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이 뭔데? - 한 장애인이 청소년에게 묻는다 장애공감 1318
쿠라모토 토모아키 지음, 김은진 옮김 / 한울림스페셜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영화를 보려고 극장이 있는 빌딩으로 들어섰다. 매표소는 4층. 마침 엘리베이터가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고 1층에 멈춰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없다는 의미이니 빨리 올라가겠구나 싶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안에 사람이 있었던 것뿐인데, 내가 너무 놀라서 당황했었나 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전동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한 명 있었다. 분명 그도 놀랐을 텐데, 놀란 것보다는 미안해서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순간 ‘왜?’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해야 했던 거다. 너무 놀란 나의 제스처가 그를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3층을 눌러달라고 했다. 그도 나처럼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탄 건데 3층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로 문은 닫혔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냥 서 있었던 거다. 그가 앉은 상태로 보면, 팔이 그의 가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아, 그래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 안에서 혼자 얼마나 애가 타고 있었을까. 보통 엘리베이터 안에는 층수 누르는 버튼이 문 쪽으로 세로로 만들어져 있고, 벽 쪽으로 안전 바와 나란히 가로로도 있어야 했는데, 왜 그런지 그 건물 엘리베이터는 층수 누르는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다. 그냥 습관적으로 타고, 누르고, 내리곤 했던 터라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도 그날 처음 알았다. 그 건물 엘리베이터에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없다는 것을, 엘리베이터에는 가로로 누르는 층수 버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는데, 거기 엘리베이터가 2대 있었는데 한쪽에는 가로 버튼이 있었다. 그때 내가 탄 쪽 엘리베이터에 가로 버튼이 없었던 거였다.) 그는 엘리베이터가 3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그 몇 초 동안 나에게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나는 무안함을 감추며 아니라고, 오히려 내가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어서 당연히 안에 아무도 없을 거로 생각해서 놀랐다고,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그가 전동 휠체어를 작동해서 안전하게 내릴 때까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전에 어느 방송인이 자국의 장애인 정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나 서비스, 정부 정책 같은 걸 시행할 때 당사자인 장애인이 그 기획 단계에서부터 같이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무엇이 불편하고 필요한 것인지 피부로 직접 닿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참여가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말도 들었다. 그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은 그 몇 초의 경험에서 그 말의 의미를 절실히 깨달았다.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도 그 빌딩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엘리베이터였다고...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장애에 관한 책 몇 권을 일부러 찾아봤다. 쿠라모토 토모아키의 『보통이 뭔데?』는 나에게 그날의 기억이 더욱 생생하게 만든다. 한울림스페셜의 '장애공감 1318' 시리즈 중 한권인 이 책은 시각장애인인 저자가 자라오면서, 일상을 지내면서 겪은 시선을 이야기한다. 내가 알고 있던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나 배려가 정작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그날 내가 봤던 일과 그로 인한 생각을 이 책이 그대로 말하고 있던 거다. '네가 그냥 생각하는 것과 직접 부딪혀서 알게 된 것은 이렇게 달라.'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가 '보통'이라고 정한 기준에서 익숙한 것들이,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을 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 '그 보통의 기준은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보통의 전제가 처음부터 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일부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생기기에 비장애인에게 치우친 보통의 개념이 장애인에게는 보통이 아닌 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반대로 장애인의 기준으로 '보통'이 이루어지면 비장애인은 보통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세상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보통의 의미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 책은 그 보통이란 기준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그 '보통'을 실현하면서 '공생'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너무 당연하고.

 

저자의 경험 몇 가지를 소개해보자면, 상대를 배려한다고 했던 게 오히려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저자인 쿠라모토 토모아키는 시각장애인이다. 약시에서 전맹으로 진행된 경우다. 어렸을 적 그가 약시였을 때, 친구들과 야구를 했던 기억은 즐거웠지만 '참여'한다는 의미를 상실한 놀이였다. 약시인 그를 배려하며 진행된 야구,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친구들은 야구의 규정을 약간 변형했다. 그에게 공이 날아들 확률이 적은 자리로 수비를 배치해주었고, 그의 자리로 공이 날아오면 옆의 수비수가 대신 공을 받아주곤 했다. 타자로 그가 마운드에 섰을 때는 투수가 가까운 거리로 와서 공을 던져주었다. 친구들은 같이 하기 위해 그에게 이런 배려를 한 것이지만, 그에게는 참여의 의미가 상실된 야구였을 뿐이다. 어른이 된 그가 지하철을 탔을 때, 사람들은 맹인용 지팡이를 짚은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지하철 안에서 잘 안 보이는 통로를 걸어 서 있을 자리가 필요했던 건데,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행동을 취했던 거다. 그가 말하길, 그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 아니니 굳이 자리 양보를 받아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선로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몸이 다치게 된다. 이때 생각할 건, 사람들의 구조정신이 아니라 지하철을 안전하게 탈 수 있는 스크린도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지하철의 스크린도어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에게도 필요한 안전장치가 아니겠는가.) 건물의 문턱을 없애 휠체어가 잘 다닐 수 있게, 에스컬레이터가 아니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저상버스를 운행하는 등 배리어 프리가 많이 적용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 공생에 가까이 왔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비장애인과 크게 다르지 않아 숨기거나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것이 비교적 쉬운 때문인지, 경도인 사람이 장애가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중도장애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장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리겠지만 장애가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 조금이라도 비장애인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경우도 있지요. (82페이지)

 

시각장애인만 놓고 보면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이 그나마 나을 것이다, 또 청각장애인이라면 조금은 들리는 사람이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장애가 심하면 더 힘들고 심하지 않을수록 덜 힘들다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요. 장애가 심하지 않다고 해서 어려움도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경도장애인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 받기 어렵거니와 어중간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무리를 해야 해서 오히려 중도장애인보다 더 힘든 점이 있습니다. (99~100페이지)

 

특히 저자의 이야기에서 많이 생각했던 부분은 경도장애와 중도장애의 차이에 관해서다. 장애의 정도에 따라 '경도', '중도' 장애라고 부른다. 장애의 정도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 차이로 장애의 정도를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한데다, 가장 많이 할 수 있는 오해가 경도장애가 중도장애보다 불편함이 '덜' 할 거라는 거다. 저자의 경우 약시보다 전맹이 더 심한 장애라는 오해에 대해 말한다. 내 생각도 그랬다. 희미하지만 약간 보이는 것과 아주 안 보이는 것 중에서 약시가 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신체의 장애를 겪지 않은 나의 착각이었다. '덜' 불편한 것과 '더' 불편한 것의 차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약시일 때의 불편함, 전맹일 때의 불편함이 서로 다른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장애에 대해 알고 있던 약간의 이론마저 온전히 알지 못했던 거다. 내 머릿속에 있던 장애에 대한 지식을 다 지우고 다시 새겨 넣어야 하는 거였다.

 

‘이럴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이렇다’라고 이론으로만 들어왔던 것은 ‘이렇구나!’라고 실제 부딪히면서 알게 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그날 엘리베이터에서의 몇 초가 나에게 얼마나 귀한 경험을 허락했는지 알겠다. 실제의 경험과 생각, 시선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됐던 거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경험일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경험은 아닐 터. 타인에 대해, 세상에 대해 무심한 시선을 가진 나에게 일부러 찾아와준, 두 번 만나기는 어려운 아주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에 대해, 세상을 향해 관심 좀 두라고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보통의 기준을 만들어내는 시선을 알게 하고, 공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