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헌법 책을 고르고 있자니 복잡하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좀 난감하다. 어렵다. 어떤 헌법 책을 사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까?

그래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으니, 어떤 책이든 일단 골라야 하긴 할 것 같다.

서너권을 장바구니에 넣고 조금 더 살펴보고 있다.

내가 나로 살기 위해, 이 나라에서 인간다움을 챙기며 살기 위해 헌법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다 김제동 때문이다.

평소 그가 하는 말을 호감으로 듣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는 나에게 딱 이정도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저런 방송인이 있구나 싶은, 그는 저렇게 말을 하는구나 하는 정도,

나와 생각이 같구나 다르구나 하는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냥 딱 그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굳이 관심 두지 않았던 대상이라고 하는 게 가장 솔직한 표현일 듯하다.

그런 그가 헌법 독후감을 썼다고 해서 내 관심 안으로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읽다가 보니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의 이번 책을 읽지 않았다면 참 많이 후회했을 것 같다고...

 

 

 

 

 

 

 

 

 

그는 왜 헌법을 읽기 시작했을까?

헌법을 읽으면서, 그는 어딘가에 기댈 곳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생각해보게 되는데. 아주 어렸을 적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가 나타나서 보듬어주고 다 해결해줄 것 같은, 맹목적인 든든함 같은 것을 떠올렸다. 물론 헌법이 엄마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또 법으로 규정한 것을 따르며,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테니까. 사적인 감정 뚝뚝 묻어나는 엄마와의 관계와 법이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

 

어쩌면, 그는 뭔가 자기를 지켜줄 것을 찾아다니면서 헌법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개그맨인 그가 개그 무대보다는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곳에서 자주 보이곤 했다. 어느 시위 현장, SNS, 어느 강의 무대에서 그는 움직였다. 그가 잘 짜인 개그보다는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같이 힘을 냈던 시간이 그에게 만들어준 무엇 때문이지 않았을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이런 일에 사람들은 무너지고,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다다른 곳. 우리의 존재 이유와 우리가 속한 국가가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헌법에 저절로 가 닿았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게 그가 닿은 헌법에, 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된 풀이에, 독자가 공감하지 않을 이유가 없더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헌법 37조 1항)

 

헌법 37조 1항을 보고 마치 연애편지의 한 구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른여섯 가지 사랑하는 이유를 쫙 적어놓고 마지막에 추신을 붙인 거죠.

“내가 여기 안 적어놨다고 해서 널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야.”

법 조항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5페이지)

 

헌법을 연애편지라고 소개하는 것부터 ‘법’에 관한 두려움을 없애준다. 법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법의 판단 아래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의 기본권을 응원해주는 듯한 헌법 이야기를, 그것도 쉬운 말로 한번 풀이된 상태로 듣게 되니 그의 말처럼 감동적이다. 그가 진행하는 토크쇼 보는 느낌이다. 저절로 TV 앞으로 고개가 빨려 들어가는 시선 그대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동안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하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읽게 된다. 우리의 권리를 찾아서, 우리가 억울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 법이 우리를 통제하고 우리의 행동에 제한을 두기 위해 테두리를 쳐 놓은 그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가 들려주는 헌법은 그 딱딱함과 두려움을 없애줬다. 우리가, 국민이 국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적어놓은 ‘국가 사용 설명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

 

헌법은 사회 갈등을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모두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만들어낸 가장 간결한 문장이잖아요. 그걸 통해서 우리가 치유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헌법이 법조문을 넘어서서 시나 음악처럼 우리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149페이지)

 

딱 그거였다. 살면서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도구, 혹은 문서 같은... 내 것이라는 등기권리증 같은 문서를 보는 기분이 들더라. 아무리 은행 지분이 많더라도 내 것임을 확인해주는, 직인이 쾅쾅 찍힌 문서를 코앞에 두고 몰랐던 것 같다. (한글도 아는데 이걸 몰랐어!!) 법이 나를 보호해주는, 그 기본 중의 기본을 언급한 게 헌법이었다. 나의 존엄을 그대로 명시해준 문서였다. 그의 말처럼, 헌법을 읽다 보면 그동안 우리가 체결한 계약서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국민이 ‘갑’인 계약서인 거였는데, 몰라서 그 계약서의 기능을 활용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 생활 곳곳에 묻어있는, 헌법에 근거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이제야 보게 됐다. 더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이 아니었다면 헌법에 관한 관심조차 두기 어려웠을 것 같다. 2017년 3월의 판결 때문에 조금은 들어본 기억이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로만 생각했다. 우리 같은 일반 시민과 헌법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어떤 계기가 필요한 경우, 이렇게 힘을 내서 공부하게 되는 것 같다. 그가 헌법에 관심을 두고 읽게 된 게 그냥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가 거리에서 마이크 잡고 외치는 일이 없었다면, 바쁜 농사일 접어두고 거리로 나오는 어르신들을 못 봤다면, 고사리손 호호 불어가면서 그 추운 겨울 광장으로 나오는 아이들이 없었다면, 그에게 헌법이 이렇게 빨리 친해질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주권자이며(1조), 인간다운 삶을 살고(34조) 쾌적한 생활을 할 권리(35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특수 계급을 만들어(11조 2항 위반)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다면, 그를 끌어내릴 권리(65조)가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이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면 헌법 10조 위반이고, 저는 그것이 내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106~107페이지)

