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나무를 하던 가난한 나무꾼은 풀숲에서 뛰쳐나온 사슴이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얼른 나뭇가지 더미 속에 숨겨주었다. 사냥꾼이 와서 사슴의 행방을 물었지만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무꾼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슴은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보답하겠다면서 나무꾼에게 소원을 물었다. 나무꾼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사슴에게 평소 바라던 소원을 말했다. "고운 색시를 얻어 장가를 갔으면 좋겠어!" 그에 사슴은 오늘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왔을 것이니, 나무꾼에게 그중 한 선녀의 옷을 훔치라고 했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없으니 그 선녀를 색시 삼으라고, 아이를 셋 낳을 때까지는 절대 선녀 옷을 내어주면 안 된다는 경고도 함께. 나무꾼은 사슴의 말대로 선녀들이 목욕한다는 폭포로 향했고, 거기서 선녀 옷을 한 벌 훔쳤다. 이제 선녀 옷의 주인만 찾으면 나무꾼은 예쁜 색시도 얻고 재밌게 살겠지...

 

...라고 우리가 알던 동화는 잘못됐다. 선녀들의 목욕을 훔쳐보고 옷까지 훔친 나무꾼은 새신랑이 아니라 죄인이 된 거다. 선녀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잃어버린 날개옷의 주인인 서령선녀는 나무꾼을 붙잡아서 옥반지를 낀 주먹으로 나무꾼의 얼굴을 내리쳤다. 훔친 옷을 돌려달라고 하는데도 나무꾼은 버텼다. "내가 훔쳤다는 증거가 있어?!" 이놈이 강펀치 한 방을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먼. 선녀와 나무꾼은 누가 빨리 나무를 베는지 내기를 하기로 한다. 나무꾼은 설마 선녀가 나보다 나무를 잘 베겠나 싶은 마음에 기세등등했지만, 선녀의 나무 베기 솜씨가 장난 아니었다는 건 안 비밀. 선녀는 나무꾼을 이기고 선녀 옷을 되찾음과 동시에, 이 불량한 계획을 꾸민 나무꾼과 사슴을 가만두지 않았다.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두 놈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낱낱이 털어놓게 하고, 나무꾼에게 천 일간 투명 옷을 입을 것으로 벌을 주었다. 보이지 않는 옷이라, 남들 눈에는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는 거야. 깔깔깔~ 그리고 사슴에게는 나무꾼과 작당한 죄로 천 일간 입이 묶인 채로 생활할 것을 명했다. 암만, 이래야지. 이렇게 벌을 주어야 당연한 것을 우리가 그동안 만난 「선녀와 나무꾼」 동화에서는 하늘로 올라간 선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마무리하는 내용이었지, 아마?

 

 

구오 작가의 『선녀는 참지 않았다』는 이미 제목에서부터 이 책이 기존의 동화와 얼마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이미 아는 유명한 전래동화 10편을 가져와서,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몰라서도 몰랐지만, 알고서도 말하지 못하고 감당해내야 했던 여자의 모습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본다. 나무꾼에게 선녀 옷을 훔치라고 알려준 사슴은 은혜를 갚은 게 아니라 계략을 꾸민 거고, 선녀 옷을 훔쳐서 아내로 맞은 나무꾼은 착하게 살아서 복을 받은 게 아니라 범죄자일 뿐이다. 비슷한 이야기로는 「서동과 선화공주」가 있다. 선화공주에 관한 헛소문을 퍼트려 선화공주가 궁에서 쫓겨나게 한 서동은 허위사실 유포로 처벌받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쫓겨난 선화공주가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할 때 ‘짠’하고 나타나서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가 아내로 삼는다는 원래의 이야기를 확 뒤집었다. 선화공주는 아버지에게 따진다. 왜 자식의 말을 믿지 않고 저잣거리에 떠도는 헛소문을 믿는 것이냐고. 선화공주는 범인 탐색에 나서고, 마를 팔던 서동을 붙잡는다. 그런데 서동의 핑계가 참 어이가 없다. "저는 그저 공주마마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흠모하는 마음에... 흑흑. 그저 실수했을 뿐이옵니다." 뭣이라? 실수? 그 헛소문에 한 사람 인생이 왔다 갔다 하는데 실수우우우우? 선화공주는 서동의 이마에 그의 죄를 잊지 못하게 하는 주홍 글씨를 새긴다. 사람들은 그의 만행을 알게 되고 선화공주를 둘러싼 오해는 풀린다. 세 자매의 지혜로 범인을 찾아내고, 신라의 세 자매는 현명하게 나라를 이끄는 존재가 된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전래동화의 그런 전개가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변해야 한다. 누군가에 기대어 인생을 얹어가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새로운 시각은 당연히 필요하고, 그 시각에 맞는 동화의 재해석도 이어져야 한다. 아이가 글자를 알고 읽어가기 시작하는 동화 한 편, 두 편. 점점 더 많은 이야기에 빠져 지내게 될 텐데, 처음 잘못 접한 이야기가 그 시작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왕자가 와서 키스해줄 때까지 잠에 빠져 있고, 날개옷 하나 빼앗겼다고 그 남자와 결혼을 하고, 헛소문 하나에 계획에 없던 쫓겨남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구오(俱悟)’는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함께 깨닫다’라는 이름 아래 2015년부터 함께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토론 모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작가의 필명쯤으로 생각했는데,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생각과 쓰기가 함께한 글이라고 하니 더 의미 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10편의 동화는 앞서 언급된 선녀와 나무꾼, 선화공주와 서동, 처용, 우렁각시, 장화홍련전, 혹부리 영감, 콩쥐팥쥐전, 박씨전, 반쪽이, 바리데기다. 각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게 각색되었는데,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흥미롭게 깨트려놓는다.

