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이 흘렀다.

세상은 변했다.

이제는 시골 어디에도 친구들끼리 주머니를 털어 갈 색싯집 하나 없다.

달이 환한 마찻길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앞으로 또 30년이 흐르면?

마찻길이라는 말을 잊어버렸듯이 그때 가서 우리는 장터라는 말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장터의 모습을 기억해 내기 위해 이 사진집을 열심히 뒤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258페이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오늘 팔아야 할 물건을 싼 보자기를 버스에 싣고 오르느라 애쓰는 사람의 뒷모습 혹은 앞모습 말이다. 자기 몸보다 큰 짐을 버스에 올리느라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한 사람분의 차비를 내고 사람이 타야 할 자리에 자기 짐으로 영역을 차지하느라 운전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버스에 오르는 표정이 더 기억난다. 우리 집은 시내와 시골의 중간쯤(시내 쪽에 조금 더 가깝게)에 있다. 나갈 때는 시골에서 나오는 버스를, 들어갈 때는 시골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엄청나게 컸던 보따리가 오후에 들어갈 때는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들고 나간 물건을 다 팔았다는 거겠지. 아니면 들고 나간 물건을 팔았던 돈으로 다른 것을 사 오느라 다시 양손이 무거워지거나. 사람 사는 생생한 모습을 그대로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시내 반대 방향의, 우리 집 너머의 어디쯤을 가본 적도 거의 없다. 버스의 종점 이름이 쓰여 있어도 그게 어딘지 잘 모른다. 어렸을 적에는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친다는 게 두려움이었고, 지금은 그저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니 나오는 사람 들어가는 사람이 있겠지 하는 정도일 뿐이다. 가끔 보는 20세기의 흔적들 같은 느낌으로...

 

그런 내게도 그곳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궁금해질 때가 장날이다. 집 앞 시장 상가에는 평소에도 문을 열고 장사하는 곳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에는 아직도 유명한 5일 장이 있다. 엄마는 지금도 고추나 마늘을 살 때면, 약초를 살 때도 그 재래시장에 간다. 요즘은 재래시장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그곳은 장터다. 참 정겹게 들린다.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 세상 온갖 물건이 펼쳐져 있는 곳, 시골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유일하게 즐기는 외출이 아닐까 싶은 곳. 백화점과 대형 마트가 익숙하고, 24시간 문을 연 편의점에서 시간 구애받지 않고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구매할 수 있는 오늘을 떠올리면, 장터의 풍경은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저자가 보여주는 사진이 아니었다면, 시인들의 기억 속 시간을 불러오는 게 아니었다면 공감은커녕 어디 별나라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시골에 살아서 불편한 게 많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았는데, 막상 이런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에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백화점이나 마트가 장터의 업그레이드 버전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다르다. 같은 맥락으로 흐르고 있는 매매의 장소일 테지만, 분명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같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이 채워지는 곳, 그곳이 장터다. 요즘의 편리한 구매 방식이 절대 채워줄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시골의 오일장은 그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가 발생하고 생성되어 완성되는 곳이었다.

각 마을에서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모든 물건들이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갔다.

짚으로 만든 망태나 짚신에서부터, 산에서 난 나물들과 강에서 잡힌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품들이 모여들었다.

농촌 마을의 모든 것들이 상품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경제적 활동이었다. (122페이지)

 

갈담장(현재의 강진장)은 이 근방 사람들의 세상을 향한 출구였다.

갈담장에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외부로부터의 정보가 모두 갈담장을 통해 동네마다 퍼져 갔다.

혼담이 오고가고, 무르익어 가는 곳도 그곳이었으며,

농사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도 그곳이었다.

정치에 대한 모든 정보도 그곳에서 밝혀지고 여론이 조성되었다.

