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으로 만든 방처럼 생긴 공간에 살림살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물건들이 지나치게 가깝게 붙어 있어 서로가 서로를 쓰레기처럼 만들어버리는 방이었다. 그녀는 깨끗한 쓰레기통 같은 방에 앉아 아들이두고 간 일본 돈을 손에 쥐고 창밖으로 낯선 도시를 바라봤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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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듈형 인간이 되고 싶은 것 같다. 블록을 조립하듯 마음대로 세상과 연결되고 분리되는사람, 외톨이가 아닌 채로 혼자일 수 있는 사람.
약속이 취소되면 나는 함께라는 가능성을 가진 채로 기쁘게 혼자가 된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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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수상한 서재 4
하승민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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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당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다면 당신에게 그 삶은 축복이겠는가?

만약 그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면 당신은 그 삶을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


죽음 앞에서 살아있음은 더 찬란히 빛나게 마련이지만, 산산이 조각나버린 영혼을 간신히 부여잡고 살아남은 이에게 삶은 고통과 슬픔, 절망과 분노의 아우성일 것이다.

특히 범죄의 희생양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에겐 더더욱.



여기 그런 사람이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눈앞에서 충에 맞아 죽는 걸 지켜봐야 했다.

엄마뿐 아니라 마을의 여러 집에서 줄초상이 났다.

누군가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날, 그곳에,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유 없는 죽음을 당해야만 했다.


무엇도 잘못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수없이 죽어갔다.

우리 역사의 뼈아픈 슬픔의 시간 속에 여섯 살 염지아가 있었다.

그날, 엄마는 죽었고, 지아는 살아남았다.

엄마의 죽음을 밟고서.


그러나 아무도 지아가 살아있음을 기뻐해 주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아내를 잃은 아빠는 비통함을 견뎌내지 못했다.

말하지 않은 책망이 살갗으로 스며들었고, 어린아이가 견디기엔 너무 힘든 자책과 고통이 지아를 조각내고 있었다.

삶이 폐부를 뚫고 들어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을 때 지아는 영혼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암흑.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다.


지아의 스위치가 내려가면, 혜수의 스위치가 올라갔다.

지아는 모르는 또 다른 자아가 지아의 몸을 차지하고, 지아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질렀다.

삶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마다 혜수가 찾아왔다.

그리고 지아의 몸을 멋대로 휘두르며 지아의 삶을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지아는 혜수의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

혜수는 영리하고 파괴적이었다.

혜수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수습하는 것은 항상 지아였다.

지아는 혜수가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매번 혜수에게로 도망 치곤했다.

지아가 숨을 곳이라고는 결국 혜수의 뒤뿐이었으므로.


그런 시간들이 이어져 어른이 되었고, 대충 기워 입은 옷처럼 옹색하고 쓸쓸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지아의 삶과 혜수의 삶은 엎치락뒤치락하며 교차했고, 삶이 너무 무겁고 힘들었던 지아는 어느 날 영영 혜수의 뒤편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망각의 시간.

지아는 모르는 혜수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영영 꺼져버린 줄 알았던 지아의 스위치가 19년 만에 다시 켜지며 책은 시작한다.


밤이었고, 추운 겨울이었고, 산속이었다.

그리고 땅에 반쯤 묻힌 시체와 삽을 든 채 지아의 삶은 다시 강제로 점등되었다.


혜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 시체는 누구이며, 범인은... 나인가?

나는 시체를 묻고 있었던 걸까, 파고 있었던 걸까?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다시 점등된 지아의 삶은 온통 물음표뿐이다.

그녀의 기억은 20대에 멈춰있었고, 40대인 몸은 남처럼 낯설기만 했다.

혜수가 살았던 19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혜수는 왜 지아의 스위치를 올리고 도망쳐 버린 걸까.


이제 지아는 자신이 모르는 19년의 삶을 파헤쳐야만 한다.

살인자로 꼼짝없이 잡히기 전에.



하승민 작가는 처음이다.

다른 작품을 읽은 적 없어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이 글에서는 날 것의 냄새가 났다.

오래전에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가 떠올랐다.

향수를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충격.

책에서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탄생을 어떻게 저렇게 서술할 수 있을까.

그 생경한 공포와 충격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었다.


이 책을 읽으며 오랜만에 비슷한 냄새를 맡았다.

조금도 꾸미지 않은 삶 그대로의 비릿함.

날 것의 밭은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살아있는 것이 살아남으려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도처에 깔린 덫은 날카롭기만 하고,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짙고 견고했다.

남은 건 본능뿐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삶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했다.

독자의 본능에도 반짝 불이 켜졌다.




글의 초반에 예고도 없이 등장한 광주 민주화 운동 때의 배경에 잠깐 의아했었다.

