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다. 험한 말을 막 쏟아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지금의 것만 보면서 순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들 말이다. 작정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머무는 성격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이 성격이 어떤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시행착오의 순간이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내려놓음, 차분한 마음을 갖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니,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이 순간을 내면의 고요라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리는 스틸니스라고 부른다.

 

살면서 굳이 이 스틸니스가 필요한 건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소개해주는 여러 인물 사이에서 공통된 것이 바로 스틸니스였다. 타이거 우즈나 나폴레옹, 윈스턴 처칠이, 안네 프랑크, 케네디 대통령 등 유명인에게 내재한 내면의 고요가 그들의 성공과 성장을 이끌었다.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경지의 인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하고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신을 만든 것이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던 나폴레옹 같은 이들에게는 냉정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판단하면서 흥분하는 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에, 우리 삶에서 스틸니스의 영역이 얼마나 광대하게 작용하는지 알 것 같다.

 

나폴레옹이 받은 편지를 바로 뜯어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데, 그에게 오는 편지를 나중에 뜯어보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그 편지를 뜯어볼 때쯤이면 편지 속에 적힌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된 후라고 한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는 일들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까운 시간을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이 어떤 양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니 해결되는 것들. 안다. 당장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지만, 결국은 해결된 문제들이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못하면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면서 조급해하는 게 또 우리의 성격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굴러봤자, 해결될 것은 해결되고 해결되지 않을 것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하느냐에 그 순간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음의 고요가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시때때로 선택의 순간에 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현명하고 냉정한 판단으로 좋은 결과를 도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니었나 싶다.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결정해봤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날 수는 없다는 것.

 

요즘의 나에게 때맞춰 잘 와주었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갑작스러운 일로 서울에서 몇 주를 보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보니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오지도 못했고,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해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했다. 일상이 불편했고, 무엇보다 해결되지 않은 현재 상황이 불안만 증폭시켰다. 어떻게 하면 될까 계속 걱정하면서도, 막상 명확한 답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또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살면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어쩔 수 없지’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거였다. 어쩔 수 없지. 저자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보면서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냉정한 시선과 판단보다는 감정의 시선으로 결과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고요한 내면을 마주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또 순간순간 감정이 앞서는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고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또 한 번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현명한 판단이 무엇인지 다시 배울 것만 같다.

 

저자는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들려주면서, 그들이 내재한 고요의 모습을 보게 했다. 집중력과 창조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주변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파고드는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말한다. 그 힘을 스틸니스라고 부르며, 그들은 내면의 고요 힘으로 인생을 이끌어나간다.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의 성장을 이끄는 좋은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안에 스틸니스를 장착하는 게 쉬워 보이는데, 사실 처음부터 내면의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이 방법을 배우는 게 문제의 해답이 되면서, 우리가 잘 성장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열쇠가 되는 거겠지. 이 책에서 처음 들은 이름인 야구선수 숀 그린은 슬럼프를 겪으면서도 조급함보다는 불교의 사상에 기댔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지면 시선이 좁아지기 마련인데, 그는 머릿속을 비우면서 내면의 고요를 찾았던 거다. 빌 게이츠가 혼자 숲에 들어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윈스턴 처칠이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것, 나폴레옹이 편지를 바로 읽지 않으면서 중요한 일을 고를 수 있었던 것 등을 보면 무슨 상황에서건 우선순위를 제대로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집중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가장 잘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고만고만해 보이는 여러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 문제들은 저마다 자기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경쟁하는 목소리와 신념에 이끌린 채 너무 많은 방향으로 끌려간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적이 깔려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선하고 악한 충동 사이에서, 야망과 원칙 사이에서, 우리가 되고 싶은 존재와 실제로 그 존재가 되기까지 겪어야 할 어려움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이러한 전쟁에서 고요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는 강이자 철로의 교차점이다. 고요는, 열쇠다.

