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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웃는 아이였다. 그 웃는 모습 때문에, 눈웃음친다고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웃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웃지 못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웃고 싶은 일에 웃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커가면서 점점 웃음은 줄어들었다. 웃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웃음에 인색해졌다는 것밖에는... 웃음이 줄어들었던 그때, 같이 줄어든 게 있었다. 웃는 것만큼이나 우는 일도 많지 않았다. 슬프고 아프면 울어도 되는 거였는데, 점점 그 울음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다. 울면 안 되는 순간이 많아진 거다. 남들이 볼까 봐, 혹시 그 눈물에 계산이 있다고 생각할까 봐, 자존심이 상해서. 혼자 참 많이도 계산했다. 계산기를 마구 두드려보니 울면 안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진 건, 감각이 둔해져서이기도 하다. ‘그게 울 일인가?’ 하는 생각이 감정에 파고들었을 때, 울음은 약해지고 사라졌다. 울 여유가 없다고 여겼던 거다. 사는 일에 치여서 눈물 따윈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날들. 어떤 이유로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눈물은, 일상에서 그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눈물이 그리워지는, 한번 울고 나면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해질 것 같은 날이 있다. 습관이란 게 무섭기도 하지. 이상하게도 그런 날마저 눈물은 잘 나지 않더라는. 그럴 때는 눈물도 감정도 너무 메말라버린 삶에 괜히 화가 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을 버티고 넘어가는 일에 눈물이 답은 아니지만, 눈물이 풀어주는 게 분명 있다는 걸 아는데도 울지 못하는 것도 답답하고, 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일상이 마냥 아쉬워서... 그런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서였나. 『아주, 조금 울었다』의 저자 권미선은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아니, 어쩌면 그 누군가와 같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처럼 눈물이 필요한 순간을 풀어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오롯이 혼자’일 때 꺼내놓을 수 있는 마음을 들려준다. 혼자여도, 뭐가 잘 맞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외로워질 때 같은, 이대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순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밀려오는 감정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종착역으로 가 닿으려고만 애쓰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하나도 안 괜찮은 마음으로 남아있을 때. ‘어떻게 하지?’ 라는 물음에 터져버린 답.

 

 

그냥 혼자여도 괜찮았는데,

누군가를 찾았을 때 대답이 없다는 건,

외로워지는 일이다.

그땐 진짜 혼자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럼, 원래부터 혼자인 존재는 외롭지 않을까? (아주, 조금 울었다 15페이지)

 

 

말들이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거든.

우리는 잘 모를 때 말을 더 많이 하게 돼.

잘 모르니까 애쓰는 거야.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주, 조금 울었다 32페이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울고 싶을 때, 울어야만 하는 때를 그대로 확인하는 기분이 들어서 순간순간 울컥해지는 문장들이 담겼다. 안 되는 거 아는데도 쉽게 포기가 안 될 때, 헤어졌다는 걸 인지하는데도 문득 생각나서 힘들 때, 일상이 버거워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계속 아플 때. 일부러 찾지 않아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그리움, 외로움의 시간이 콕콕 파고드는 순간들이 덩어리가 되어 올 때.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올 감정도 아니고, 머물지 말라고 해서 떠날 감정도 아닌 것들을 해결할 방법이 되기도 하는. 애써 참았던,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버리면서 느슨해지는 일이 필요할 때 ‘조금’이 아니라 ‘많이’, ‘펑펑’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혼자인 시간에, 혼자이기 때문에 울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꼭꼭 닫아두지 말고 문고리 하나 살짝 풀었더니 쏟아지는 건 자동. 차마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내지 못한 진심이, 나와 마주하게 된 순간에 고백처럼 토해져 나오고야 마는, 그렇게 울어도 되는 일이었던 것을 왜 몰랐을까. 내가 봐주면 되는 거였는데 말이지.

 

 

그녀는 펴지지 않는 우산을 손에 들고,

길 한복판에 서서 그렇게 울었다.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울음이 터질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울어야 한다.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울지라도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울고 나면, 그리고 비가 그치고 나면

그녀의 인생에도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주, 조금 울었다 161페이지)

 

 

참아야 하는 게 많아지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눈물도 참아야 할 목록에 담아져버렸다. 누가 참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참다 보니, 뭔가 자꾸 쌓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가슴 속에 쌓이기만 했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전에, 미처 꺼내놓지 못한 진심을 마주하고 싶을 때 울어도 좋겠다고, 아마도 작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에서 번져 나오는 건 깊은 곳에서 끌어낸 마음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그 마음이 읽힌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닌가? 들어달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마음 때문에 공감하는 거니까. 눈물 섞인, 물기 가득 촉촉한 문장으로 마음을 읽는 시간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울어도 좋은 거니까, 안심하고 둑 터지듯 실컷 울어보라고...

 

 

이런 부족의 이야기가 있다.

카리브 해에 산다는 그 부족은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는 언제든 새로운 남자와 함께 살 수도 있다.

만약 새로 살고 싶은 남자가 생기면,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남자의 짐을 싸서 문 앞에 놓아둔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자는 그 보따리를 보고 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그래서 떠나야 한다는 걸.

그럼 남자는 보따리를 안고 울면서 어머니 집으로 되돌아간다.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이별의 순간들이 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제 그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울면서 떠나고 있었다. (아주, 조금 울었다 108~10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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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8-01-2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바껴서 또 사고 싶어지는 간사한 마음이;;;;

구단씨 2018-01-26 17:17   좋아요 0 | URL
아, 표지가 바뀐 건가요? 저는 원래 표지가 이런줄 알았어요.
도서관에서 읽어서 원래의 표지 디자인을 몰랐네요. ^^;;;
 

 

 

 

 

 

 

 

 

 

“사람이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디디 않아요.”

