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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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면 뜨끔해지는 소설이 있다. 스멀스멀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괜히 고개 숙이게 하는 이야기 말이다. 혼다 데쓰야의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전과자에게 방을 임대한다는 특이한 소재로 읽기도 전에 독자의 궁금증을 만든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세상의 시선을 한번쯤 받은 이들에게 방을 내어준다는 말인가. 입주자 중의 일부가 그런 조건이라는 게 아니다. 입주자 모두가 전과가 있고, 세상으로 스며들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찾아든 곳이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어떻게 같이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서로의 과거를 모두 드러내는 것도 가능할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입견 있는 시선을 버릴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는 마음이 궁금했다.

 

다카오는 각성제 사용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약물을 즐기려다가 그런 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약물 복용을 하게 된 거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살던 곳은 갑자기 화재가 나서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그런 그에게 보호사는 셰어하우스 플라주를 소개해주었고, 큰 무리 없이 입주하게 됐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의 전과 이력을 알고도 선뜻 방을 내주었는지 모르겠다. 일단 거처가 마련되어 있으니 안심이지만, 일정한 거처가 있다고 해서 쉽게 일자리가 구해지지는 않았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알고 보니 그가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직과 같은 업종으로 계속 일을 찾았는데, 이미 그의 소문은 업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당분간은 셰어하우스 주인 준코가 운영하는 플라주에서 일을 돕기로 한다.

 

일단 임대 조건은 나쁘지 않다. 월세가 5만 엔. 하루 세 끼 식사가 제공된다. 청소는 교대로 하면 된다. 방문이 없어서 사생활 보호가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은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그것도 괜찮다. 입주 조건이 전과자인 것만 빼고는. 준코가 왜 이런 조건으로 세입자를 구하는지는 모른다. 언제까지 이런 조건으로 임대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셰어하우스에 모인 이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이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할 뿐이다. 특이한 점은 서로의 과거나 오늘에 대해 굳이 간섭하거나 캐묻지 않으면서 사생활을 지켜주는데, 또 어느 순간에는 플라주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술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이 모임이 오래전부터 지속하여 온 것처럼, 서로가 허물없이 지내면서 가족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누구나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낯설고 어색해하던 게, 어느새 서로의 간격을 좁혀가는 게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 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태풍이 언제 멈출지도 알 수 없었다. (135페이지)

 

시오리는 말했다.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지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고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수는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262페이지)

 

당신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렇게 묻는 나부터도 전과자라는 이력에 두려움을 가질 것 같다. 흔히 '빨간줄'이라고 말하는 인생의 오점은 그 자체보다는 오점의 내용이나 이유가 더 중요할 것 같지만, 그런 사연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던 어떤 사실 하나만을 생각하고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저지른 죄로 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있다. 시간이라는 귀한 것을 잡히고 죄의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한번 저지른 일로 평생을 마음 다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은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다.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로 각인해야 하는지, 과거는 과거이므로 지금의 모습만 판단해야 하는지. 이런 마음은 셰어하우스 플라주와 의미가 통하기도 한다. '플라주'는 프랑스어 '해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모호하게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사람의 접점, 남과 여,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죄와 용서(278페이지)라고 해석한다. 해변이 정확한 선으로 그어서 표시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선이라고 여겼던 일은 때로 악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진실은 거짓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죄와 용서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삶의 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다카오를 포함한 셰어하우스 입주자 여섯 명과 집주인 준코. 플라주에 드나드는 손님들과 보호사로 존재하는 몇몇 어른들까지. 이들의 어두운 과거를 아는 데도 나쁜 시선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으며, 하나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읽다 보면 그들의 어두운 과거가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그들을 겁내거나 욕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어쩌다 그런 상황에 빠졌던 걸까, 이제 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시선은 또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바빠진다. 거기에 어떤 살인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프리랜서 기자가 셰어하우스에 잠입하면서 이야기는 현실적인 고민에 더해 흥미진진해진다.