그러니까 고요는,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더 나은 부모, 더 나은 예술가, 더 나은 투자자, 더 나은 운동선수, 더 나은 과학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인생에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인 것이다. (스틸니스, 23~24페이지)

 

우리 안의 스틸니스가 발휘하는 때는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직면했을 때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내면의 고요를 잘 찾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와 선택의 순간을 현명하게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가 아직 다 찾지 못한 내 안의 가능성을 찾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 영혼, 몸의 영역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영혼이 분노나 욕망에서 멀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생각한 것을 몸으로 움직이며 실천하면서 우리 안의 고요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책이나 걷는 것, 충분한 휴식과 수면은 우리 몸을 진정시키고 편하게 만든다. 그때 생기는 고요가 또 한 번 우리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누구나 바란다. 내 인생이 더 완전해지기를, 누구보다 만족한 삶이었기를. 언젠가 죽음을 마주할 우리지만, 지금 마주해야 할 현재의 우리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잘 채우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가는 것인지 묻고 싶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건너가는 방법이 듣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았고, 특히 지금처럼 힘들다고 여기는 때 내 안의 고요를 찾는 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급해할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지금의 상황을 마주하는 시선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다. 거리를 두니 보이는 것들, 시간을 두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고요를, 현명한 판단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인생이 흐르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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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아니, 증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존재 자체로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그러지 못한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상식과 불평등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꼭 편지 같다. 친애하는 당신에게 하고 나는 말할 테다. 이름 없는 당신에게라고. 이름을 붙이면 ‘당신’을 실제 세계에 연루시키게 될 텐데, 그러면 훨씬 더 위험해지고, 훨씬 더 부담이 커진다. 저 바깥 세상에, 당신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그 누가 알겠는가. 당신, 옛날의 고리타분한 사랑 노래들처럼 그냥 당신이라고 부르련다. 당신은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당신은 수천 명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건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당신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다고 가정하련다.

하지만 소용없다. 당신은 듣지 못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시녀이야기, 72페이지)

 

21세기 어느 날의 미국. 지구는 전쟁과 환경오염, 온갖 성질환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이런 불행의 시대를 누군가는 권력을 잡는 기회로 만든다. 대통령은 사라졌다. 국회는 해산됐다.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길리아드’가 일어났고, 국민들을 폭력적으로 억압했다. 특히 여성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으면서 체계화하여 관리했다. 통제하고 착취했다. 평화롭게 살던 여성 오브프레드는 갑자기 이름도, 가족도,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감시당하고 살아가면서, 사령관의 아이를 임신하도록 강요당한다. 그게 ‘시녀’로 살아가는 여성들의 존재 이유였다. 평범하게 자유를 누리며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한순간 모든 권리를 빼앗긴 채 한 인간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상상이 되는가? 갑자기 여성의 은행 계좌는 압류되었고, 기혼 여성의 모든 금융자산은 남편에게 귀속되었다. 여성들은 모두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한 삶이 시작되었다. 남성에 의해 지배받는 세상이 왔고, 여성의 신분은 몇 가지로 구분되어 관리와 통제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은 통제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해도, 심지어 살인을 해도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던가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누구는 앉을 수 있고 누구는 꿇어앉거나 일어서거나 다리를 활짝 벌리고 드러누워야 한다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진짜 문제는 누가 누구한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마찬가지라는 말만큼은 절대 내 앞에서 하지 마라. (시녀이야기, 233페이지)

 

읽으면서 착각을 했다. 혹시 신분 계급이 있던 우리나라의 과거 어느 시대, 양반과 천민의 구분으로 인간 차별을 하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성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던 시절이 생각났다. 뭐가 다른지 한참을 찾고 있는데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브프레드가 있던 시설의 시스템이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으로만, 그녀들의 자궁만 존재할 뿐이다. 여성을 아이를 낳는 도구로만 여기면서, 통제하고 교육하면서 각 사령관의 집으로 보내는 게 ‘아주머니’들의 역할이었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 따위는 없다. 쾌락의 요소를 철저히 제거한 상태로, 은밀한 욕망이 꽃필 여지도 전혀 없이, ‘시녀’들은 다리 둘 달린 자궁에 불과한, 오직 남자들의 종족 번식을 위해 존재하며 삶을 멈췄다. 시녀들은 원래 이름을 빼앗겼다. 그녀들이 배속된 가정의 남성 이름을 따 '오브000'으로 불린다. 오브프레드, 오브글렌… 처럼, 프레드의 시녀, 글렌의 시녀.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계급이 없을까? 여성과 남성의 차별이 없을까? 오브프레드의 시대와 다르지 않을까? 소설은 2195년의 어느 날 열린 심포지엄에서 길리어드 시대에 ‘시녀’였던 어느 여성의 녹음을 들려준다. 그 여성이 오브프레드라고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역사의 기록쯤으로 여기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불분명한 출처의 기록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임이 여성의 탓은 아니면서도, 불임의 여성을 다른 여성의 자궁으로 대신한다. 환경오염이나 성병, 핵전쟁으로 세상이 물든 게 여성의 탓인가?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 세상은 불임의 원인을 여성에서 찾고, 여권 신장에서 불안을 느끼며 성경에 바탕을 둔 세상을 만든다. 아이를 낳는 도구로 만든 ‘시녀’를 사령관의 집에 보내고, 기한 안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유배지로 보내서 핵폐기물을 치우는 인생을 만든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앓으면서 죽어가겠지.