 

「우렁각시」에서는 씩씩하게 농사일을 하는 처녀 혜석이 주인공이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집안일 해주고 빨래 해주고 맛있는 식사도 챙겨줄 총각을 만나고 싶은 거였다. 그래서 일하면서 습관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나랑 살면서, 맛있는 밥과 반찬을 해줄 그런 총각 어디 없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저기 멀리 바닷속에 이런 청년이 딱 준비되어 있었다. 용왕의 아들인 우렁이 총각은 매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음식을 만드는 게 너무 좋았는데, 아버지인 용왕은 그런 아들을 항상 혼냈어. “지금 사내가 무얼 하는 것이냐!” 이미 익숙해진 규범은 우렁이 총각이 집안일을 하고 음식을 만드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렁이 총각은 저기 땅 위에서 일을 하는 처녀가 혼자 중얼거리는 걸 들었던 거다. 자기에게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농사를 짓는 혜석에게 다가간 거지.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알콩달콩 자기 스타일에 맞는 일을 해가면서 행복하게 살았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런 둘의 생활을 좋게 보지 않았다. 남사스럽다는 둥, 혜석이 요물이라는 둥, 우렁이 총각이 미련하고 둔해서 혜석에게 홀렸다는 둥. 둘은 마을 사람들의 편견을 깨주기 위해 초대를 한다. 우렁이 총각은 맛있게 음식을 하고, 그 음식 속에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어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게끔 하는 묘약’을 넣는다. 그날 이후로 우렁이 총각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변했다. 여자들은 집안에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남자들은 농사 외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며 미래를 생각했다.

 

 

나쁜 혹부리 영감에게는 혹을 하나 더 붙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할 때마다 아프게 만들었고, 장화홍련의 새엄마에게는 세상 모든 새엄마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언젠가부터 새엄마는 계모라고 불리면서, 무조건 아이를 학대하고 괴롭히는 못된 엄마로 만들었을까? 계모는 모두 나쁘고 못됐다는 고정관념부터 새로 써야 한다. 장화홍련의 새엄마는 오히려 위기에 빠진 장화와 홍련을 구해주는 현명한 여자로 재등장했다. 홍련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을 수령이 되고, 누명을 쓴 장화의 억울함을 풀어준다. 장화와 홍련에게 다가가 술수를 부리고 약한 여인으로 대하면서 수작을 걸어보려고 했던 이들을 벌준다. 콩쥐팥쥐의 성별을 여자에서 남자로 바꿔놓는다. 또 박씨전에서는 결말을 바꾸어 허물을 벗고 외모가 달라지는 일을 만들지 않는다. 박색이었던 박 씨가 나중에 허물을 벗는다고 하여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될 거로 생각하기 쉬운데, 박 씨의 어질고 현명한 모습이 외모가 달라졌다고 하여 인정받는 게 좀 억울하지 않은가? 외모가 달라도 내면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박 씨는 집안사람들의 구박에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장착한 한 명의 인간이었는데, 그 인간다움을 존중받지 못하다가 외모의 변화로 인정받게 된다는 설정 자체가 외모지상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 재해석된 박 씨는 허물을 벗었어도 외모가 달라지지 않았고, 덕은 생김새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전쟁으로 붙잡혀가서 되돌아온 여인들은 사람들이 욕할 때, 그녀들은 그저 ‘환향 여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 여인들과 함께 상처 입고 아픈 기억을 지우는 데 애쓰면서 악몽을 벗어내 새로운 삶을 꾸려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데기는 어느 노부부에게 거두어져 자랐고, 상인으로 성공한 후에는 학당을 세워 갈 곳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불러 모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들(특히 여자아이들)을 거둬서 무엇 하느냐고 말했지만, 바리데기는 상관하지 않았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그녀가 가슴에 한이 된 일이기도 했을 테지. 처음 바리데기는 부모에게 왜 버려졌는지 몰랐다. 그저 형편이 좀 어려웠나보다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도성에서 신하가 찾아와 바리데기를 붙잡았을 때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다. 딸이라고 필요 없으니 버려놓더니, 이제는 왕과 왕비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그 병을 고칠 사람이 바리데기밖에 없다면서 찾아온 게 화가 났다. 저승의 서천서역국에서 나는 약수를 먹어야만 병이 낫는다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한 바리데기뿐이라나 뭐라나. 딸이라서 버리고, 딸이라서 왕위를 이을 수 없고, 그래서 내쳐지는 운명. 그런데 인제 와서 부모의 병을 고치러 저승의 서천서역국에 다녀오라고? 안 한다. 못 한다.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공짜로는 못하겠다. 뭔가 내놓아라. 어찌어찌 서천서역국까지 다녀온 바리데기는 스스로 왕이 되고, 성차별 없이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든다. 여인이어서 할 수 없고 거부당하는 세상은 이제 상대하지 않으련다.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고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까? 원님이 꽃신 한 짝을 들고 콩쥐를 찾아가는 일, 서동이 퍼트린 헛소문에 진상을 밝히지 못했던 일, 나무꾼의 절도에 벌하려고 하지 않은 일, 아내가 좋아하는 농사를 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집안일을 할 수도 있는 거, 반쪽이에게 업혀 가는 게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만 했던 것 등등. 아니라고, 잘못된 거로 생각하면서도 꺼내놓지 못한 마음속 말들이 왜 가슴 속에서 머물기만 해야 했을까. 학생들의 손끝에서 재탄생한 이 페미니즘 전래동화는 말 그대로, 살짝 뒤집으니 이야기의 판이 뒤집어졌다. 여럿이 모여 함께 읽고 토의하고 여성적 시각이 담긴 이야기로 재구성하다 보니, 뭔가 더 적극적인 게 되었다. 오랜 세월 이어져 왔기에 당연하게 여긴 차별과 편견이, 더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의식을 변화하는 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강하게 다가온다. 익숙하게 만나온 전래동화에서 뿌리박힌 가부장적 사회와 그 사회에서 재생산되는 성차별을 없애는데 이 책이 굉장한 힘이 될 것 같다.