진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보태서 써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 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눔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

“…네.”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아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노인은 진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보태서 쓴다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보태서 쓰기까지 어느 정도의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좋아하는 소설 속 구절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사실 잘 안 된다. 애인이든 친구든 동료든,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도 어려워서 관계를 끊기도 하는 일이 새삼스럽지 않다. 매번 불편하고 힘든 그 관계를 정리하고, 또 다른 인연을 시작하고 또 정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에서 항상 줄다리기하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이 사람을 보태서 쓴다고 생각하면 만날 수나 있을까? 만나다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서 헤어지기도 하겠지. 정말 이필관 옹의 말처럼 보태서라도 쓰고 싶은 애정이 남아 있을 때 계속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거겠지. 다만,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머릿속의 수많은 갈등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힘들다는 거다. 그러면 관계의 정리 여부를 선택을 하는 시기는 또 언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다.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느끼게 되지만, 그 순간에는 잘 알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관계의 한 부분이 그러했다. 어떤 일에 익숙해지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일. 혹은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어도 체하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일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마주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의 편안함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까 계속 생각했다. 같은 집에 태어나서 같이 자라고 사는 가족이어야만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그저 오직 한 가지,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도 가능한 관계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일을 앞에 두고 매번 이런 게 어려웠다. 편해지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지를.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민낯을 드러내고, 어떤 힘듦과 괴로움으로 속이 상하는지 말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건 정석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겪어보니 그렇더라. 이런 방식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때에만 결과로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우리 친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으로 알게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너와 친해지기 위해 내가 이런 노력을 계속해왔구나, 하는 확인과 안도 같은 감정까지도. 그래서인지, 나이를 계속 먹어갈수록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힘들었다. 처세술처럼, 어느 순간을 통과하기 위해 가면 하나를 쓰고 사는 날이 많았다. 상대방(들)과 굳이 친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시 안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고, 계속 보게 된다고 해도 또 그 순간을 넘어갈 대응을 보이면 되는 거였다. 어른들을 만나도, 또래를 만나도, 언젠가부터 그랬다. 적당한 예의로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과 연관된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되곤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난 주말에 집안일 때문에 어떤 분을 만나게 됐다. 잠깐 인사만 하고 나오면 충분할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그분과 차를 한 잔 마시게 됐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가 아니었는데, 인사하고 뒤돌아서서 나오면 되는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자리였고, 불편한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혹시 보게 된다면 불편할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혹시 눈물이 나오더라도 꾹 참아야 할 자리에서 나는 추하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는데, 그분은 나에게 울지 말라는 말도 안 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괜히 울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나보다 인생 더 살아온 사람이니 분명 더 많이 쌓아온 게 있을 터였다. 그분 역시 세상 쉽게 살아오지는 않았겠지. 어떤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상담자와 내담자로 만난 기분이었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을까. 정의하기 모호한 관계가 되었고, 불편한 것을 아닌 척하며 한 번 더 만날 일이 생겼다. 싸우자는 자세로 나갔는데, 오히려 미안한 일을 더 보태고 와버렸다. 원하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은 여전했고, 그들은 자기들의 오지랖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처럼 기뻐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고 싸우고 화나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결국은 그들의 오지랖을 내가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걱정에 머리를 싸매고 두통을 이고 사는 날들이다. 남들이 펼쳐놓은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게 화가 나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만 쌓이고, 가능하면 누구라도 상처를 덜 받게(아주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요즘의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인생 뭐가 이렇게 어렵냐 싶은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 또 누구에게 투정 부리면서 민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은 이 모순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남들이 펴놓은 장기판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기 말이 된 것만 같아서 너무 아프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다독이고 위로하며 건너갈 수 있을까 하던 중에 보게 된 이웃님의 리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한 문장 때문에, 완전하게는 아니어도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그가 찾고 있는 비유에 거의 다가간 것 같다.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섬에 있는 서점, 301페이지)

 

우리는 단편집이야. 우리는 단편집이야.. 우리는 단편집이야... 그러네. 살아오는 순간순간들의 단편이 모여서 단편집으로 만들어지는 게 우리 인생이었네. 기다란 장편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겠지만, 우리가 단편집이라는 저 문장을 보자마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로를 받은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어렵다고 징징거리고, 왜 남이 만들어놓은 힘든 일의 정리를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화를 내는 일도, 짧은 단편처럼 금방 읽고 덮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이 순간을 넘어가는 일도 인생의 한 부분이겠거니, 그 마무리가 더 고통스러운 일로 변할지 몰라도 단편 하나의 마지막 페이지이겠거니, 하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워질 일들이 인생이겠구나 싶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과 이렇게라도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거라면,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 가끔은 슬프고, 아프고, 힘들겠지만, 이 순간이 단편소설이 되어 넘어갈 거로 생각하면 참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은, 보살 같은 마음으로 지금은 건너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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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가깝고 먼 사이. 대개 이런 사이는 가족이란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주변에서 지켜본바, 대개 엄마와 딸 사이가 그렇다. 모녀처럼, 친구처럼 마음을 나눌 수 있고 길이를 잴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 반면, 그 거리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질 수 있는 불안을 아는 사이.

