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다리 아저씨 허밍버드 클래식 7
진 웹스터 지음, 한유주 옮김 / 허밍버드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고전 속 진짜 선수, 그 아재... 『키다리 아저씨』
 
읽을 때마다 다른 부분이 보이는 게, 시끄러운 걸 싫어하면서도 그 수다스러움이 마냥 사랑스럽게 보이는 게 『키다리 아저씨』가 아닐까 싶다. 처음 읽을 때는 주디의 시선에서, 소녀에서 여자로 성장하는 시간의 흐름을 봤다면, 그 이후로 읽을 때마다 철저하게 저비스 씨(키다리 아저씨)의 마음을 읽게 된다. 내 것으로 만들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유치한 짓까지 저지르는 그 아재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거다. 그래서 몇 번을 읽어도 예쁜 소설이다. 친구 오빠, 옆집 오빠, 오빠 친구, 뭐 이런 오빠들이 오빠가 아니라 애인이 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 ^^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으로 대학에 가게 된 주디에게 주어진 숙제는 단 하나. 한 달에 한 번씩 후원자인 키다리 아저씨에게 편지를 쓰는 것. 뭐, 그렇게 어렵거나 부담스럽지는 않지? 별것도 아니잖아. 그냥 어떻게 학교생활 하고 있는지 써서 보내달라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겠어, 안 그래?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아니, 어쩌면 처음에 키다리 아저씨는 그냥 후원하는 아이가 제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이런 아이에게 미래를 그려주고 있어, 하는 뿌듯함 같은 거? 그런데 여기에서 바로 키다리 아저씨가 함정에 빠졌으니... 아니, 한 달에 한 번만 보내라는 편지를, 주디 너는 왜 그렇게 자주 보내니, 아재 마음 술렁이게? 미치겠네, 진짜.
 
주디의 수다스러움은 그녀의 모든 일상을 키다리 아저씨에게 알려주는 셈이 되었고, 무엇보다 주디의 진심이 팍팍 묻어나는 편지에 아저씨는 사랑에 빠지고야 만 거야. 얼굴도 한번 제대로 못 본 어린(!) 여자에게 푹 빠져버린 거지. 이거 안 되는데, 후원자로 시작해서 이게 뭔 말이여? 여기서 또 한 번, 보이지 않는 관계에서 시작된 사랑을 보게 되는데,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도 그랬잖아. 잘못 배달된 이메일로 시작된, 얼굴도 몰랐던 그들이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상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어떤 마음을 숨기고 있는지 저절로 보이는, 결국 마음을 빼앗기고 마는 일들. 여기서는 주디의 일방적인 보고에 가깝지만, 누구라도 이 아이에게 마음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주디의 주변에 슬슬 꼬이는 남자들이 신경이 쓰이고, 주디가 자기의 보호가 아닌 홀로서기를 시작하려니까 오는 서운함까지. 아, 아재~!! 어쩌면 좋아, 흑.
 
그래서 다가간다. 저비스 씨라는 가면을 쓴 채로, 조카를 만나러 왔다는 핑계로 주디를 감시하러. 은근슬쩍 작업하고 관리하면서 상대가 눈치 못 채게 말이다.
"전 줄리아와 샐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지만, 그분은 조카가 차를 너무 많이 마시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시더군요. 차를 너무 많이 마시면 과민해진다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우리는 둘이서만 학교 밖으로 나가 발코니에 마련된 작지만 근사한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머핀에 마멀레이드, 아이스크림, 거기다 케이크까지 먹었어요. 마침 사람들이 없었죠. 월말이라 학생들 용돈 떨어져 가는 때거든요." (88페이지)
괜히 조카 생각하면서, 조카가 차를 많이 마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 굳이, 주디 너는 지금 갈 필요가 없다고 붙잡으면서 말이지. 근데 주디한테는 왜 차를 마시라고 하냐고. 혹시 주디도 차를 많이 마시고 줄리아처럼 과민해지면 어쩌려고? 주디의 과민함은 받아줄 수 있다는 거야? (아재~ 속 보인다고, 응?)
 
샐리네 집에 다시 한 번 초대받았다는 말에 바로, 허락할 수 없다는 답장(비록 비서님이 보낸 거긴 하지만)을 보낸 거 봐라. 키다리 아저씨는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제발 답장 한 번만 보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그 흔한 인사 한 번 안 써주더니! 이럴 때만 총알 배송으로 답장을 보내는 거냐고.
"아저씨 비서님이 보낸 편지를 막 받았어요. 스미스 씨는 제가 맥브라이드 부인의 초대에 응하는 대신 지난여름처럼 록 윌로우 농장으로 가기를 바라신다고 하더군요.
왜죠? 왜죠? 아저씨, 대체 왜요?" (151페이지)
그러게요. 아재~ 대체 왜요? 왜 못 가게 하는 거예요? 아직은 간을 보고 있는 건가요? 나설 때가 아니라고? 지미 때문에 질투가 난다고 말도 못 하고 그냥 이유도 없이, 무조건, 아무튼 무조건 샐리네 집에 가지 말고 록 윌로우 농장으로 가라고 말해야만 했던 아재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닌데, 내가 주디라고 생각하니 정말 고구마 한 박스 먹은 것처럼 답답하네요, 정말... 아마도 이런 이유로 주디는 더 빨리 독립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방학에 친구네 집에 맘대로 놀러 가지도 못하는 이런 후원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얼른 경제적 독립을 해서 키다리 아저씨의 관리에서 벗어나자고 마음먹고 속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을지도 몰라. (아재~ 겁나지? ㅎㅎ)
 