 

그냥 재밌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재미있고 통쾌해서 시원하다.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바라봤던 많은 것이 더는 익숙하지 않도록, 그 모든 것을 더 깊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전래동화를 떠올릴 때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면, 왜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흘러가야만 했는지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면, 이야기의 흐름과 다른 생각이 마구 비집고 나온 적이 있었다면, 더 의미 있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불합리하고 차별에 물든 역사가 동화 속에서 더는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기 좋은 글이다. 이렇게 바뀐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아이는 분명,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것과 다른 의식을 심을 것이다. 불합리하고 억울한 여성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도록,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집안일과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뭔가를 돌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조차 두려움을 가졌던 적이 있다. 어떻게 키워야 하나, 잘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엄마가 돌보는 작은 화분 몇 개에서 꽃이 피는 걸 지켜보면서도 내가 돌볼 몫으로 화분을 만든 적은 없다. 애완동물을 곁에 두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이 녀석을 내가 잘 보듬어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니 내 곁에서 외로워하거나 홀대받다가 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그랬다. 그러니 내게 애완동물은 멀리서 거리를 두고 보는 대상이다. 누군가의 강아지 고양이를 그저 한 발짝 떨어져서 보는 정도.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과연 누가 누구를 돌보는 게 인간과 애완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전부였던가 싶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미유는 작은 상자 안에 있던 고양이 초비를 거둔다. 버림받은 고양이였지만 미유에게 속하게 된 초비. 오랫동안 유지한 친구와의 우정과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남자친구 사이에서 아픔을 겪는다. 그림을 그리는 레이나의 집에 드나들던 고양이 미미는 떠돌면서도 레이나의 곁을 찾아든다. 시니컬한 레이나 곁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데 고양이 미미는 길고양이와 집고양이의 중간쯤 행동으로 레이나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생활한다. 1년 동안 집안에서 나가지 않던 아오이에게 고양이 쿠키가 찾아온다. 아오이의 엄마가 분양받은 고양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고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 아오이에게 대화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된다. 노부인 시노의 곁에 까칠하고 힘센 고양이 구로가 애완견 존의 자리를 차지한다. 개인 존과 친구 아닌 친구 사이였던 구로는 어느 날 사라진 존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시노 부인의 활력소가 된다.

 

화자 '나'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세상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점점 드러나는 '나'는 고양이의 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묘했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의 모습, 고양이가 하는 말들, 고양이가 겪는 감정의 변화들까지.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고양이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고양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들의 생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화자 '나'는 인간의 시선이다. 연작소설처럼 이어지는 네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간은 모두 '그녀', 여자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세상 만만하게 살아가도 좋으련만, 각자의 상처와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다. 신뢰가 없는 연애 아닌 연애를 했다가 친구도 애인도 잃은 여자, 자기 재능을 너무 믿고 있다가 뒤늦게 좌절하는 여자, 우정에 실패하고 1년 동안 집안에서 파묻힌 여자, 결혼생활에 지친 시집살이에 이제 혼자가 됐지만 외로운 여자.

 

"누가, 누가 좀."

나는 그녀가 소중한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잃었음을 알았다.

"누가 좀 나를 구해줘."

그녀는 언제까지고 울었다.