 

처음 제부가 집에 인사를 왔을 때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니(나)는 어머님이랑 정말 친한가 봐.' 단 몇 시간 만에 분위기 파악을 끝낸 제부 말처럼, 엄마와 나는 친구처럼 마치 세상에서 서로 의지할 단둘만 남은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사람에 대해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시선으로 먼저 상대를 평가하는 마음을 가진 때였다. 믿을 사람 없다고, 일단은 의심하고 보자는 눈으로 살아갈 때였다.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 때였으니, 유일하게 내가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사람이 엄마라고 여겼다. 언제까지나 그러지 않을까 생각했다. 또한, 언제까지나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고...

 

누가 누구를 소개하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착한 사람의 기준은 너무 주관적이어서 나에게 잘하면 착하고 좋은 사람이고, 나와 싸우거나 여러 가지로 어긋난 사람은 착한 사람이 아닌 거다. 철수는 영희에게 착한 사람일지 몰라도, 철수는 나에게 착한 사람이 아닐 수 있던 거다. 그런데도, 나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너무 착해서 바보처럼 누군가한테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내가 인연 맺고 사는 모든 상대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안다. 모두에게 그럴 수 없었을 테고, 의도하지 않았어도 나는 상대에게 착한 사람이 아닌 채로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에게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평생. 엄마에게 잘하지 못해서 나 자신을 죄인처럼 여길지라도, 나는 엄마에게 좋은 인간이 되고 싶은 거다. '그래도 내 딸이 나를 이해해주는구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는 공감을 가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으로 남을 거로 생각했다. 이제껏 그래왔다고 믿었다. 엄마와 나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아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같이 견뎌온 동지애로 살아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우리'가, 더는 '우리'가 아닌 것만 같다. 폭발하듯 두 여자가 울며불며 터졌다. 발단은 다른 사람의 오지랖 때문이었지만, 언제고 터질 일이 이때다 하고 터져버린 거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을 거다. 대책 없는 인생에 아픈 기억에, 어떤 기억으로 내일을 살아야 행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의 감정이 한껏 예민해지고 고조되었을 때. 엄마와 나는 그런 순간을 맞이했고, 더는 참을 수 없는 가슴 속 말들을 터트렸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모든 게 나의 잘못임을 안다. 이번 일로 누군가에게 사과도 해야 했다. 나에게 상처받은 그분은 괜찮다고, 잘 아는 사이이니 그 맘을 왜 모르겠느냐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그분께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터트리며 어른으로 대하지 못한 것까지 사과해야 했다. 이상했다. 오히려 사과는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마음의 씻어지지 못한 감정이 그 사과를 온전하게 만들지는 못한 듯하다. 다음 주에 찾아뵙겠다고 말하면 약속을 잡았지만, 그것도 안다. 엄마와 내가 이번 일로 더는 동지애가 쌓아질 수 없는 것처럼, 그분과 나도 존중하고 감사하는 사이로 더는 묶일 수 없을 것 같다. 사람에게 미안해지는 건 한순간인데, 그 미안함은 참 오래도 갈 것 같다.

 

엄마와 나는, 서로가 등 돌리면 바로 외로워질 사이가 되어버린 거다. 다른 딸들은 결혼해서 나가 살아도, 한번 보러 오려면 몇 시간씩 걸리는 곳에 살아도 별말씀 없던 엄마가, 내 결혼에 관해 얘기할 때면 늘 이런 말을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와 볼 수 있는, 그런 지척에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그랬던 우리였는데...

 

엄마와 같은 밥상에 마주하지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지냈다. 물론 밖에 나가서도 나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3일을 굶었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갈 데까지 가봐야 이 불편함이 끝이 나겠지. 그래도 자식이라고, 엄마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늦은 저녁까지 들어오지 않는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한 건 엄마였다. 늦었는데 왜 안 들어오느냐며, 저녁 차려놨으니 빨리 들어와서 먹으라고...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한참을 울다 보니 눈이 빨갛고 얼굴이 너무 부어서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그렇게 들어오고서도 나는 저녁을 먹지 않았다. 비어버린 위장이 배고픔의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버린 오늘. 거의 일주일 만에 엄마와 같은 밥상에 마주했다. 엄마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던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서로가 어색하게 말을 섞고 있지만, 우리는 안다. 예전과 같지 않음을. 동지에서 동거인으로 이름을 바꿔 불러도 이상할 게 없는 사이가 되었음을.

 

엄마와 딸.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지만, 한번 틀어지면 화해가 어려운 가장 먼 사이가 된다는 걸 증명하는 관계다. 적어도 내가 보고 겪은 엄마와 딸은 그렇다. 가장 밀접하고, 아끼고, 친해서 유지되던 관계가 한 번의 어긋남으로 친하기 전의 사이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방송이나 책에서 보던 여러 사례가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바로 여기,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었던 거다. 다만, 그동안 내가 겪지 않았고, 겪을 겨를이 없었던 것뿐이다. 나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근거 없이 자신했던 마음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누구보다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장 많이 가진 서로인,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사이였던 것을.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몇 권을 꺼내 들었다. 그중에서도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던 신달자의 책을 가장 먼저 펼쳤다. 작가의 말처럼, 엄마 역시 딸의 행복을 바라며 했던 많은 행동, 말이었을 거다. 그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걸 이해하기 위해 뭐라고 읽어야 했다. 평소에 열 마디를 하는 우리였다면, 지금은 한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우리다. 선뜻 어떤 말도 꺼내지 않는다. 실없는 말 한마디조차도. TV 뉴스를 보면서 같이 욕하던 일도, 영화 예고편을 보고 같이 보러 가자고 말하는 것도, 같이 목욕탕에 가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일도, 가끔 낮술을 같이 즐기는 것도. 그동안 우리가 같이하던 그 어떤 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면, 이 순간의 아픔을 건너가지 못한다면, 나는 영영 엄마와 같이할 수 있는 게 없을 것만 같다. 엄마와, 엄마에게 말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말하는 연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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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4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4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7-10-24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 자식이 뭔지..