그러더니 자기 매력을 어필하고 싶었던 마음은 있었나 보다. 비록 저비스 씨라는 대역(?) 뒤에 숨어 있지만, '나는 이런 남자야~' 하는 상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록 윌로우 농장으로 찾아와 주디와 시간을 보내면서, 유모처럼 자기 어린 모습을 그대로 기억하는 리지 아줌마에게 더는 자기를 아기 취급하지 말라고 하잖아.
"가 보세요, 리지 아줌마. 하시던 일이나 신경 쓰시라니까요. 더는 제게 이래라저래라 못 하신다고요. 전 다 컸어요." (168~169페이지)
아줌마, 자꾸 왜 이래요. 제가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자꾸만 저를 애기 취급하실 거예요? 저, 다 컸다고요. 하나하나 챙겨주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제가 좋아하는 저 여자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네? 그러니 제발, 아줌마 저리로 좀 가시라고요~!!! (저비스 씨는 리지 아줌마에게 눈빛으로 울먹였을 거야. 제발, 아줌마, 응? 내 연애가 성공하게 도와달라고요! 주디가 지미 같은 녀석은 생각하지도 못하게 말이에요!)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다. 주디는 점점 성장하고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운다. 숙녀가 되고, 어른이 된다. 유럽 여행이 아닌 패터슨 부인의 별장으로 가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주디의 결정에 속이 상한 아재. 저비스 씨로 빙의해서 주디 너는 유럽 여행을 꼭 가야 한다고, 교육의 일부라고 목적까지 심어주면서 설득하지만 현명한 주디는 그 그물에 덥석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아재 많이 삐진 것 같아) 
"아무튼 그분은 제가 유럽에 가야 한다고 고집하셨어요. 그것도 교육의 일부이니 거절할 생각은 접으라고 하셨죠. 또 그분도 같은 시기에 파리에 계실 테니, 가끔 보호자에게서 벗어나 멋지고 재미있고 이국적인 식당에서 같이 저녁을 들자고 하셨어요." (212페이지)
교육이라는 의미를 붙여 자기와 함께할 시간을 만들고자 했으나 주디가 한 번에 걸려들지 않자 절망한 키다리 아저씨. 더는 자기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더 자라고 독립하면 키다리 아저씨라는 존재는 작아질 거라는 걸 알았을까. 그래서 물질 공세로 방향을 바꿨나 보다. 아니면 정말 선물 17개의 마음이 꽉 차서 보낼 수밖에 없었거나...
"대체 생각이 있으신 거예요? 여자애 하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17개나 보내시면 안 된다는 걸 모르세요? 전 사회주의자라고요. 제발 기억해 주세요. 절 재벌로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226페이지)
아저씨, 주디는 사회주의자라 크리스마스 선물 17개가 싫다잖아요. 나에게 보내주지 그랬어요. (아재,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비싼 선물이 아니어도 됩니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자꾸 살이 찌려는지, 요즘 정준하 스테이크에 푹 빠졌어요. 끈적끈적하게 늘어져 올라오는 그 치즈에 침이 꿀떡꿀떡 넘어가요. 근데 살이 찐다고 엄마가 안 사줘요. ㅠㅠ) 매달 35달러의 용돈으로 시작한 주디에게 가끔 수표도 보내주고, 그러다 진짜 어마무시한 선물들까지 막 보내주고, 고아 소녀를 후원하겠다는 아재의 초심이 이렇게 변해도 돼요?
 