 

특히 이 책의 두 번째 챕터에 마음이 많이 머문다. 소시민으로 사는 우리와 가까이 닿아있는 사례들이 그의 입을 통해 무게를 가진다. 날씨 수당 100원을 더 지급해달라는 맥도날드 배달 청년의 피켓 시위(10조)는, 최소한의 존엄을 지켜달라는 말이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영장을 가지고 와서 나를 끌고 가라’고 말하는 것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며(12조 1항, 2항,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12조 4항)로 나의 말을 대신해줄 사람을 둘 권리가 있다. 사생활의 자유를 존중받을 권리가 엄연히 있으며(16조, 17조, 18조), 그가 가장 싫어한다는 36조 1항과 2항은 결혼과 가족생활에 관한 내용이다. ^^ 선거에 관해 언급한 24조 25조를 말하면서 그는 선거 연령이 낮아져야 하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출마 연령 제한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 자체는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라고 말하잖아요. 더러운 이들에게 주면 더러운 것이 되고, 깨끗한 이들에게 주면 깨끗한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로 반드시 좋은 투표를 해야 하고, 정책도 꼼꼼히 살펴보면서 정치인들을 국민의 하인으로 잘 부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말 하고 싶어요, 187페이지)

 

헌법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글. 그는 누구나 헌법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우리가 헌법의 ‘진짜 주인’이 된다고 했다. 지금껏 모르고 살았던 우리의 상속 문서라고도 했다. 그랬다.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했던 헌법을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거다. 그의 헌법 독후감으로 헌법의 내용을 듣고, 우리의 존엄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법을 믿을 수 없다, 법이 잘못된 거다, 라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법을 가지고 더럽게 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였다.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손가락 끝을 향해야 하는 대상이 잘못 지정된 거였다. 헌법을 제대로 알고 그 의미를 우리의 일상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불행해지는 일은 적어질 것 같다. 우리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있다. 그 행복을 위해 헌법이 우리 뒤에 든든히 자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한다면, 우리의 존엄은 더 가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공부였다. 헌법을 공부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일.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뭔가를 확인하고 질문하고 상대방을 귀찮게 했던 경우는 싸우기 위해서이거나 내게 돌아올 혜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 시술을 받고 병원에 한 달 동안 있게 되면서 만만치 않은 병원비가 들어갔을 때, 국민건강보험의 여러 가지 제도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재난적 의료비’였다. 입원으로 병원비 200만 원이 넘어갔을 경우, 그 절반을 국가가 되돌려주는 거다. 물론 자격 조건이 되어야 하는 거지만, 그런 제도를 몰라서 비싼 의료비에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기억해두어야 할 제도인 것 같다. 특히 공공기관 이용하면서 당한 불편함이 너무 커서, 웬만해서는 온라인 검색이나 해당 기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내가 필요한 내용을 확인하거나 적어서 방문하곤 한다. 담당자가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몰라서 나의 민원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걸 너무 많이 겪어서 화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껏 한 번도 연체한 적 없이 꼬박꼬박 세금 내면서 사는데,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으며 일하는 사람이 기본도 안된 자세로, 오히려 민원인의 요청을 귀찮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내용은 없다니까?’ 하는 말투와 표정으로 민원인을 대하는 걸 보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런 일을 한번 두 번 겪다 보니, 나 나름의 자세가 생긴 것 같다. 저자가 헌법을 읽기 시작한 이유도 비슷할 거로 생각한다.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사는 게 옳지 않음을 의심하면서, 우리를 지켜줄 수단을 스스로 찾아다니면서가 아니었을까?

 

지난겨울의 끝 무렵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서비스센터에 접수할까 하다가 보일러 사용설명서를 먼저 읽었다. 고장 증상을 살펴보면서 원인을 확인하고, 서비스를 접수해야 하는 건지 내 손으로 설명서를 따라 하면서 고칠 수 있는 건지 고민하게 됐다. 결국은 서비스 접수가 필요한 고장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알게 된 사실들 때문에 다음번에도 같은 증상이 보이면 처음처럼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않을 것 같다. ‘아, 그때 이 증상은 이런 원인 때문이었지. 전원을 끄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서비스 접수하고 기다리면 되겠군!’ 하는 일련의 과정과 자세를 배웠다고 해야 할까. 저자가 확인한 헌법도 마찬가지다. 헌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법’이라는 단어에 두려움부터 생기고,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에 다가가기를 주저하고는 했던 지난 시간에 미안해질 만큼, 그가 전하는 헌법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다. 내가 국가를 사용하는 방법, 내가 나로 살아가면서 존엄을 지키는 방법을 알려주는 게 헌법이라는... 헌법 조항 하나하나 기억하고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내 안에 새기는 일이, 우리 일상의 헌법 사용설명서로 자리매김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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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n0502 2019-08-1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제동씨 책 읽고 헌법 구매해요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쓰고 보니, 아버지를 처음 봤다는 말은 좀 이상한 데가 있다. 그것이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언제 처음 만난 것일까? 그것이 내 몸의 소용돌이가 시작된 기원이라면, 내가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의 어디쯤에 다다라야 하는 것일까? 사실 ‘처음 본 기억’을 꺼낸 것은 이어서 이런 문장을 쓰기 위해서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08년 7월 11일 대학병원 중환자실이었다. 그날의 날씨와 창밖의 여름과 분주한 간호사들과 가족들의 모습. 하지만 첫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 알 수 없는 생각의 문을 열자,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4페이지)