갈담장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들끓는 장소였다. (79페이지)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장터 사진가, 두 명의 시인. 이들이 하나가 되어 들려주는 장터는 그 시간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리움이다.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나들이 가듯 따라가던 곳, 별다른 고명도 없이 멸치 육수로 끓여낸 잔치 국수 한 그릇의 기가 막히는 맛, 장사는 뒷전이고 끼리끼리 모여 화투판을 벌이기도 하는,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잔칫날 같다. 그러니까. 지금과는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다는, 하나의 역사로 보면 이해가 될까? 놀이공원에 가고,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뷔페에서 여러 종류의 음식을 맛보고, 여건만 되면 국내든 해외든 다닐 수 있는, 문자나 전화 한 통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이 되기 전에 있었던 삶의 방식이었다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장날에 장터에나 가야 얼굴 보는 사람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소식들을 들으며 눈물과 웃음을 나누고, 장터 한쪽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윷놀이라도 즐기는 게 유일한 놀이이고 외출이었던 시절을 보게 되는 거였다. 그 시절의 장날, 장터는 사람들에게 온 세상을 모아놓은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을 사진가와 시인의 이야기로 새삼 다시 보게 된다.

 

 

 

그런 장터의 풍경이 이제는 사라져간다는 게 매우 아쉽다. 무형문화재처럼 장터도 하나의 역사와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명맥을 이어갈 환경을 만든다는 게 쉬울 리도 없고 말이다. 누군가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 그냥 유지만 한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고... 그 옛날 우리에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장소였던,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사고팔고 하던 그곳은 이제 생기를 잃고 시들어간다. 엄마 아빠의 놀이터 같은 곳이었을 그곳은 이제 추억으로만 머물려고 한다. 그런 아쉬움을 채워주려는 듯 작가는 장터의 사진으로 그 시간을 공유한다.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생기를 넣어 우리에게 전달한다. 그들이 그 시간 속에서 주고받았던 온기를 작가의 진심으로 채운다. 그들 각각의 사연이 이야기되어 들려온다. 장터의 바닥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사람들, 소박한 국밥집에서 데이트(?)하는 듯한 노부부, 뻥튀기 계를 잠시 쉬면서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아저씨, 늘어놓은 옷들 사이에서 물건을 고르는 아주머니...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흔적 그대로였다. 우리 엄마가 물건을 사러 가서 보인 행동일 것이고, 아버지가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던 순간이었을 테지.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서 먹었던 1000원짜리 장터 짜장면의 맛이었다.

 

소박하다면 소박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넉넉하지 못한 시절의 흔적 같다. 부족한 게 더 많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사는 게 여유롭지 못하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의 생활환경이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부족함보다는 다른 것을 더 느끼면서 살아간 시절이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채워진 것들로 만족하고 웃으면서 지냈을 시절. 작가의 말처럼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많은 것이 우리를 채우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힘들다고, 외롭다고 말한다고 한다. 추위를 막아줄 집과 뜨뜻한 보일러 온기가 있고, 삼시 세끼 밥을 먹고 한겨울에도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구멍이 난 양말을 기워 신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데 힘들고 외롭다고, 심지어 죽고 싶다고까지 한다고.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점심을 일본에서 저녁을 중국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도 외롭다고 말한다고... 작가는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힘들고 외로운 이유는

신이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163페이지)