 

프리랜서 기자가 한 살인자를 쫓고 있었다. 친구를 죽였다는 이유로 살인죄로 복역하다가 2심에서 무죄 판정을 받고 나온 한 사람이 있다. 기자는 그의 소식을 찾아다녔고, 그가 플라주에 세입자로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위장하여 그곳에 세입자로 들어간다. 살인자의 모든 것을 밝혀내어 그가 무죄가 아님을 입증하고, 그 사건에 대해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도록 그럴싸한 기사를 작성하리라 다짐한다. 그 부분이 조금 아리송했는데, 기자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셰어하우스의 모습을 봐도 처음부터 그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살인자의 존재를 확인해갈 수 있지만, 선뜻 그가 정말 살인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범죄라는 게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건 아니기에, 그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들려올 순간을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분명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나라는 법치국가다. 설령 죄를 저질렀어도 제대로 벌을 받으면 용서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그 사람이 제대로 생생했는지 어떤지, 재범 가능성이 높은지 낮은지 그건 또 다른 문제일 터다. 일단 벌을 받은 사람에게는 재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 정도는 사회가 보장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346~347페이지)

 

소설은 마지막에 다다르면서 준코가 왜 전과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셰어하우스를 열었는지, 프리랜서 기자가 왜 무죄 판정을 받은 살인자를 그토록 찾아 헤매면서 셰어하우스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오, 이런. 준코의 사연이야 혹시나 하면서 상상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기자의 잠입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반전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가는 소설의 결말이 뭉클하다.

 

날마다 똑같아 보이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도 어느 하나 같은 파도가 아니다.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달라진 것을 슬퍼해서도 안 된다. (396페이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다. 그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느냐 아니냐 하는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그 잘못의 다음이 어느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긍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범죄자라는 과거가 주홍글씨가 되지 않도록, 다시 사회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렇게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누구에게나, 누구라도 생각해볼 문제에 작가는 추리소설로 흥미를 더해가면서 우리가 직접 부딪혀야 할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의 중심에 끌어다 놓았다. 죄를 저지른 이들을 갱생한다고 만들어놓은 곳이 교도소나 법의 규율 안에 있는 곳이지만,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그 갱생의 성공을 감동적으로 이루어낸 곳이다. 현실에서 마주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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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가 말하는 아빠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40여 년을 아빠의 딸로 동거인으로 살아왔는데, 돌아가신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아빠에 대해 기억나는 건 한 가지다. 살아계시는 동안 가족들을 참 힘들게 했지. 아빠는 나에게 애틋한 기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많은 존재로 남았다. 함께 외식을 한 적도, 서로 대화를 한 적도 거의 없다. 다른 친구들 아빠들을 보면 딸과 참 돈독하게 잘도 지내던데, 나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던가 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마스다 미리 역시 아버지와 친근하게 지내지는 않은 듯하지만, 우리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며 보이는 부녀지간의 모습을 보인다. 읽는 동안, 서먹하고 다 이해하지 못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가족의 한 자리에 있던 아빠를 기억하는 그녀가 너무 부러웠다.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가까운 사람일 텐데 몹시 먼 사람 같기도 하다. 딸을 편하게 대하지 못할 때면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관심과 애정을 자꾸 원하는데 자꾸 헛짚는달까, 애정 표현이 때때로 이상해서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가실 때도 있다. (아빠라는 남자, 4페이지)

 

저자가 들려주는 아빠의 에피소드 중 한 부분인데, 아빠는 딸의 운동회나 학예회, 졸업식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걸 거북스러워했다. 그런 아버지인데도 딸이 다닌 고등학교와 단기대학, 취직한 회사 주변은 훤히 알았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드시 견학하러 갔단다. 내 딸이 다닐 학교와 일하는 곳의 환경이나 지리를 미리 파악하고 다니셨던 거다. 세상 어느 아빠가 이 정도의 애정을 뽐낼까 싶다. 딸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건 어색해서 피하면서도, 내 딸의 안위를 위해서는 몸소 움직여 안전을 살피는 아빠라니. 어떤 때 보면 굉장히 고집스럽고 독단적이면서도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라고,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집스러운 면이 빛을 발하는 듯하다. 굳이 나서서 내 딸이 다닐 그 길을 살펴보는 아빠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비록 아빠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고 모든 상황에서 100% 소통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거다. 무뚝뚝하고 투박하지만, 그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걸 보면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싶다. 아빠의 그런 사랑은 소소한 기억에서 더 애틋해진다.