우리를 실은 이 세상이 끝없는 암흑 속에서 계속 돈다.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46페이지)

 

처음 생각할 때는 이 여자들이 고양이를 집안에 들이면서 떠돌이 고양이를 거두는 것이 아닐까 했다. 길에서 흔히 보는 고양이들의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먹이를 주고 돌봐주는 일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다른 면이 조금씩 보이면서 누가 누구를 돌보는지 알 수 없게 됐다. 삶의 여러 가지 것들로 지키고 힘든 인간에게, 고양이는 돌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옆에서 공생하는 대상이었던 거다. 고양이의 언어로 하는 말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서로 이야기가 통한다.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된다. 이게 가능할까? 등장인물들과 네 마리의 고양이, 한 마리의 개가 차근차근 풀어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알겠다. 이들이 하고 싶은 말은 굳이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것을. 표정과 마음으로 전달하는 말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기적(?)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인간이어도 동물이어도 상관없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강하기만 한 인간은 없지만 계속 약하기만 한 인간도 없으니까."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99페이지)

 

네 마리의 고양이가 각자 다른 것 같지만, 고양이들은 또 고양이들과 함께하는 주인들의 사연은 조금씩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슬픔이나 상황이 낯설지 않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가 이들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진학 문제, 남녀 문제, 우정 문제, 결혼생활의 문제 등 여자들에게 공통으로 다가오는 고민이 그대로 전해진다.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이야기 앞에서는 어른 사람 마음을 흉내 내면서 읽게 되고, 내가 아직 감당하지 못한 문제 앞에서는 그들의 고충을 짐작하면서 읽게 된다. 사는 내내 우리가 털어내지 못할 삶의 힘겨움을 고양이와 여자의 일상으로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다.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적 있는 이야기라 그런지, 영화의 포스터나 스틸컷으로 장면들을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흥미로운 소재에 평범한 일상이 어우러져 판타지와 드라마 두 가지 장르를 만나는 기분이다. 특히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동물들의 세상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그냥 길고양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길고양이들에게도 나름 관할 구역(?)이 있고 그렇게 정해진 구역에 발을 디디는 것은 남의 구역을 침범하는 게 된다. 바로 전쟁의 시작인 거다. 고양이들의 난투극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본 적이 없어서 다 알 수는 없으나, 인간 세상의 구역 싸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역의 터주대감같이 그 구역의 오래된 노견 존의 지혜가 고양이들끼리의, 고양이와 인간의 교감을 이뤄내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달리고 달리다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세상이란 내 생각과 다르다는 걸.

세상의 크기는 내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무서워.

아오이도 분명 이걸 두려워했던 거야.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141페이지)

 

단순히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면서 교감하고 성장하는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괜히 더 착해지고 싶은, 누군가를 더 이해하고 싶은, 내 인생을 조금 더 아껴주고 싶게 하는 이야기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끈끈한 뭔가를 엿본 기분이다. 이제 길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들이 다시 보일 것 같다. 그들의 사연과 사정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작가가 그랬던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게 자기 이야기를 한번 써보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이 한 마디가 계속 생각나는 건, 다른 작품들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확인하게 되는 감정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 몇 편을 접하면서,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수식어를 그대로 흡수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가 왜 자신의 이야기를, 경험한 그대로 사실대로 적어야만 했는지 읽으면 저절로 느끼게 된다. 이건 그녀의 이야기이고, 그녀가 느낀 그대로 적어내려 애쓴 흔적이며, 그녀 자신이 걸어온 시간이면서, 그녀가 작가로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말이다.

 

1952년의 어느 여름, 그녀의 열두 살 일요일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어머니의 목을 조르고 때렸으며, 심지어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치면서 낫을 들었다. 공포의 순간, 어머니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날의 사건은 그대로 끝났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탁에 앉는 부모. 흔한 부부싸움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렇게 행동했다.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날의 일은 열두 살의 아니 에르노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다.

 

나는 사립학교,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부끄러움 속에 편입된 것이다.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다. (『부끄러움』 117페이지)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에서 인간적이지 못한 인간의 행동을 떠올렸다. 흔히 어떤 행동이나 말투를 보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혐오의 눈길을 보내는 순간 말이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할 때는 대개 그런 순간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부끄러운 순간은 충격이었다. 공감하고 싶지 않지만, 삶의 곳곳에서 묻어났던 어떤 감정이 생각났다. 부유하지 못한 우리가 세상에 부딪히면서 느끼는 순간순간들 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소리치며 싸우던 그때. 아마도 그녀 가족이 중산층도 되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계층이라는 자각에서 그녀의 부끄러움은 시작된 것 같다. 싸우다가 자기 아내를 죽이겠다고 낫을 손에 휘두르는 남자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트라우마가 된 건 아니었을까. 특히 그녀가 공립학교가 아닌 기독교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생활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던 순간 그 부끄러움은 본격적으로 다가왔다. 중산층 이상이 다니는 기독교 사립학교는 그녀와 다른 아이들 사이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느끼게 했다. 결국, 가난하고 천박한 행동을 하는 부모가 부끄럽고, 그런 부모가 자기 존재의 뿌리라는 게 그녀를 혼란스럽게 한 거다. 사립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소녀스럽고 괜찮은 외출복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 우아하고 예쁘게 자랄 거라는 긍정적인 말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게, 사람들의 시선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아름다우며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하는 대상으로 비치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고 부끄러움이 되었다.