 

오직 출산의 도구로 존재하는 여성의 삶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기록이라는 전달은 끔찍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이를 갖기 위한 성행위에 세 명이 등장한다는 거다. 사령관과 시녀와 사령관의 아내는 아이를 잉태하려는 행위에 같이 참여한다. 불임인 사령관의 아내는 시녀의 뒤에서 단단한 벽처럼 자리하고, 시녀는 사령관과 마주하며 성행위를 한다. 감정은 없다. 쾌락도 없다. 오직 아이를 만들기 위한 의식으로 여긴다. 웃긴 것은, 계급의 위에 있는 이들은 시녀나 다른 이들을 무시한다. 그들의 일상을 위해 존재하는 여러 가지 도구 중의 하나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이 문제에서만큼은 시녀의 자궁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남편의 아이를 갖기를 원하면서도 남편의 내연녀를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진다.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해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말이다. 사령관의 아내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에 필요한 도구(?)를 들이면서도, 그 도구를 존중할 마음은 전혀 없다. 사령관도 마찬가지. 그의 유희를 위한, 과거의 어느 시절에 성행했지만 지금은 금지된 것들을 은밀하게 즐기기 위한 파트너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출산 과정 역시 기가 막힌다. 마치 대리모의 출산에 참여하듯,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자세를 취하며 출산의 고통에 동참한다. 진짜로 출산하는 것처럼. 자기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온전히 자기 인생의 한 장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들의 이기적인 세상에 희생되는 많은 여성의 삶을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한 결과로 소설은 에필로그에서 독자에게 그 과정을 이해시킨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그 시대의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이야기로, 그러나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실로 믿고 싶은 역사로 말이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누군가 만든 체제가 운영되고 있을 뿐인 세상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오브프레드가 남긴 목소리는 간절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누군가는 들어줄 거로 믿고 남긴 이야기다. 목숨이 위태로운 그 순간에도 이렇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 지금 이후로의 여성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저자의 말처럼,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이 다시 반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걸 증명하는 게 이 소설의 결말이기도 하다. ‘길리어드’가 무너지고 당시의 자료들은 폐기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삶과 고통은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길리어드’ 시대의 숨기고 싶은 폭력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듯이. 이런 비슷한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은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을 상담하던 의사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김지영의 상황과 상태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이해해주면서도, 아이 때문에 선택한 자기 아내의 경력 단절을 아파하면서도, 의사는 다짐한다. 임신 때문에 그만두는 여직원의 후임은 미혼으로 구해야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야 한다. 계속 말해야 하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더는 불합리와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여성의 삶을 이어갈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인생이 암흑이 아닌 빛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오래전에 샀는데도 미루기만 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읽어냈다. 혹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던 소설을 그래픽 노블 출간 때문에 핑계 삼아 같이 읽게 된 거다. 이미 영화나 발레, 오페라로 보여줬던 이야기는 아마 몇 번을 다시 봐도 충격일 듯하다.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기에 몇몇 장면을 찾아봤다. 생각보다 소설의 장면들을 잘 담아놓았다는 느낌에, 언젠가는 드라마로도 만나고 싶어졌다. 피를 보는 것 같은 빨간 드레스, 그와 상반된 하얀 두건은 누구도 그녀들을 침범할(볼)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녀들의 시선은 오직 드레스에 감춰진 채로 보이지 않는 발끝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인간이되 인간다움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는. 어디서 이런 설정이 등장했을까 하는 궁금증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서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1985년에 써졌다는 이 소설은 21세기를 통과하는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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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8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픽노블의 그림이 제가 책 읽으며 떠올렸던 바로 그 장면이라 놀랐어요. 같은 책을 읽은 것일테니 당연한거겠지만요. 그림이 참 사실적이네요.