어쩌면,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외로운 이유는 도시의 삭막함 때문이 아닐까?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게 현관문 꼭꼭 닫고 사는 세상. 도시는 인간에게 육체적인 편리함을 주는 공간으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인간의 마음까지는 다독여주지 못한 공간으로 남아있는 건 아닐까 하고. 오래전 우리 마음을 풍요롭게 했던 시골의, 장날의 그 모습처럼 사람 사는 냄새가 북적거리던 세상이 사라져서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장터의 매매 형태가 00 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로, 00 상회가 슈퍼로, 슈퍼가 대형할인마트나 백화점으로 변화하면서 도시가 장터를 빼앗아가서, 흥정이 사라진 자리에 정찰제의 거래가 채워지는... 장날만 되면 보이던 세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그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괜히 뭉클해지기도 하고, 내 기억 속 희미한 흔적을 선명하게 다시 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사진가의 사진과 시인들이 들려주는 문장은 하나의 영상처럼 흐른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화려하고 예쁜 배우들이 출연하는 게 아닌, 손끝의 굳은살이 더 먼저 보이는 장터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어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되었다. 물건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국수 국물 한 국자 더 떠주며 마음도 덤으로 얹어주는 온기가 그대로 보인다. 이들의 모습이 내 기억에도 어렴풋이 남을 걸 보면 내 나이가 참 많구나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지만,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시인의 경험담이 낯설지 않게 들리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박물관이나 역사관의 어디쯤에서 마주했다면, 설명해주는 몇 줄의 문장으로만 기억할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네 살아온 시간의 한 부분을 그렇게 들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의 생생한 온도까지는 들을 수 없었을 것 같다. 다행인 건 사진가의 사진에 얹어진 시인의 이야기가 그 온도를 전하면서, 우리에게 건너오는 그 시간의 기록이 완전해졌다는 거다. 사진가가 포착한 순간에 시인의 추억이 보태어져 장날의 기록이 완벽해진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건너와서 또 하나의 기록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이 사진들에서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는 모습들,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삶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작가는 사진을 위한 이미지를 채집하거나 포획하려 한다기보다는, 삶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찰의 시선은 차갑고 냉정한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리라. (289페이지)

 

'옛것'과 '지금 것'은 항상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유리창의 안과 밖처럼 '옛것'과 '지금 것'의 이분법적 분할은 있을 수 없고 또한 그래서도 안 될 일이다. '옛것'의 따스한 온기와 '지금 것'의 현재성이 함께할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는가. (318페이지, 사진가 이흥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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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설연휴동안 늘 평온하고 복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구단씨 2019-02-07 23:38   좋아요 1 | URL
설 연휴 잘 지내셨나요? ^^
월요일 같은 목요일이었습니다.
하루만 더 지나면 맞이할 주말을 생각하면서
유쾌하게 지내세요~ ^^

재는재로 2019-02-02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구단씨 2019-02-07 23:39   좋아요 0 | URL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일교차 심하면서도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요즘입니다.
감기까지 오면 더 힘드실 텐데, 몸조심 하셔요.
 

이해는 타협을 위해서도 싸움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선행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핵심과 취약점들에 대한 인식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들은 생각보다 남자를 모른다. 그저 자기와 주변의 남자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의 파편으로 하나의 상을 그려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자로서의 자기 인식인 동시에 사회적 객관을위한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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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자주 드나들면 그냥 알게 된다. 어떤 의사(의료진)가 환자를 위하는 건지 저절로 보인다. 저자가 지금 이렇게, 마지막 구명 밧줄을 잡는 것처럼 계속 말하는 이유는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환자를 위해서다. 환자에게 다가가는 시간이 길어져서 환자가 사지를 넘지 않도록 붙잡으려고,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살리려고. 그게 전부다.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대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마라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 (골든아워1, 148~149페이지)

 

저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게 아덴만 작전이고, 저자의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가 작년이다. 그사이 다른 매체를 통해 인터뷰나 강연을 잠깐씩 보긴 했지만,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훌륭한 의사라는 생각만으로 멈췄다. 북한군 병사를 치료하면서 그의 인터뷰를 몇 번 보고, 국회의원들에게 중증외상센터의 현실과 대책을 브리핑하는 걸 보면서 뭔가 달라질 거로 믿었다. 중증외상센터가 왜 필요하고 또 그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야 하는지 일련의 사건들로 증명되었으니까. 알려진 것이 그 정도일 뿐,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그보다 많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나라의 병원에 그가 말하는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고 중증외상센터의 지원이 늘어나서, 병원까지 가지 못해 길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더는 없는 세상이 곧 올 거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했던 것 같다. 세상을 너무 몰랐다. 어느 날 CF에 등장한 그를 보고 의아했다. 화면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다. 그가 왜 CF까지 등장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이름을 알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 싶은 오해를 했다. 나중에 그 CF를 찍어야 했던 배경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출동에 필요한 지원을 해주지 않는 정부 대신에,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을 해주는 통신사와 손잡고 찍은 광고. 그것도 갑자기 출동하게 된 현장을 화면에 담게 되었다는 후문에 한숨이 푹푹 나오더라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방송이나 다른 인터뷰에서 말하는 현장의 생생함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나 역시도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저렇게 나대는 거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틀렸다고 말해주고 싶다. 사람의 목숨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시스템과 구조장비를 갖추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걸 해주지 못하는 정부나 그런 생각조차도 곱게 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그의 간절한 바람은 한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당장 눈앞에 엄청난 돈을 물어다 줄 제도가 아니어서 아무도 어떤 기관도 쉽게 협조하지 않는 것일까?