 

한없이 품이 넓은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천 엔짜리 라면에 흥분하는 아빠를 기억하는 모습은 불편하기도 하다.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공통으로 생각하는 건, 다음에 가족이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저자의 아빠 역시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는 아빠와 외출하는 건 반기는 일이 아니었단다. 편하지 않았고, 아빠를 접대하는 시간으로 기억했다. 아빠의 기분을 맞춰주고 아빠가 화를 낼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였다고. 그러니 아빠가 기분 좋게 찾아낸 맛집을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선뜻 반길 수는 없었던 거지. 마음 편한 외출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결국 따라나선 시간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빠와 둘이서 라면을 먹는 상황이 겸연쩍어졌다고. ㅎㅎ 맛있다는 감탄사만 거듭하면서 그 불편한 시간을 견뎠나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딸보다 더 오랜 시간 아빠의 모습을 보며 살아왔을 엄마의 마음을 어땠을까 하고.

 

'엄마.'

혼자, 가만히 입 밖에 내어보면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엄마.'

이것은 마법 같은 단어다. 푸근하고 아늑해지는……. (엄마라는 여자, 4~5페이지)

 

둥지에서 떨어진 쇠약한 새끼 제비를 엄마가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수건으로 따듯하게 감싸고 모이를 먹였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다. 새끼 제비 한 마리 때문에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 나는 천천히 배웠던 게 아닐까. (147페이지)

 

엄마의 인생 역시 다른 엄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소소한 기쁨을 맛보며 살아왔던 엄마의 시간이었고, 모든 아끼며 검소하게 가정을 꾸려왔다. 저자가 들려주는 엄마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전단을 이면지로 사용하는 것도 친근했고, 백화점 행사 매장에서 쇼핑하는 것도 익숙했다. 가정주부로 살면서 어떤 시간을 건너왔을지 상상이 된다. 소박한 수다에 사람의 정을 나누고, 별거 아닌 일에 까르르 웃으면서 일상을 견디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견디는' 세월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온 시간은 적응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고, 딸들을 키우면서 함께한 시간은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게 했지 않았을까. 어쩌면 엄마 자신이 성장하는 시간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엄마가 아니라 친구처럼 딸과 지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이기에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해야 했을 거다. 저자가 고향에 갈 때마다 엄마의 살림에 못마땅한 것을 지적할 수 없는 것은, 자기만의 방식의 삶이 인정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엄마와 딸 사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행하는 엄마와 딸 이야기는 가장 뭉클하면서도 내가 가장 바라는 시간이었다. 뭐 이런 걸 다 챙기고 왔느냐는 핀잔에도 순박하게 웃으면서 그 필요성을 어필하는 엄마의 표정을 상상하며 읽었다. 아마 어디를 갔어도, 어떤 피곤함이 있어도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서 여행지의 택시 기사와 수다를 떨고, 눈에 보이는 곳곳에 감탄한다. 때로는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날리는 엄마이기도 하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듯 작은 동물들을 감싸고 돌보는 엄마를 보기도 한다. 엄마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기도 하지만, 원래 엄마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는 엄마에 관해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엄마의 별것 아닌 모습에 낯섦을 발견하는 것일까. 그래도 딸이라고, 아들보다는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안다고 자부했는데, 작은 에피소드 하나에서 끄덕일 때마다 내가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엄마와 아빠를 부모라고 부르며, 그들과 모든 생애를 같이 한다. 아빠를 이상형으로 꼽으면서 우상으로 여기며 자라기도 하고, 같은 여자로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가족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제각각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걸 보면, 혹시 엄마 아빠의 고정적인 성향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지만,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조금은 아는 그 감정을 흠뻑 느끼며 읽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아끼고 절약하는 게 습관이 되고, 마당 한쪽에 작은 꽃을 심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엄마의 표정을 떠올렸다. 엄마의 많은 부분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해주시는 반찬 중에 하나도 못하는 나를 보면 '엄마'의 모든 것은 당연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그대로 보여주는 게 엄마였는데, 그걸 저자가 들려주는 엄마 이야기에서 또 확인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감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아빠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만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특별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존재,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서로 얼굴 마주하며 애틋했던 적이 없던 아빠를 떠올리는 게 익숙하다. 저자가 아빠에게 느꼈던 불편함과는 조금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마음 자체가 달라서 저자나 다른 사람이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저자가 말하는 아빠를 다 모르지 않기에, 다 드러내고 살아갈 수 없는 성격을 좀 알기에 이해해보고 싶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 아빠라는 존재가 미움으로만 가득하지 않기를 바란다. 두 권 모두,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내 부모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자기 부모에 대해 솔직하게 쏟아내는 저자의 입담에 꽉 조인 뭔가를 풀어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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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라는 말에 깜빡 속을 뻔했다. 깨어있다면 감성을 누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 아니 아침으로 향해가는 새벽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도 좋고, 누군가 깨어있는 사람 또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있어도 좋다. 미뤄두었던 정리하지 못한 책을 꺼내놓고 이삿짐 싸듯 정리해도 괜찮겠지.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 기꺼이 깨어 있어도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내 의지라면 말이다. 이 책에서 마주하는 ‘새벽 세 시’는 내가 생각했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책임과 부담이 먼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여러 이유로 겪게 되는 우리 몸의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12페이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가 아프고 나이 들며 살아가고 죽어가는 몸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으로 몫으로, 가족의 일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병명은 다를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언젠가, 현재에, 앞으로의 어느 날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관심 두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고통과 질병을 마주하고, 그 정면에서 부딪히는 장면에 질문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신이 그 돌봄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가 같이 안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페이지)

