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이 뭔데? - 한 장애인이 청소년에게 묻는다 장애공감 1318
쿠라모토 토모아키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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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 영화를 보려고 극장이 있는 빌딩으로 들어섰다. 매표소는 4층. 마침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1층에 멈춰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니 빨리 올라가겠구나 싶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뿐인데, 내가 너무 놀라서 당황했었나 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한 명 있었다. 분명 그도 놀랐을 텐데, 놀란 것보다는 미안해서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왜?’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 했던 거다. 너무 놀란 나의 제스처가 그를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3층을 눌러달라고 했다. 그도 나처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건데 3층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로 문은 닫혔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냥 서 있었던 거다. 그가 앉은 상태로 보면, 팔이 그의 가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아, 그래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 안에서 혼자 얼마나 애가 타고 있었을까. 보통 엘리베이터 안에는 층수 누르는 버튼이 문 쪽으로 세로로 만들어져 있고, 벽 쪽으로 안전 바와 나란히 가로로도 있어야 했는데, 왜 그런지 그 건물 엘리베이터는 층수 누르는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다. 그냥 습관적으로 타고, 누르고, 내리곤 했던 터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 건물 엘리베이터에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없다는 것을, 엘리베이터에는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거기 엘리베이터가 2대 있었는데 한쪽에는 가로 버튼이 있었다. 그때 내가 탄 쪽 엘리베이터에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였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3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몇 초 동안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는 무안함을 감추며 아니라고, 오히려 내가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어서 당연히 안에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놀랐다고,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그가 전동 휠체어를 작동해서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전에 어느 방송인이 자국의 장애인 정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서비스, 정부 정책 같은 걸 시행할 때 당사자인 장애인이 그 기획 단계에서부터 같이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무엇이 불편하고 필요한 것인지 피부로 직접 닿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참여가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은 그 몇 초의 경험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도 그 빌딩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엘리베이터였다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장애에 관한 책 몇 권을 일부러 찾아봤다. 쿠라모토 토모아키의 『보통이 뭔데?』는 나에게 그날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한울림스페셜의 '장애공감 1318'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시각장애인인 저자가 자라오면서, 일상을 지내면서 겪은 시선을 이야기한다. 내가 알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가 정작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날 내가 봤던 일과 그로 인한 생각을 이 책이 그대로 말하고 있던 거다. '네가 그냥 생각하는 것과 직접 부딪혀서 알게 된 것은 이렇게 달라.'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가 '보통'이라고 정한 기준에서 익숙한 것들이,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 '그 보통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보통의 전제가 처음부터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일부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비장애인에게 치우친 보통의 개념이 장애인에게는 보통이 아닌 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반대로 장애인의 기준으로 '보통'이 이루어지면 비장애인은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보통의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보통이란 기준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 '보통'을 실현하면서 '공생'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너무 당연하고.

 

저자의 경험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상대를 배려한다고 했던 게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인 쿠라모토 토모아키는 시각장애인이다. 약시에서 전맹으로 진행된 경우다. 어렸을 적 그가 약시였을 때, 친구들과 야구를 했던 기억은 즐거웠지만 '참여'한다는 의미를 상실한 놀이였다. 약시인 그를 배려하며 진행된 야구,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친구들은 야구의 규정을 약간 변형했다. 그에게 공이 날아들 확률이 적은 자리로 수비를 배치해주었고, 그의 자리로 공이 날아오면 옆의 수비수가 대신 공을 받아주곤 했다. 타자로 그가 마운드에 섰을 때는 투수가 가까운 거리로 와서 공을 던져주었다. 친구들은 같이 하기 위해 그에게 이런 배려를 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참여의 의미가 상실된 야구였을 뿐이다. 어른이 된 그가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은 맹인용 지팡이를 짚은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지하철 안에서 잘 안 보이는 통로를 걸어 서 있을 자리가 필요했던 건데,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동을 취했던 거다. 그가 말하길,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아니니 굳이 자리 양보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선로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몸이 다치게 된다. 이때 생각할 건, 사람들의 구조정신이 아니라 지하철을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스크린도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필요한 안전장치가 아니겠는가.) 건물의 문턱을 없애 휠체어가 잘 다닐 수 있게,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저상버스를 운행하는 등 배리어 프리가 많이 적용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 공생에 가까이 왔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비장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숨기거나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것이 비교적 쉬운 때문인지, 경도인 사람이 장애가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중도장애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장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장애가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조금이라도 비장애인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82페이지)