 

시인의 첫 문장이 강렬하다. 아마도, 저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겠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부모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억이라는 것을 소환하면 어디쯤에서부터 시작되는지는 알 것도 같다. 저마다 다른 시작점이겠지만, 그 시작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머니는 이랬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기억의 시작. 나에게도 그런 시작이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시작될 무렵을 거슬러보니, 나의 기억 대부분은 엄마와 함께였다. 남들이 말하는 '부모'라는 이름은 거의 떠올릴 수 없었다. 나의 모든 일상과 성장에 있었던 건 부모가 아니라 엄마였다. 혹시 모르겠다, 기억이 없는 그 시절에는 아빠가 함께 있었는지도.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내 인생에서 기억하고 있는 순간에 아버지와 나는 같은 시간 속에 없었다는 거다. 이런 말을 하는 게 가슴 아프다거나 속상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게 아버지란 이름의 개념이 없었다는 게, 남들이 말하는 ‘보통’과 달랐다는 게 조금은 아쉬울 뿐이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제목만 보고 무슨 연애소설인지, 아니면 이별 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알았다. 누군가의 눈물은 차마 앞에서 흘리지 못해 뒤돌아서 우느라고, 그 등만 보이게 된다는 것을. 소개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그와 불화해본 모든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와 산문’이라고 하는 이유를 읽다 보면 느끼게 된다. 들려주는 시는 그렇다 치고, 산문은 그들의 기억과 시간에서 소환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의 기록일 것이다. 아니, 그 사실에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더한 이야기겠지. 어쨌거나 두 시인이 말하는, 아버지를 향한 감정인 것은 그대로일 터이니.

 

처음부터 이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그냥 조금은 궁금한 정도? 왜 아버지가 주제인지, 왜 두 사람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아버지는 나와 다른지,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은 정도였다.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한 대상을 굳이 책으로 내는 것까지 감행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한번은 만나고 싶은 이상한 느낌에... 호기심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말하는 그들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궁금증. 하지만 곧 후회했다. 읽지 말 것을, 공감과 비공감 사이에서 갈팡질팡, 내가 자라온 시간에 없던 아버지가, 다른 이들에게는 왜 그리도 많았는지 속이 조금 상하더라. 사이가 좋지 않았어도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추억이고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인데, 나에게는 왜 그런 아버지가 없던 걸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요양병원의 중환자실이었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특히 나와 더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한집에 살면서도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 나는 그런 사이였는데, 아버지의 병원 생활을 하는 3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병원에서 아버지를 가장 많이 마주하는 가족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도 마주하기 싫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같은 밥상에 앉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동안 아버지와 내가 함께했던 시간의 몇 배를 같이 보내고 있던 거였다. 괜히 억울했다. 화가 났다. 나는 그 병실에서 아버지와 같이 있고 싶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마지막을 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이렇게 그럴 일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와 나의 불화는 고등학교 1학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글쎄, 내 기억엔 나쁘지 않았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69페이지)

 

아버지와 나는 서로를 향해 무심한 사이였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다. 나는 아버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고, 내 인생 안에 포함한 적도 없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러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라는 단어가 내 일상에서 사라진 것 같다. 내가 아버지를 타인처럼 여겼던 것은 중학교 졸업 무렵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써놓고 시험 날짜를 기다리던 때였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왜 입학 원서를 바꾸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되물었더니, 아버지가 학교에 오셔서 입학 원서를 바꿔 달라고 했단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갑자기 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던 게, 아버지는 내가 어느 학교로 원서를 썼는지도 몰랐다. 고등학교에 대해 서로 단 한 번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중학교 생활 내내 어떻게 학교에 다니는지도 알지 못한 사람이 갑자기 학교에 찾아와 입학 원서를 바꿔 달라고 했다니. 그날 집에 돌아와 아버지한테 물었다. 이때껏 부모 노릇한 적 없는 사람이 왜 뜬금없이 내 일에 참견하려 드는 거냐고. 당신의 인생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당신도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면서 다음 날 담임선생님께 원래대로 진학하겠다고 말했다. 그때 이후로 나의 보호자는 더 확실하게 엄마뿐이었고, 나의 성장 시간 내내 함께한 것도 엄마뿐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버지는 옆에 존재했다. 가족들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일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부담을 주는 존재로...

 

시인의 말이 솔직하게 들려서 계속 읽게 된다. 무슨 사전에 정의라도 해놓은 것처럼, 아버지는 무조건 존경해야 하고 아프게 여겨야 하는 대상으로만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그 존재가 너무 버거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게, 때로는 그 존재가 너무 그리워서 얼굴을 그리고 싶게 하기도 하는...

 

종합병원의 응급실, 중환자실, 일반병실, 요양병원. 수시로 병원에 드나들면서, 엄마의 고충을 덜어드려야겠다는 것 말고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아버지의 보호자로 사인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나는 엄마를 원망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꾸 화가 났다. 왜 엄마는 이런 사람을 나의 아버지로 만들어놔서, 왜 엄마와 나 단둘이 있을 때 이런 일은 자꾸 일어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건지. 3년여의 세월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하루가 일 년 같았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왜 나왔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까. 양가감정이 수도 없이 부딪히면서 마음을 상처 나게 했다. 시인의 말처럼, '삶과 죽음이 싸우듯, 사랑과 미움이 서로를 찌르고 희망과 절망이 자리를 바꾸듯, 그리고 눈물이 왼뺨과 오른뺨의 길이를 재듯'이.