 

돌봄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가족의 일이니까 마음을 다해 보살피면 된다고 여기던 일에 위기는 찾아온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 돌봄의 책임이 당연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인지 왜인지, 우리는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족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많다. 서로 애틋하고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에 의미를 둔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니 가족 같다는 말이 언제나 정이 넘치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돌봄의 위기가 그 ‘가족’에서 시작되고, ‘독박’에서 찾아온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양가감정을 슬쩍 꺼내놓아 본다. 상황이 그러하니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누군가 독박 돌봄을 해야 한다면, 돌봄의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환자를, 가족을 돌볼 수 없다. 그러다가 환자를 방치, 학대하는 일도 생긴다. 어느 순간 간병인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마음을 누가 제대로 읽어줄 수 있을까.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인생을 꾸려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우리는 다시 독립적이지 못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젊음이 독립이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늙음은 의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존의 상황은 두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는 말에 나오는 답은 늙고 병든 몸은 비용이고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육체가 버겁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돌봄을 피할 수도 없다. 치욕이라 여기는 돌봄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언제부터 돌봄이 이렇게 고역이 되었나. 이 책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의 돌봄 구조였다. 앞서 말한 독박 돌봄의 불균형이 돌봄을 긍정의 이미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돌봄은 대개 가족 내 돌봄으로 이루어지고, 돌봄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란다. 한국 사회가 만든 돌봄의 구조가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해온 현상이다. 그 안에서 돌봄은 고통과 희생이 되고, 때로는 학대와 방치에 가깝게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봄 경험은 여성의 주도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 돌봄 경험으로 기록한 책들이 더 많다. 웃기게도 이건 육아와 비슷한 흐름으로 보인다. 남성의 돌봄은 기록으로 남겨져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왜 누가 하면 당연하고 누가 하면 배워야 할 지식이 되는가? 이는 여성의 모성과 돌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몸의 아픔과 돌봄 문제에서 같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사회 문제이다.

 

저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은, 돌봄이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부담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시민적 돌봄’을 강조한다. 누구나 아프고 죽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비슷하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가 된다. 이는 각자가 겪는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책이 반영되어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절대 혼자 이룰 수 없는 집단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면서 ‘우리’가 되었을 때 받는 힘의 크기도 만만치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소통하며, 듣게 하는 이야기다.

 

부담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다른 시선이 생긴다. 나는 환자로 누워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호자로 누워 있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의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간병인을 구할 수 없던 그때 꼬박 일주일을 환자 옆에 있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빨리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다. 장기전이 될 텐데, 지금 이러면 보호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간병인이 구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병 비용 부담도 상당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간병인과 교대하면서 병상을 지켰지만, 책에서 언급한 ‘독박’이란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몸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쌓여가는 감정적 육체적 피로는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학대와 방치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많은 경험과 통계 자료들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저자들은 한때, 그리고 지금 아픈 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더 절실하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 몸이 언젠가 돌봄을 받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늙으며 살며 죽는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돌봄에 의존한다. 또한 의존하면서 의존하는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돌본다. 내용과 형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상호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의존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복합적으로 발화되고 청취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돌봄이 어떤 노동이고 어떤 윤리적 가치인가를 차이 속에서 보편적 합의로 구성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다. (21페이지)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우리는, 누구나 새벽 세 시의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 모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돌봄의 현실을 같이 마주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멀고 먼 일이라고 여길 텐가.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주침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떡 하고 나타나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돌봄의 고립된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 부담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될 간병에 힘이 되는 ‘토로’이자 ‘토론’의 이야기인 이 책이 조금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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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을 버리고 가면을 쓰는 거고. 그 가면을 벗기는 게우리 일이야. 거짓의 가면을 벗기면 진실한 얼굴이 나온다. 사람을 믿지 말고 원칙을 믿어라." (신데렐라 포장마차 2, 213페이지)