 
언제 읽어도 즐겁다. 다시 읽을 때마다 하나씩 다르게 보이는 것들도 있고, 괜히 설레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다시 보면 현실의 적나라함이 구석구석 묻어 있는 글이다. 그동안 작가 이력 자세히 볼 생각도 안 했는데, 이제야 알았다. 1876년에 태어난 진 웹스터는 1915년에 친오빠의 친구와 결혼했다고 한다. 진짜 오빠 친구랑 결혼했네. ㅎㅎ 근데 1916년에 딸을 낳고 며칠 후에 숨을 거두었다는 거. ㅠㅠ 저자의 인생이 정말 소설 같다.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자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여기다. 
"우리 주디,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261페이지)
이상하게 나는 이 부분에서 항상 눈길이 멈추게 된다. 주디가, 키다리 아저씨가 저비스 씨라는 걸 알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읽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서 말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소설의 마지막인 이 부분에서 한참 시선이 멈췄는데, 더 생생하게 자체 음성지원까지 되는 거다. 문장은 분명히 써진 그대로 눈에 보이는데, 왜 자꾸 수정된 다른 문장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이런 거 말이야.
"아이구~ 우리 주디,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생각은 하지 못해쪄여?(↗) 우쭈쭈쭈쭈~"
어떡하지? 이 음성지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키다리 아저씨는 아재 개그 정말 잘할 것 같아. ㅋㅋ)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1-09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0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뭐냐, 이거... 웃음 나게 어이없고, 허무해서 황당하다. 사내들이 추구하는 삶이 이랬단 말인가? 한탕 뛰고 세상의 꼭대기에 오를 거라고 믿으면서? 아무리 봐도 그냥 건달인데?

 

일단 이들의 이름부터 기억해야 한다. 연안파의 보스 양태식 사장. 양 사장의 오른팔 형근. 형근의 사랑 루돌프. 그 밑에 조직원인 듯 아닌듯한 울트라는 정식 조직원을 꿈꾼다. 삼류 포르노를 찍는 박 감독의 한쪽 발은 건달 세계에 걸쳐있고, 인력사무소 장다리는 탈세가 취미다. 엄 사장은 다이아몬드 사업을 끌고 와 양 사장을 꼬드긴다. 대리운전하는 삼인방은 노름에 빠져 박 감독에게 빚을 지고, 어디서 사기 칠 것만 그렇게 용케 찾아오는 뜨끈이는 만인의 표적이 되고...

 

어찌 되었든 이 소설은 울트라에서 시작해서 울트라로 끝난다. 벤츠를 세차해 오라는 보스(?)의 지시를 따르다가 진짜 보스를 두들겨 패고, 후환이 두려워 살아남고자 4층에서 뛰어내린 뒤로 울트라의 머리가 좀 이상해졌나 보다. 무슨 일만 시키면 왜 그렇게 칠칠찮게 구는지. 사설 경마에서 돈 좀 따보겠다는 자기들 두목의 심부름 하나 제대로 못 하고 삼십오 억짜리 종마를 훔쳐오면서 경상도 건달의 코털을 건드린다. 또 다이아몬드를 훔쳐온 또 다른 무리는 그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 건달들에게 둘러싸여 이것 동네 싸움에서 나라 간 전쟁이 된다.

 

말장난처럼 들리는 문장에서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이거 뭔가 싶을 때 다른 건달이 치고 들어와 난리가 나고,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싶어 콧김이 푹푹 날 때 어이없이 결판이 난다. 황당해서 웃음이 나는 거다. 하긴, 읽는 나보다 주인공들이 더 황당하겠지? 뭐 이렇게 꼬이나, 왜 그렇게 치고 들어오는 건 또 많은 건지, 각자의 욕심에 눈이 멀어 달려드는데 나라고 어찌 빠질 소냐. 이들에게 넘쳐나는 건 구라요, 온몸은 두꺼운 허세의 옷을 입고, 무식한 것들이 모여 서로 무식하다며 무시하네. 뒷골목 건달들은 원래 이런가? 그 속에 들어가 살아보지 못해 알 수 없으니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다만, 건달이란 단어에서 좀 가까이하기 싫은 공포도 좀 생기고 그래야 하는데, 왜 이렇게 짠한 웃음만 나게 하는 것이냐...

 

웃다가 보니, 그 웃음에 짠함이 자꾸 섞인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나이 드니 변하는 게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양 사장은 연희(지니)의 구라와 내숭을 알면서도 마음을 준다. 아버지의 지침대로 그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데 자꾸 믿고 싶어지는 건 늙어서라고 생각한다. 몸도 늙었지만 마음도 늙어서, 어느 순간 외로워져 버려서. 고양이 미니를 끌어안고 온기를 비비던 그가 한밤중에 잠옷 바람으로 미미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미미에게서라도 외로움을 달래야만 했던 거다. 연안파의 보스로 그 동네의 모든 권력을 쥔 것 같은 그가 도대체 얻지 못할 게 뭐라고. 남들 앞에서는 거만한 포스로 숨어있는 범인도 찾아내는 그가 돈이나 권력으로도 떨칠 수 없는 게 외로움이었더라! 남자는 말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면서 그 세계의 우상이라도 되어 동상으로 세워질 것 같은 남자의 뒷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추워 보여서 어디서 사제 군용 깔깔이라도 사서 보내주고 싶어졌다. 이 봐, 양 사장! 그렇게 다 가진 것처럼 살더니 끝내 외로움을 떨치지 못한 것이여? 사람으로 채울 수 없는 외로움이라면 두툼한 아크릴 담요라도 덮어보시구랴. 혹시 알아? 몸이 따뜻해지면 외로움도 옅어질지...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 도박장의 흥분을 놓지 못하는 삼대리에게서는 변하지 않는 사람의 치명적인 단점을 보게 된다. 에이~ 그렇지. 조직의 보스도 못 되고 누구 밑이나 닦아주면서 겨우 살던 것을 어렵게 살길 열어주었더니 손맛을 못 끊네. 끝까지 추접스럽게 사네, 진짜. 어째 인생이 맨날 도박이여. 하긴 하루하루 사는 모양새가 도박이 아닌 게 어디 있겠어. 그러고 보면 울트라가 인생 핀 거네. 기어코 투시력도 배웠겠다, 말 울트라로 인간 울트라의 마음마저 채웠겠다, 누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직진으로 걸어가 보고자 했으니, 자기 맘대로 사는 인생이네.

