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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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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굳이 '나' 대신 '당신'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조금은 색다르게 그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기의 모습을 한발 떨어져서 회고하고 싶었을까.

 

소년이 자라 청년으로, 작가로 자리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좀 남다르게 들려온다. 일단은 2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게 그렇고, 다음으로는 특별할 것 없어 보였던 이야기에서 뭔가가 자꾸 솟아오르려고 하는 기운이 그렇다. 폴 오스터가 걸어온 그 시간의 궤적을 말하는 『내면 보고서』는 그의 유소년, 청년 시절의 시간을 걸으며 그 시절을 복원한다. 이제 와 몇십 년 전의 시간을 복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의 글과 그의 인생, 그의 사랑까지 이 복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그의 아내가 된 연인과 주고받은 연애편지,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을 만든 체험들. 다소 두서없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가 다시 불러오는 그 기억들은 우리가 몰랐던 그의 모습을 확인시켜주기도 하고, 그가 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릴 순간들의 흔적이기도 하다. 순수했던 모습, 작은 것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던 생생함,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고리를 그리기도 하고, 상상으로 만든 또 다른 세상을 살았던 것처럼 생명을 불어넣었던 시간.

 

전작 『겨울 일기』와 닮았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겨울 일기』를 읽지 못했다. 그저 오랜 시간 그의 작품에 대해 들어왔을 뿐이다. 여전히 읽으려고 시도하고 있고 읽다가 만 책들이 많아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만, 이 책 『내면 보고서』를 통해 뭔가 조금은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다. 그가 전개하는 회상으로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그의 내면의 흐름을 조금 맛본 듯하다. 어린 시절의 그와 지금 어른인 그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그 같음과는 별개로 변화하는 것까지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시간의 축적이, 다양한 경험이 그의 글과 그의 내면을 숨 쉬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작은 사람, 당신은 누구였나? 어떻게 당신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 당신이 생각할 수 있었다면 당신의 생각은 당신을 어디로 데리고 갔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파고들어 가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헤집어 보고 파편들을 들어 올려 빛에 비춰 보기로 하자. 그렇게 해보자. 한번 해보는 거다. (11페이지)

 

남들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특별하지도 않은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지는 독자라면 이 책을 펼쳐도 좋겠다. 그때부터 꾸준히 이어온 그의 역사에 좀 더 접근할 기회가 되어주니까. 너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대부분인데 오히려 그런 일들이 강한 여운을 남긴다.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비슷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과거의 시간을 역추적하면서 꺼내는 것들은 대개 그런 소소한 일상에서 일어난 것들이 많다. 개구쟁이 같은 모습, 순수해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엿보이는 일,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실수마저도 모두 그를 이루는 것이 되어가는 것이니까.

 

순수해서 아름다운 소년 시절이나 불안하고 치열해서 애틋한 청년 시절까지의 이야기가 폴 오스터를 이해하는 걸 도와주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본 영화로 철학적 사유에 이르기도 하고, 다양한 책을 접하며 많은 것을 이해하려 애쓰고, 많은 사람과의 교류는 그를 성장시킨다. 그의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까지 더해져 인간, 남자 폴 오스터를 볼 수 있다. 이 한 권의 책이 그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그가 인간과 세상을 탐색하고 싶었던 갈증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듯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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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사노 요코의 글을 많이 읽지 않았다. 온전히 한 권을 완독하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책들을 조금씩 들춰보면서 만난 게 전부다. 내가 접한 저자의 전작들을 보면, 조금 연륜 있고 조금 더 느긋한 느낌이 많았다. 할 말 다하지만 밉지 않은, 가볍게 말하는 듯하지만, 무게가 있는, 그렇게 세월의 흔적이 많이 쌓인 사람이기에 가능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사노 요코가 40대에 쓴 수필집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어서 그런지, 좀 더 나이 있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상하게 조금 더 발랄하게 들리는 말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전작들과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순간순간 느껴지는 어떤 것들이 저자의 젊음(?)을 더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솔직한 게 저자의 매력이다.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듯하다. 때론 그런 게 모든 병의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나는 저자가 쏟아내는 말들에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다. 어느 순간 꽉 막혀버려 답답함이 가득 채운 내 안을 툭 터트리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때로는 까칠하고 때로는 푸근하기도 한 저자의 말에 시원해지고 즐거워진다. 마음의 여유로움이 찾아올 때가 많다.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추억에 잠기게 하고,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으며 웃게 한다. 이런 창피함 따위 뭐 별거냐 싶게 툭툭 털어내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자유로운 저자의 마인드가 부러워서 배우고 싶어질 정도였다. 인간적인 면모가 저자를 참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고, 가볍고 편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저자만의 삶의 깊이와 사색이 가득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가끔은 찾아가서 상담받고 싶은 때도 있다. 강하고 직설적인 호된 말로 회초리를 맞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게 필요해서 그 앞에서 말문을 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우리 살아가면서 필요한 게 참 많지만, 말과 마음으로 어루만져주는 어른의 통찰이 필요한 경우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사노 요코다. 물론 내가 만난 건 저자의 글이 전부지만, 그 글로 저자의 진심과 솔직함이 느껴졌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비싼 돈 내고 진료받는 전문의의 처방보다 저자의 한 문장이 직방의 효과를 거두는 처방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나이니까.