 

아버지와 둘이 떠난 여행지에서도 그녀의 부끄러움은 계속됐다. 여유롭게 여행 준비를 하지 못해서 여행지에서 부족함에 시달렸다. 때가 낀 운동화를 신고 계속 다녔고, 넉넉한 돈을 준비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 가서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했고, 우아하게 식사할 줄 몰랐다. 비슷한 또래의 여행객에게서 매 순간 다른 점을 볼 때마다 그녀는 좌절했다. 자기는 그들의 세계에 속하지 못한 배경을 가졌고, 또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이어갈지 모른다는 불안 같은 게 그녀에게 내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근원이 시작된 그곳에서부터 이어져온 부끄러움이 사라질 곳이 있던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궁핍한 그들의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그리고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또한 6월 일요일의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는 인식하지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끄러움』 137페이지)

 

열두 살의 그녀가 체험한 1952년은,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리 부유한 상황은 아니지 않았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세계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는 계속되었을 것이고, 전쟁 후에 안정적인 나라가 얼마나 되었으려고. 하지만 그런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부와 가난은 뚜렷하게 구분되기 마련이니, 그녀 가정의 가난이 쉽게 변할 환경도 아니었던 거다.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일 테니, 그리 아파하거나 차별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한번 눈에 들어온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경험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말하지 못할 그 체험의 감정을 그녀는 오랜 세월 담아두고 살았다. 부끄러움은 그녀 삶의 방식이 되었으며 그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년이 된 그녀의 어느 날, 그녀는 1952년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낸다. 오랜 세월 그녀를 부끄럽게 했던, 그녀의 삶을 지배했던 그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의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자기의 기억을 꺼내면서도 객관적인 그녀의 감정은 때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이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인간이기에 가능하고 허용될 것 같은 그 주관적인 느낌을 그녀는 철저히 배제하며 적었다. 그 순간의 상황이나 현상에 감정을 넣지 않는다. 오랜 전의 기억을 꺼내면서 추억 운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와서 이 기억을 꺼내놓아야만 했던 그녀의 간절함이 느껴져서다. 이런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기어코 이걸 써 내려가지 않으면, 이 순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위기를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자기 존재의 불편함을 이제는 정면으로 마주하며 넘어서야 할 때라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 한 번쯤은 찾아올 것 같다. 자기 자신을 옥죄며 단단히 묶어놓고, 어떤 기억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살아왔기에 완전하지 못했던 순간을 다시 마주할 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불안하게 세상으로 보게 했던 기억에, 지금 그 기억과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결국은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에 몸부림칠 때.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만 같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는 말과 기억이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게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의 글이 더 충격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다들 비슷하게 경험하는 어떤 감정과 충격들일 텐데, 그 비슷한 경험과 영향에서도 비슷하지 않게 드러내는 방식들. 누구는 해냈고 누구는 해내지 못한 채로 간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차이를, 그녀는 이렇게 통과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뿌리를 수치스러워했던 기억에서 벗어났다. '나는 기어코 이렇게 쓰고 말았어.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거든. 이제 벗어날 수 있어서 홀가분해. 이렇게 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해냈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당신, You win!

 

전작들에서와 다르지 않은 그녀의 쓰기 방식이 가슴에 파고든다. 『단순한 열정』에서 사랑의 절절함을 목 놓아 우는 것처럼 기록해내더니,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서술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기억을 들추며 비루하며 수치스러웠던 솔직한 기억을 폭발시키는 듯하다. 그녀다운 글쓰기 방식이 혹시 언제 변하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방식을 끝까지 고수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일기처럼, 기록처럼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느낌을 얻고 싶어서다. 아무리 솔직해도, 아무리 객관적으로 쓴다고 해도, 이렇게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놓고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아직은 부족한 우리들일 테니까 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번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는 게, 아직은 그녀의 작품을 가까이하고 싶은 이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05-30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과 얼마전에 이 책이 나온 걸 알게 되었는데 구단씨 님은 벌써 읽고 이렇게 근사한 리뷰를 쓰셨네요. 역시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 좋아요.
:)

구단씨 2019-05-30 14:29   좋아요 0 | URL
<세월>과 <사진의 용도>는 읽는 중이라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 <단순한 열정>은 좋아하는 글이거든요.
이번 <부끄러움> 역시 짧은 문장 읽으면서 숨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더라고요.
이제까지 읽은 그녀의 글 중 가장 있는 그대로, 솔직한 문장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레삭매냐 2019-05-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예전에 나온 책의 재개정판
이더라구요.

구판으로 도서관에서 한 번 봐야겠네요.

구단씨 2019-05-30 15:51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저는 기존 출간작을 몰랐어요.
번역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의 글을 만나는 데는 구판 신판 구분할 이유는 없을 듯합니다. ^^
 

 

플로베르는 정열적이고 허물없는 이집트인들에게 큰 인상을 받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플로베르의 이집트 여행 체험은 그의 작품에도 반영됐다. 플로베르는 이집트에 다녀와서 7년 뒤에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글로벌 베스트셀러가 됐다. 거기엔 자유롭게 욕정을 즐기고 싶어 하는 엠마 보바리Emma Bovary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에로틱 세계사 220페이지)

 

대문호 플로베르가 이집트로 섹스 관광을 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 누구?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의 작품 몇 편을 접한 게 전부이지만, 적어도 작품으로 만난 그의 이미지는 섹스 관광과 전혀 연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집트로 섹스 관광을 다녀온 후에 마담 보바리를 탄생시켰다니, 안 믿을 수도 없지 않은가?!