구단씨 2020-03-18 14:04   좋아요 0 | URL
잔인하면서도 놀랍고, 굉장히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이었거든요.
한 사람의 존재감을 완전히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했고요.
오래 전에 사두고 뒤늦게 읽었다가 충격이었습니다...
 

 

초저녁의 졸림을 이기려고 눈을 부릅뜨면서, 저녁 일일 드라마의 오늘 분량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엄마 얼굴을 보고 있다. 웃음이 난다. 졸리면 그냥 주무시지, 기어코 본방 사수하겠다면서 주인공의 복수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신다. 일상의 낙이 매일 저녁 방송하는 TV 드라마를 보시는 건데, 그게 그렇게 웃기다. 마치 그걸 보지 않으면 하루를 마무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인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이 책을 읽고 있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봤다. 엄마가 돌아가시면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을까 하고.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갖고 싶었다는데, 나는 엄마의 무엇을 갖고 싶은지 계속 생각하고 있다.

 

 

제목만 들으면 무슨 스릴러인가 싶겠지만, 유골의 주인이 엄마라는 걸 알게 된다면 놀라움과 궁금증이 먼저 생길 거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어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혹시 경험해본 사람은 조금 알까? 막 화장터에서 나온 유골을 담은 유골함을 손에 들면 따뜻하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적당한 온도다. 온돌방에 앉아 있는 느낌으로 따뜻하다. 만약 내 엄마의 유골이 그런 느낌이라면, 한 번쯤 그 유골함을 꽉 안고 싶어질 것 같다. 엄마를 안는 기분으로,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말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자의 저 말을 듣고 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어야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일까.

 

저자는 엄마의 유골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엄마의 유골을 먹고 싶다고. 눈동자가 떨릴 정도로 엽기적인 말로 들리지만, 엄마를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문장 그 자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순간의 마음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지만, 이 강렬한 감정이 부르는 아픔을 알 것 같아서다. 사랑하는 엄마의 부재, 더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한 번쯤은 상상해 보고 싶지 않은가?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어마어마하겠지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을 알기에는 상상만 한 게 없으니.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수시로, 계속 상상한다. 내 엄마와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이해야 하는지를.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죽음을 볼 때마다, 그 죽음의 대상이 엄마가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많다. 특히 언젠가부터 엄마의 병원행이 잦아질 때마다 생각은 극단적인 쪽으로 기운다. 작가 자신이 20대에 겪은 혈액 질환 때문에 엄마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기에, 그 이후로도 엄마의 존재는 남달랐을 것 같다. 저자의 엄마는 위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아들을 사랑하고, 한없는 애정과 격려를 보내며 아들의 삶을 응원했다. 그런 엄마가 암이라니, 더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말기 선고를 받고 나니 이제 엄마의 병을 고치기보다는 엄마의 남은 시간을 행복하게 해드려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저자와 애인은 엄마의 병간호를 하고, 긴 시간 엄마를 돌보면서 지쳐갈 때쯤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이 글은 저자가 의사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메모해 두던 것이 차곡차곡 쌓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어떤 순간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록을 읽는 것에서 그만이겠지만, 그 대상이 엄마라면, 부모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더는 볼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인지 아는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슬픔에 공감하는 이들, 참 많을 것 같다.