 

시각장애인만 놓고 보면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이 그나마 나을 것이다, 또 청각장애인이라면 조금은 들리는 사람이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장애가 심하면 더 힘들고 심하지 않을수록 덜 힘들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해서 어려움도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경도장애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어렵거니와 어중간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무리를 해야 해서 오히려 중도장애인보다 더 힘든 점이 있습니다. (99~100페이지)

 

특히 저자의 이야기에서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경도장애와 중도장애의 차이에 관해서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경도', '중도' 장애라고 부른다. 장애의 정도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차이로 장애의 정도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한데다,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오해가 경도장애가 중도장애보다 불편함이 '덜' 할 거라는 거다. 저자의 경우 약시보다 전맹이 더 심한 장애라는 오해에 대해 말한다. 내 생각도 그랬다. 희미하지만 약간 보이는 것과 아주 안 보이는 것 중에서 약시가 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신체의 장애를 겪지 않은 나의 착각이었다. '덜' 불편한 것과 '더' 불편한 것의 차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약시일 때의 불편함, 전맹일 때의 불편함이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장애에 대해 알고 있던 약간의 이론마저 온전히 알지 못했던 거다. 내 머릿속에 있던 장애에 대한 지식을 다 지우고 다시 새겨 넣어야 하는 거였다.

 

‘이럴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이렇다’라고 이론으로만 들어왔던 것은 ‘이렇구나!’라고 실제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의 몇 초가 나에게 얼마나 귀한 경험을 허락했는지 알겠다. 실제의 경험과 생각, 시선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됐던 거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경험일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경험은 아닐 터.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무심한 시선을 가진 나에게 일부러 찾아와준, 두 번 만나기는 어려운 아주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에 대해, 세상을 향해 관심 좀 두라고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통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시선을 알게 하고, 공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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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1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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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구든 어느 나라든, 안과 밖의 모습이 다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20여 년의 시간 동안 들어온 목소리를 그대로 전하는 저자의 마음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또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역시나...

 

이제는 낯선 이름이다. 소련. 분명 내가 자랄 때 들어왔던 이름인데, 지금은 사라진 단어처럼 들린다. 소련이 무너지고 변할 거라 믿었던 사람들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한 증언으로 가득 채운 이야기다. 그 긴 시간 저자가 들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막상 그들의 삶을 듣고 있노라니 이상하다. 혼란 그 자체였다. 겉으로는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인데 그들 내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분명하지 않지만, 또 강한 어떤 목소리. 그 혼란의 시간을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증언으로 풀어간다. 무너진 소비에트 연방. 그렇게 공산주의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바로 열릴 거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세상은 쉽게, 금방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들이 살아온 세상은 그랬다. 이도 저도 아닌,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삶으로 볼 수 있는 건 풀어야 할 많은 숙제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저자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그들만이 겪은 사회, 감정, 그들만의 생각을 말한다. 붕괴한 공산주의, 밀려든 자본주의와 돈, 아직 남아 있는 공산주의의 향수. 뭔가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은 듯하지만, 그 시간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모르지도 않을 것 같다. 생활에 직접 영향은 크지 않겠으나, 그 크지 않음이 서서히 쌓여가고 있음을 감지하는 건 가능하니까. 그게 한꺼번에 작용하는 순간이 오면 그 무너짐은 더 크게 다가올 것일 테니.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은 끄덕이면서, 잘 모르겠는 내용은 조금 더 읽어보려 애쓰면서 머리와 마음에 담으려 애썼다. 공산주의 국가를 살면서 공평하지 못했던 삶이 아이러니였고, 그 계급의 차이에 물음표도 던져본다.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게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들이 지향했던 세상은 도대체 뭐였을까.

