의 구인란을 눈여겨보던 어느 인생을 생각한다.


그가 보고 확인하는 죽음의 흔적에서 삶을 생각하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이자, 저자가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은 무게감에,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사실과 기록하는 이의 감정까지 들여다본다. 1인 가구와 고령 인구가 늘어나고, 매 순간 가계 빚이 사상 최고점을 찍는 현실의 암담함이 저자의 기록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한다. 나는 아직 고령이 아니지만 죽음을 아주 먼 일로 생각할 수도 없게 하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고독사가 나이 성별 따져가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고독사의 공간이 아닌 쓰레기 집을 청소하는 의뢰가 올 때면 안도하기도 한다. 의뢰가 들어오는 쓰레기 집이 자살이나 고독사의 전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다. 그런 집을 치울 때면 누군가 다시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릴 것 같다. 나를 옥죄던 이 공간을 치우면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만드는 기도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 변기를 꽉 채운 똥을 장갑 낀 손으로 퍼내거나 오줌이 가득 찬 패트병을 볼 줄 누가 알았으랴. 고양이 사체 몇 개를 치워야 했던 순간은 또 어떻고. 그럴 때면 치우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살아야 했을 누군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내 옆에, 내 공간에 자꾸만 뭔가를 쌓아가는 일. 저장 강박증은 조금 더 관심 두어야 할 현대인의 질병이 아닐까.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도기용 광택제를 뿌려서 변기와 세면대를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으로 하얗고 눈부시게 닦아놓으면 마음이 참 뿌듯해진다. 더러움이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순수하고 충만한 행복이 남는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마음도 더러운 화장실 청소처럼 얼마간 곤욕을 치르고 나면 잠시나마 너그러워지고 밝아진다. 평소 우울감에 시달려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화장실 청소를 추천하고 싶다. 그 화장실이 더럽고 끔찍할수록 더 좋다. (죽은 자의 집 청소, 220~221페이지)


"누군가의 죽음을 돌아보고 의미를 되묻는 이 기록이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기전이 되리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이 무엇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느껴진다. 저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의 생계를 책임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다시 삶을 생각한다. 죽음의 공간을 청소하면서 마음속 청소를 한다. 위로가 된다.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묻는 방식이 누군가가 죽은 공간을 청소하는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의 모습들을 보니 세상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개인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는 환경과 감정의 문제는 개인만의 일이 아니기도 하다. 사회가 같이 묻고 답을 찾아가야 할 많은 일 중의 하나를 이렇게 마주한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란 게 참 신비하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죽음의 흔적이 지겨운 밥벌이의 고충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저자는 그 시간에 죽음의 곁을 들여다보고 삶의 생생함과 행복을 찾아간다. 오늘, 내 앞의 사소한 것들이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시선 그대로를 배우고, 죽음 앞에서 삶이 더 절실해짐을 확인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은 너무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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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10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이들에게 둘러쌓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그런 죽음의 장면. 그게 제가 꿈꾸는건데요. 쉽지않겠죠. 내 죽은 뒤의 자리를 스스로 정리하고 준비할수 있는것 누구에게나 오는 축복은 아니겠죠. 정말 죽음은 예측불허이므로 살아있는 오늘 하루가 소중해집니다. 구단씨님의 글로 죽음의 자리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9-14 16:01   좋아요 0 | URL
저는... 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장면을 기대하다가도, 정말 누군가에게 악담을 들으면서 떠나는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문득 걱정되기도 하더라고요.
죽음으로 바라본 생의 의미를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참 시선이 멈춰있었네요...
 

 

오오~ 정은궐 작가님.

작품을 계속 쓰고계셨네요...

신간 소식 반갑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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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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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 무심했던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중략) 그러니 무표정했던 삶이 조금 환해졌달까. 무채색 세상이 유채색으로 칠해졌달까. 묵혀뒀던 오감이 자극된달까. 별것 아닌 일상조차 조금 특별해졌다. 손이 닿은 딱딱한 액정 속 디지털 세상이 아닌, 숨이 닿는 지근거리 이야기들이라서.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301~302페이지)


겪어봐야 안다. 세상일 대부분이 그렇다. 그중에 경험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게 누군가의 마음이자 살아온 시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섣부르게 꺼낼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왜냐고?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에는 상대의 마음을 그대로 다 느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이해한다는 말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고 아프고, 제도의 불편함을 느끼고, 상실의 경험을 하고, 시험에 탈락하기도 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이 누군가에게 이해와 공감을 부를 수 있지만, 온전하게 같은 경험을 한 게 아니라면 제대로 알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보자면 TV 프로그램의 ‘극한직업’ 정도 되려나? 하지만 이건 직업이 아니고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기에 진지하면서도 울컥한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깨알 멘트는 웃음을 놓지 않는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감히 잘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이 남았다. 내가 굳이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그동안 그의 연재를 꾸준히 찾아보지 못했기에 내가 놓친 이야기가 궁금했다. 호기심만 채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에 너무 닿아있는 모습들을 알고 싶었다. 세상의 정의를 외치면서 앞에 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소심한 다짐을 더 해보면서 말이다.