늦었는데 왜 안 들어오느냐며, 저녁 차려놨으니 빨리 들어와서 먹으라고..
말하는건 항상 엄마 ㅠㅠ

2017-10-26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 달 전부터 비공개로 ‘절망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다. 나 혼자 쓰고 나 혼자 보는 거다. 가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는 슬쩍 책 제목을 언급하며 주변 이웃에게 토로하기도 한다. ‘아, 진짜. 그 책 나랑 안 맞더라.' 하면서 말이다. 육두문자 섞인 욕을 대놓고 쓰지는 못하겠어서, 그 책이 왜 그렇게 별로였는지 혼자 적고 혼자 누르는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 그동안은 게을러서 아예 그런 목록 작성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작성하고 싶더라. 누구에게 대놓고 전달할 것도 아니지만, ‘앞으로 이런 제목, 이런 표지, 이 작가의 글은 피해야겠다.’는 나만의 기억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기껏 골라서 읽은 책이 ‘절망’의 기분을 안겨준다는 게 슬퍼서 자꾸 곱씹게 된다. 가만 안두겠어! (이미 읽고 나서 기분 나쁜데 가만 안 두면 뭐 어쩌려고? 읽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하려고?)

 

곰곰 생각해보니, 사실 그런 느낌(별로였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책을 제대로 고르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내 취향인가 하는 고민, 그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살펴보려고 하는 노력, 무슨 목적으로 그 책을 선택하려고 하는지 하는 확신이나 이유 같은 거를 확인하지 않은 채로, 특히 외형만 보고 골랐던 책에서 그런 느낌을 종종 받았던 것 같다. 책이 목적이 되지 않고 다른 이유가 책을 고르는 목적이 되어버리니, 그 책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 특히 책의 디자인, 책의 제목 때문에 골랐던 경우 후회할 때가 많았다. ‘어머, 이 표지 너무 예뻐!’라던가, ‘무슨 책의 제목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라는 듯한 호기심과 호들갑에 맞이했던 책들. 말하고 보니 모두 예쁘다는 이유로 골랐던 게 되어버렸네. 쩝~

 

 

 

 

 

 

 

 

 

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외형을 무시할 수는 없는데, 어느 날 가슴을 파고 들어온 제목에 설렐 수밖에 없는데, 역시 사람이나 책이나 외형보다는 내면의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까? 줌파 라히리의 두 번째 산문집 <책이 입은 옷>을 읽으면서, 책의 외형을 대하는 마음이 더 오락가락해졌다. 독자가 아닌 작가가 보는 책의 디자인을 대하는 자세를 듣고 보니 책의 외형을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거다.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또 이렇게 다른 느낌을 받는 건가 보다. 그동안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펼친 적은 많았으나 완독한 적이 없어서 그녀의 작품이 어떤 느낌이라고 한마디로 말하는 건 어려웠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녀의 작품 분위기가 어떤 느낌일 것이다.’ 라는 추측은 가능하게 됐다. 시니컬하고, 담백하다. 뭔가 할 말 다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닌 듯하다. 지나고 나서, '이런 말을 해야 했는데!'라고 머리 콩콩 찧어가며 후회하거나, 끝까지 말해도 관철될 수 없는 일에 양보하면서 속상해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의 말을 옆에서 듣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책의 표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녀가 그랬다. ^^

 

완벽한 표지는 뭘까? 존재하지 않는다. 표지 대부분은 우리의 옷처럼 영원히 계속되지 않는다. 표지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날짜가 새겨지고 난 뒤 특정한 시간 동안에만 사랑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면 옛날 번역을 다시 번역해야 하듯 표지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바꿀 필요학 있다. 책에 활력을 주기 위해, 책을 좀 더 현실감 나게 하기 위해 새 표지를 입어야 한다. 새로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는 것은 바로 원래 언어로 적혀진 오리지널 텍스트다. (책이 입은 옷 79페이지)

 

'책이 입은 옷'이라는 제목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읽기 시작했는데, 단순히 책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특히 그녀가 자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작가로서 그녀가 책의 표지에 많은 관심과 애착을 두는 이유도 이해가 된다. 벵골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그녀가 자라면서 겪었을 많은 혼란이 그대로 드러난다. 보통의 미국 소녀처럼 입기 원했던 그녀에게 엄마는 인도 전통 의상을 강요했다. 엄마의 사고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미국에서 사는 인도 사람, 이방인으로 보였을 그녀가 학교나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내왔을지 저절로 그려진다. 때와 장소에 맞게 적당한 옷을 입어야 하는 일은 일상인데, 그녀에게는 그 '옷을 고른다.'는 고민이 계속됐다. 차라리 교복 같은 유니폼이 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 옷으로 남들이 보는 나를 생각한다. 옷과 책표지. 다르지만 닮은 두 가지를 작가는 참 맛깔나게 이야기한다.

 

내용에 걸맞은 표지는 내 말이 세상을 걸어가는 동안, 독자들과 만나러 가는 동안 내 말을 감싸주는 우아하고 따뜻하며 예쁜 외투 같다.

잘못된 표지는 거추장스럽고 숨 막히는 옷이다. 아니면 너무 작아 몸에 맞지 않는 스웨터다.

아름다운 표지는 기쁨을 준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해주는 느낌이다.