 

책을 읽다가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했던 게 참 오랜만이다. 끝이 없는 그의 노력이 시한부가 될까 봐 답답하고, 그런데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고 있는 그에게 감동해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 그놈의 행정은 당장 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행정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급하지 않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골든아워에 도착해서 치료를 시작해야 환자가 살아날 기회는 늘어난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가까이 갈수록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다.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자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다니. 미국이나 독일, 영국, 일본에서도 정착되었다는 중증외상센터의 시스템이 대한민국에서는 한없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일 앞에 무엇이 문제가 되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그의 인터뷰를 한 번씩 볼 때마다 이 커다란 제도를 그 혼자서 이고지고 끌고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한 인터뷰일수록 그의 신념은 사그라진 것 같다. 다음이 없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달라지지 않을 일에 그는 더는 어떤 바람조차 갖지 않는 듯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없는 중증외상센터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곳은 언제까지 운영이 될까, 그가 없는 그곳이 과연 존재할까, 그럼 우리가 목숨을 구할 기회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은 두려움이 앞선다.

 

이 책은 2002년부터 2018년까지 그가 경험한 기록이다. 1권에서는 주로 그가 외상외과에 들어와서 부딪힌 의료 현실에 절망하는 순간들이 많다. 미국과 영국의 외상센터 연수로 그는 한국에서도 정착시킬 외상센터를 기대했겠지만, 한국의 현실은 그의 바람을 다 담지 못했다. 외상센터로 실려 오는 환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들려주면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접 마주한 인간의 무력함을 토로한다. 여러 가지 사건으로 왜 중증외상센터가 필요한지 피력하지만, 그의 바람이나 노력만큼 따라주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다. 이어지는 2권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장의 모습이 담겼다. 그가 속한 병원이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로 지정되었지만 열악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외상센터를 제대로 갖출 시스템을 안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고 현장에서의 일들, 병원과 정부가 해결해주지 않은 행정상의 일들,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나아가야만 하는 그의 감정들. 거기에 그 혼자가 아니라 중증외상센터 팀원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와 동급으로 들려온다. 틈나는 대로 헬기 출동 훈련을 하고 부족한 장비지만 정비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든 환자를 구하러 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응급 출동 현장의 이야기는 더 생생했다. 세월호 사고에도 갔었다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거기에서도 참 우리나라의 행정은 사람이 우선이 아닌 채로 굴러가더라. 더는 그곳에서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돌아왔을 때는 얼마나 허탈했을까. 밤에 나는 헬기 소리를 소음이라고 민원을 넣는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만약 그 소음(?)이 지금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오고 있는 소리가 되었을 때야 아무 말도 안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특히 힘을 잃은 채로 중증외상센터를 떠나는 동료들을 이야기할 때마다 읽고 있는 내 어깨도 축 처진다.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고 해도 그들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마찬가지다. 이대로 중증외상센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을 구하고자 한다는 그의 신념과 의지가 끝날 것만 같아서 무섭다.