 

끊임없이 입담의 향연으로 낄낄대게 하다가 결국 그 말(말 울트라)로 끝맺는 소설이다. 재밌다. 잘 읽히고, 내내 웃음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괜히 짠해져서 내가 가서 한마디 해주고 싶어진다. 어이~ 거기~! 걔를 믿지 말라고~!! 서로에게 신뢰를 보내는 것 같으면서도 머릿속은 각자의 계산으로 바쁜 그들이 사는 법이 참, 어설프고 헐렁하다. 서로 상대의 머리 꼭대기에서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인데, 결국 그들의 전쟁에서 춤을 추는 이는 따로 있으니... 어디, 머릿속 계산이 맞아떨어진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란 말이다. 근데 또 슬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편을 구분할 수 없어서다. 내 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 편이 아닌 게 되는 건 종잇장 뒤집는 것처럼 너무 쉬워서,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는 걸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어서, 줄을 잘 서거나 틈새를 노리는 이가 얻어가는 것들이 영양가 있어서... 결국은 어차피 살아남은 게 이긴 거라고 계산하면 또 맞는 것 같아서 뭐라고 할 말은 없네. (그래서 울트라가 갑이다. ㅎㅎ) 어때? 지금 당신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

 

반전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익숙해질만 하면 어디서 다른 것들이 막 튀어나와) 흐름이 소설을 더 즐겁게 한다. 천명관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으나, 그의 소설에 기대를 많이 했다면 좀 심심했을 수도 있겠다. 전작들이 워낙 꽉 채운 맛이 있었던지라... 주인공들의 말장난 같은 언변에 가벼운 흥미를 느끼다가도, 이들의 마음속을 드러내는 찰나에서는 씁쓸한 공감도 끌어내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운 치킨과 맥주를 자꾸 불러...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이 책을 처음 본 건 2014년 언제쯤이었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와 읽다가 다 읽지도 않고 반납했다. 서평집을 좋아하지 않는데 왜 대출해왔는지 모르겠다고 의문이 들긴 하는데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고...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지도 않고 반납한 이유는 글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앞뒤 구분 없이 어느 부분 펼쳐서 읽다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반납한 거다. 그때의 기억을 돌이켜봤다. 한 번에 몰아서 읽을 시간도 안 되었지만, 나는 이 책을 한꺼번에 읽기 싫었던 것 같다. 아무 때나 아무 페이지나 마음 내키는 대로 펼쳐지는 대로 읽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같다'라고 말한 건, 지금의 기분에 근거해 그때도 그랬을 것으로 추측해서다) 도서관에서 대출해온 책은 그렇게 읽지 못한다. 기한 내 반납도 해야 하니 마음이 느긋하지 않다.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을 사서 읽자고 마음먹었던 것 같은데, 정작 내가 이 책을 산 건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직후였다. 그럴 줄 알았다면 도서정가제 전에 살 것을, 이라고 잠깐 후회했던 기억이 분명히(!) 난다. 어쨌든 굳이 사서 읽어보자고 생각했던 책을 이제야 제대로 꺼냈다.

 

나는 지금 뭔가, 아주 많이 매운 뭔가와 함께 캔맥주를 한 개 마시고 싶었는데, 지금 냉장고에 캔맥주는 없고 아주 많이 매운 먹을 만한 뭔가도 없다. 이럴 때는 그냥 잠들어야 먹을 거 생각도 안 나고 배고픔도 잊을 수 있는데, 왜 잠도 안 자고 갑자기 쓰레기장 같은 책방을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쌓여있는 책 어딘가에서 생뚱맞게 누워있는 이 책이 눈에 들어온 건 뜬금없는 생각에서였다. 이 책을 보면 배고픔이 사라질 거야, 나는 배가 안 고파, 안 고파, 절대 안 고플 거야.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아직도 다 읽지 않았지만, 읽다가 배고픔을 잊긴 했다. 배고픔 대신 그 자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 찼다. 갑자기 오래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생각나고, 바로 옆에서 볼륨을 크게 놓고 TV 드라마에 빠진 엄마가 보고 싶고, 좋아했지만 헤어졌던 누군가도 생각났다. 징그럽게 말을 안 듣는 말썽쟁이 조카들도 보고 싶어져서 카톡도 보냈다. 무엇보다, 두 번 볼일 없다면서 미련 없이 내다 팔았던 책들이 가장 많이 생각났다. 아, 왜 이 시간에 그 책들이 다시 보고 싶은 것인지... 이럴 수는 없어!