 

저자의 말투가 익숙하다. 시크한 것 같은데 너무 건조하지도 않고, 무심한 듯한데 다정한 기운이 풍기는 느낌. 요즘 말로 츤데레 같은? ^^ 저자의 추억 속 이야기부터 일상, 소소한 경험들까지 솔직하게 꺼내면서 하는 많은 말이 전하고 싶었던 건, 너무 애쓰며 살지 않아도 즐거울 수 있고, 급하지 않게 여유로운 삶을 그릴 수 있다는 말 아니었을까. 그렇지. 인생 뭐 있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지. 오늘 울었다고 내일 울지 말란 법은 없잖아.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을 그리는 듯한 저자의 이야기가 그런 즐거움을 준다. 숨 막히게 달리듯 뭔가에 쫓기듯 살지 않아도 뭐, 괜찮아요, 같은 말.

 

그녀에게 속한(?) 많은 대상. 남자, 가족, 친구, 소설과 영화, 여행 같은... 보면서 흥분하고 열이 나는 감정 이입도 재밌고, 소소하게 들리는 가족 이야기는 괜히 뭔가 더 그립게 하고, 인생 잘 살게 도와주는 친구의 존재는 듬직하다. 누군가는 한 마디 할지 모를 그녀가 사는 방식이 즐거워 보인다. 그녀가 들려주는 평범하게 살면서 즐겁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살짝 닮고 싶기도 하다. (내 성격상 그녀와 닮을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므로 살짝만... ^^)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별거 아닌 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기가 가져야 할 무게와 신뢰 같은 게 어떤 인생을 만드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녀만의 삶의 방식이 재밌다. 어떤 한마디 말보다 그저 평범하게 들려오는 이런 이야기에서, 울고 웃으며, 진지하고 심각해지지만 부담 없이, 용기를 얻는다. 산다는 건, 어떻게든 살아지는 거 아닐까 하는 무한 긍정의 결론을 얻게 하는 그녀만의 메시지가 듣기 좋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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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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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너무 건조하게 살아서 그런 걸까. 그리움이란 단어 속에서 오래전 어떤 기억을 떠올려보려 하니 금방 떠오르는 게 없다. 오늘도 매일 다니는 거리, 자주 보는 사람들, 익숙한 건물. 그냥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채우는 평범한 모습으로만 보인다. 언젠가,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흐르면 다르게 보일까? 선뜻 어떤 대답을 꺼낼 수가 없다. 그렇다는 대답이 금방 나오지 않는다. 곰곰 생각해보니, 항상 보는 곳들이라 특별함을 느낄 겨를이 없는 건 아닐까 싶다. 아마도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그 장소 그 시간에 포함할 사람이 함께한다면, 그 대상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무언가를 함께한 기억이 머문다면, 나는 지금의 건조함과는 다르게 오늘, 이 장소를 더 기억할 것 같다. 나의 일상을 채우는 배경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좀 더 소중하고 애틋한 기억으로, 그리움으로 저장해놓을 것 같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다가간 그 장소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시간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 곳, 그게 비록 호기심일지라도 확인하고 싶은 간절함으로 채워져 있다. 오래된 연립주택에 머무는 사람들. 전직 미용사 다로는 얼마 전에 이혼했다. 같은 연립에 사는 여자 니시가 이웃집 '물빛 집'을 몰래 들여다보는 걸 알게 된다. 니시는 그 집 안으로 들어가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니시는 다로에게 '물빛 집'을 찍은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 20년 전에 그 집에 살던 광고감독과 여배우 부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사진집으로 니시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이사할 집을 찾던 니시가 '물빛 집'을 바라보고 싶어 그 옆의 연립으로 이사와 살게 된 것까지. 그렇게 물빛 집을 관찰하던 니시를 발견한 다로가 그녀의 계획에 동참한다.