 

1990년대 그 세상이 붕괴하면서 드러나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비치던 것은 욕망의 연장선이었다. 바뀐 세상에서도 큰 변화가 없을 바탕이었다. 희망을 품고 살아가려는 세상 그 기저에 깔린 고통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에 희생자가 늘어날 뿐이다. 저자가 만나고 인터뷰한 사람들은 다양했다. 공산당 간부부터 평범한 일반인까지, 그들이 겪은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그 시간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같은 목소리로 하는 얘기는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소비에트 시대의 마지막 증언들이라고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들의 증언이 품고 있는 건,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처 적응하지 못한 사회에 스며들지 못하고 향수를 불러오는 감정이 남았다. 과거로의 회귀가 답인 것처럼 여기는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 뒤로 돌아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시대에 발 묶인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순간이다.

 

모든 변화의 목적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것이어야 할 텐데,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세상에서 여전히 혼란을 겪는 목소리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인터뷰를 조금씩 들으면서 아직 찾지 못한 답을 구해야 할 것이 남은 듯하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종말이 하고 싶은 말은 비단 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기에.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려는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기에.

 

많이 무거운 이야기였다. 이해가 쉽지도 않았다. 내가 여전히 그 이해에 다다르지 못한 부분이 많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혼란의 시간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서, 그 이해에 가까이 가고자 노력할 뿐이었다. 그 노력은 여전히 남아있는 숙제이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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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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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영화가 아니라 원작부터 읽었어야 했다. 유감이지만, 나는 아직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다. 오랜 시간 읽고 싶은 도서 목록에 올려놓고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아쉬운 대로 몇 년 전에 영화로 《위대한 개츠비》의 목마름을 대신 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오랜 시간 들어왔던 개츠비 이야기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보는 눈요기까지, 뭐 이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이 책을 읽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개츠비를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 거다. 도대체 한 작품, 한 작가를 어느 정도 좋아해야 이 정도의 열정을 뿜어낼 수 있는지 궁금해서다. 저자가 뿜어대는 개츠비 사랑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잖나.

 

읽다 보니 개츠비가 전부는 아니었다. 한 작품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듯했다. 작품 속 배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시대상은 기본이고, 작품 속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사람을 읽는다. 그런 것을 넘어서서 작가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기분이 들게 한다. 피츠제럴드에게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작품 속 문장들은 현실 속 그와 어떤 교감을 나누는지, 그의 아내와 딸에게 어떤 삶을 허락했는지 하는 것들. 출간 당시에는 별로 드러나지 못했던 작품인데 왜 오랜 시간이 흘러 기다렸다는 듯이 개츠비 붐이 일었는지, 이 책을 쓰기까지 개츠비를 몇 번이나 정독했는지 하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다. 읽는 것에 머물 수 없는 저자의 마음을 한껏 듣는 재미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삶을 언급할 때다. 한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 글을 쓴 작가의 삶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한다. 피츠제럴드의 삶, 가난과 가족과 글에 관한 이야기는 개츠비의 삶과 닮았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떼려야 뗄 수 없게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에 자신을 투영한 듯하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으로 비치기 쉬운 《위대한 개츠비》가 ‘계급을 다룬 미국의 소설 중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보인 문장들의 해석 같은 부분은 읽을 때마다 고개를 절래 흔들게 한다. 애정이 넘쳐 매력이라 발견한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은 것처럼 골라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라고 생각했는데, 부지런해야 덕후질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이다. 연애도 부지런한 사람이 잘하는 것처럼,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사랑하는 것 역시 그 부지런함과 호기심, 열정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개츠비》를 쉰 번도 넘게 읽었다는, 개츠비 사랑의 끝판왕으로 등극한 저자의 말은 이 책 한 권으로도 증명되고 남는다. 저자 스스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굳이 몇 번 읽었다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 책만으로 충분히 그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참으로 덕후다운 모습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것에서 끝내지 않은, 그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그걸 파헤치기 위해 전국 어디든 향했던 저자의 열정은 ‘나는 이렇게, 이 정도로 개츠비를, 피츠제럴드를 사랑한다오~’ 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한 작품과 한 작가에서 머무르지 않고 곧 넓은 시선을 갖게 한다. 그건 이 책의 부제처럼 고전을 읽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저 책 한 권 읽는 것에서 끝내지 못할, 그 책에 대한 무한한 발견이 이어지는 책 읽기를 고전 읽는 방법으로 직접 보여준다.