보기 흉한 표지는 날 싫어하는 적 같다. (책이 입은 옷 25페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책표지와 그녀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책표지의 의미는 닮았으나, 독자와 작가의 차이만큼 다른 점도 있더라. 예쁘고 책의 내용과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는 표지를 보면 만족스럽고, 책표지와 내용이 다른 느낌이어서 와 닿지 않는다는 마음에 서운하기도 한 건 독자의 마음이다. 내가 쓴 글의 많은 것을 표현해주는 이미지를 표지로 삼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내 의견이 그대로 반영되지 못해서 포기해야 하거나,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 만족스러운 표지를 만나는 건 작가의 기쁨인 것 정도의 차이. 둘을 모두 만족하게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긴 하다. 어떨 때는 책표지가 충동구매의 원인이 되기도 하니, 글과 책표지가 하나의 길로 독자에게 가는 길은 꽤 어려운 듯하다.

 

<책이 입은 옷>은 작가의 글과 책표지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작가와 표지 디자이너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책표지와 예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작가의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글 쓰는 과정이 꿈이라면 표지는 꿈에서 깨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글과 표지의 만족도가 같아지는 게 어렵다고 생각된다. 동시에 작가는 글과 책표지를 자신의 성장 과정의 옷 입기와 연결하면서,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되는 인식의 차이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나로 보이는 유니폼이어서 좋은 점, 또 그렇게 일률적이어서 찾기 어려운 차이점들을 생각한다. 특이한 것은 작가는 어렸을 적 도서관에서 봤던 '발가벗은 책'을 그리워하기도 하는데, 도서관 이용자들이 많이 공감할 듯하다. ^^ 내가 찾던 책이 비치 중인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결국 사서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내가 착각한 거였다. 책표지가 있던 상태의 책 색깔만 생각하고 찾다가, 책표지가 벗겨진 채로 서가에 꽂힌 책을 못 본 거였다. 작가는, 자유롭게 책을 읽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꺼낸 말이겠지만, 나는 나의 실수담으로 더 와 닿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도서관의 모든 책을 책표지를 입은 채로 비치해달라고 하면, 책의 비닐커버를 씌우는 또 한 번의 작업이 필요한 것 같아서 강력하게 요구하지는 못하겠던데, 그건 도서관만의 차이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 도서관은 본관 포함해서 5개의 도서관이 있는데, 같은 책도 어느 도서관에서는 커버를 벗기고 비치해놓고, 어느 도서관은 책표지 그대로 비닐커버 씌워서 비치해놨더라는. 각 도서관의 입고 담당자가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많은 도서관의 책은 줌파 라히리가 말한 것처럼 옷을 벗은 책 상태로 비치되어 있을 거다.

 

표지의 역할과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완벽하게 만족하지 못할 감정을 떠올려본다. 작가가 말하는 책표지의 상업적인 역할도 충분히 공감한다. 표지가 책의 내용을 충분히 반영해야 하지만, 아름다운 표지의 매력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는 것. 책과 표지가 말하는 게 달라 진실과 거짓이 대립할 수도 있기에 작가는 바란다. 표지가 자신의 책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해주기를.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정체성 사이에서 보는 책과 표지의 관계로 작가가 평생 겪어왔던 갈등을 연결하며 하는 이야기에 불편함은 없다. 다만, 앞으로도 그 갈등을 계속 확인하고 고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표지가 단순히 책의 의미나 내용을 반영하는 세상에 살지 않는다. 오늘날 표지는 책에서 또 다른 비중을 차지한다. 표지는 미적인 목적보다 상업적 목적이 더 크다. 표지가 책의 성공 혹은 실패를 결정한다. (책이 입은 옷 41페이지)

 

 

 

 

 

 

 

 

 

 

 

나는 이은규의 시집 <다정한 호칭>을 읽었으나 사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번에 마리몬드 콜라보 버전으로 나온 책표지가 예뻐서 사고 말았다. 나름대로 이유를 붙여가면서 말이다. '이미 읽었지만 굳이 사고 싶기도 했어, 가끔 생각나기도 했거든, 그런데 굳이 살 필요까지 있을까 고민하면서 사지 않았는데, 이번 표지는 너무 예쁘잖아, 그러니 이번에 사야 해, 원래 다시 읽고 싶었던 거잖아?!' 이런 마음으로 그 책을 사는 것에 후회나 충동구매보다는 기쁨과 만족을 끼워 넣었다. 절망의 리스트를 열심히 작성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표지의 상업적 목적에 충분히 빠져든 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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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늙어갈 수 없을까? (맞춤육체 238페이지)

 

정아은의 소설 『맨 얼굴의 사랑』은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조성환과 글을 쓰려고 하지만 일단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서경이 주인공이다. 이서경은 소설의 캐릭터 연구를 위해 환자로 위장하고 조성환에게 성형수술 상담을 받는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작가 지망생이었던 이서경은 흐지부지한 글쓰기를 일단 멈추고 조성환의 추천으로 그의 성형외과에 상담실장으로 일한다. 어느 날 이서경은 조성환이 집도하는 가슴 성형 수술에 참관한다. 아무래도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 나면, 상담을 좀 더 사실적으로 성실하게 할 수 있을 듯했다. 말로만 듣고 상담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크게 날 테니. 생생하게 눈으로 목격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묘사된 가슴 성형 수술 장면이다.