 

세계사와 에로틱을 연결하여 소개하는 게 이 책이 처음은 아닐 테다. 세계사 속에 숨어있는, 은밀한 그들만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건 나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섹스 이야기는 끝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화두가 된다. 현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마 오래전부터 인간 사회의 섹스는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면 인류의 역사와 계속되었을 것이다. 종종 세계사에 녹아든 섹스스캔들 비슷한 이야기는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이 책이 흥미로운 건, 부제에서 말하는 것처럼 '1만 년 성의 역사'라는 부분이다. 인류 역사에서 시작된 성 이야기와 후에 발견된 역사의 흔적에서 또 확인하는 성 이야기가 재밌게 들려온다. 앞서 말한 플로베르의 경우만 봐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니, 그 이상의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올지 궁금할 수밖에. 응? ^^

 

수메르인들은 분명 관음증 증세가 심했다. 그들은 남자가 아내의 음부를 오랫동안 바라보면 부자가 되거나 행운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광란의 사도마조히즘 파티를 열었다. (에로틱 세계사 4페이지)

 

기원전 600년 전의 일이다. 참 기발한 믿음이지 않은가? 여성의 음부를 오랫동안 바라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늘날 심각한 범죄로 인식될 만큼 여성의 신체를 몰래 엿보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게 범죄가 아니라 열려있는 성문화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성문화가 변하게 된 것은 신석기 혁명부터라고 한다. 떠도는 생활에서 정착생활로 변한 환경, 개인이 가축 키울 땅과 가옥을 소유하게 되면서 그 소유의 주체가 자식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시 됐을 때. 그럼 어떤 자식에게 자기 소유물을 넘겨주어야 하는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적자를 정확히 가려내는 일이 시작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과 아내라는 분명한 관계인 일부일처제가 선호되어야 했다. 그때부터 섹스는 철저한 감시의 대상이 되면서, 소유의 개념 안에 들어간다. 잠자리의 규칙이 생긴다.

 

인간의 갈망은 끝이 없었던 것일까. 이렇게 정한 잠자리 규칙의 제한은 인간의 섹스 욕구를 제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극하기에 이른다. 섹스 테크닉을 전수하는 책이 나오고, 피임약을 만들고, 매음굴을 만들었다. 섹스를 찬양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이 생겼다. 언제나 양면의 문제를 가지고 존재해온 것이 섹스다. 애널 섹스를 치료법으로 추천한 의사가 있는가 하면, 중세 수도사들은 딜도를 사용하기도 했다. 성문화는 때로는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게, 때로는 그 개방성에 반기를 들 정도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성문화가 대립하기도 했고, 종교와 도덕적으로 규범적인 제한을 받은 적도 있다. 이 책은 지난 오랜 성문화를 다루면서 인류에게 벌어진 섹스의 감각과 역사를 들려준다. 호모사피엔스는 1만 년 전부터 섹스에 대해 광적으로 관심을 가져왔고, 동굴에 포르노그래피를 그리기도 했으며, 파피루스에 음담패설을 썼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하룻밤에 최소 네 번 성적 만족감을 느끼는 게 여성들의 권리였다고 한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입으로 여성을 만족시켰다.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특이하게 들리면서 많이 놀랐던 게 몇 가지 있는데, 켈트족은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이 몸의 털을 모조리 깎았다고 한다. 속옷 없이 바지만 입고 돌아다녔고, 남성들 간의 동성애가 만연이었다. 상당한 미모의 아내가 옆에 있어도 아내와 가까이하지 않으면서 동성과 불같은 연애에 쉽게 휩싸인다. 다른 민족의 사람들에게 야만스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들의 행동은 쉽게 이해를 받을 수 없을 정도였나 보다. 그리고 놀라운 건 지금도 존재하는 섹스 파트너 공동체인 모수오족이다. 이들은 결혼이란 개념이 없다. '아즈부'라는 섹스 파트너만 존재한다. 모수오족 여인은 임신해도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다. 아이의 육아는 여자의 어머니와 자매들, 오빠들이 책임진다고 한다. 모수오족의 이런 모습을 본 마르크 폴로는 너무 당황했고, 그것을 미신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모수오족의 낙원 같은 사회 공동체는 경쟁이나 질투, 분노, 탐욕, 폭력이 없는 세상이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와는 너무 다른 그들에게는 바로 그곳이 낙원이었으리라. 아니, 낙원인 줄 모르고 처음부터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 환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독일 항문성교의 역사는 30년 전쟁 기간 동안 독일에서 쓰이던 처벌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죄인들은 교도관의 항문을 혀와 입으로 핥아야 했다. 이는 죄수들의 굴욕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이렇게 독일 전쟁사에 등장하는 항문 성교는 독일의 고급문화와 일상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괴테도 '엉덩이를 핥을 수 있다'는 말을 사용했고, 모차르트는 <내 엉덩이를 핥아줘>라는 제목의 캐논을 작곡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시작된 항문 집착은 욕에서도 사용되는 말이 나왔고, 항문 성교 행위가 있고, 애닐링구스라는 성교 행위도 있다. 고상했던 문화도시 폼페이에서는 이천년 전에 그려진 그룹 섹스 모자이크가 발견됐고,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비아그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페니스를 강조한 의상으로 패션을 선도하고 있었다. 플레이보이 카사노사가 페미니스트였다는 기가 막힌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노력이 좀 필요했다.