 

추리소설의 다양한 소재가 있겠지만, 음식이 추리에 끼어든다면 더 흥미진진해지는 건 왜일까.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음식은 우리의 일상에서 익숙한 것이고 그 익숙함 속에 녹아든 추리를 만나는 건 평범하면서도 흥미로운 사건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이상한 야간열차에 탄 것처럼, 이 소설은 밤에 한 시간 동안만 문을 여는 푸드 트럭이 장소가 된다. 그러니, 한 시간만 영업하는 그곳에서 무슨 음식이 등장하며 독자를 그들의 미스터리한 사건에 초대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1권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의 매력은 2권에서 좀 더 깊게 들어가는 듯하다. 이미 소개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장편 시리즈라고 한다. (사실 1권 먼저 읽어야 하는데, 신간이니까 이 책을 먼저 읽어보고 싶다는 간절함에...) 등장인물은 똑같고, 그들에게 던져진 사건이 조금 더 깊이를 더한다. 뭔가 더 파고들어야만 확인되는 결정적인 단서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유치장에 갇힌 프랑수아. 그는 한국에서 프랑스 요리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셰프이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단서를 쥔 인물이다. 그가 왜 유치장에 들어갔는지는 모른 채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치장 밖에서 프랑수아를 기다리는 민간조사원 김 건과 프랑스식당의 수셰프 소주희. 그리고 이들의 기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수아를 가둔 채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고 싶은 형사 신영규. 프랑수아는 김 건과 소주희에게 푸드 트럭에 있는 엽서 한 장으로 무언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갇힌 몸이라 어쩔 수 없으니, 또 과거는 모두 잊은 김 건이 현재의 기억력은 최고로 달리고 있으니 소주희와 콤비가 되어 조금씩 사건에 다가간다. 그 사이 김성기 전 장관이 방송 인터뷰 중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전 국민이 보고 있던 상태라 이 사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신영규 형사 팀은 이 사건이 단순 자살이 아님을 느끼고 유력한 용의자이자 김성기 전 장관의 비서 같은 강하라를 취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김성기 전 장관의 자살로 사건은 마무리되고 강하라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프랑수아에게 단서를 얻은 김 건과 소주희는 하나씩 단서를 추적하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건의 윤곽을 좁혀나간다.

 

형사, 민간조사원, 셰프, 추리 소설가 등 이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알겠는데, 정작 무슨 사건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사건도 모른 채로 단서만으로 퍼즐을 풀듯이 맞춰가는 뭔가가 오히려 더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러면서 제각각 개성이 뚜렷한 이들이 모이면 어떤 사건이라도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는 기대감이 생기는데, 그들이 추적하는 단서에는 음식이 중심이 된다. 이번 2권에서는 1권에 이어 프랑스 음식이 등장한다. 서대기를 주재료로 하는 '솔 베로니크'와 빛나는 칵테일이라는 뜻의 '글로우 칵테일'이다. 단편처럼 두 가지 음식을 소재로 사건을 푸는 이야기 두 편이 담겼다. 처음에는 별도의 이야기로 짧고 굵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메뉴가 등장하면서도 처음 사건과 연결이 되는 방식이다. '솔 베로니크'로 추적한 음식에 얽힌 사건을 가지고 가면서, 뒤이어 '글로우 칵테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따라간다. 물론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는 다르지만, 그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들은 같다. 첫 번째 사건에 이어 두 번째 사건을 만난 독자에게는 아리아 변호사라는 새로운 인물이 합류하면서 이들에게 사건 해결 어벤져스라는 이름도 붙일 수 있게 된다.