 

외래 진료는 내가 병원에서 하는 일 중 그나마 가장 부담이 적다. 이때 만나는 환자들은 생사를 오가는 긴 싸움을 끝내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환자가 부서지고 으깨진 몸으로 실려 왔을 때나,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수술방에서 그리고 죽음과 지난한 전투를 벌이는 중환자실에서 그들을 만나는 것과는 다르다. 미국에서 연수받을 때 데이비드 호이트(David Hoyt) 교수는 외래 진료는 추수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외래 진료는 죽다 살아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고, 내 지긋한 일상에서 실제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골든아워1, 19~20페이지)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아예 표정이 없는 사람 같다. 이 사람이 지금 화가 났는지 슬픈지 아픈지 어떤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 로봇인가? 그만큼 그에게서 표정은 물론이고 웃는 것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봤다. 이런, 그에게 이런 표정도 있구나 싶은 놀라움. TV에서 그의 병원 생활을 취재하는데, 중증외상센터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 받고 퇴원한 후에 외래 진료를 온 장면이 보였다. 그때 그가 활짝 웃으면서 진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면서 이제는 안 봐도 되겠다고, 잘 나았으니 더는 안 와도 된다고 말하며 환자와 웃으면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모습에 놀랐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을 확인한 기쁨도 있지만, 그가 이럴 때 웃는구나 싶은 의미심장한 순간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상황에서 실려 온 환자가 잘 치료받고 나가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그에게는 이 일을 하는 목적이자 신념이었다. 더도 덜도 아닌, 사람을 살리는 그 자체가 그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이유다. 우리가 그를 응원하는, 그에게 다가온 환자를 더 많이 살릴 수 있게 정부의 지원과 외상센터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하는 이유도 하나다. 사람을 살리는 일, 예방 가능한 사망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외상센터 안에는 환자를 끌고 CT를 찍으러 갈 사람도 부족했다. 외상외과 교수들은 다른 대학 병원이라면 수련의들이 할 일들을 직접 몸으로 감당하며 버텨내고 있었다. 새벽 3시에 환자에게 소변줄을 꼽고, 똥으로 오염된 핏물을 온몸에 뒤집어쓰며 수술했다.

이런 현실과는 정반대로 새 정부는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고 나섰다. 각종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외상센 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들의 업무 공백을 메워주는 전담간호사들의 근무시간도 주 52시간으로 묶여버렸다. 증원은 없으면서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기상천외한 정책. 이것은 센터 운영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나는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돌아가야 간신히 유지될 수 있는 내 처지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골든아워2, 290~2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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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싸움에서 밀려난 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가 왕이 되는 거로 생각하면 단순한데, 뭐든 그 순서와 절차가 자연스럽지 못함을 발견할 때는 복잡해진다. 그럴 때마다 의심하고 불합리한 뭔가를 찾아내고 싶어질 테지만,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서 왕의 독살을 의심해본 적도 있을 테지만, 아무도 그 독살에 대해 입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기록으로만 만났던 조선왕의 순서별 이름만 외우려고 노력했지 그 기간과 왕권 교체 순간의 내밀한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게 흘려들었다. 저자가 말하는 조선왕의 독살은 그래서 더 궁금하고 흥미롭다.

 