 

작년 4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평생을 사실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언젠가 한 번은 죽는 거지만, 내가 그 대상을 직접 보게 된다는 게 낯설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본 게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했다. 날씨가 좋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나들이 가기 좋았던 날, 손님을 초대하기에도 덜 미안했던 주말을 낀 날, 마침 들어가고 싶었던 장례식장에 자리도 있던 날, 화장터에서 오래 기다리지도 않게 예약도 순조로웠던 날. 한 사람을 보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아버린 날이었다. 누군가, 결혼식이 너무 복잡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두 번은 하고 싶지 않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었지. 장례식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피곤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결혼식처럼 한 번만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남겨진 사람은 또 누군가를 보내는 일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겠지만, 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되겠지만 말이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식구들이 각자의 공간으로 떠나고 엄마와 둘이 남아있을 때, '어제 비가 이렇게 왔으면 더 힘들었겠다'는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나는, '당신은 우는 것 같다'는 그 순간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나는 아버지가 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혹시라도 아버지가 혼자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 시인이 말하는, 그 교차하는 마음은 한없이 공감한다.

 

나를 상처 입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을 향해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파른 사랑인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기도 하다.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서는 미움이 있어 또 다른 사랑은 태어나고 사랑은 또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44페이지)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쓴 이야기들 속에서 어떻게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있나. 누구라도 그러겠지. 기억 속 아버지를 소환하며 추억하거나,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나 하는 순간을 떠올리겠지. 한때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일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겨져 이렇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이 점점 조각이 난다. 하나둘씩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악에 받쳤던 감정은 마치 남의 일처럼 조금씩 흐트러진다. 이대로 계속 흐트러져 완전히 사라져가는 기억이도 좋을 것 같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는데, 앞서가는 사람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비가 오는데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추적추적 걸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얼른 가서 우산을 씌워드리고 집으로 가는 그 길을 같이 걸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앞서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 걷는, 그냥 모르는 사람과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것처럼, 가만히 걷기만 했다.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볼 때까지, 나는 천천히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작정하고 뒤를 따라 걸었던 게 아니라 조금은 주저하고 있었던 듯하다. 평생 해보지 않은 일을 하려니 머쓱하고, '아버지' 하고 부르며 가는 걸음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같이 가요' 그 말을 하기가 어색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한 것,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아쉬워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그날이 자꾸 생각난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날은 우산을 같이 써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일은 지난 일이 된다. 시간은 세상의 전부였던 일들을 기억의 일부로 돌려놓는 재주가 있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85페이지)

 

기억이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너무 많아 버거운 것이기도, 때로는 텅 빈 것이기도 하니까. 기억은 호리병처럼 생겼을까, 핀셋으로 집어야 하는 작은 칩처럼 인간의 몸속 어딘가에 심어진 부품일까. 기억의 모양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인간의 의지로 결별을 제안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88페이지)

 

가족은 뜨겁고도 차갑고, 성기면서도 질긴 이름. 어느 가족이건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한 부분이 조금씩은 있게 마련. 기타노 다케시의 말마따나 “누가 안 볼 때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가 가족이라는 건 이제, 그리 특별한 비유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너무 구질구질해서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결국 가족이고 끝내 가족이니까 마지막까지 당신 곁에 남는 게 또한 가족이라는 거. (당신은 우는 것 같다, 19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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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빈말로라도 마음에 없으면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스치듯 우연히 만나는 사이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을 일이 일어나는 건 드물다. 그래서 그런 빈말에 마음을 두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언제였던가. 서른 즈음에 중학교 동창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인지 자주는 아니어도 그렇게 어쩌다 한번, 몇 달에 한 번 정도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내는 정도. 어느 날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언제 시원한 생맥주나 한잔하자고 그러면서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가 느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의 제안이 씁쓸했던 건 빈말이라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언제 한 번 시원한 생맥주 한잔하자고 하면서 내 연락처를 묻지 않고 갔다. 몇 년 동안 몇 번을 지나치며 인사했어도 그 친구와 나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런 상대에게 내가 '다음에'라는 가정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술 한 잔'이라는 '다음에'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거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에'가 있을 수 없을 거, 아닌가

 

전작들을 꾸준히 챙겨 읽고, 개정판 특별판 한정판 등등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기존 출간작도 관심 두게 하는, 인터넷서점의 출간 알림을 설정해놓은, 나에게 이도우는 그런 작가다. 6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이번 작품 소식이 반갑다. 느려터진 내가 다행히도 선착순 사인본을 놓치지 않았다. 힘들었던 건, 받아놓고도 바로 읽지 못하고, 이제 좀 읽어보려고 하니 폭염에 책을 손에 들 수 없었다는 거. 힘들지만, 읽어냈다. 사람을 읽고,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전하는 삶의 모습들을 읽었다. 아마도 특별한, 아주 특별한 뭔가를 기대하고 읽었다면 밋밋하고 재미없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런 기대를 한 독자가 있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조금 기대했다. ^^) 이야기는 평범했고, 잔잔했다.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치이던 여자가 어렸을 적 자랐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그곳에서 고교 동창이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던 순간에 시골 동네의 작은 서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듣는 시간 때문에, 오래전 해묵은 상처부터 기억 속에서 잊으려고 애쓰던 상처까지 같이 찾아오고야 말았던,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찾은 것들 때문에 상처는 비워지고 마음이 채워진다다는 내용

 

 

 

 

 

 

 

 

 

듣고 보니, 별거 없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서 높낮이가 심한 감정을 읽는다거나 사건의 출렁임을 자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잔잔한 흐름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한마디, 의외의 장면에서 삶의 뭉클함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아아, 속이 시원하다."