 

가슴 밑을 메스로 긋자 옥수수 알갱이처럼 생긴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호사가 집게로 벌려 준 일자로 난 틈새에 조성환이 기구를 넣어 공간을 넓혔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긴 송곳 모양의 기구가 위아래를 쑤시면서 보형물이 들어갈 공간을 확보했다. 제법 큰 부피의 공간이 마련되자 조성환이 벌어진 구멍을 들여다보더니 간호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중략) 조성환은 으음 하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작은 동굴 안으로 보형물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동굴이라고 해 봤자 엄지손가락 하나나 들어갈까 싶은 작은 공간이었다. 그보다 몇 배는 돼 보이는 보형물이 순식간에 가슴 조직 안으로 밀려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곡선을 만들어 냈다. 조성환은 바로 봉합에 들어갔고, 민첩한 솜씨로 입을 벌리고 있던 동굴 입구를 닫아 버렸다.

다른 쪽 가슴에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른 양쪽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술 전 그어 놓은 마킹 자국과 번진 핏자국, 방금 꿰맨 자국으로 너저분한 상태였지만 환자의 가슴은 사이즈와 형태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핀셋과 실을 간호사에게 넘긴 조성환이 한손으로 여자의 유두를 잡아 올리더니 나머지 한 손으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순간 외설스러운 상상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좋겠구나, 저 여자는. (맨 얼굴의 사랑 218~219페이지)

 

소설이니까, 실제 소설을 쓴다고 해도 수술실에 들어가 참관한다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작가가 그냥 두루뭉술하게 서술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소설에서는 가슴 성형 장면이 상당히 세세하게 묘사됐다. 가슴 수술을 정말 이렇게 하는 건가? (나도 직접 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없지만, 정말 이럴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장면을 쓸 수 있지? 이렇게 적나라하게? 소설 속 이서경처럼 나도 묘사된 그 장면을 보고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장면이 생생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는 가슴 성형 부분을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를 참고했다고 한다. 궁금해서 노엘 샤틀레의 『맞춤육체』까지 펼쳐보게 된 거다. 부제가 '성형 수술 세계로의 여행'이다. 성형수술이 궁금하다면 딱 펼쳐 봐도 좋을 거 아니겠나? 물론 나는 아직 그 성형 수술에 관심이 많거나 어떤 부분을 고치고 싶은 간절함이 하늘을 찌르지는 않았으나, 이런 내용을 들을 기회가 흔하지는 않을 터이니 생각난 김에 읽어보고 싶었다. 정아은 작가가 소설에 인용한 부분은 『맞춤육체』의 초반부에 나온다. 그 부분을 보는 순간 궁금증은 더 커진 거고. 코는 어떻게 수술할까? 눈은? 지방 흡입은? 그 외에 여러 부위의 성형 수술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노엘 샤틀레는 몇 곳의 병원을 방문하면서 성형 수술 전과 후의 환자를 면담했다. 성형 수술 직전의 환자를 만나기도 하고, 수술 후 퇴원한 환자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오래전 성형 수술 경험을 한 환자도 만났다. 어쩌면 저자의 성형수술 관찰기는 어떤 내용이 나올지 뻔한 느낌도 있었지만, 막상 읽어가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는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저자가 방문한 병원에서는 심리상담사가 있다는 거다. 의사와 면담하기 전 환자는 반드시 심리상담사를 거쳐야 한다. 물론 일반 병원에서도 진료 접수를 할 때 어디가 아파서 방문한 것인지 묻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성형외과의 심리상담사의 역할은 그보다 큰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심리상담사는 환자가 원하는 수술의 이유나 부위를 이야기하면서 조금 더 환자를 살펴본다. 수술의 이유에 더 집중하면서 보는 듯하다. 그러고 나서 의사와의 면담 시간이 정해진다. 정아은의 소설에서 이서경의 역할도 비슷했다. 그녀는 상담실장이라는 직함으로 환자를 상담한다. 그렇게 상담실장을 통한 1차 상담이 끝나고 각 수술 부위에 적합한 의사에게 2차로 상담받을 시간이 정해지는 거였다. 모든 성형외과가 이런 절차를 거친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아직 내가 성형외과에 방문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소설과 취재로 말하는 내용을 믿기로 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노엘 샤틀레가 방문한 병원의 '심리상담사들'에게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들은 의사를 만나기 전의 환자를 면담하고, 상태를 확인하고 기록한다. 의사는 진료할 때 그 상담 내용을 참고하고 환자를 관찰하는데, 환자가 바라는 성형이 의학적인 이유가 아닐 때, 지금의 상태도 충분한데 욕심껏 성형을 원할 때, 수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정신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수술을 거절한다. 어느 정도 살펴보면 이 환자의 문제가 외모인지 정신적인 문제인지 보이는 거다. 그럴 때 다시 심리상담사에게 환자를 인계한다. 외과적 수술로 치료할 이유가 없는 환자들이기에.

 

처음 사례로 등장한 가슴 성형 환자의 이야기가 정아은의 소설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여자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를 낳기 전의 자기 가슴을 그리워했다. 남편은 반대했지만, 여자는 지금 이 수술을 해야만 했다. (사실, 남편과 같이 상담한 순간 더 알게 되는 이들 부부의 성격이나 사생활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수술을 했고, 저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가 자기 가슴 수술에 참관한 것을 알았던 여자는 저자에게 묻는다. 자기 가슴 수술이 어땠느냐고. 저자는 그 환자에게 수술은 놀라웠다고 말했다. 그 순간,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들어왔다. 보형물 외피에 연결된 호스를 빼낼 순간이었다. 나는 멀찌감치 물러섰다.