한 사람의 자아가 분열되어 둘이 될 수밖에 없는 사건은 생각보다 더 다양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 역사의 시간이 맞물리는 걸까.

무엇을 위해 그날의 죽음이 재조명되었을까. 그것도 스릴러에서.


책을 다 읽고 난 후, '이런 마음'이 들라고 하필 그날이었던 건가 싶었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 자책과 원망, 구하지 못한 목숨에 대한 부채감.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런 마음들에 스스로를 찌르며 살았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내 이웃이 죽고, 친구가 죽는 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이 그들의 가슴에 남겨둔 깊은 상흔과 치유되지 못하는 슬픔.

슬픔은 익숙해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무사한 삶 속에서도 온전히 기쁨만을 만끽하긴 힘들었을 마음의 상처들이 엄청난 무게로 내게 쏟아져내렸다.

그동안 나는 사건에만 집중했고, 처참하고 참혹한 시간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가졌을 뿐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내게는 교과서로 배우고 미디어로 접하는 '역사'였을 뿐이었으니까.

그 역사가 여전히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또 한 번의 인지와 경의로움. 애달프고 감사한 일이다.


시간은 지나도 그날은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들이 여전히 지나가지 않은 오늘일 텐데, 겪지 않은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오월에만 떠올리는 감사함, 오월에만 떠올리는 애도, 오월에만 재조명되는 이야기.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되는 역사이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무겁기만 해야 할까.

최근에 '오월의 청춘'이라는 드라마에서도 그 시대의 장소와 사건이 배경이었다.

청춘들의 사랑을 다루면서도 충분히 그 슬픔을 담아낼 수 있으며, 이런 스릴러의 배경으로도 얼마든지 그 아픔은 차용될 수 있다.

너무 무거워서 입 밖에 꺼낼 수조차 없는 역사는 그대로 잊히고 색이 바랜다.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읽어야겠다.

겪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진심을 담아 기억하는 일일 테니까.



이 책의 화자는 광주 사태의 고통을 껴안고 삶을 살아왔다.

한 사람을 관통한 역사의 날카로운 칼날이 그 삶을 어떤 식으로 헤집어 놓았는지 선연하게 보여준다.

비단 그때의 비극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비극을 하나씩 껴안고 살아간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절망을 마주쳤을 때 우리도 가끔 삶의 스위치를 내리고 싶어진다.

그것을 견디는 방법은 모두 다르겠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모두 한결같으리라.

그래서 한 자아에서 다른 자아로 도망 쳐버린 지아를 나약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아직까진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일 뿐일지도 모르니까.


'몹시 슬프고 가난한 얼굴'로 끝이 난 책이 그래서 더 아프다.


많은 날 중에 단 하루가 잘못된 것뿐이었다. 그 하루가 인생을 뒤집어놓았다. 누군가의 결정이 너무 많은 사람의 일생을 헤집었다.

P.609



누가 우리를 악인으로 만들었을까.

누가 우리를 피해자로 만들고 가해자로 만들었을까.

평범한 우리가 어째서 누군가를 죽고 죽이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을까.

악은 처음부터 악이었을까, 그도 가끔은 선의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책 속의 어떤 죽음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의 손에 피를 묻혀도 된다고 알려줬을까.


스릴러적인 재미와 묵직한 고뇌를 함께 건네줬던 책, 「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




그녀에게 남은 건, 지아의 얼굴일까, 혜수의 얼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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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걷는 밤 - 나에게 안부를 묻는 시간
유희열.카카오엔터테인먼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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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산책.

낯선 듯 닮은 두 단어가 만나 아름다운 밤 산책이 탄생했다.

어둠 속에서 더 반짝이는 별빛처럼, 밤을 만나 산책은 더 깊고 다정해졌다.



한낮의 풍경이 선명하고 쨍한 사진 같다면, 밤의 거리는 아름다운 것만 남기고 아웃포커싱 된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몰랐던 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시야는 흐릿한데 감각은 한층 예민하게 깨어난다. 바람이, 나무와 꽃이, 공기의 질감이 거리마다 새롭게 말을 걸어온다.

프롤로그_ P.4



숙한 풍경이 낯설어지는 시간.

낮과 밤은 같은 공간을 다른 감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 준다.

밤을 천천히 걸으며 한낮의 눈부심에 놓쳤던 풍경들을 새삼 더듬어 본다.


밤 산책, 시작!





희열 님의 감성이 밤과 산책을 만나 한 권의 책이 되었다.

서울의 밤을 사계절을 통과하며 걸은 흔적이다.

다정하고 깊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바라본 눈빛이 글에서도 읽혔다.

나도 모르게 문장을 쓰다듬고는 했다.