이제 해원은 추운 것도 못 느꼈다. 실내복에 맨발엔 은섭의 슬리퍼만 꿰신고 나왔는데도 몸에서 이상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명여가 통쾌하게 외쳤다.

"그래, 다 망가져버려라! 내가 망가지는데 집이 멀쩡하면 되겠니, 같이 고장 나야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45페이지)

명여 이모의 낡은 펜션으로 찾아온 해원은 이모가 왜 펜션을 방치하는지 몰랐다. 이 장면을 읽고 있던 나도 몰랐다. 그러나 명여가 통쾌하게 외치는 그 순간의 감정은 알 것 같았다. 답답함이 폭발하듯, 본인은 닫아두고 꼭꼭 눌러두면서 그 감정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단속하고 살아온 것 같은데, 고장이 난 수도가 폭발하듯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순간, 명여의 마음도 폭발했으리라. 아무리 단속을 한다고 해도 감정은 작은 틈새로라도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이건 뭐, 새어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폭발했으니 얼마나 거대했을까. 이렇게 소리치고 싶던 순간이 명여에게 얼마나 많았을까? 담고 있자니 아프고 답답하고, 쏟아내자니 그게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자책의 순간을 조금은 더 끌어안고 있었으리라. (명여가 왜 자책하면서 15년을 살아왔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 나온다) 이 장면을 읽는데, 몇 문장 안 되는 명의 외침을 듣는데, 갑자기 뭔가 확 터지는 것 같은 기분에 은근슬쩍 개운함마저 들었다. , 한파에 수도는 터지고, 물은 분수처럼 튀어 올라온 집을 얼음 왕국으로 만들었지만, 명여의 속은 시원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 감정이 이입된다. 누구나 그런 순간 담고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차마 꺼내놓을 수 없는 말에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일들, 어디 대나무 숲에라도 가서 외치고 싶은데 그래서도 안 될 일들, 그게 담아두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니까.

 

이게 시작이었나 보다. 서울 생활이 지친 해원이 강원도 시골의 이모 집을 찾아든 이유도 명여 이모가 외치던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시원하게 쏟아냈으니, 이제 회복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거다. 이야기는 그 길을 참 천천히 걷게 한다. 당장 뭔가를 전환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걷는 길을 여는 것만 같다. 고장이 난 수도 때문에 펜션 호두하우스의 수리 기간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명여 이모는 친구 수정의 집으로, 해원은 은섭의 집으로 임시 피난처로 삼는다. 그리고 서서히 상처를 비우고 마음을 담는 시간을 연다. 해원은 은섭의 서점 굿나잇책방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은섭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서점 일에 몰두하면서 피곤했던 서울에서의 시간을 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섞이는 법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얼음 왕국이 되어 흉가처럼 보이던 호두하우스는 일주일의 시한부였지만 굿나잇책방의 이벤트 상품으로 활용된다

 

소설 곳곳에서 묘사되는 장면들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진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독립서점의 분위기를 그리면서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공간에 모여든 나이 성별 불문한 책모임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작고 허름한 기와집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질 작은 서점 내부, 여름 내내 푸르게 자랐던 벼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겨울 논의 스케이트장,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 리어카의 뒷자리에 앉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승호, 뭔가를 계속 만들면서 손을 놓지 않는 소녀 감성 수정 씨, 엘이디 전구로 바꾸라며 영업에 열을 올리지만 그래도 책이 좋아서 책방을 찾는 거라고 믿고 싶은 근상 씨, 반항하는 이미지 뒤로 속이 꽉 찬 아마추어 래퍼 현지. 그중에서도 명여 이모의 표정을 계속 그리면서 읽게 되는데, 내가 바라보는 명여 이모의 얼굴은 항상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나날들 때문에 명여 이모는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해원의 인생에 책임까지 느끼지는 않았을까? 상당히 복잡한 표정의 명여 이모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한밤에 창으로 비친 달빛에 의지해서라도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할 수 없어서 곧 죽어도 계속 써 내려가야만 하는 사람, 그렇게까지 했건만 다 쏟아내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전에 이모가 했던 말을 생각해봤어.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건 너무나 기약이 없다는 거. 그러게, 좀 더 때가 되면, 상황이 좋아지면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일들이 내게도 있었어. 이젠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401페이지)

 