 

그리고 놀랐던 것 또 하나는 바로 콘돔이다. 타이어가 콘돔에서 탄생했단다. 타이어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가 아내 몰래 부엌에서 실험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게 콘돔이다. 고무의 적정 비율을 맞추지 못해 매번 실패하던 실험에서 콘돔을 만들게 되었단다. 영국의 산부인과 의사는 히스테리 치료 목적으로 바이브레이터를 발명했다. 의도적으로 섹스에 관련된 것을 찾다가 개발할 수도 있는 게 많겠지만, 이렇게 우연으로 만들어진 개발과 발명의 현장에서 이뤄낸 성과가 섹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어느 길로 가더라도 결국엔 섹스에 이용되거나 섹스와 관련된 발견으로 그 목적지를 찍는다.

 

1만 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곳곳에 숨겨진 성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 순서로 들려준다. 섹스가 인류의 보편적인 주제라는데 부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분위기 탓인지 체면 때문인지, 근엄한 인류 역사 속에서 섹스는 잘 드러내지 못하는 주제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성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성 이야기를 재밌게 듣게 한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 흥미롭게 읽게 될 줄 몰랐다. 그저 역사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곁가지로 붙여놓은 자질구레한 성 이야기 몇 개 담아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으니까. 섹스를 주제로 본 1만 년 인류 연대기가 섹스를 책상 위에 꺼내놓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숨겨야만 하는, 억압된 주제가 아니라는 거다. 수세기 동안의 우리 조상의 성문화를 다루면서, 인류와 함께해온 섹스가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지 다양한 사례로 들을 수 있다.

 

덧붙이자면, 책의 뒷부분에 저자가 한국 독자에게 던진 발칙한 제안이 있다. 저자는 한국의 성문화가 많이 궁금한가 보다. 독일에서도 유명하다던 제주도에 있는 러브랜드 테마파크와 한국의 비디오방 문화가 듣고 싶단다. 게다가 한국 성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있는 사건들을 알려달라면서 이메일 주소까지 공개한다. ^^ 역시, 범상치 않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노보노 시리즈를 두 편 정도 읽은 게 전부다. 그 정도만으로도 이 만화의 분위기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꾸준히 보고 싶은 만화이기도 하다. 특이 이번 베스트 컬렉션은 '베스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녀석들의 모험 같은 일상이 재밌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얘네들 원래 이랬나 싶게 각 캐릭터를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한꺼번에 모아놓고 보니, 그 특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각자 해결하는 자세가 다르다. 각자의 개성이 더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매력이 달라서 다가오는 색이 다르기 때문에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 이 녀석들의 일상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우리와 너무 닮았다는 거다. '어라? 이거 나도 궁금했는데, 왜 그런 걸까? 어떻게 해야 하지?' 싶은 문제들을 풀어가는 방식이 가슴으로 한 번에 들어온다. 때로는 고민도 해야 하지만, 우리가 겪는 많은 문제 대부분은 의외로 쉬운 답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보노보노의 엉뚱함은 그가 하는 고민에 그대로 드러난다. 아빠의 보물창고에 새긴 구멍 때문에 사라진 귀한 것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발을 동동 구른다. 너부리, 포로리와 머리 맞대고 고민하지만 찾을 방법이 없다.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마찬가지. 길을 떠난 아빠가 돌아올 때는 다 되었고, 사라진 아빠의 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러다 누군가의 한 마디에 귀가 번쩍 뜨인다. "혹시 아빠가 길을 떠날 때 그 보물들을 가지고 간 건 아닐까?" 그러네.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처음부터 아빠의 보물창고에 생긴 구멍으로 사라진 보물을 걱정할 게 아니라,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어봐도 좋았을 것을...