 

피츠제럴드의 글쓰기(와 그의 인생)에 흐르는 위대한 주제는,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물 밖으로 머리를 계속 내밀고 있기 위해 노력하는 일의 고귀함이다. 피츠제럴드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소설의 주인공 ‘딕 다이버’(이름은 비록 만화책에 나오는 바보 같지만)는 그의 작품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가 창조한 최고의 인물들은 들뜬 채로 인생이라는 물에 대책 없이 뛰어들고, 그다음엔 떠 있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그들은 대부분 바닥에 완전히 잠기지는 않더라도, 밑으로 가라앉는다. 돈 문제로 인한 걱정, 그들을 집어삼키는 욕망, 과거의 무게 등이 물귀신처럼 그들을 아래로 잡아당긴다. (49~50페이지)

 

지극히 사적인 독서 양상을 보는 듯하지만, 그렇게 사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들린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보이는 저자의 행동이 귀엽다고 여겨질 정도다. 그때 꼭 그걸 보려고 그렇게 추운데도 기다려야 했어? 아, 질문이 어리석다. 불필요한 질문이다. 저자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일 테니. 그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개츠비 사랑을 마구 뿜어대는 저자의 발걸음은 그때 극장을 향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그게 진리라는 것을. ^^ 그 열정으로 찾게 된 책과 자신의 삶 역시도 포함된다.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으로 비로소 한 사람의 인생을 제대로 본 것 같이 느꼈던 듯하다. 그건 ‘개츠비’라는 한 남자뿐만 아니라 그 작품 속 여러 인물들, 피츠제럴드, 그리고 개츠비를 읽는 독자를 포함해서 해당한다. 몇 초의 시간이라도 저마다 그 안에서 녹아든 자신의 모습과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을 만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보고 더 빈틈없이 읽고 싶기 때문에, 1년쯤의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다시금 피할 수 없이 《개츠비》를 뽑아들게 될 것이다.” (376페이지)

 

아직 나는 그런 책을 만나지 못했다. 가끔 생각나면 한 번씩 다시 꺼내보는 책은 있지만, 저자처럼 오직 한 작품을 쉰 번도 넘게 읽을 만큼 애정을 줄 책이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뭐, 평생 그런 책이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겠지만, 저자의 열정을 보고 있노라니 살아가면서 그런 책 한 권쯤 나에게도 있었으면 싶다. 책을 좋아하고 계속 읽게 되겠지만, 그 안에서 이렇게 내 마음을 몽땅 퍼부어도 될 만한 한 권을 만난다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서, 책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기다려본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순간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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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행복해지고 싶지만 길을 몰라 헤매는 당신에게
법륜 지음, 최승미 그림 / 나무의마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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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타인과 연결된 관계의 어려움이나 앞날의 걱정이 주는 공포, 내가 겪는 가족과의 갈등, 세상일의 많은 것이 누구에게나 어려웠을 거다. 그 모든 일 역시 내려놓음으로 달라질 것을 안다. 그 '내려놓음'의 다양한 의미와 형태도 잘 알겠는데, 한 번도 쉽지 않았다. 말로는 가능한데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건 스님의 말씀처럼 욕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만큼 채워지지 않아서 더 무거워진다는 결론을 얻게 하는 책이다. 정말 가능할까? 매번 의심의 눈초리로 이런 글을 대하면서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3주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간다. 한번 가면 5~6시간을 검사와 진료로, 치료받고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진다. 갈 때마다 지친다. 병원 가기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부모한테 그걸 못하나,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 그 부모와 어떤 관계이냐 하는 게 문제다. 우리집의 가장은 엄마였고, 부모도 엄마였다. 우리 형제들은 한 번도 가장이고 부모였던 적이 없던, 존재 이유를 몰랐던 아버지에게 분노하며 자랐다. 이제 와 몸이 병들어 힘들어지니 가족들에게 뒤처리를 던져놓고 아버지 대우받으려 한다. 항상 화가 났다. 특히 남겨진 가족인 엄마와 나는, 오래된 집의 한겨울 웃풍에도 방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야 할 정도의 열을 품고 산다. 그런 화를 끌어안고 매번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는 건 나다. 갈 때마다 생각한다. 왜 내가 해야 하지? 죽을 것처럼 하기 싫은데, 미칠 것 같은데... 웃긴 건,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의 답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화가 나고 욕이 나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계속 이렇게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화를 끌어안고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아버지와 나는, 병원 대기실에서도 누가 보면 일행인지 모를 정도로 떨어져 앉는다. 유독 대기 시간이 길었던 어제, 멀찍이 떨어져 앉은 아버지를 보니 꾸벅꾸벅 졸고 계시더라.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는데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한부로 죽어가는 몸,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지팡이에 의지하고, 부실한 치아로 죽을 넘기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싸해졌다. 싸움도 복수도 되지 않을 상대를 앞에 놓고 지금 내가 무얼 하는 건가 싶었다. 순간, 미움과 분노로 가득 채운 지금 내 마음이 너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한번 웃어보지도 못하고 좋은 시간 흘려보내고 있다는 두려움까지. 변하지 않을 아버지의 모습과 이 상황에 나의 불행과 화가 겹쳐 보였다. 이대로라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순간도 행복해지지 않겠지. 내 안의 화가 사라질 날이 없겠지. 아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이 화가 수그러들지 장담할 수 없을 듯하다. 그때는 또 그때의 분노와 후회가 나를 갉아먹을 것만 같다. 결국, 행복을 위해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바꿀 일만 남았다는 건가?