 

특히 2권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곳곳에서 등장인물들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아마 1권에서 시원하게 확인하지 못했던 그들의 배경이 2권에서 들려줌으로써 이들이 가진 상처와 인생을 사건 해결에 더 열정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마치 숨어 있는 비밀과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사건도 밝혀주고 등장인물들의 삶도 나아가게 하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연루된 비밀조직 '레메게톤'의 사건을 밝히려는 프랑수아, 기억을 잃으면서도 그 재능을 뽐내는 김 건, 어머니의 후계자보다 프랑스 음식에 끌린 소주희, 그 누구도 끼어들 틈이 없이 완벽한 사건 해결을 위해 달리는 신영규,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여 그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 아리아. 이들 앞에 닥칠 진짜 사건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그 기대감이 더 커지는 듯하다. 얽히고설키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이들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것처럼 하나씩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더 고조된다. 온갖 추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지게 한다.

 

프랑수아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낸 순간 사건은 끝난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사건은 묘하게 그 끝이 보이지 않게 붙잡고 있다. 게다가 추방당할 뻔한 프랑수아가 위기를 모면하면서 다시 신포(신데렐라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한국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프랑수아가 정면에서 마주할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지...

 

페이지가 너무 잘 넘어가면서도, 도대체 이 사건은 언제 시작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자꾸 투덜거렸다. 전 장관이 방송 도중 죽어버리지를 않나, 살인자로 보이는 여자가 타이밍 좋게 빠져나가지를 않나, 추레한 남자 한 명이 비행기에서 묘하게 분위기를 바꾸지를 않나, 가면 하나 쓰고 인생 바꾸려는 여자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를 않나. 무엇 하나 시선을 끌지 않는 게 없다.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방식이 추리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다른 분위기를 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더 탄탄하게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으면 하는 성장의 시간 같기도 하고, 언젠가 이 사건이 완벽하게 마무리될 때는 이들이 가진 상처들 모두 깨끗이 나아서 그들이 처리한 사건처럼 깔끔해질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마지막에 숨어서 보고 있던 '독 예술가'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리아 변호사의 합류가 소설을 어디로 끌고 갈지도 궁금하다. 무엇보다 '레메게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가장 궁금하겠지. 2권이 끝인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점점 열린 결말처럼 보여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3권이 이어진다는 갈증 나는 마침표로 끝난다. 아우~

 

빨리 1권 마무리 하고 3권 기다려야겠다. 작가님, 빨리 3권 내놔요. 롸잇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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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딱 여동생만큼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결혼생활의 이상향을 보여주었던 여동생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이 그런 생각을 할 거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시’자 붙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역시 시월드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며느리의 고통 영역이었던가 싶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미 영화에서 보여준 김진영과 시어머니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적응하면서 살아가기에도 힘든 게 결혼생활인데, 그 결혼생활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관계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그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 고부가 보여준 것이다. 처음에는 좀 충격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이런 대화(라고 쓰고 싸움이라고 읽는다)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누가 봐도 ‘감히’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라고 여길 테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런 충돌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시작점을 찾게 되더라.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직접 어른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과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자식과 오래 알아온 부모님은 자기 자식의 허물에 더 너그럽다. 남편의 중재는 그렇게 간단한 이치에서 필요한 것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173페이지)

 

행복해지자고 결혼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차곡차곡 만들어갈 하나의 가정을 상상하고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작으로 만들어져야 할 하나의 가정이 주변 사람들의 개입으로 전쟁터가 됐다. 이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모두 상처 입고 나뒹굴어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전쟁의 시작이 ‘간섭’과 ‘관심’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같을 말을 오랫동안 해왔다. ‘간섭’과 ‘관심’은 한 끗 차이라고, 그 한 끗의 차이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내가 건네는 게 관심이어도 상대가 받아들일 때 간섭이라고 느끼면 그건 간섭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이는 관심이 상대가 부담스럽고 과하다고 여기면 불편해진다. 그럼 나에게서 나간 관심은 간섭으로 모습을 바꾸어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게 시월드와 며느리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며느리 김진영은 남편 선호빈과 함께 두 사람이 주축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두 사람은 부모의 관심 안에 있었고, 부모는 그런 두 사람의 삶에 관여하고 계속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듯하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며느리의 태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거로 보인다. 한번 시작된 김치 건네기는 언제나 싸움과 분노의 발단이 되었고, 며느리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집안의 화장대 위치까지도 간섭하며 계속 말하는 것이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며느리 삶을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며느리로 살아가는 부조리함을 말하는 게 이 책이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앞서 만난 몇 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라떼’를 마시면서 강요하는 과거 여성의 삶이 충돌을 일으킨다. 나 때는 말이야... 시월드의 모든 말에 복종하고 며느리는 그 집안의 하녀처럼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언급하고 강요하면서 따라주지 않는 며느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갈등은 시작된다. 하지만 왜 그 시대가 기준이 되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며느리 모습은 잘못된 건데, 왜 그 모습이 기준이 되어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갈등의 발단이 되어 끝이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러니까. 서로가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게 맞다.