나는 C부인의 고통스런 외침을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상처로 괴로워하는 짐승의 외침이었다. 호스가 보였다. 나는 그것이 가슴의 어느 부분에 뾰족한 낚시 바늘 같은 닻을 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갑자기 다리가 풀리고 무기력해져서 옆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바로 이것이 성형수술이다. 생생한 상처의 폭력에 복종해야 하는 육체. 바로 이 육체는 달라지려는 욕망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고 구원의 외침을 날카롭게 내지르는 것이다. (맞춤 육체 22~23페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상기시키는 부분이었다. 성형수술의 이유와 과정에서 육체의 고통이 빠질 수가 없는 거였다. 수술 후 육체가 마음에 드는, 완벽한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할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가슴 수술을 한 C부인은 퇴원하고서도 고통을 겪었다. 최소 몇 달을 그런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는 그 고통이 사라지고 보형물이 들어간 가슴을 더 만족하게 될 순간이 오겠지. 그녀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으리라.

 

첫 번째 절개가 이루어진 후 지방 덩어리 속으로 들어간 흡입 기구가 거칠게 왔다갔다하면서 일어나는 끔찍한 그 느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지방이 배의 내벽으로부터 붉게 물든 혼합물로 축출되는 것, 그리고 나서 호스를 따라 병에 담기는 것을 어떻게 흥분하지 않고 서술할 수 있을까?

저 물질들을 지방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생각하자. 영혼으로부터 뽑혀져 나오는 고통, 지방의 모습으로 저장 용기에 가득 채워짐으로써 마침내 사라질 고통.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맞춤육체 153페이지)

 

다양한 부위의 성형이 등장한다. 대머리, 주름 제거, 코, 가슴 등. 미용 성형인지 재건 성형인지 구분이 모호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미용 성형에 관련된 부위였다. (화상으로 가슴 수술을 한 여자아이도 등장하는 걸 보면 성형이라는 분야를 거부감으로 채우는 게 다는 아니라는 것. 재건 성형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지울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 듣게 되는 성형의 이유가 참 아팠다. 예쁜 몸을 더 예쁘게 하려는 목적만 등장했다면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환자마다 각자의 히스토리가 있었다. 주름 제거 수술을 원하던 여자는 남편의 바람기와 그가 던진 살인 같은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당신은 너무 늙었어." 이 말이 비수가 되어 그녀가 수술을 선택하게 했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에게 너무 집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가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 두지 않음에 불안했다. 급기야 너무 늙었다는 말까지 들었다. 성형 수술이라는 방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기 몸의 주름이 사라지고 늙은 외모가 조금 더 젊어진다면 남편이 자기에게 다시 시선을 주지 않을까 바랐던 거다. 남편에게 집착하고 사랑에 갈구하던 여자의 선택은 성형이었다. 오직 한 가지. 자기 몸과 정신을 남편의 사랑으로 다시 채우고 싶어서.

아버지의 코와 닮았다는 남자는 자기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지우고 싶어서 코 수술을 했다. 아버지와의 모든 관계를 벗어나고 싶었던 거였다. 23살부터 36살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10번의 수술을 했다. 그래서 10번의 수술로 그는 만족할 수 있었을까? 혹시 또 한 번의 수술로 아버지의 기억과 완전한 이별을 이뤄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생겼다. 가슴 속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성형 수술. 그게 완전한 답이자 치료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이밖에도 많은 성형 수술 환자의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드는 생각은 -저자도 같은 얘기를 했지만- 결핍과 사랑이 성형수술로 이끄는 부분이 많다. 물론 성형 수술 환자의 모두가 그런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듣다 보면, 정말로 그 이유가 가장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 때문에 선택하는 성형. 사랑받기 위해서,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건 아니냐고... 수술의 남용과 방지를 위해서, 걱정 때문에 심리상담사가 존재하는 걸 보면, 환자의 불안과 결핍을 없애주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는 역할이 아닐까 한다. 성형 수술이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심리상담사일 거라고. 애슐리 몬테규의 『터칭』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촉각, 인간의 피부에 접촉되는 감각으로 존중과 배려, 아껴지고 있다는 느낌을 찾을 수 있다는 말. 접촉을 통해 사랑을 느끼는 게 우리를 건강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좀 더 다양하고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내가 그 책에서 느낀 가장 큰 부분이다. 우리 몸을 덮고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피부가 스킨십을 통해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다. 외모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감정들이 우리를 건강하고 사랑받게 한다는 느낌이다. 수술을 통해 외모의 변형이 사랑을 만들거나 완벽한 육체를 선사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와 닮은 듯하다.

 

나는 여자들이 아름다워지고 결점을 고치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육체를 내밀고, 의사가 그 피부라는 옷감에 실시하는 작업을 본 이후로, 정말로 우리가 외모에 관한 욕구의 한 단계를 정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속임은 더 이상 옷이나 화장, 액세서리에 제한되지 않는다. 눈속임은 이제 의복과 액세서리가 된 살 자체를 정복하고 있다. (맞춤육체 56페이지)

 

성형은 분명 삶에 도움이 되는, 필요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성형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막연한 거부감이 먼저 생기곤 했다. 여기를 좀 고쳤으면 더 예쁠 텐데, 더는 굶어도 빠지지 않는 뱃살의 지방을 좀 뽑을 수는 없을까, 눈이 좀 작아진 것 같은데 어떻게 쌍꺼풀이라도, 안 그래도 작은 가슴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은데 내 가슴에도 보형물을? 많은 생각과 상상을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 가끔 보는 부작용의 모습들이 성형 후 나의 모습이 될까 봐 무서워서 감히 엄두를 못 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이대로 사는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그대로 살아내 보자, 하는 긍정의 주문을 걸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완벽을 위한 욕망이 아닌 숨겨진 사연들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성형이 답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에게 그들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면 나도 성형외과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젊음에 대한 욕망을 꿈꾸다가도 세월의 흐름과 같이 가는 얼굴의 주름이 괜찮아 보이기도 한다면서 한번 웃고 마는 결론에 이를 때가 더 많지만 말이지.