저자는 평소 보고 생각했던 곳곳의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아마 그가 알고 싶었던 버킷리스트쯤 되지 않을까 싶다. 리스트 목록에는 그가 가진 기자의 시선이 담겼으리라. 누구나 바라보는 밝은 곳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이면의 곳곳을 비추고 싶은 마음. 세상의 시선 밖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공유하고 이해하면서,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까지 당연히 얹어 있다.


그가 어떤 경험을 했을까. 연재 때 읽고 가장 웃음이 났던 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봤다’이다. 어느 하루,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방 안에서 지냈다. 씻는 것을 생략한 것은 물론이다. 더럽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한없이 늘어지면 방바닥을 뒹굴던 우리의 모습을. 솔직히 나는 며칠 동안 밖에 안 나가면서 세수도 안 한 적이 있다. 뭔가 입에 대면 양치는 꼬박꼬박했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체험을 하는데 왜 씻어야 하는가? ㅎㅎ 사실 이 경험의 의미는 안 씻어도 된다는 데 있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반추하며 삶에 의미가 무엇인지 조용히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살아가든,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 아니었던가. 바쁘게 달려오면서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은근한 떠올림까지 저절로 이어진다. 이 체험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봤다’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면서 달려온 10대 20대 시절, 직장생활에 적응하고 결혼하면서 현실을 살아내느라 벅찼던 30대를 그리는 저자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 같다. 쉬어보자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안 하던 하루가, 가만히 쉬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동안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을 그리게 한다. 어느 날 하루 그가 꺼놓고 지냈던 스마트폰은 그동안 놓쳤던 세상의 모습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진심까지 읽게 했다. 스마트폰에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왔던 시간이 무섭기까지 했다. 이 작은 기기 하나가 삶의 대부분을 조정하게 하다니. 놀라우면서도 겁난다. 편리하지만 무섭다. 그가 스마트폰을 꺼놓고 지낸 시간 동안 업무나 상대방의 감정에 스크래치가 났을지는 모르지만, 스마트폰 없는 하루가 그에게 준 것은 표정 있는 삶이었다.


거절과 나쁜 말 듣기가 싫어서 자꾸 움츠러드는 마음을 이기고자 스스로 거절당하기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가 정작 들여다보지 못한 내 마음을 돌봐 주려 착하게 살기를 거부해봤다는 저자.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당하기 직전의 강아지 구출 작전에 참여해보고, 무연고자의 죽음을 배웅해봤으며, 24년 만에 초등학생이 되어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경험했다. 가볍게 웃으면서 보고 싶은 경험 같았지만, 그 경험의 시간 동안 느낀 것을 듣고 있노라면 하나도 가벼운 게 없었다.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이 함께했다.


노인 체험 장비를 벗은 뒤 팔이며 다리에 붉게 물든 상처들을 보고 알았다. 하루 내내 싸운 흔적이었다. 마음처럼 안 움직이는 팔과 다리를 애써 움직이려고, 굽은 허리를 곧게 펴려고, 몸은 여든 살이라는데 마음은 여전히 서른일곱 살이라 여기면서. 그렇게 세월을 거스르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노인 체험을 자처했으면서, 막상 노인이 되니 난생처럼 겪는 경험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젠가 나이들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요했던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파장이 일듯 별 것 아닌 일상들이 일렁거렸다. 43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감은 그렇게 컸다. 이게 체험이 아니라, 언젠가 맞을 미래란 걸 알기에 더 그랬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58페이지)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들. 그가 폐지를 줍는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것. 인생이란 게 얄궂어서 누구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들을 외계에 사는, 별나라 사람쯤으로 볼 게 아니라 이웃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145페이지)


그의 경험 대부분은 우리와 오늘을 함께 사는 이들의 시간이었다. 거리에서, 근처에서 익숙하게 봤지만, 우리가 실제 경험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노인 분장을 하고 80세 노인의 삶을 경험한 그는 나이 듦의 자연스러움과 그동안 애쓰며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진하게 느꼈으리라. 누구나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된다. 어떤 젊음을 보내면서 맞이할 노인의 모습을 상상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마냥 다 다 잃고 내려놓은 절망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나이 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됐다. 폐지 줍는 이의 하루를 같이 걸으며 어떤 일상인지 보기도 했다. 길에서 흔히 보이는 폐지 줍는 이들. 리어카 한가득 싣고 가는 모습이 위태로우면서도 정작 그 리어카의 뒤를 밀어본 적이 없다. 그들의 삶이니, 타인이니 굳이 가까이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경험한 폐지 줍는 하루는 누군가의 생활수단 전부이자,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하루이자, 아이들에게 먹여줄 음식값이 된다. 누구나 사연도 있고, 그런 삶을 가진 이유도 있다. 그 제각각의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 하루를 경험한 이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해의 근처에 닿을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함이 담겼다.