 

 

'밤 10시쯤, '이 시간에 내가 이 사람에게 전화해도 될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뭐해?"라고 물어도 되는 사이, 대뜸 묻는 질문에 거리낌 없이 대답해줄 수 있는 그런 사이. (271페이지)'를 생각하며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그게 지나간 시간 속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살면서 그런 기억이 한 번쯤 찾아와 나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끝난 인연이라도 말이다. 사실 나는 이 문장에서 울고 말았다. 몇 년 전 정말 똑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정말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고, 미친 듯이 무슨 말을 쏟아내고 싶었다. 그때 꼭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말이 많았는데,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한참 들여다보고서도 끝내 아무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검열이 시작된 거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될 거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될 거고... 그 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때 이후로 말도, 눈물도 더 아끼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런 사이'가 있다는 건 정말정말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한겨울에 붕어빵을 두 손에 쥐고 있는 듯한 따뜻함을 아는 사람일 거다.

 

 

같은 책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같은 책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보고 부모님을 더 생각했다는 저자와는 달리, 나는 그 책을 읽고 아버지와의 거리를 더 느꼈다. 몇십 년 동안 좁혀지지 않았던 거리를 나는 이 책으로 공감했던 거다. 부모가 가진 배경 때문이 아니다. 사람을 보는 기준에는 학벌이나 외모, 부가 적용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그 생각과 이해의 차이는 대화에서 온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사라진 그 대화가 부활하지 않는 한, 그 거리는 여전할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고 엄마를 더 이해하게 됐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그동안 내 인생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차지해왔던 지분의 차이 때문일 거다.

 

나도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정말 좋아한다. 온라인의 글을 보면서 느끼는 많은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글이다.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건, 포스팅이나 댓글이 전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글에서 그 사람의 성격을 읽는 거다. 마치 얼굴을 보는 것처럼! 에미와 레오가 주고받는 이메일을 볼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글에서 보이는 두 사람의 성격, 혹은 글로 감추려고 하지만 가려지지 않은 채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보인다고... 얼마 전에 이 책과 후속작을 다시 읽을 일이 있었는데, 아, 역시 다시 읽어도 너무 설레!!! 슬픈 건 지금 이 책이 없다는 거다. 나는 이 책을 사서 읽었고, 팔았다. 언젠가 생각이 나서 또 샀는데 읽고 또 팔았다. 그렇게 사서 읽고 되파는 일을 서너 번 반복한 것 같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번에 이 책을 사면 절대! 다시 팔지 말아야지, 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

 

 

소설을 참 맛깔나게 읽는 사람인 듯하다. 저자의 독서 방식이 어떤지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적어낸 글로 그 분위기를 상상한다. 내가 우아한(?) 영화 <벤허>를 보면서 주인공의 '그지 커트'에 빠져 있던 때처럼, 소설에 푹 빠져 읽다가 어떤 생각을 끌어오고(아마 그 생각이 저절로 끌려왔겠지),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져 오는 생각들에 웃고 울다가(왜 이럴 때는 꼭 삼천포 같은 생각들이 계속 따라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람들의 진심 혹은 거짓 같은 눈빛까지 읽게 된다. 언젠가의 생각이 틀렸음을 확인하기도 하고, 지금 그 장면에서 내가 찾아야 할 답을 얻기도 하는 시간. 구체적이지도 않고 막연하기까지 한 마음의 소리가 기어코 자리 잡는다. 어떤 문장에서 뿜어지는 감정의 힘을 느낀다. 그 여자는 왜 그랬을까, 그때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을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세상에서 두 눈 크게 뜨고 봐야 할 게 너무 많다. 하지만 다 볼 수 없이 살아가는 게 또 세상이라, 작은 장면 하나에서, 한 줄의 문장에서 보게 되는 어떤 것들이 소중하다. 또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쌓여 어떤 감정을 만들어낸다면 더 기쁠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적어도 읽는 동안은 즐거웠으면 좋겠다'던 저자의 바람처럼,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읽는 동안 즐거웠다. 슬프고 아팠다. 웃으면서 울었다. 내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이 감정을 좀 더 분명하고 또렷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서 속상하다. 읽는 동안 마음이 춤을 추다가 발목이 꺾였다가, 맛있는 것을 먹고 배를 두드리는 것 같다가 뭔가 또 간절히 먹고 싶어졌다가... 옆에서 누가 봤다면 조울증에 걸리지 않았는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히는 걸 어떡하라고.