우리 역사에서 이어져 온 각 나라의 왕조가 보통 200~300년을 이어온 것에 비하면 조선이 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긴 세월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 긴 세월 왕조를 이어올 수 있었을까? 혹시 조선의 오랜 역사를 이어올 수 있게 했던 것은 왕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조선의 왕권은 절대 권력이라고 하는 중국 왕권과 이름뿐이었던 일본 왕권의 중간쯤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조선의 신하는 왕을 위해 존재하기보다는 당파를 위해 존재하는 당원으로서의 신하였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자신이 소속된 당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행동이 올바른 나라를 이끌어가고자 애쓰는 왕의 신하 된 도리를 다하는 것 다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의 신하는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크게는 당파를 위해 작게는 개인의 안위와 권력을 위해 태도를 보였던 것 같다. 그러니 자기 당파의 이익과 존재를 위협하는 왕이 등장했을 때, 그 왕의 재위 기간을 단축하게 할 방법을 연구했겠지. 혹은 허수아비 왕을 세울 방법을 찾았거나. 그런 순간에 필요했던 게, 아무도 모르게 왕을 끌어내리는 독살이라는 확실한 방법을 이용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조선의 왕은 4명 중 한 명이 독살당했다고 한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피를 봐야 했다는 건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 왕족이 되고, 언젠가 왕이 되는 이가 있을 테다. 하지만 왕이 되지 못한 왕족을 생각하면 그 권력을 모른 척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왕의 자리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항상 목숨을 위협받는 자리였을 거로 추측한다. 보이지 않는 적(?)이 너무 많아서 밤에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싶다. 그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위험도 불사할 수 있다는 걸, 조선왕 독살사건으로 알게 된다. 철저한 보안, 왕의 잠자리를 옆에서 지키고 대변까지 확인할 정도의 호위를 하는 곳이 궁궐이다. 그런 곳에서 독살할 수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완전한 곳은 아니었으리라. 한두 번도 아니고, 조선의 왕 여러 명이 그렇게 죽어갔다는 건 궁궐은 왕을 위한 곳이 아니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곳은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쥐려는 자의 싸움터일 뿐이다.

 

처음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한 번 읽고, 개정판이 출간되었을 때 읽고, 이번 특별판이 세 번째다. 한 권으로 출간되었던 책이 개정판을 거치면서 두 권으로 늘어난 이유는 독살 의혹을 하게 된 조선왕의 숫자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에 근거하여 시작된 글은 문종의 독살설을 의심하면서 두 권 분량으로 늘어났다. 그러니 조선왕의 독살설은 조선 후기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렇게 이 책에 기록된, 독살된 조선왕은 문종, 단종, 예종, 연산군, 인종, 선조, 소현세자, 효중, 현종, 경종, 정조, 효명세자, 고종까지, 오랜 세월 조선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독살된 왕도 많았다는 비례적인 숫자다. 자연사라고 믿어왔던 문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처리되었다는 의심, 단종과 예종의 의문사까지 이어진다.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말에 어머니 폐비 윤 씨의 복수라고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른 내용이 펼쳐진다. 연산군은 자기가 처벌한 사대부들의 재산을 빼앗고 독식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바꿔놓은 기록의 분위기가 연산군 이미지를 만드는데 한몫한 건 아니었을까. 인조반정으로 소현세자가 사라지고,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 역시 의문사로 사라졌다. 북벌을 꿈꾸었다던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의혹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어의가 침을 잘못 놓아 죽었다니...

 

개인적으로 죽음이 아쉬웠던 왕이 정조다. 개혁 군주라고 불리던 그가 조금만 더 조선을 이끌었다면, 저자의 말처럼 정조가 아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조가 꿈꾸었던 개혁이 좀 더 활발하게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때 정조가 계속 조선을 이끌며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어떤 결과를 얻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항상 놓칠 수 없는 부분은 '만약'이라는 가정일 것이기에 말이다. 만약에 그때 정조가 조금 더 조선의 운명을 바꿔놓았더라면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운명도 다른 모습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지나온 역사에 만약은 없다. 지나간 역사가 더 아쉽고 안타까운 부분이 존재하는 이유다. '만약'이 없기에,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지나왔기에, 나라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권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성 없는 역사에는 미래가 없으며, 미래가 없는 역사는 어디에도 쓸 데가 없다고. 의심의 부분을 드러내놓고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지나간 조선의 역사 속에서 조선왕 독살설이 들추어내는 게 무엇인지, 그것들을 보고 확인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남겨진 자의 역사가 아니라 그 순간을 보면서 찾아내야 할 것들을 들려주며 역사에 필요한 것은 반성이라고 말한다. 반성과 함께하는 역사만이 이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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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로 난 길로 저녁마다 산책을 하는데, 기찻길이 보인다. 30분 정도 걷다 보면 지나는 기차를 몇 대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랑 둘이서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기차 타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고. 질리도록 했던 말... 그냥 역에 가서 기차를 타면 되는 일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일까. 막상 기차를 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건 실행에 옮기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냥 습관처럼 하는 말이라는 것을, 엄마도 나도 안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버지 때문에 어디 가는 일이 불가능했는데, 아버지가 안 계신데도 어딘가로 가는 일이 쉽지 않더라. 오늘은 이런 일로 내일은 저런 일로, 며칠 동안 집을 비우고 떠난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는 걸 새삼 느낄 즈음. 드디어 기차를 탔다. 집을 떠나 어딘가로 향했다.