어쩌면 우리에게 화해나 용서, 상처를 덜어내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무게가 없는 말들이 그 순간을 만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잔뜩 날 선 마음을 둔해지게 하기 싫었나? 나를 방어하기 위해 계속 뾰족하게 있어야 했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더는 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의 제목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다는 말은,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과 같다고 명여 이모가 그랬다. 그건 만나지 말자는 말이라고. 그랬다. 그런 빈말들. '다음에'라며 약속 시각을 못 박지 않고 흐지부지 잊어주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은 말. 해원이 보영에게 지금은 너무 춥다면서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말을 했을 때, 아마도 해원은 미루고 싶었던 것 같다. 기억 속 상처를 들추는 시간을, 그 상처를 다시 꺼냈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어쩌면 영원히 기억에서만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런 상처들이 안에서 머물기만 한다고 좋은 걸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을 걸까? 아니다. 괜찮지 않으니까 우리는 매번 그 상처를 조금씩 들추고, 싸우고 화해하고,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거 아닐까. 그 괜찮아지는 시간은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건가 싶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갈 게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그날 날씨를 좋은 날로 기억하라는 듯이. 결국은 그 상처도 치유도 내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너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이, 세월이 흐르니까 이렇게 용기를 내게 하기도 하는구나' 싶은 조금은 늦어버린 안심.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날씨가 좋은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으니까.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것으로 시작한 빈말(?)'우리가 같이 밥을 먹은 그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는 마음 가득한 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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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0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장미 2018-07-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말말고 꽉찬 말로..... 우리도 밥 한번 먹어요.ㅎㅎㅎㅎㅎ
완전 진심!

구단씨 2018-07-28 00:11   좋아요 0 | URL
속을 꽉 채울 수 있는 음식을 골라봐야겠어요~!! ^^

다락방 2020-02-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비 채널 돌리다 이 드라마를 하는 걸 알게 됐어요. 어? 이건 이도우 작가 책인데?! 저는 읽지 않은 책이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고, 오, 이거 분명 구단씨 님의 리뷰 있을거다! 하고 찾아왔어요. 역시 있었습니다! 헤헷 :)

구단씨 2020-02-28 15:38   좋아요 0 | URL
아... ^^
언젠가부터 드라마 방영 시작 예고도 많이 하더라고요.
알면서도 드라마는 못 봤는데, 반응은 궁금합니다. ^^
 

 

어린이 책을 좋아하는데, 예전만큼 어린이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한다.

아무래도 조카가 분가한 뒤로 조카랑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전히 책 읽기가 게으른 탓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어떤 책이 나왔는지 먼지 찾아볼 기회가 줄어들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작년에, 페미니즘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 동화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다시 꺼내본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제목부터 익숙한 이야기가 굳이 다시 읽을 필요를 못 느끼고,

그냥 지나쳐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 <아기돼지 세 자매>는 <아기돼지 삼 형제>인줄 알고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 읽게 된 책이다.

 

아기돼지 세 자매는 아주 깔끔했다. 엄마 돼지한테 가정교육도 아주 잘 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과 다른 아기돼지의 연령이다. 아기돼지 세 자매는 사실 아기가 아니다.

결혼할 나이가 된 어른 여자 돼지다. 어느 날, 엄마 돼지는 세 자매 돼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도 이제 통통하게 살이 잘 오른 예쁜 돼지 아가씨가 되었구나.

자, 이 금화 주머니를 하나씩 받아라. 가서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아보도록 하거라……."

 

엄마돼지는 아기돼지들에게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떠나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신랑을 찾아 떠나라고 한 거다.

 

 

 

 

엄마돼지에게 돈주머니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세 자매는 헤어진다.

(같이 떠날 줄 알았는데) 서로 다른 길을 찾아서 떠났다.

 

 

여기서부터 『아기돼지 삼 형제』와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떠날 때 엄마 돼지는 금화 주머니를 준다.

원작이 무작정 길을 떠난 돼지 삼 형제가 집 지을 재료를 얻어 집을 지었던 것에 비하면 돼지 세 자매는 금화를 들고 떠난다.

그렇게 받은 금화로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진 집을 사는 거다. (오~ 이 방법이 더 간단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다.)

이 부분을 보니 어느 정도는 변화해가는 사회에 맞게 구성된 게 아닐까 싶다.

돈이 없으면 뭘 못하잖아. 누가 집 지을 재료를 그렇게 준다고?

그렇게 길을 떠난 돼지 세 자매의 행보가 기가 막힌다.

 

편안한 걸 좋아하는 첫째 돼지는 가진 금화 모두 털어서 커다란 벽돌집을 산다.

어느 날 아침, 첫째 돼지가 창밖을 내다보니 멋지게 차려입은 돼지 한 마리가 청혼하는 거였다.

"아리따운 아가씨, 문 좀 열어 주세요. 제가 귀부인이 되게 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돼지는 문을 열어주면서 생각했다. 예의 바르고, 돈도 있는 것 같고, 마음에 드니까 저 정도면 좋은 신랑감이라고.

그러나 그 돼지는, 돼지의 탈을 쓴 늑대였다. 첫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지.

 

둘째 돼지는 가진 금화 반만 들여서 나무로 된 예쁜 집을 샀다.

첫째 돼지 때와 마찬가지로 멋진 돼지의 청혼을 받는다.

잘생기고 힘도 세어 보이고, 겨울에 땔나무 걱정은 없겠다는 판단에 그 돼지를 좋은 신랑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러나 역시 돼지의 탈을 쓴 늑대에게 잡아먹혔다는 결론.

 

이제 셋째 돼지가 궁금하겠지?

 

늑대는 돼지 가면을 쓴 채로 보리수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었다.

돼지 두 마리로 포식하고 나니 배가 불러서 좀 쉬어야겠다. 소화도 시키고 낮잠도 좀 자려고.