'이 책에 실린 다른 책들의 어떤 부분에 꽂혀 서점으로 달려가 그 책들을 사서 읽었으면 좋겠다'던 바람 역시 이뤄냈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씩 찾아보니 이 한 권에 70편이 넘는 책을 언급했다. 목록을 훑어보니, 4분의 1쯤은 내가 읽은 책이고, 4분의 2쯤은 내가 읽다 말았거나 오랜 시간 내 보관함에 있던 책이고, 4분의 1쯤은 제목조차 몰랐거나 제목을 알고 있었더라도 내 관심 밖의 책이었다. 지금 다시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내다 팔았던 책을 다시 들여와야겠고, 책장 어디선가 묵혀둔 책도 꺼내고 싶어졌고, 보관함에 오래 머물러서 먼지 덮고 있는 책들을 하나씩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책을 다시 주문하고, 다시 읽고, 새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읽고, 다 좋아.

다 좋은데 그 전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큰조카에게 전화했다.

빨리 와. 꼭 지금 와야 해. 오늘이 아니면 안 되고,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너는 빨리 여기로 와서 나랑 매운 치킨에 맥주를 마셔야 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살찔 생각도 하지 말고 일단 먹자. 이 집에서 나와 입맛이 비슷한 사람은 오직 너밖에 없어. 그러니 지금 니가 와서 나랑 같이 먹어줘야 한다고!!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10-18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8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8 1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오유리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금입니다. 한 잔 꺾어봅시다~ 『술이 있으면 어디든 좋아』

 

정신은 비교적 말짱하다. 헌데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 양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늘어진 엿가락처럼 꼬였다. 옆에서 따라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 마시지 않고 선을 그은 것이 그나마 다행. 기특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51페이지)

 

밤 10시쯤, 정말 딱 한 잔만 하고 싶었다. 아니다. 딱 한 병. (한 잔은 좀 서운하잖아) 집에 엄마가 맛있게 익혀둔 고기도 있었고, 목이 시원해지는 과일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한 병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상황. 2월 설날 명절 이후로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집에 맥주가 없을 게 뻔한 걸 알면서도 냉장고를 뒤졌다. 아하. 그때 미처 다 마시지 못하고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맥주가 한 병 나온다. (다행이다) 신난다. 기분 좋게 맥주를 컵에 따르다가 급우울해져버렸다. 맥주가 한 컵 밖에 안 나와. ㅠㅠ 정말 딱 한 잔뿐인 거야? 아쉬운 대로 그 한잔을 마시다가 보니 속이 상한다. 아, 서운해. 뭔가, 정말 서운해. 맥주를 사러 가야겠다. 그런데 너무 귀찮다. 걸어서 3분 거리의 마트까지 가는 게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그때 마침, 내 눈에 들어온 건 며칠 전에 제부가 왔다 가면서 준 와인이다. 아주 좋은 거라고 했다. 비싼 거라고도 했다. 얼마나 좋은 건지, 얼마나 비싼 건지 모른다. 몰라도 괜찮다. 일단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이름도 모르는 그 와인을 땄다. 조금씩, 한 모금씩, 그렇게 천천히 마시다가 보니 와인 반병을 마셨더라. 그때야 알았다. 내 손에 힘이 빠지고 있던 것을... 그래도 뭐, 기분이 알딸딸하니 좋더라. 적당히(?) 잘 마셨고, 기분 좋게 취해서, 잤다. (주사가 특별히 없고, 그냥 술 마시면 졸리니까, 잔다. 그래도, 그날 그렇게 몸이 늘어지고 손에 힘이 빠지는데도, 양치까지 잘하고 잤다니까!)

 

아, 이런. 술과 함께한 미야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자꾸 말이 삼천포로 빠지려고 한다. 내가 아직도 술이 안 깼나 보다. 술은 술술 들어가지만, 인생은 안 술술~하다는 미야코의 일상에서 웃음까지 곁들이다 보니 술과 미야코에게 취하는 기분이다. 그녀의 이름 코사카이 미야코. 책 소개에서 보면, '코사카이'는 '술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뜻이란다. 어쩜 이리 잘 어울리는지 모른다. 잡지사 편집부에서 일하는 미야코는 퇴근과 동시에 술집이 즐비한 골목으로 선배 언니들을 불러내 술을 마시는 게 삶의 낙이다. 어라? 무슨 말인가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도착하니 열쇠가 없다. 택시에서 두고 내렸나? 의미 없는 길을 오가며 열쇠를 찾았는데, 그녀의 손에서 도망간 가방은 집 앞 돌덩이에 걸쳐 있다. 술로 가득 채운 에피소드가 미야코를 설명한다. 동료의 명품 가방 안에 술 마신 것을 게워내고, 취중에 길거리에서 누워 잠자는 그녀는 누구인가. 훌러덩 벗고 있던 그녀의 앞 시간은 어디서 찾아와야 하나? 잃어버린, 찾을 수 없는 그것(?)을 기억해내기 위해 그녀가 했던 일들에 숨이 막힌다.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아픈 건가. 병원 진료실에서의 일화에는 진짜 박장대소했다.