 

성형수술이 모든 사회 계층으로 확산될 거라는 예감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논리적이다. 즉 수십 년 전부터 이러한 의학적 발달의 혜택은 여성의 외모라는 문제에 집중되었지만 이제는 남자들과 학생들,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것 역시 달리 보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메스로 손쉽게 고칠 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평생 감수하면서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시술을 통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아름다움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양에 대한 과대평가에는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일종의 끔찍한 면이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맞춤육체 211페이지)

 

저자의 취재로 듣는 성형에 관한 좀 더 깊고 넓은 이해. 무엇보다 성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수술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성형외과는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성형이 인생을 바꿀 거라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성형이 옳다 그르다 하는 이분법적 결론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렇게 편 가르듯 간단하게 말할 수 있었다면 오늘도 성형을 고민하는 사람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균형 감각의 유지를 말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 것도 같다. 우리 몸과 정신을 살필 수 있는 심리적 의미와 질문을 계속하면서 글을 맺었다. 수술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비슷한 사례를 들려주며 선택의 책임을 묻기도 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성형을 선택해야만 하는 고민도 언급한다. 성형과 관련한 업종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다면 잘 알지 못한, 성형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시술 후 이야기를 같이 들려줌으로써 여러모로 문제를 인식하게 한다. 영원한 물음표로 계속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볍게 농담처럼 말했던 성형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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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8-2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 님, 먼저 좋은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근래에 접하기 어려웠던 성찰과 사색을 던져주는 글입니다. 정말 구단씨 님의 글 「육체를 맞춤할 수 있다면, 삶도 맞춘 것처럼 바뀔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저 또한 요즘 성형에 관한 생각을 나름 깊게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 접점이 딱 맞아떨어지는 글을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요. 정말 놀랍고도 흥미롭습니다. 윗글에서 구단씨 님의 성형에 관한 일종의 실존적 고민과 성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숨 막히듯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은 과장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구단씨 님 윗글을 읽으면서 분명 그런 느낌을 느꼈습니다. 성형 시술자(성형외과의사), 성형 심리상담사, 성형 당사자, 성형 관찰자들 각각의 시각으로 성형을 여러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 이면 혹은 속사정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형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과 피상적 인식을 뚫고 들어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아니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던/못했던 성형의 비밀과 사연과 고민을 귀 기울여 듣게 합니다. 나아가 깊은 철학적 사색으로까지 이끄는군요. 우리 각자는 고유의 형태 혹은 형상을 지니고 있죠. 그것이 고유하다는 의미는 불변하는 정보로서 유전자에(DNA에) 각인돼 있다는 것이죠. 우리 몸의 형태는 동그라미(원), 세모, 네모 등등의 형태적 구성요소들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완성이 된다고 볼 수 있죠. 그 비율이 유전자에 들어 있는 정보일 텐데요. 그 정보 내용들이 개인마다 존재마다 다르다는 것이죠. 헌데 성형은 (즉 여기에서 논의되고 있는 외과적 성형은) 그 정보 내용을 원천적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대개의 경우 (특히 족보 등 뿌리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경우) 원본, 원형, 원천적인 것, 근원적인 것, 본질적인 것 따위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전자나 DNA에 내재된 원본·원형·본질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성형이 외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의 발로인 것이라면 우리는 자기모순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성형은 외형적 가치 중시의 발로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죠. 위 구단씨 님의 글에서 이러한 점은 충분히 드러났다고 봅니다. 성형이 불가피한 선택, 필수불가결한 처방(치료), 혹은 실존적 결단일 수도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으니까요. 해서 저는 이런 상황을 꿈꿔봅니다. 내 정체성(identity) 혹은 인격 동일성, 존재적 고유성을 결정짓는 유전적 정보, 그 원천적 정보의 코드를 선택적으로 바꾸거나, 수정하거나, 교체하거나, 조정하는 그런 가능 세계를 꿈꿔봅니다. 요컨대 외형만을 바꾸는 불완전한 성형에서 원형을 바꾸는 근본적 성형이 가능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이건 헛된 욕망일 수 있죠. 너무나 공상적이거나 혹은 망상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의 외과적 성형이 외형적 가치를 중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런 공상/망상은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요? 외형을 바꾸기보다는 근원으로 돌아가 원형과 본질을 바꾸고 싶다는 갈망을 저렇게 표현해 본 것입니다. 이런 사유를 전개하다 보니 수많은 논제와 개념들이 빗발치듯 마음 속에 몰아치네요. 요즘 화젯거리인 인공지능(AI), 유발 하라리의 Data 개념, 일론 머스크의 AI 종말론, 레이 커즈와일의 2045년 특이점(singularity) 도래 예측, 사이보그(cyborg), 앤드로이드(android), 섹스 로봇(sex robots, sexbots) 등등과 관련지어 성형(plastic surgery) 개념에 대한 사유를 더 깊이 파고들고 싶은데요. 하지만 일단 여기서 마무리짓겠습니다. 막상 깊게 고민하던 문제가 눈앞에 딱 나타나면 갑자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워지는 때가 있어요. 지금도 그런 순간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구단씨 님의 윗글은 너무나 깊은 사유의 글이고, 또 그런 깊은 사유로 이끄는 글인 듯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구단씨 님 덕분에 성형이란 논제 혹은 개념을 조금은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한 듯도 합니다.

2017-08-26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제베도 2017-09-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은 글 읽었습니다. 내가 참 무식하구나...생각하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qualia님의 글도 좋구요.
아...난 무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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