 

늘 함께일 거로 생각했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헤어질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떠나간 이를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게 고통일지 기쁨일지 모르겠다, 아직은. 주변 많은 이의 죽음을 애도했고, 지금도 가까운 이의 백혈병 투병을 지켜보고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만, 아직은 그 슬픔을 100% 공감할 그릇을 갖지 못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아니었기에, 그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인 이별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그때마다 상상의 시간은 길어진다. 엄마의 죽음을 생각한다. 아마 그들도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심정을 이해 하고자, 언제가 내가 마주할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며 가슴을 단단하게 만들고자. 평소 엄마와 얘기하면서도 엄마의 죽음을 빼놓지는 않는다. 작년 말에는 엄마가 죽으면 가고 싶다는 봉안당에 미리 다녀왔다. 조건이 맞으면 좋은 자리에 계약해놓을까 했는데, 아쉽게도 엄마의 종교를 바꿔야만 갈 수 있는 곳이라 포기했다. 외삼촌(엄마의 오빠)이 계셔서 더 마음이 가는 곳이었는데,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엄마가 종교를 바꾸지 않는 이상 그곳으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얘기한다. 그곳에서 쉴 주인공인 엄마와 함께 말이다.

 

저자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저자의 아버지는 뜻밖에 담담해 보였다. 아내의 죽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마는, 세상 이치가 다 그렇다는 표정으로 아내를 보내는 모습이 의연했다. 그런 아버지가 술이 늘고, 집안이 지저분해질 정도로 치우지 않고, 일상이 흐트러져 있었다. 겉으로는 자식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 진심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슬픔은 누구나 똑같은 거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저자 형의 모습도 비슷했다.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저자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는데, 정작 그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이런저런 정리를 하면서, 남겨진 이들이 감당해야 할 일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 보였는데, 그 이면의 표정을 미처 다 읽지 못했던 거다. 가족을 잃고 슬프지 않은 사람 없고, 엄마의 돌봄에 감사하지 않은 자식 없다. 그러니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일 것이다.

 

 

엄마를 보내고 난 후의 이야기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발견하는 엄마의 메모들, 엄마가 가꾸던 정원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남겨진 이들은 또다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한 번씩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해야 하고, 울고 웃으면서 그 시간을 추억해야 한다. 엄마의 강요로 남겨두었던 정자를 꺼내 아이를 낳게 되면서 또 한 번 엄마의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저마다의 의미를 쌓아간다. 머리로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론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더라도, 마음이 알고 느끼는 것들을 그렇게 적립하는 시간이었다.

 

몇 십 년을 엄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살다가,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엄마가 지금보다 덜 늙었을 때 따로 살아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요즘이다. 언젠가 혼자서 지낼 엄마를 생각하니, 작년보다 한 살 더 나이 드신 엄마가 부쩍 더 늙어 보이는 건 왜일까. 같이 살 집을 알아보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고, 따로 살 집을 알아본다고 하니까 투덜투덜 서운해하시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엄마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같이 살자니 자식에게 부담이 될까 봐 싫어하시는 것인지, 따로 살자니 갑자기 혼자 지내는 일상이 겁이 나는 것인지. (사실 나도 많이 무서운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겁이 많아지고, 본인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의지하는 모습이 늘어간다. 한때는 이 집의 가장이었던 당신. 이제는 본인이 돌봄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게 슬프면서도 안도하는 걸 볼 때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힘듦을 겪었을지 새삼 알겠더라. 그래서 엄마의 지금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함과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이는 엄마, 당신의 두려움과 떨림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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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작품을 잘 읽지 않았다는 것을 이렇게 확인한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난 '양 사나이'는 하루키의 초기 작품부터 등장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조금은 특이한 캐릭터가 분명하다. 언제부터 생각해서 세상에 내놓은, 왜 '양 사나이'라는 인물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루키의 작품 곳곳에서 보이는 인물이라고 하니 하루키와 상당한 인연을 만들어낸 인물임은 틀림없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우일의 일러스트와 함께라고 하니,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는지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날을 배경으로 양 사나이의 일화를 만들어낸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막상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그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양 사나이의 이야기 하나가 탄생했고, 동화 같은 이야기에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었다면 그걸로 충분할지어다.