 

어쨌거나, 병원에는 진료에 앞서 기록하는, 문진표라는 것이 있다. 외상에 관해서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됐는지도 적는다.

"코사카이 씨."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흰 커버를 덮은 둥근 의자에 앉아 의사와 마주했다. 의사의 첫 마디.

"정직한 사람이군요."

놀랄 일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사실 위장, 속임, 거짓말은 적인 편이라 생각한다. 허나 병원 의사의 소견으로 듣기엔 이게 뭔가 싶었다. 조심성 없다, 멍청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할 상황 아닌가. 술 취해 다쳐서 병원에 왔는데 어째 도덕적인 칭찬을 듣는 거지? 미야코는 절로 고개가 외틀렸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대개 이런 상황에서 '넘어졌다'고 씁니다."

그러면서 문진표에 다치게 된 경위란을 톡톡 쳤다.

흰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자. '술이 떡이 돼서.' (155~156페이지)

 

이러니, 미야코가 어떤 사람인지 눈앞에서 그려지지 않아? 몸에 술이 채워지지 않을 때도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잖아. 게다가 그녀가 술만 잘 마시느냐? 아니다. 일도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다. 작가를 대하는 것부터 기획을 마무리하는 일까지, 그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떤 일도 불사하는 그녀다. 대책 없을 것 같지만, 나름 선을 지키고 열정을 불사르는 그녀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녀이기에 어느 자리에서건 인기를 폭발시킨다. 말 그대로 못 하는 게 없다. 누구 하나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다. 일 잘해, 술 잘 마셔, 인간적이지, 대화 통하지. 이 얼마나 좋은 상대냐고. 읽는 내내, 이런 사람 하나쯤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솔직히 미야코 같은 사람 옆에 한 명 있다. 일단 술병을 들면 말술을 마시는데, 술 취한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는 정말 힘들다. 새벽 두 시에 술집 앞에서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한 시간을 헤맨 적도 있다. 에휴...)

 

술이 술술 넘어가듯 그녀의 인생도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 듯했으나,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실패로 기록될 일이 있으니, 바로 연애다. 어느 날, 대학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가 만나자고 한다. 뭔가 느낌이 온다. 이상하다. 좀 더 예쁘게 하고 나가야지. 아마도 오늘이 디데이가 될 것 같다. 오호~ 이건 틀림이 그거야. 바로 그거! 프.로.포.즈. 뭐, 아직 결혼할 때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뭐, 결혼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도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미야코는 설레는 맘으로 애인을 만나러 간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미야코한테 물어봐. 그날 밤 그녀가 왜 그렇게 술잔을 꺾어댔는지 말이야. 그녀는 애타게 불렀다. 술아 술아~ 내 술들아~ 일루 와~. 한 잔 꺾고 꺼억~, 두 잔 꺾고 꺼~어~억~

 

술로 시작해서 술로 계속되고, 술로 즐겁고 우울해지는 그녀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남 일 같지 않은 거냐. 소설인데 시트콤 같다. 나 같고, 내 옆의 또 다른 사람들 같다.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오늘을 풀고, 속상함을 털어내고, 기쁜 일에 더 설레게 하는 매개로 술을 선택한다. 술 때문에 미야코가 보인 엉뚱함이 자칫 과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런 과함이 어쩌다 한 번, 귀엽게 보일 정도라면 괜찮을 듯하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이 가볍지만도 않다. 직장이나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진지한 일들이 그녀들의 끝도 없는 수다로 술술~ 풀어가는 재미가 있다. 그게 바로 살아가는 즐거움 아닐까. 때로는 울기도 하는 인생이지만, 이렇게 웃어가는 일들 때문에 오늘이 재밌어질 수도 있는 거. 그런 재미를 술이, 좋은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만들어주기도 한다는 게 즐겁다.