 

10월 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기로 말만 한 상태였는데도 설렜다. 기차표 예약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캐리어를 꺼내고, 소지품 몇 개와 엄마와 내가 갈아입을 옷 한 벌씩만 넣고 짐을 다 쌌다. 동생과 통화를 하고 하루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몇 년 동안 집을 비우지 못해 힘들었을 엄마와 나에게, 제부가 어렵게 예약한 숙소도 있으니 설악산에 가자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 때문에 예약한 일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꼭 오셔야 한다고. 이렇게 같이 어딘가로 가자고 얘기한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곤 했는데, 예전 같으면 너희들끼리 다녀오라고 말했을 엄마가 별 고민도 없이 같이 가자고 하더라. 그럴 때 주저하면 안 된다. 엄마 마음 변하기 전에 일을 저질러야 한다. 바로 기차표를 예약하고 짐을 싸고, 말을 번복하지 말라고 엄마한테 으름장을 놓고. 별다른 준비도 없이 그렇게 집을 떠났다.

 

 

여기서 서울까지는 고속열차를 타고 한 시간 거리다. 노원에 사는 동생이 잠실에 있는 언니한테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보다 빠른 시간이다.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는 곳인데, 매번 한번 오라고 하는 제부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만 했는데,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는 게 조금 씁쓸했다. 사실, 그렇게 다녀온 곳에서도 별거는 없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리, 사람들, 먹을 것 같은 게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태풍 콩레이가 지나간 후여서 바닷바람은 세고 파도도 높고 너무 추웠다. 아직은 이른 시기였던 터라 설악산의 단풍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좋았다. 엄마와 함께여서 더 좋았다. 나이가 들고 여기저기 아프면서 오래 걷지 못하는 엄마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데도 엄마는 그 먼 거리를 걸어 올라가고, 힘들다고 밤마다 코를 골면서 주무시는데도 일정에 다 맞춰 움직여줬다. 그렇게 힘들면서도 재미있다고, 이렇게 데리고 나와 줘서 자식들한테 고맙다는 말도 하셨다. 노인네 데리고 다니는 거 쉽지 않은데 애썼다고.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또 오고 싶다고... 또 오면 되는 거지!!! 여동생과 내가 동시에 한 대답에 다 같이 웃고 말았는데, 속으로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에게 이런 말 처음 들었다. 그동안 사는 게 팍팍해서, 크고 작게 일어나는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 가족을 이끌어온 엄마의 고달픔이, 막상 어디 가자고 하면 귀찮다고 거절하던 엄마가 어딘가로 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그대로 들려서. 이제라도 여기저기 많이 다니고 싶은데 엄마가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

 

그래서 요즘 부모와 함께 떠난 여행, 특히 엄마와 함께 다니는 이야기를 찾아서 보고 있다. 작년에는 <엄마의 골목> 때문에 참 많이 울컥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발랄한 느낌의 엄마와의 여행책들을 만났다.