 

결국 모든 상처는 그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누가 상처를 줘서가 아니에요.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상처받고, 그 상처를 내면에 품고 있다가 때때로 꺼내보면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85페이지)

 

그때 자꾸만 생각나는 말. 작년에 만났던 신경과 선생님도 그랬고, 지난달에 만난 친구도 그랬다. 조금만 내려놓으라고. '내려놓으면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지만, 현실회피는 재발한다'며 이제는 스님까지 내려놓으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쉽지도 않기에 반복해서 듣는 말이다. 그 내려놓음이 누구에게나 같은 모양으로 적용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일 테고. 어제 하루 내가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했던 생각을 떠올려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풀리지 않은 상태로 계속 기다리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안쓰러워진다는 것을. 내가 내려놓은 것들로 내 위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다. 쉽지 않을 것도 안다. 그동안 많이 겪어봤으니까. 다만, 그 과정의 어려움이 조금씩 옅어지기를 바라면서 믿고 싶은 거다. 불가능이 아닌 가능이라는 말로 나를 채우고 싶어져서다. 가까이서 악다구니 써가며 싸울 때는 안 보이던 것이, 지금처럼 한 발 떨어져서 보니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라도 하나씩 배워가며 조금씩 내 안의 불행을 걷어내는 일. 그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걷어낸 불행의 자리에, 행복이 조금씩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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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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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았는데 읽다 보니 재밌다. 저자의 전작 『동사의 맛』은 크게 관심도 없었기에 도서관에서 초반부를 읽다가 만 것을 보면, 이번 책이 내 눈에 들어올 만한 이유가 없었는데도 쉽게 잘 읽힌다. 문장을 쓸 때 자주 실수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은 기본이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듯한 말투가 듣기 좋다.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들리지 않아서 좋다는 거다. 이런 책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저자가 하는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어서 특별할 게 없는데도, 이런 이야기를 또다시 듣게 되는 이유는 그 실수를 반복해서 하는 나를 알고 있어서다. 특히 예시로 든 문장들이 너무 흔한 문장들이어서 그런 걸까.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계속 뜨끔거려 혼났다. 아, 이런 고질병.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건 익숙해서라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 내가 자주 쓰는 단어이고 익숙하게 사용하는 문장들이서, 그게 ‘이상’하다고 느낄 이유가 사라지는 거다. 이게 왜? 뭐가? 어디가 이상해? 이런 말이 부끄럽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 무시할 때도 많았다. 나는 게으른 독자이기도 하지만, 게으른 리뷰어니까. ㅠㅠ 귀에 딱지가 앉게 듣는 말도 자주 까먹고, 몇 번을 들어도 ‘그런 말이 있었나?’ 싶게 집중해서 듣지 못할 때가 많고, 알아도 귀찮아서 손대지 않을 때도 있다. 저자는 문장을 손보는 여러 가지 이유와 방법을 말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우선 필요한 건 게으름을 탈피하는 거다. 두 번 세 번, 그것도 부족하다면 열 번이라도 보고 무엇이 이상한지 계속 살펴보는 반복이 필요하다. 그래야 저자가 하는 말에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듯하다.