 

모두, 오늘도 시원하게 넘어가는 한 잔으로 즐겁게 지내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완전범죄를 꿈꾸며... 『죽여 마땅한 사람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살인이 범죄가 아니라면, 처벌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나는 몇 번의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지 않을까? 누구나 그런 적 한 번이라도 있지 않아? 나를 상처 입혔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미워하고 분노하는 감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 다만, 우리가 그 마음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건 타인의 목숨을 내 기준대로 처리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살인은 법의 처벌을 받는 범죄라고 인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신감, 분노 같은 감정을 이길 수 없어 살인을 저지른다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생명이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동시에 이 책의 저자가 들려주는 그 ‘죽여 마땅한’ 이유도 듣고 싶었다. 가끔 TV 뉴스를 보면서 흥분하다가 쉽게 내뱉는 말, 어떤 가해자나 피의자에게 당연하게 던지는 말이 있다. ‘똑같이 당해봐야 한다고...’ 내가, 피해자가 받은 고통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개인의 복수가 아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절차와 방식이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죽어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진짜 죽인다면? 그들은 '죽여 마땅한' 사람이 된다. 그 가정에서 멈추지 않고 그걸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이 있다. 그 누군가가 죽어 마땅한 이유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유 중에 마음의 상처를 입힌 이유라면 상대에게 죽음을 건네고 싶은 감정은 더 격해진다.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한, 배신감에 치를 떨게 한 너를 그냥 둘 수는 없다’고. 그래서 실행에 옮긴다. 나와 직접 관계가 있든 없든, 죽이고 싶다는 그 바람을 가진 이를 돕는 일도 한다. 릴리가 그랬다. 히스로 공항 라운지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 테드와 릴리. 테드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을 공항에서 처음 본 릴리에게 이야기한다.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로 생각한 릴리에게 무거운 속내를 털어놓은 거다. 바람난 아내를 죽이고 싶다고. 그냥 꺼낸 말이라고 생각했던 테드에게 릴리는 진지하게 대꾸한다.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고, 도와주겠다고...

 

“사람을 죽이고도 잡히지 않으려면 시체를 숨겨야 해요.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애초에 살인이 없었다면 살인자도 없는 거니까요.” (87페이지)

 

릴리가 테드를 어떤 방법으로 도울까? 그 방법은 한 가지다. 테드가 자기를 배신한 아내 미란다를 죽이고 싶다는 바람을 현실로 만들어주고, 사람을 죽이고도 잡히지 않기 위해 시체를 잘 숨기는 것. 두 사람은 공동의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이 소설의 묘미는 그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처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는 것을 따라가면서부터다. 릴리와 테드, 테드의 아내 미란다, 살인 사건의 담당 형사 킴볼의 시선이 교차로 진행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모든 진실을 알고 싶을 때 당사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풀어야만 들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게 불가능할 때 관계된 이들의 목소리를 따로 듣기도 한다. 이때, 각자의 입장만 듣게 된다는 맹점이 있다. 어떤 이유로 이들의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동하는지, 죽여 마땅한 이들이 존재하기 시작했는지,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모든 경우 다 죽일 수 있었는지, 그 죽음에 관해 아무도 처벌할 수 없었는지... 누군가를 죽이기로 계획했다고 해도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위기를 또 어떻게 넘기면서 새로운 국면에 처하게 되는지 반전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다. 테드는 미란다를 죽일 수 있을까, 그 살인이 성공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살인을 들키지는 않을까?

 

‘썩은 사과 몇 개를 신보다 먼저 도려내는 일’이 가능한지 물으면서 또 하나의 큰 질문을 던진다. 썩은 사과를 도려내는 일은 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다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이어진다. 사람이 사람을 살인으로 심판할 수 있는지 물으면서, 명확한 한 마디로 대답할 수 없음도 확인한다. 선과 악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도 보게 된다. ‘나라면?’ 이라는 질문이 수도 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살아오면서 누구나 한번은 경험해봤을 생각일지도 모른다. 법의 절차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처벌을 내가 하고 싶다는 욕망에 잠겼던 찰나를 건너가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냥 한번 생각해본 것’과 ‘살인’ 사이의 경계를 만든다. 인간이기에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가 많을 듯하다. 혹여 누군가 나의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하면 나는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하는 정도의 즐거운(?) 상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법이라는 제도가 있고, 우리는 그 법의 절차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배워왔다. 그게 많은 사람이 한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아서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생각들이 사건을 만든다. 이 소설은 그 빈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준다. 그들이 저지른 살인은 잘못되었지만, 또 그렇게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뿜어져 나오니까.

 

가슴이 아팠다. 익숙한 감정은 아니지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내가 한 짓을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느껴서가 아니다. 난 후회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저지른 살인마다 이유가,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픈 까닭은 외로움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내가 아는 사실을 공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외로움. (420~421페이지)

 

‘살인은 나쁘다’라는 한 가지 결론만을 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살인을 응원하는 순간도 만들면서, 이게 정말 가능한가 싶은 의문을 품게 한다. 벌을 받아야 할 행동에 묘한 공감이 생겨나고 있다니... 나 정말 이상한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저지르는 살인에 동조하는 순간이 있는 걸 보면,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음이 틀림없다. 릴리만의 심판이 모두 옳다는 결론에 다다르지는 못하겠지만, 그 시도 자체를 무조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 완벽한 살인과 숨김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당신은, 우리는,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하려고 직접 해결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