괜히 긴장하며 걷게 되는 밤길을 이렇게 느긋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다니.

밤의 산책이 가지는 묘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길을 잘 모른다.

서울의 얼굴도 잘 모른다.

낮의 얼굴도 모르는 내가 밤의 얼굴을 궁금해할 일이 있었을까.

그저 낯설고 복잡하고 높고 빽빽한 건물들로 서울을 기억할 뿐이었다.


희열 님이 들려주는 서울은 좀 달랐다.

마치 작은 소도시의 골목처럼 정답고 친근했다.

내가 본 차갑고 높고 단단하고 번쩍이던 빌딩 숲은 어딜 가고, 오래되고 좁은 골목길이 이렇게도 많은 걸까.

나는 지금껏 서울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골목을 산책한다는 건 세월의 두께를 헤아리는 동시에, 나이를 먹어가며 달라진 나의 시선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했다.

프롤로그_ P.4



오래되고 좁고,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골목길을 걸으며 '산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동안은 산책을 하러 일부러 계단이 이어지는 골목길을 선택해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공원이나 나무가 심어진 길, 하천, 그도 아니면 그냥 동네를 걷는 정도가 내 산책의 전부였다.

동과 동이 바뀌고, 골목을 걷다가 계단을 오르고,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긴 산책 길이 새롭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도 걸었다.

사람에 치이는 공간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단어가 '산책'인데, 희열님은 그 속에서도 변함없이 산책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하긴 사람이 없는 서울보단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서울이 더 익숙하긴 하다.

그게 진짜 서울의 익숙한 얼굴이기도 하고.


희열 님의 걸음을 함께 걷다가,

산책은 시간과 장소가 아니라 걷는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오래된 반짝임을 따라서 시간의 틈새를 걷다가

도시의 혈관이 지나는 길목에서 _ P133



산책은 우리를 사색하게 한다.

밤은 우리를 더 깊게 만든다.

그래서 밤의 산책길엔 더 깊고 은밀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을 듯하다.

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내 마음과만 대화 할 수 있는 시간.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시간들이 간절하다.

내 마음결을 쓰다듬을 수 있는 시간.

방치되어 있던 다친 마음 결들을 토닥 토닥 다독여줄 시간.


걷는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고 한다.

산책이 실제로 마음의 우울을 치료하는데 특효약이라고 하는데, 낮의 소란스러움보다 밤의 차분함이 좀 더 좋은 연고가 되어 주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 아래에서 새삼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길과 나무들.

그 속을 거닐며 한낮의 피로를 덜어내고, 나도 진짜 내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실 나는 밤을 좀 무서워한다.

밤에 혼자 느긋하게 산책을 하는 일이 내겐 조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동안 밤 산책의 매력에 빠져 어디든 걷고 싶어졌다.

당장은 혼자선 용기가 나지 않아 남편의 손이 필요하겠지만, 어느 날엔가 나 혼자 조용히 밤 산책을 즐기는 날을 기대해 본다.


종종 여름밤에는 남편과 함께 동네를 거닐곤 했다.

여름밤만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와 냄새가 밤을 희석해 줘서 어둠에 대한 두려움이 옅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봄밤도, 여름밤도, 가을밤도, 겨울밤도 모두 만나보고 싶다.


어둠과 불빛 아래, 계절을 덧입고 선 나무와 삶의 흔적들은 내게 어떤 말을 건네줄까.

그 속에서 나는 또 얼마나 깊어질 수 있을까.



이제는 안 하던 짓을 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접 걸어봐야 마주칠 수 있는 뜻밖의 풍경을

좀 더 많이 보며 살고 싶어졌다.

그러면 낯설고 새로운 풍경들 속에서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

빛과 물과 가을이 쉼 없이 노래하는 밤 _ P.173





채널S에서 '밤을 걷는 밤'을 방영 중이다.

덕분에 책과 함께 희열님이 걸었던 곳들을 좀 더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영상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과 글만이 전해주는 울림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서 두 배는 더 좋았다.

물론 글에서 좀 더 유희열만의 느낌이 짙다.

토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글 쪽으로 좀 더 마음이 기울 것만 같다.

그가 바라본 세상을 TV로 함께 보고, 그가 사색한 흔적들을 책으로 더듬으며 함께 '산책'을 할 수 있었던 시간.

새롭고 특별한 밤 산책이었다.


TV에서 방영이 종료되더라도 사실 책만으로도 충분히 밤 산책의 여운을 즐길 수 있다.

아름다운 밤의 사진과 그가 걸었던 길들을 지도로 그려 담아두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의 손을 잡고 밤 산책 속으로 빠져들기에 충분하다.