 

문제는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쓰는 데 있다. 어떤 표현은 한번 쓰면 그 편리함에 중독되어 자꾸 쓰게 된다. (22페이지)

 

이십 년 넘게 남의 문장을 다듬어온 저자다. 문장을 다듬는 일에 법칙이나 원칙이 분명하진 않지만, 문장 안에 반복해서 등장하고 문장을 어색하게 만드는 표현은 주의해야 할 표현목록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목록이 바로 이 책이라고. 뭘 자꾸 더해서가 아니라, 내가 써놓은 문장에서 어색한 표현들을 발견하고, 그걸 빼거나 대체해서 깔끔한 문장을 만든다. ‘좋은 문장은 주로 빼기를 통해 만들어진다.(33페이지)’는 말을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 단어(문장)를 빼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뺄 건 빼고 간결하게 만든다. ‘-적’, ‘-의’, ‘것’, ‘들’과 같은 말만 빼도 문장이 훨씬 좋아진다고, 필요 없는 요소를 가능하면 덜어내는 게 좋은 문장을 만드는 기본이라고 한다. (많이 들어봤쥬?) 아, 이렇게 다시 강조되는 말을 듣고 있자니 기본 중의 기본을 왜 자꾸 잊는 건지. 게다가 ‘있다’로 어색해지는 문장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이렇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외국어에서 온 표현이라도 필요하다면 쓸 수 있지만, 한국어 표현을 어색하게 만들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문장을 쓸 때 특히 더 주의해야 할 동사와 명사 등을 언급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좀 더 명확하고 잘 전달하게 한다.

 

이 책은 이렇더라, 하는 것보다 직접 펼쳐보고 자기 경험에 맞춰 골라내어 활용해도 좋겠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들에서 어디 하나 틀린 게 없는 듯하나, 자기가 고수하는 방식과 다를 수 있으니 굳이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춰보면 나 같은 경우 저자의 지적이 반복되어 들려와도 괜찮다는 거다. 내가 생각했던 것들, 알고 있는 것들을 이렇게 다시 들으며 한 번 더 따끔해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방법 중간에 작가와 교정자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들이 주고받는 메일에서 보게 되는 것도 교정 교열에 관한 내용이어서 볼만하다. 빨간 펜으로 그어지고 삭제되는 자리에 채워지는 문장들과 그 기준점을 살짝 엿볼 수도 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적인 문제까지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어떤 책의 문장이 저자 혼자 만들어낸 것은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전문가의 교정으로 문장이 어떻게 변해 내 앞에 놓여있는지 알게 되는 부분도 있다. 새삼 몰랐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비교해서 보니 더 확실하게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한 번 읽고 끝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잊을 때마다 한 번씩 꺼내서 살펴보고 싶은 책이다. (‘나’라는 인간을 내가 아니까...) 앞에서 나의 게으름에 반복하는 실수를 언급한 것처럼, 몇 번씩 보고 또 보는 노력을 해야만 좋은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결론이 뻔히 보이므로, 그 방법밖에는 없으므로. 분명 내가 썼는데 이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도 모르겠고, 한국 사람이라 한국말을 쓰고 있는데 이게 어색한지 어떤지도 모르겠는 때 펼쳐보면 좋겠다. 물론, 한 번에 완벽하게 배우고 적용하면서 실수를 없앨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별수 있나.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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