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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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엄마가 입원한 병실에는 4명의 환자가 거쳐갔다. 작은 병원의 2인실인데, 대부분 노인인 데다가 몸의 어디 한 군데든 수술을 한 환자들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건 당연했으니, 누군가 돌볼 사람이 상주해야만 했다. 그중 세 번째 환자는 보호자도, 간병인도 없었다. 당연히(?) 내가 그분을 화장실에도 모시고 갔는데, 밤에 내가 없는 시간에는 엄마가 그분을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에 같이 갔다고 했다. 엄마도 손을 수술해서 불편한 사람인데, 환자가 환자를 돌보는 상황이 된 거다. 그것도 생판 남을.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치료 받고 쉬어야 할 엄마가 이런 일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내 마음이 전혀 편하지 않았다. 어지럼증으로 고생하는 엄마가 옆 침상의 소리 때문에, 밤에 잠도 못 자고 불편한 상황은 더 커져만 갔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부스럭대면서 몸을 움직이는 소리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분은 연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런 말도 불편했다. 사소한 일인데 사소하지 않았고, 모른 척하고 싶었는데 모른 척할 수 없는 상황이 그저 어렵기만 했다.


돕는다는 의미. 크게 작게,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도움이 되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온전히 나만 생각하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위태롭게 하는, 나의 가족에게 닥칠 불행을 알면서도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게 언제나 가능할까?


40대의 남자 빌 펄롱의 그날은 이상하기도 했고, 특별하기도 했다. 나라 전체가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빌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먹고 사는데 부족함은 없었다. 아내와 다섯 명의 딸과 행복했다. 특별할 게 없어도 별일 없는 날들이 그저 감사하다는 게 뭔지 보여주는 가정이 아니었을까. 도시는 쇠락해가고, 굶주린 사람은 늘어만 가는 날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아침, 그는 수녀원으로 땔감 배달을 갔다가 창고에서 한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맨발에 때가 낀 상태로,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를 아무 일 없듯이 수녀원에 데리고 들어간다. 수녀원에서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는 확인할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알고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는 할까 싶기도 하고. 수녀들의 품으로 돌아간 여자 아이는 말끔한 모습을 하고 그들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빌은 여자 아이의 첫 모습을 잘 못 본 거라고 여기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마주친 모습은 그의 일상에서 잊히지 않았고, 수시로 떠올리는 기억이 됐다. 그 여자 아이의 모습이 수녀원의 실상은 아닐까. 소문으로만 듣던 수녀원의 불법적인 일이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빌은 이 여자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끝도 없는 고민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고, 그는 잊으려는 듯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안고 지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수녀원으로 찾아간 그는 확신했다. 그 여자 아이가 다시 창고에 갇혀 있으리라는 것을, 다시 그 여자 아이를 창고에서 발견한다면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의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여자 아이를 집으로 데려갔을 때 벌어질 일을. 그의 삶이 아주 불편해질 것이고, 그의 딸들이 다닐 학교에서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주의를 줄 정도로 위험에 빠질 것을. 그의 가족의 안위가 보장 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여자 아이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에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혼란스럽고 많은 생각 끝에 그 여자 아이의 손을 잡았는지 알기에 숨이 트인다. 추운 새벽, 그의 야적장 자물쇠가 얼어붙어 있던 날, 처음 본 집의 문을 두드리고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를 건네받았던 그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떤 친절은 누군가의 목숨을, 삶을 구원하는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어렵기만 한 시절에, 시들어가는 채소 한 바구니에도 고맙기만 한 날들에 보여준 손길이었을 것을.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119페이지)


미시즈 윌슨은 미혼모인 엄마와 그를 버리지 않고 도움을 주었다. 그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주었고, 그의 형편에 부족하지 않고 성장하게 해주었다. 물론, 바라는 모든 것을 채우려고 한다면 한없이 부족할 수 있지만, 그가 가진 조건으로 보자면 그의 성장 과정은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게 미시즈 윌슨이 내민 손길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가 수녀원 창고의 여자 아이에게 내민 손길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원하는 첫 온기였으리라. 그에게 다가올 불행을 걱정하면서도 그의 선택에 은근한 응원을 실어주고 싶은 이유는 그 작은 여자 아이가 나일 수도, 나의 가족일 수도 있어서. 어느 날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누군가 나를 외면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에 말이다. 서로 돕고 사는 삶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빌 펄롱의 말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엄마와 같은 병실에서 보호자 없이 지내던 어르신은 다인실로 병실을 옮겼다. 입원한 첫날부터 돈이 없다고, 다인실에 자리가 생기면 자기부터 옮겨 달라고 간호사만 보면 말씀하시곤 했는데, 대기자가 많다고 했는데 갑자기 옮긴 걸 보면 그분의 사정을 누군가가 배려한 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어제는 엄마가 그분 병실에 가서 인사를 나누었다는데, 그분은 보자마자 또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 병원에서는 식사 때 개인적으로 수저를 준비해야 했는데, 첫날 아무 준비도 없이 입원한 분에게 내가 집에서 일회용 숟가락 젓가락을 몽땅 갖다 드린 일이, 그게 아직도 고맙다고 하신다. 자녀들이 있지만 멀리 산다고, 이렇게 병원에 입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이번에는 아예 연락을 안 했다고 말씀하시던 그분의 말이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녀가 부모의 간병을 책임져야 한다거나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일을 보험 드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아이가 없이 살아가는 내가 언젠가 이런 상황을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분의 모습은 어느 날의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씁쓸하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고, 변해가는 세상의 당연할 수도 있는 모습이기도 한 그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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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4-01-1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몇달간 병동생활을 했어서 느낀 점들이 많네요. 그곳의 공기와 적막함은 지금도 기억납니다...

그보다 이 작품 자주 보이던데 리뷰보니까 읽고싶어지네요. 겨울이라 그런지 좀 울적해지고 싶나봐요🙂

구단씨 2024-01-18 16:28   좋아요 1 | URL
그곳의 공기와 적막함은 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

이 작가의 전작도 좋았는데, 이번 작품도 짧은 글에 느끼는 바가 많아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