그런 돼지를 지켜보는 늑대 한 마리가 있었으니, 굉장히 사나워 보인다. 상황이 역전된 거다.

'돼지 가면을 쓴 늑대'는 '늑대 가면을 쓴 돼지'에게 자기가 사실은 돼지가 아니라 늑대라고 설명하느라 애를 쓰는데,

그에 '늑대 가면을 쓴 돼지'가 말한다.

"그래? 저기 가서 지푸라기로 만든 집에 숨어 있는 셋째 돼지를 잡아먹으면 네 말을 믿어 주지."

'돼지 가면을 쓴 늑대'는 지푸라기 집으로 뛰어들면서 셋째 돼지를 후식으로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어디 셋째 돼지 캐릭터가 그렇게 쉽게 잡아먹히는 것이더냐.

지푸라기 집은 셋째 돼지가 늑대를 잡기 위해 놓은 덫이었다.

그렇게 늑대를 포획한 셋째 돼지는 늑대를 사로잡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그래서인지 셋째 돼지와 결혼하겠다는 돼지들이 줄을 섰다는 후문이... ^^

하지만 셋째 돼지가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았다고 나오지는 않는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아기돼지 삼 형제』보다 <아기돼지 세 자매>가 훨씬 재밌게 읽힌다. 글로 보면 A4 종이의 절반이나 채워질까 하는 정도의 분량인데, 그 흐름이 통쾌해서다.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보냈던 돼지 삼 형제와는 아주 다르다. 돼지 세 자매에게 신랑감을 구하러 내보낸다는 설정은 참 구닥다리 같지만, 그 여정에서 보이는 돼지 세 자매의 태도는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비춘다. 외모나 태도로만 판단한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이 정도면 뭐, 하는 계산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다. 돼지의 탈을 쓴 늑대였으니, 늑대의 손이나 발만 보았어도 돼지가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신중하고 세세하게 상대를 살펴볼 생각을 못 한 거다. 반명 셋째 돼지는 늑대가 쓴 가면을 똑같이 이용한다. 늑대가 돼지 가면을 쓰고 돼지를 잡아먹었으니, 돼지도 늑대 가면을 쓰고 늑대를 잡아먹어야지!

 

 

 

 

(늑대를 포획하고 난 후의 셋째 돼지 표정 좀 봐라. 저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돼지 자매 두 명은 죽었지만, 신랑감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길을 떠난 돼지 세 자매가 얻은 교훈은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아마도 그건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사는 법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가 똑바로 서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 동화였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 역시.(이 부분은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자세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적당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마지막 반전은 참 대단했다.

신랑감을 구하러 떠났던 여자 돼지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처음 길을 떠난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거다.

신랑감을 구하러 떠난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신랑, 결혼이라는 것은 삶을 차지하는 많은 의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니까.

여자의 행복이 결혼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나, 어떤 남자를 선택하느냐에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이나

요즘 세상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개념은 아니니까.

사실 이건 여자 남자 따로 놓고 볼 일은 아닌데 말이다.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결혼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건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인생의 법칙이 아니라는 거다.

 

『아기돼지 삼 형제』보다 훨씬 현실적이어서 파고드는 메시지가 강하고,

통쾌한 결말에 큰소리로 웃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이야기다.

이 짧은 동화 한 편으로 요즘 시대의 많은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뭔가를 해결하고 찾아가는 느낌이 좋다.

 

 

페미니즘 동화를 검색하다가 같이 발견한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는데,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주인공들이 멋있어서 아직은 코딱지만한 조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들이다.

그동안 우리가 만났던 동화 속 공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색다른 캐릭터들, 21세기를 사는 여성들에게 여자 어린이들에게 필독서로 보여주고 싶은,

굳이 어린이가 아니어도, 엄마가 아니어도, 만나보면 좋을 책들이다.

 

 

 

 

 

 

 

특히 <종이 봉지 공주>는 마지막 페이지가 압권이다. 너무 멋있었던 사이다 공주 때문에 박수를 막 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린이(청소년) 책을 고르거나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책 한권 더.

 

 

 

 

 

 

 

아이들 책을 바라본 최윤정 작가의 평론집인데, 어린이 문학을 보는 우리의 시선과

책 속의 구절에서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감정들, 실수들, 웃음들을 함께 볼 수 있다.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골라놓은 책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굳이 부모가 아니어도 어른이 된 우리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아이들에게 보여야 할 태도, 말 같은 것을 배우는 또 하나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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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06-2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네요!!

구단씨 2018-06-29 10:08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읽고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 ^^
 

 

가끔 그런 시댁을 본 적이 있다(사실 너무 많이 봤지만...)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무임금 노예 한 명 들인 것으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아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혹은 시댁의 많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아니,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런 짓(?) 못 하는 건데,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지 모르겠는 상황들. 하아...

 

미혼인 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누군가를 만나서 좋아하면 되고, 혹시 헤어지지 않는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라고만 생각했던 어린 나이를 지나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인다. 나의 자매들, 친구들, 지인들의 평균 결혼생활은 15년 정도 된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직접 보게 되는 상황들도 있고, 속상하다면서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TV 일일 드라마의 막장 스토리가 단지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며느리를 내 아들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시댁 사람들을 보면, 그럴 거면 죽을 때까지 아들 끼고 살지 왜 결혼하게 내버려 두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신수지의 <며느라기>를 보면서도 한숨만 푹푹 나왔다. 며느라기. '시댁 식구에게 예쁨 받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 그런 단어가 있고 정의가 있는 건지, 이 웹툰에서 만든 신조어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만들어진 말인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 시기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공감이 먼저 다가오니 '며느라기'라는 단어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다들 그런 시기를 겪었다는 것만 알겠더라.