 

양 사나이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 양 사나이 협회에서 선택받은, 성 양 어르신 승천일을 기념하며 음악을 작곡할 대상으로 선정된 것. 크리스마스에 맞춰 음악을 내놓으면 되는 것을 여름에 의뢰를 받았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하지만 양 사나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음악을 만들 수가 없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크리스마스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슬럼프인가? 모르겠다. 우연히 만난 양 박사의 말로는 저주가 걸렸다고 하는데, 저주에 걸렸다면 그 저주는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이야기는 저주에 걸렸다고 여긴 양 사나이가 양 박사의 말대로 시작한 여정에서 출발한다. 크리스마스 날 오전(새벽 아니고?)1시 16분에 성 양 어르신이 빠진 구덩이에 빠지면 되는데, 그걸 양 사나이가 직접 파서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건 뭐냐? 무슨 세트 지어서 재연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저주를 풀 방법이라니 안 할 수도 없고, 참... 그렇게 열심히 판 구덩이로 들어가기만 하면 저주가 간단히 풀릴 줄 알았는데, 인생사 어디서나 밖의 변수는 있는 법.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서 양 사나이의 저주 풀기 계획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데... 이거 어떻게 잘 풀리기는 하겠어? 내가 다 걱정이구먼.

 

예정에 없던 모험인지 여행인지 모를 일들은 양 사나이의 저주를 풀기는커녕, 뭔가 자꾸 모호하고 이상한 곳으로 흐르기만 한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여러 인물과 사연들은 상상 속의 이야기로 거듭나고, 느리고 어수룩하게 보이는 양 사나이는 특이하게 등장하는 여러 인물에게 사기당하는 캐릭터처럼 엉뚱하고 순박한 느낌에, 결국에는 그들의 진심이 나쁘지 않다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면 '아하~!' 하는 감탄사와 함께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바다까마귀 부인, 208 209 쌍둥이 소녀, 오른 꼬불탱이 왼 꼬불탱이(처음에 나는 이들을 꽈배기라고 불렀다는...), 양 박사와 성 양 어르신, 그리고 그 저주가 시작된 구멍 뚫린 도넛까지. 어느 것 하나 특이하고 개성 없는 것이 없어서인지, 읽는 재미와 함께 보는 재미까지 더해진 책이다.

 

사실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양 사나이를 비롯한 그동안 그의 작품에서 보였던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또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로 탄생하는 과정을 보는 게 즐거웠다. 상상력과 더해진 크리스마스라는 즐거운 시간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짜잔~ 서프라이즈~!' 뭐 이런 느낌? ^^ 단순한 이야기로 머물 수도 있었을 텐데, 이우일의 그림과 어우러져 완성된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다. 우연히 마주한 인생의 저주와 그 저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양 사나이의 노력이 눈물겹지만, 결말에서 마주한 즐거움은 그 노력의 끝에서만 만날 수 있는 웃음이리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즐기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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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밥상에 오른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어제 마트에서 할인 가격으로 사 온 부드러운 돼지고기에, 온갖 야채를 듬뿍 넣어 얼큰하고 달달하게 볶은 게 내 입맛에 딱 맞는다. 고기보다는 야채를 먼저 집어 먹고 있는데, 엄마가 슬쩍 고기를 집어 나 있는 쪽으로 놓는다. 같이 먹자는 의미다. 어제 같이 사 온 밤맛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마시면서,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된다면서 투덜투덜. 그래도 젓가락질을 멈추지는 않는다. 맛있으니까. ^^

 

일상의 많은 날에서 종종 엄마와 이런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집 앞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 한 그릇씩 먹고 오거나, 영화 <겨울왕국>을 보자는 엄마의 말에 더빙판을 예매하거나(엄마는 자막 읽기 힘들다면서 한국 영화나 애니메이션 더빙을 선택한다), 저녁 하기가 귀찮다면서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씩 입에 물고 걸어오거나, 집 근처 기찻길 주변을 돌면서 운동이라고 우기거나... 생각해보면 너무 소소하다. 엄마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참 많을 테지만, 사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맞는 결과를 내보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게 언제나 미안하면서도 너무 익숙하다. 엄마니까, 엄마는 자식의 부족한 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언제나 지켜보면서 또 기다려줄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또 그렇게 믿어왔다.