 

사람들은 영화 〈B급 며느리〉보고 거의 두 가지 평을 내놓는다. 저런 며느리 얻으면 큰일 나겠다, 아니면 저런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는 거다, 뭐 이런 비슷한 의미의 말들을 꺼낸다. 사실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이 책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니, 영화의 연장선에 있으니까. 하지만 왜 그 상황이 시작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그 시작을 찾고 싶었는데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 그냥 인간 김진영으로 살다가 선호빈의 아내 김진영이라는 호칭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은 낯설고 힘들어졌다. 그녀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머물기를 바라는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없애고자,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말들은 ‘B'급으로 취급받았다. 싸우고, 절연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분노의 찌꺼기는 남아있고.

 

막장드라마만 암 유발하는 건 아닌 듯하다. 며느리와 시월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고구마 한 박스 그냥 삼킨 것처럼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궁금하다. 우리 엄마와 나의 올케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을까 싶다. 엄마에게도 ‘시’자의 냄새가 풍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조금 다독거린다. 엄마에게도 딸이 다섯이나 있다고,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그나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괜히 친해지려고 애쓰고, 잘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레 질려 나가떨어진다고. 안부 전화 한번 안 한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전화하면 되는 것이고, 쓸데없이 전화 타령하지 말고 용건 있을 때 통화하면 되는 것이라고. 적당한 관심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 적당한 선을 넘는 간섭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니 조금만 무관심해지라고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의 시어머니를 보면서 느낀 건, 아들 며느리에게 관심을 넘어선 집착에 스스로 분노를 쌓아가는 것 같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당신이 돌봐주면서 길렀던 아들의 모습으로만 뿌리박혀 있으니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자기를 가두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무리하면 탈이 난다. 마음이 넘쳐도 탈이 난다.

 

과연 중간이 있었을까? 이제 보니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난 게 아닌 것 같다. 각자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성숙한 관계는 ‘나를 위해 네가 변해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라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서서히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젖어들듯이 말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238페이지)

 

읽을수록 짠하다. 그러면서도 시원하다. 며느리니까 참아야 하는 건 없다. 하고 싶은 말 담아두기만 할 이유도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새로 어우러진 가족이 된 일원으로 서로를 대하면 되는 일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투쟁하듯 이뤄낸 현재의 관계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아진 관계의 모습을 보니 이 투쟁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며느리 이미지가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리’라고 하면서 ‘의무’를 강요하지 말고, 서로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면서 같이 살아가야 할 일이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웹툰이나 후속작으로 그 후의 이야기까지 읽었지만, 아무리 많이 봐도 다시 보게 된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현실 속 이야기들이라 생생하고 또 생생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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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요? 우앗... 저는 보기도 전부터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네요.

모든 시어머니들이 ‘나는 달라, 나는 좋은 시어머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 포함해서요. 저는 그럴 때마다 ‘엄마, 그래봤자 엄마는 시어머니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단씨 님이 정말 정확한 지적을 하신 것 같아요.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갈등을 일으켜야만 하는건지, 우리는 그 시작을 찾아서 부숴버려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구단씨 2020-05-13 14:04   좋아요 0 | URL
20분짜리 드라마로 만들어진답니다.
방송하게 될지 웹드라마로 보여줄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옆에 사이다 캔맥주 한잔 가져다 놓고 보고 싶은 드라마여서 기다릴 겁니다요. ^^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남자 사람 포함해서요. 남자들이 하나같이 얘기해요.
˝우리 엄마는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네 엄마가 더 그러더라, 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실제로 저희 엄마도 아들 며느리 있는데요. 똑같이 말씀하세요. ˝나는 안 그래, 야.˝
그래서 제가 옆에서 자꾸 말씀드리죠.
엄마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딸 가진 엄마니까 며느리 마음 많이 헤아려주시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