 

작가 태원준이 엄마와 떠난 여행이 마냥 신기했다.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한 해외여행도 아닌 듯했다. 여행비용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편안하고 고민할 게 적은 패키지여행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조건에 엄마가 함께했다는 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두 사람은 해냈다. 막상 떠나고 보니 어떻게든 나아가게 되어 있더라. 아들과 엄마. 그 조합이 이뤄낸 여행이 참 발랄해서 보는 이가 다 즐거웠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신난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더라. 아, 부러워라. 예순 살과 서른 살의 엄마와 아들이 한 이 여행은, 힘들면서도 놓치기 아까운 하루하루를 함께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부모와 자식 간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삶에 집중하기 마련인데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까? 그러니 언제 또 올지 모를 이 여행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오자는 바람처럼 보였다. 엄마도 아들도, 열심히 걷고 많은 것을 보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겪고... 뭉클했다. 커다란 배낭 하나씩 메고 서 있는 모자의 뒷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부럽다고 말하면 누군가는 ‘너도 엄마랑 가면 되잖아?!’라고 말하겠지만, 이 모자의 여행이 부러운 건 그렇게 떠나는 일이 절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정부터 비용까지, 떠나있는 동안 비워둘 곳의 정리까지, 크고 작은 일들이 발목을 잡곤 했다. 작가는 엄마의 환갑잔치 대신 그 비용으로 엄마와의 여행을 택했고, 작가의 엄마 역시 아들의 제안에 응해주었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정리해야 할 것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같이 여행길에 오르면 감정 상할 일이 많을 텐데, 그걸 아들과 엄마가 한다는 게 무슨 기적이라도 보는 듯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300일이라니... 가능할까 싶은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야 만 이 모자가 부럽지 않을 수가 있나?

 

엄마는 일상의 대부분이 걱정투성이다. 이제 11월이 시작인데, 엄마는 벌써 김장할 걱정을 한다. 기름값이 많이 올랐는데, 기름으로 난방을 하는 여기 시골에서의 겨울을 지낼 걱정을 한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엄마는 감기 없이 올겨울을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을 한다. 가족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식들이 별문제 없이 하루하루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 마치 그게 자신의 걱정과 기도로 다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10월에는 한 달 사이에 세 번의 장례식을 다녀오면서, 언제 닥칠지 모를 자기 죽음도 걱정한다. 며칠 전 누군가의 장례식에 다녀온 어느 날,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건강하게 잘 지내면서, 또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다고도 했다. 엄마에게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 지난번의 짧은 여행이 좋으셨나 보다. 그러면서, 어딘가를 다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듯하다. 두 다리가 건강해야 여기저기 걸으면서 많은 것을 볼 것이고, 정신이 건강해야 보고 듣는 많은 것을 즐기면서 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건 누구보다 우리가 바라는 일인데 말이다. 엄마가 건강하게 지내면서 우리와 지금처럼 스스럼없이 얘기도 하고, 싸우고, 같이 다니는 일상을 계속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엄마가 없으면 할 수 없으니까, 의미가 없으니까.

 

짧았던 가을 여행을 기억하며 다시 겨울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생각만 해도 좋다. 엄마 앞에 닥친 가장 급한 일은 김장일 텐데, 김장이 끝나고 가야겠지? 명절이 돌아오면 힘들다고 하실 테니까 명절 기간도 피해야겠지? 겨울이니까 지난번보다 짐은 많아지겠지? 캐리어 하나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까 하나 더 사야겠다. 혹시라도 엄마가 망설이면 조금 더 귀찮게 졸라봐야지. 달달 볶이다 보면 두 손을 들고 가자고 하겠지...

 

집을 나서는 게 문제이지, 막상 나서고 나면 그다음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게 되어 있다. 추우면 가방 안에서 패딩을 꺼내 입고, 다리가 아프면 조금 쉬었다 가고, 배가 고프면 근처 식당에서 뭐든 먹으면 될 것이고. 한 가지 걱정은 체력이다. 유독 겨울 지내기를 힘들어하는 엄마가 잘 견딜 수 있기를... 나야 엄마보다 젊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게 익숙해서 덜 힘들겠지만, 허리와 무릎이 안 좋은 엄마가 오랜 시간 걷기에는 무리가 생기는 게 걱정이 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가 될지 몰라서 놓치는 게 더 후회될 것 같다. 조금은 덜 춥고, 덜 힘들 곳. 겨울을 즐길 수 있지만 따뜻하게 쉴 수 있는 곳,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같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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