 

 

그게 언제까지일까? 내가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엄마가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고, 엄마가 우리 형제들 보면서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우리가 사는 시간은 유한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언제까지나 영원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아는데도, 자꾸만 착각하게 된다. 현재 상황에 핑계를 대고 안주하면서 기다려주는 시간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꾸만 미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어떤 순간이 다가오고 후회를 하겠지. 그때는 이미 늦을 테지만, 어리석은 나는 또 그걸 모르고 계속 지금만 보고 있겠지... 우와노 소라의 소설에서 단편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를 읽으면서, 어리석은 자식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게 됐다. 아마도, 어쩌면 나도 가즈키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가즈키의 열 살 생일날, 눈앞에 이상한 숫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어머니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하나씩 줄어들었다. 이상하다. 다른 때는 아닌데,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숫자가 줄었다. 가즈키는 숫자가 0이 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눈앞의 그 숫자는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을 때만 줄어드니까, 언젠가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이 그 숫자를 다 채우게 된다면 더는 어머니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계속 생각해봐도 답은 하나다. 어머니가 안 계시게 되는 상황이 올 거고,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는 말 아닌가. 그래서 가즈키는 결심했다. 더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더는 눈앞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게 하기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안 먹어? 엄마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언제까지 먹을 수 있다고 그러는 거야?!’ 한집에 살면서 서로 다른 상차림으로 밥을 먹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번거롭기도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가 없다. 가즈키는 아예 집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밖에서 사먹곤 했다. 그러다가 집을 떠나서 대학에 진학하고, 취직을 하고서도 집밥을 절대 먹지 않았다. 숫자는 328에서 줄어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 다짐이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가즈키에게는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이렇게 할 거라고 다짐하면서도, 가까운 곳에서 맡아지는 엄마의 집밥 냄새를 이겨내야만 했다. 그리웠다. 엄마의 집밥도, 엄마의 표정과 따뜻한 말도. 하지만 본가에 갈 수는 없었다. 갈 때마다 음식을 먹이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을 알기 때문이다.

 

소설은 의외의 결말로 후회와 눈물을 만든다. 설마 그런 상황이었을 줄이야. 왜 한 번도 그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결말은 잔인했다. 가즈키에게 땅을 치고 후회할 상황을 만들어버린 작가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왜 우리는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를 아프게 하는지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한 것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영원하지 않은 시간을 조금 더 아껴두고 싶은 마음을 후회하게 하는 거다.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은 안 되니까’가 아니라, ‘형편이 곤란하니까’가 아니라. 오직 지금만이 가능한 것을 눈앞에서 확인한 기분이다. 자꾸만 미루다가는, 조금 더 있다가 할 거라는 핑계가 더는 통하지 않은 거였다. 가슴이 알싸했다. 식상하지만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새기게 한다. 가즈키의 선택의 결과는 후회였지만, 후회 그 후의 일상은 다시 소중함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엄마, 집으로 갈 테니까…… 뭐라도 좀 만들어줘.”

“뭐라도, 라니……. 언제?”

“지금 당장.”

“지금 당장!? 뭐, 뭘 먹고 싶은데?”

“뭐든지 좋아.”

“…… 그래서, 뭘 먹고 싶니, 가즈키?”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 - 42~43페이지)

 

이상한 카운트다운을 마주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비슷한 선택으로 비슷한 상황을 만든다. 하루하루 살아남기에 벅차서 일상의 소중함 따위는 잊고 지낸 지 오래일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 일에 있을 그 끝을 상상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푸근한 냄새를 풍기는 엄마의 집밥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뭉클했다. 만약 우리 인생에서 무언가가 남은 횟수가 보인다면, 그게 엄마에 관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무 잘 알고 있는 답마저 당황해서 제대로 볼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런 감정적인 이야기에 찬물을 끼얹듯 보다 현실적인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게 케스터 슐렌츠의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이다. 갑자기 쓰러진 엄마 때문에 형제들의 일상은 변한다. 엄마를 모실 병원, 비용을 처리할 보험, 치료 후 돌봐드려야 하는 요양원 등을 거치는 길고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엄마의 변덕과 괴팍한 성격은 덤으로 감당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엄마라는 걸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다. 항상 우리를 돌봐주는 엄마였는데, 언제 엄마가 우리가 돌봐드려야 하는 대상이 된 거지? 그게 언제였든, 현실은 현실이다. 저자와 형제들에게는 엄마를 돌봐야 하는 현실만이 남아있었다. 언제나 든든하게 나를 돌봐주고 내 삶의 기둥이었던 엄마가, 이제는 내가 돌봐드려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 때문에 이미 어느 정도 경험하긴 했지만, 저자가 겪은 시간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는 이 글을 마주하니까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이 생생해진다. 언젠가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상이 힘들어지고, 병원에 드나들고 요양원에 머물러야 할 시간이 많아진다면, 나는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저자 역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을 마주하면서 당황한다.