 

왜 우리는 아닐지도 모를 일에 걱정부터 하는 걸까 생각해보게 한다. 나처럼 작은 일 하나에도 마음을 계속 쓰고 고민하는 사람이 보면 좋은 안내서 같은 부분이었다. 보노보노가 아빠의 사라진 보물을 걱정할 때 누군가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면, 아마도 보노보노는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아빠가 들고 간 게 아니었는지 묻고, 그게 아니라면 다 같이 찾아보면 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하는 걱정 대부분이 처음부터 할 필요 없는 고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일상적으로 뱉는 쉬운 말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는데, 이 녀석들이 아빠의 보물을 찾아다닌 시간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언제 해도 해야 할 걱정이라면, 확인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꼬리를 떼어버리겠다는 너부리의 다짐으로 궁금해졌다. 너부리의 꼬리는 정말 필요 없는 것일까? 처음부터 있던 꼬리의 쓰임새가 분명 있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꼬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붙어 있는 거겠지. 그런데도 너부리는 그 꼬리가 거추장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은가 보다. 떼어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떼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그렇고, 웬만한 다짐은 아닌 듯하다. 꼬리가 없어도 죽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참에 확 떼어버리고, 예쁜 너부리로 거듭나고 싶었나... 포로리와 보노보노는 너부리의 꼬리에 마음을 두고 너부리의 마음을 바꾸려고, 그동안 그 꼬리가 너부리의 몸에 붙어 있으면서 했던 활약(?)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혹시나 너부리의 떼어낸 꼬리로 동물 친구들이 놀리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둥, 처음부터 한 몸이었으니 당연하다는 둥, 결론은 같다. 꼬리를 떼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 그때 현명하게 답을 준 족제비 아저씨가 너부리의 다짐을 바꿔놓았는데, 이상하게도 매일 거울을 보면서 내 얼굴을 품평했던 나 자신이 떠오르더라. '나이 먹으면서 눈이 자꾸 처지는데 어떻게 좀 해야 하나? 조금 더 예쁜 외모를 만들고 싶은데 좋은 방법 없을까?' 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생각하던 것을 고민해본다. 떼어내도 죽지 않으니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떼고 싶다던 너부리처럼, 조금 더 나아지고 싶은 외모를 만든다고 죽지 않으니까. 하지만 굳이 떼어내지 않아도 너부리인 것처럼, 지금보다 더 예쁜 외모가 아니어도 나인 것이라고. 목숨에 지장을 줄 문제가 아니라면, 이대로 사는 게 불편한 게 아니라면, 처음 주어진 상태로 오늘을 살아가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담아본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잖아?

 

 

꿈을 꾸는 이유를 궁금해하면서도 왜 꿈은 이상한 걸까 고민한다. 꿈이 이상한 건 현실이랑 구분하기 위해서라는 답을 내놓는 너부리의 말에 공감도 된다. 꿈은 그냥 꿈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래서일까.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상황들이 꿈에 나타나는 걸 보면, 정말 현실과 구분하기 위해 꿈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꿈에서라도 간절한 바람을 이뤄보는 거, 잠깐이지만 행복해지는 순간이 될 것 같다. ^^

 

읽다 보면 이 녀석들이 모여서 일으키는 문제들만 보는 것 같다. 나쁘지 않게 웃음을 주면서 그들만의 엉뚱함을 뽐내는 것 같아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에피소드에 이 만화가 더 가까이 다가온다. 걷는 게 좋은데 걷는 게 왜 좋을까 자문하는, 혼자 있다는 것을 외로움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보노보노의 모습에 사색적으로 된다. 심심하니까 걸을 수도 있고, 풍경을 보면서 걸으니까 좋고, 좋아하는 곳에 갈 수도 있으니까 걷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도, 아주 쿨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는다. 걷는 게 좋으니까 좋은 거라고. 걷는 순간에만 보이는 것들을 소환하면서 천천히 가는 순간의 미학을 담는다. 어떤 의미도 답도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좋아하는 것' 자체에 모든 의미가 있다는 거. 생각해보니 그러네.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잖아?! 좋으니까 좋은 거, 그 사람이 좋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은 의미잖아. 좋은 건 그냥 좋은 대로 놔두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다. 흐뭇하게 마음에 두고 그냥 생각하면 되는 거였네.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쉬웠는데, 왜 우리는 자주 그 쉬운 일을 어렵게 해야만 했던 것일까 되묻고 싶어진다. '외로움'이라는 화두, 계속 머릿속에 남을 질문이 되었다.

 

 

그렇게 포근해지는 답을 듣다가도, 외로움이라는 주제를 꺼낸 이 녀석들을 보면 진지해진다. 혼자 있는 아빠의 모습이 외로워 보였던 보노보노의 고민에 동물 친구들의 답이 가지각색이지만, 다 맞더라. 원래 모두가 외로운 거라고 말하는 포로리는 모두 쓸쓸하니까 시시한 얘기라도 하고 싶은 거라고 말한다. 그렇게라도 외로움을 달래고 싶다는 말일까? 그러다가 듣게 된 홰내기의 말. '우리는 보통 누군가와 같이 있으니까 혼자 있으면 외로워 보이는 건 당연하다'고. 반대로 혼자 있다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외로워 보이지 않는 걸까? 행복하기만 한 걸까? 홰내기의 말에 시선을 멈추고 한참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에 외로워 보인다는 말이지 외롭다는 건 아니지 않을까? 그 사람이 외로운지 아닌지 누가 정해주는 걸까 궁금하다. 그래서 자꾸만 사람들은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어 하고, 연애나 결혼으로 짝을 만들고 싶어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이 녀석들의 소소한 에피소드가 어느 순간 인생 철학을 말하는 것 같은 퀄리티가 되어 새겨진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 마음이 힘든 하루에서, 보노보노와 친구들이 찾아내는 보물 같은 순간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