(심지어 일러스트를 그리신 분께서 희열님을 똑 닮은 캐릭터를 책 곳곳에 심어 놓으셔서 볼 때마다 웃음이ㅎㅎ)

아마 서울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추억여행이 되어 줄 것 같다.

물론 나처럼 서울이 낯선 사람들에게도 그 낯섦으로 새로운 밤 산책길이 되어 줄 것이다.


잠들기 전 침대에서 희열 님의 손을 잡고 떠난 밤 산책길.

촉촉하고 말랑해지는 밤이었다.



길은 언제나 삶을 가로지른다

길은 언제나 삶을 가로지른다 _ p.101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개인적인 느낌대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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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긴 어게인 - 삶의 연습이 끝나고 비로소 최고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버니 S. 시겔 외 지음, 강이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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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를 믿는가?


이 질문 앞에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아주 흔쾌히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명확히 '아니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아마 애매모호한 답을 할 것 같다.


믿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함에도 그 존재를 믿는.


신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삶의 곳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커다란 손길을 느낀다.

우리의 삶과 죽음, 그 시작과 끝에 신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넘어선 어떤 순간에도 신의 손길이 닿는다.

도저히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이 없는 삶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본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렇게 곳곳에 스며든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의사이고, 누구보다도 더 과학을 믿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의 존재를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

그리고 삶의 곳곳에 존재하는 신의 존재에 답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은 '하나님'이거나 '부처님'이거나 '알라신'이라 불리는 어떤 종교단체의 특정한 존재가 아닌 더 넓고 커다란 존재를 의미한다.

모든 삶에 깃들어 있고, 누구의 마음에도 늘 함께하는 공기 같은 존재.

이를테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고 했던 말의 그 '온 우주'같은 존재 말이다.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내가 생각하는 '신'은 굉장히 좁은 의미로서의 '신'이었던 것 같다.

종교에 묶이고, 종교적 행위를 할 때 만날 수 있는 존재.

수없이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그들이 믿는 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를 어떤 이름 안에 가두어 생각했었나 보다.

'영성'에 관한 외국의 책을 읽다 보면 그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종교의 틀 안에 갇히기에는 너무 크고 넓은 존재인 것 같다.

특정한 이름으로 지칭될 필요조차 없는 어떤 무한의 존재, 우리가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어느 곳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가까운 존재,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의 얼굴이다.



우리는 공기 없이 살 수 없음에도 그 존재를 또렷하게 의식하지 못한 채 숨을 쉬며 살아간다.

그러다 공기가 희박한 장소나 상황에서 숨이 막혀올 때, 고통에 몸부림치며 공기의 존재를 온몸으로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신을 찾게 되는 순간도 비슷하다.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순간, 우리는 우리를 넘어선 어떤 존재에게 묻는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과 절망을 주느냐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나를 이 고통과 절망에서 구원해 달라고.


그렇다.

우리는 그저 잊고 있었을 뿐, 늘 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모른체했지만 알고 있었고,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신에게 손을 뻗는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신은 귀머거리인가 의심하기도 하고, 답해주지 않는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저자는 신의 걸음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희망이나 행복 안에서뿐 아니라 절망과 좌절 앞에서도 신의 뜻을 읽어야 한다.

원망과 분노를 내려놓고 나를 고통의 길 위에 서 있게 한 이유를 깊이 헤아려보아야 한다.

지금 당장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분노와 절망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신과 조우할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가다듬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의 뜻대로'라는 말이 참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금 슬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큰 위로가 또 있을까 싶다.

절망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절망을 넘어선 다음 걸음 또한 이미 안배해 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라기보다는 신의 걸음이 지금 이곳을 지나라고 했기에 절망을 건너는 중이라면 적어도 나 자신을 스스로 찌르고 피 흘리지는 않으리라.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지금이 너무 고통스러운 사람들.

오늘이 너무 힘든 사람들.

견뎌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은 잃은 슬픔에 잠식당해버린 사람들.


신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만 같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는 책이기는 하지만 치유와 다독임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뭐든 괜찮다고 다독이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오래도록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만 자책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쪽에 가까웠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그 이후의 세계를 믿고 싶어졌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그러므로 죽음을 너무 깊이 슬퍼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내게 필요했던가 보다.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원망하고 미워할 대상이 되어주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 간절히 희망을 찾을 때 그 희망의 이름이 되어줄 절대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신을 만들어 냈든,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든 무엇이 중요하랴.

그 신의 걸음이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걸음을 따라 걸어야 할 것이다.

저자가 그렇게 신의 걸음을 따라 걸으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오늘 신이 내게 열어준 문은 어떤 곳으로 나를 이끌어 줄까.

적어도 슬픔으로부터는 그만 벗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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