 

 

케스터 슐렌츠가 엄마를 돌보며 작성한 이 책은 엄마를 떠올리면서 감성적이 되기 쉽고, 부모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 따라오는 일상이 변화를 현실적으로 제시한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기에 앞서 현실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을 언급한다.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갑자기 닥친다면 더 당황하겠지만, 언젠가는 닥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준비해야 하는 일이었던 거다. 혹시나 아프게 되면 병원에 모셔야 할 상황, 그때 간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퇴원 후 돌봄은 어느 시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 후로도 계속되는 돌봄 상황에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잘 되어있다는 독일에서도 이런 경우는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국가가 해주는 것보다 개인이 준비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거다. (물론 다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저자의 엄마는 잘 치료 받고 적당한 요양시설을 선택해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보고 있자니 적나라한 현실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서 웃프더라. 이미 겪어본 일이라 그런지 저 마음이 쓰이는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한국과 독일은 아주 다를 줄 알았다. 각자 독립된 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간섭보다는 독립된 인격의 관계로 유지되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노년의 부모를 걱정하고 어느 부분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건 비슷했다. 부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제들이 모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의논한다. 각자 역할 분담을 하면서 같이 처리해야 할 문제인 거다. 저자는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는 일이나 요양 시설을 알아보거나 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저자의 남동생은 경제 관련 처리와 계산하는 일을 담당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있는 저자의 누나는 엄마와의 정신적인 교감을 이루려 노력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아프니 형제들이 모이거나 얘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말,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 아버지 편찮으셔서 병원에 드나들고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겪은 것과 너무 똑같았다. 우리도 그랬다. 문제가 터지니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고, 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남동생이나 여동생과 통화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집안의 우환이 생기는 건 걱정이지만, 이런 일이 생기니 형제들 사이에 관계는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참나...

 

흔히 부모가 나이 들어간다는 서글픔을 언급하면, 더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말한다. ‘더 늦기 전에...’라는 이유로 감정적인 부분의 해결을 먼저 생각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다른 의미로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하게 했다. 옮긴이의 말처럼, 노부모에 관한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노부모를 돌보는 일은 때로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 노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하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노부모라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마치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24시간 곁에서 돌봐야 하고, 실제로는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러다가 요양병원을 찾게 되는데, 그렇다고 요양병원이 최고의 답은 아니다. 자식이 있는데 요양 시설에 모셔도 되는지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비용도 발생한다. 그래서 노부모를 돌본다는 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것보다, 조금은 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보다 더 늙고 거동이 힘들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현실적이고 금전적인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어야 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혼자 남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대책보다는 걱정만 앞선다.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막상 현실에서 닥친 엄마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겁부터 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노부모에게 일어나는 문제와 그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부딪힘이 그대로 들려왔다.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해결 방법은 다를지 모르지만, 저자의 경험담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내가 이미 경험해서 그런지 공감된 부분이 많다.

 

아버지의 죽음, 엄마의 유방암, 엄마의 늙음. 이 모든 일을 계기로 나는 나의 늙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58세다. 솔직히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 이렇다 할 불만이 없다. 나 역시 중년의 위기를 겪었지만 잘 이겨냈고, 26년째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건강하고 멋진 아들이 둘이나 있고, 좋은 친구들이 있고, 직업도 만족스럽다. 뭘 더 바라겠는가. 글쎄, 나는 무엇을 더 바랄까?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모든 것이 지금처럼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 사진과 지금 거울 속 나를 비교해보면, 시간의 톱니 자국이 확연히 보인다. 주름진 거친 얼굴과 축 처진 눈 밑 지방이 정말 내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때도 있다. (엄마, 조금만 천천히 늙어줄래? - 203페이지)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부모의 늙음을 외면하지 말고 조금 더 현실적인 상황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모의 늙음과 병듦은 점점 비극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렇다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이 책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을 한 번씩 시뮬레이션해 보고 언젠가 닥칠지 모를 순간을 준비할 수 있기를, 어떤 상황이 닥쳐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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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0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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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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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5 09: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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