 

주인공 민사린은 동갑내기 무구영과 결혼했다. 이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겠지.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눈 뜨는 아침이 행복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아내이자 며느리가 된 그녀가 해야 할 역할도 같이 추가된 거다. 잘하고 싶었다.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리하게 잘하려 애쓴다. 시간이 안 되는데도 회사 일에 지장을 주면서 시댁 일을 챙기고, 시어머니의 첫 생일 아침상을 차려주겠다고 전날부터 시댁으로 향한다. 시누이는 미리 전화해서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 스타일도 말해주고 말이다. 어쨌든, 시작은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싶기는 하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잘하고 싶은 마음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쌍방인가 아닌가 하는 거다.

 

미묘하게 던지는 말에 담긴 감정들이 가슴에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까? 웃긴 건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며느리였다는 거다. 웹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감춰진 상황이 드러나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공감과 동지애를 느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잘되지 않았다. 아직은 며느리인 사린에게만 감정 이입이 되는가 보다. 한편으로는 같은 여자인 입장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모습까지 보니까, 이건 '며느라기'의 시기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서 여자가 겪는 문제까지 아우르는 것 같다. 명절 끝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의 아내를 배려하지 않고, '간단하게 집에서 밥을 먹자'는 시아버지의 말을 보면 한마디 하고 싶다. 그 '간단한 밥상'을 당신이 한번 차려보고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이 책 읽다가 TV 파일럿 프로그램인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하아, 한숨과 답답함이 밀려와서 죽을 뻔했다. 일인다역을 하는 며느리에게 왜 빨리 식당으로 출근하지 않으냐며 전화로 닦달하는 시어머니, 아이가 방바닥에 엎지른 것을 보면서도 느긋하게 다가오는 남편, 결혼 후 처음 시댁 방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며느리, 그런 아내를 방치(?)하고 거실에서 시댁 어른들과 다과 하며 앉아있는 남편, 명절에 만삭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향하는 며느리, 마치 며느리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용량의 명절 음식 준비물을 내놓는 시어머니, 주방에서 두 여자가 열심히 차례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도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시는 시아버지, 명절 전날부터 몰려오는 시댁 식구들, 차례 지내고도 바로 친정에 가지 못하는 며느리, 며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굳이 손주 아이큐 운운하며 자연분만을 언급하는 시아버지... 말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눈물과 어이없음으로 공감하면서도 보던 이 프로그램에서 그나마 건진 건, 남자 MC의 한마디였다. 평소에는 그 안에 섞여 있느라 몰랐는데, 명절의 모습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고 있으니까 안 보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정말 미묘하다. 말 한마디가 건네져 오는데 그 미묘함 때문에 감정이 상한다. 이제 한 가족이 되었다고, 며느리도 자식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아들과 다르게 대한다. 분명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아프게 한다. 남자와 여자, 시댁과 친정,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구분해서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가족이라고 하면서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람, 자기가 편하다고 아내도 편할 거로 생각하는 착각, 내 아들 좋아하는 것을 차려놓고 며느리도 좋아할 거라고 단정하는 일... 웹툰 <며느라기>에서 나오는 사린의 동서가 차라리 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싫고 좋고 분명히 표현하는 일이 자기 안위를 위해서 필요하다. 정이 없다고, 냉정하다고, 며느리인데 왜 안 하느냐고 욕먹기도 하겠지만, '걔는 원래 그래' 하는 인식이 장착되니 더는 그 며느리에게 뭔가 요구하거나 희생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린의 동서 같은 며느리가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며느라기>나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보면 공통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남편의 역할. 시댁과 아내의 중간에서 남편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보인다. 내 아내가 시댁에서 어떻게 지낼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남편에게는 '자기 집'이었겠지만, 아내에게는 쉽게 다리도 뻗을 수 없는 '아직은 남의 집'일 거라는 것을. 악의가 없다고 하지만 시댁 사람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는 집안 일들에 여성들은 힘들어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먹자'는 상차림의 준비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한다. 어른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어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거슬리면 그만하시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느낌의 상황들을 가만히 참고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아마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 같다. 요즘 많이 하는 연습이 거절하는 거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끙끙 가슴앓이하면서 위경련을 앓는 것보다 한번 싫다고 말하고 상대에게 나쁜 사람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며느라기'의 시기를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선에서, 새로운 가족과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만 내 손을 내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에는 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그 거리를 너무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부작용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 거리를 너무 멀리하려고 해도 서운해지는 일이 생기겠지만...) 사린이, 대한민국의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칭찬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정도만 하면 된다. 때로는 싫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절이, 서로가 잘 지낼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 웹툰이 계속 연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남편들, 남자들이 같이 봐주었으면 더 좋겠다. 내 아내가, 내 어머니가 어떤 일상과 시댁이라는 관계 속에서 있는지 보면서 이해와 공감의 시선을 보내주기를. 일방적으로 여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결정으로 만난 인연들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한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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