새벽 5시에 시작된 환경미화원의 세계를 보았다. 눈을 감고 벚꽃축제 그 길을, 시각장애우의 세상에서 걸었다. 집배원의 하루를 같이 다니면서 왜 과로사가 그렇게 많은지 알게 되었으며, 35킬로그램 방화복을 입고 계단을 오르며 소방관을 살아봤다. 거리의 쓰레기는 당연히 환경미화원이 치우는 거라고, 소방관은 불을 끄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면 저절로 반성 모드가 되어야 할 판이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그에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굳이 길에 쓰레기를 버릴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버리고 쏟아내고 그냥 지나간 그 길을 깨끗하게 해주는 이들의 노고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물론 무료봉사가 아니다. 하지만 하는 일에 상응하는 대우가 주어지고 있는지 거듭 확인해봐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루였지만 직접 체험한 시간이 더욱더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의 일을 이렇게 들려주는 이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나와 지금을 같이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세상을 안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삶도 지켜봐 주고 있다는 말일 테니까.


식사 후 체할 것 같아 청계천으로 향했다. 그러자 더위가 고역이었다. 섭씨 32도, 체감온도는 더 높았다. 걸은 지 5분 만에 브라에 땀이 찼다. 15분이 지나니 브라 끈과 와이어 부분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가슴골 사이에선 땀이 흘렀다. 겨울이면 따뜻하기라도 할 텐데, 여름엔 대책이 없었다. 패드 밑을 잠깐 들었더니 시원했다. 땡볕에 브라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16~17페이지)


체험한 지 사흘 만에, 브라를 결국 벗었다. 육체적인 불편함보다 더 힘든 건, 버거운 시선이었다. 누가 뭐라 안 했어도 그것만으로 무언의 족쇄였다. 그래서 여성들도 쉬이 벗을 수 없었겠구나, 절실히 깨닫게 됐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20페이지)


다양한 체험 중에서도 웃픈 몇 가지를 확인하면서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브래지어를 하는 여성의 마음을 한없이 알아주는 그가 되기를 바랐던 ‘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는 정말이지 역지사지의 대표 격이 아닐까 싶다. 브래지어 안 하는 시간의 편안함을 그가 알려주어 얼마나 고마웠던지. 특히 이 더위에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고통이다. 집안에서 브래지어 안 하고 헐렁한 티셔츠 입고 살다가, 속옷까지 갖춰 입고 나가야 해서 외출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해본 사람만 안다는 브래지어의 불편함을 남자인 저자가 생생하게 증언해주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아이 없는 남자의 하루 육아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어쩌면 그가 아이 계획을 세운다면, 하루 육아 경험 전과 다른 조금 더 괜찮은 남편과 아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루였지만 그 경험이 육아의 현장을 그대로 각인시켜줬으니까.


그의 솔직함은 ‘자소서, 진짜 솔직하게 써봤다’에서도 빛난다. 흔히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고 불리는 자기소개서. 태어나서 살아온 모습이 다 비슷한데 도대체 그 차별화는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골치가 아픈 순간들. 결국 우리는 소설에 버금가는 자기소개서를 채워나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첫 번째 관문인 서류심사조차 통과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학력 구분이 없다고 해도,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은 취업 문턱을 증명하고 있던 셈이다. 저자는 취업준비생들의 솔직한 의견을 담아 자소서를 써서 지원했고, 당연하게(?) 탈락했다. 아마 그의 서류심사가 통과했다면, 그 기업의 취업 경쟁률 더 세졌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는 어디에 지원했는지? 누구나 들어가고 싶다던 기업이 어디 한두 군데여야 말이지)


우리가 알아야 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을 읽는 내내 곱씹게 된다. 당사자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주 작은 경험 하나로도 우리는 그 세상을 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저자가 경험한 하루들의 시간은 얼마나 더 귀할까. 공감은 당연했고, 누군가를 더 이해할 수 있다는 작은 걸음을 보여줬다. (사실 누군가는 온전히, 다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온갖 고생을 하며 그가 들려준 세상의 많은 이야기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몸으로 부딪쳐 해내야만 하는 일부터 사랑한다고 말하며 감정에 힘을 실어야 하는 일까지 다양한 그의 체험이 값지다. 읽는 동안 고맙기까지 했다. 나에게는 간접경험이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누군가를 알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루의 경험이 그 사람의 모든 시간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보게 된 만큼만은 세상을 더 알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 삶은 더 편해지고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렇게 달려온 세상이 놓치고 있는 것도 분명 있을 테지. 아마도 저자가 하루의 경험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잊고 있던 어떤 것을 찾아가고 확인하는 즐거움에 감사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지만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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