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지금 하는 일을 마무리한다. 석 달만 하려고 했던 일을 어쩌다 보니 열 달이나 하게 되었다. 힘들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들 만나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원한다면 계속 일할 수도 있는데, 다른 것을 배워보고 싶어서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말하고 보니 가슴 속이 뭔가 횅하다. 내가 나를 더 존중해주고 싶어서, 좀 더 길게 일할 수 있기를 원하기에 지금 일은 여기에서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5월에 등록했던 학원 일정이 늦어져서 이제 시작하는 건데, 막상 학원비까지 결제하고 보니, 하기가 싫어지는 이 마음은 뭔지 모르겠다. 처음 등록할 때의 간절한 마음은 어딜 가고, 불안이 가득한 내 마음은 또 갈팡질팡. 사실, 겁이 난다. 괜히 시간 들여 돈 들여서 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상태로, 시작하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다. , 이거 괜찮은 건가?


임지이 작가의 <나는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있어요>를 읽고 있다. 나이 마흔에 회사원에서 만화가로 살아가는 게 쉬울까? 묻고 보니 좀 그렇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걸, 나도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도 굳이 한 번 더 묻고 싶었던 건, 내 마음과 너무 닮은 것 같아서 말이다. 뭔가를 다시 시도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지만, 그런 말이 선뜻 와닿지 않는다. 현실이 그 나이를 고민하게 만들어서, 어떤 변화나 다른 시작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 잘 안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와 시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이 생길 거다. 시간과 비용을 고민해야 하고, 그 후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또 고민하게 되고, 혹시나 이 도전이 무모했다고 후회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고. 그럼 또 그렇겠지. 시작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고 어떻게 결과를 알 수 있느냐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고 말이다. 그렇구나. 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거니까. 해봐야만 하는 거구나. 그런데도 자꾸 걱정되는 걸 어쩌란 말이냐.


일 낮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웠단다. 그럴 수밖에. 아파서 병원에만 가더라도 반차나 월차든 내고 가야 하니, 평일 시간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운 건 당연하다.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서점으로 외근 나갈 때, 서점이나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는 말에, 이상하게 가슴 한쪽이 꾹 누른 것처럼 아팠다. 많은 사람이 비슷하게 갖고 싶은 바람 같아서 공감했다. 나 역시 꽤 오랫동안 평일 낮 시간을 즐기며 살아왔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그렇게 귀하고 고마웠다는 걸 알겠더라. 월차를 내더라도, 이게 하루를 쉬면서 해야 할 만한 일인지, 혹시 한두 시간 잠깐 나갔다가 올 수는 없는지 계산하게 된다. 그러니 평일 하루의 시간은 계산하고 또 계산해가면서 결정해야 할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런 날이 저자에게 갑자기 생겼다. 회사에서 잘려서. ㅠㅠ 저자가 바란 건 이런 반전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갑작스러운 일에 얼마나 걱정이 심했으면 일주일 만에 8kg이 빠졌을까.


이런 상황에 우리는 무슨 결정을 하게 될까. 빨리 다른 직장을 구해야지, 아니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이 기회(?)를 누리고 있을까. 겉으로는 태연해도 마음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또 다른 기회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당장 취직보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했던 것을 응원하고 싶은 이유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게 된다면 좋은 결과 아닌가? 현실이 녹록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공장에서 나사도 박아보고, 동네 돌면서 빈 병 주워 팔기도 하면서, 어쩌다 엄마 돈도 훔치기도 했지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평일 낮 시간을 얻은 대가였으니까.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본인이 만화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것. 이면지와 모나미 볼펜으로 그리기 시작했다면서, 그렇게 완성해가는 이 만화가 더 기가 막힌 건, 저자가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거다. 진짜? 정말로? 이런 능력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회사에서 잘린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거 아닌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만화로 그려나가면서 재미를 알게 됐다. 취미로 그리던 만화가 이제는 만화로 먹고살게 된 거, 이거 운명 아니면 뭐야?


나이 마흔에 지금껏 해오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과정을 듣고 있노라면,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거구나 싶은 안심과 내 시간을 내가 주인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만족감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돈도 버는 일이 어디 흔할까. 그러니 저자의 지금이 너무 부러운 거다. 발로 그렸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형편없던 그림은, 계속 그리면서 실력을 키우고 현재의 캐릭터를 완성했다. 너무 귀엽고 개성이 있다. 그림에 더해진 스토리가 너무 잘 어울려서 읽는 재미까지 더한다. 만화로 표현하는 자기 생활이 이렇게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도 있구나 싶어서, 나의 똥손에도 모나미 볼펜 하나 쥐여줘 볼까 잠깐 고민했더랬다. 손인지 발인지 모를 것을 그리면서 나도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라도 표현해볼까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까지 더해진다. 생각이 많아지니 별걸 다 한다.


지금 어떤 상황을 바뀌기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하고, 다가올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알면서도 자꾸만 주저하는 건, 겁이 나서다.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지금 이 변화를 시도하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되면 어떡하지 하는, 당장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걱정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건, 내 선택이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내가 나를 잘 몰라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닐까 하는 후회를 할까 봐. 알면서도 듣고 싶은 말을 저자가 해주고 있어서, 그렇게 눈앞에 놓인 일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은 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계속 읽게 된다. 웃기지만 진지하고, 씁쓸하지만 기대되기도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보다 나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그래도 믿는 거 말고는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러니까 나에게 한 마디만 해줘. 저자, 당신이 그랬어. 재촉 말라고, 믿고 기다리면 다 잘되게 되어 있다는데, 그 말 진짜지?


우연처럼 순간을 바꿔주는 이야기들을 찾고 있다. 읽고 있는 책들과 읽고 싶은 책들 사이에서 비슷한 상황과 감정을 찾으면서, 그림 한 컷이, 문장 하나가 나를 더 토닥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더좋은곳으로가고있어요 #임지이 #빨간소금 #당신이모르는이야기 #이백오상담소 #책과우연들

#책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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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12-15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장바구니에 담아 둔 책인데 구단씨 독후감 읽으니 꼭 읽어야겠네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때입니다. 어떤 일들을 계획하고 계시든 다 잘 될거라고 응원드리고 싶습니다. 화이팅!!!

서니데이 2022-12-1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3-01-06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1-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 마니아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