 

별것 없어 보였다. 니시의 기억 속의 생각들과 현재 눈앞에 보이는 물빛 집을 향한 호기심이 전부인 것 같았다. 오늘을 사는 여자가 과거의 기억으로 이어져 온 집을 보고 싶은 간절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사진집 <봄의 정원>의 두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제 와 사진집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독자의 마음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건지, 한때 누군가 행복하게 살던 장면을 보는 기분은 어떠한지...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 이사하게 눈길이 더 머무는 건, 그 안에서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표정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광고업자와 여배우 부부는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거라는 흐뭇함이 우리가 바라는 삶을 비춘다. 물빛 집 정원의 나무들이 자라고 가꿔지는 시간 동안 그들의 시간도 함께 자랐을 거다. 변한 것 없어 보이는 욕실의 모습에서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 니시가 손에 피를 보면서까지 그 집 욕실을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녀의 마음속에 그려놓은 젊은 부부의 시간을 새기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은 것 같지만,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한때를 그렇게 저장해놓고 싶었는지도...

 

이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는 몰랐던, 생각나지도 않던 일들이, 소설이 끝나갈 무렵에는 하나씩 내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책상에 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싸우던 짝은 어떤 아줌마가 되어있을지 궁금했다. 세상 그따위로 살지 말라며 싸우고 헤어진 옛 남자는 지금 어느 거리를 걸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갑자기, 10여 년 전 요리학원에서 만난 언니의 안부를 묻고 싶어졌다.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들이었는데, 그날그날 살아가면서 겪고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움과 섞여 마음속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지금 이 거리를, 이 시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소설로 듣는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품고 있어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지, 어떤 모습일지 전혀 알 수 없는 일로 머물지 몰라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오늘 이 시간의 풍경이 된다.

 

아무렇지도 않은 오늘이다. 주말의 낮에, 조금 늘어지게 늦잠을 잤고, 뒤늦은 아침을 먹고 다방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쌓여있던 잡지를 몇 권 뒤적거렸고, 읽고 싶은 책을 꺼내 놨다. 온 집안의 창을 열고 청소를 하고, 밀린 빨래를 넣고 세탁기를 돌렸다. 빨래가 다 되는 사이 오랜만에 친구랑 통화하면서 며칠 전 내린 비로 다 떨어져 버린 봄꽃 이야기를 했다. 짧은 봄이 가는 게 아쉽다며 곧 시간 내서 얼굴 보자는 말로 인사를 했다. 나의 이런 오늘 하루가 누구나 비슷하게 보낼 수 있는 평범한 주말의 하루인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이 보내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오늘이 특별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 미리 말해주는 소설이 시바사키 도모카의 『봄의 정원』이다.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소소한 일상이 우리의 소중한 시간으로 저장되는 순간이다. 바로 지금.

 

바쁠 때도, 시간 여유가 있을 때도, 빠르다는 이유로 KTX를 선호하곤 했다. 기차 좌석에 오래 앉아있으면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어디를 가든 빨리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KTX가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모든 기차역에 정차하던 완행열차가 떠오른다. 천천히 가면서 창밖 풍경을 놓치지 않게 하고, 모든 역에 정차하면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보고,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느긋하게 앉아있던 그 불편한 좌석이 그리워진다. 다시 만나지 못할 기억과 시간이어서, 오래된 앨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사진처럼, 마음속에만 머물 수 있어서 더 그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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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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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게 있다.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갑자기'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한다. 몸이 아픈 것도, 어떤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대개 전조를 보이지만 그 전조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그럴 리가 없어, 아직은 아닐 거야, 하는 마음의 안심이 그 위험을 감지하는 걸 막는다. 나에게도 그렇게 전조를 무시하다 일어난 일들이 몇 가지 있지만, 여기서 그 얘기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마이클 길모어가 전하는, 사형수 가족의 이야기는 그 전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의 형 게리가 살인자가 된 건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게 아닐까 싶은 위험스러운 생각이 들면서도, 그 전조가 마이클에게 적용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기도 하다.

 

길모어 집안에서 폭력과 학대가 시작된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없었다. 한 살인자의 가족으로, 동생으로 살면서 그가 파헤쳐간 그의 가족의 역사는 평범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지속한 길모어 집안의 폭력과 학대의 역사는 게리가 그런 괴물이 된 이유를 비춘다. 잠깐의 기간이 아닌, 그의 부모와 조부모, 증조 부모까지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지속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자비와 용서를 모르는 모르몬 교도 부모 밑에서 자랐다. 저자가 그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았던 게 행운이었을까. 혹시 저자가 아버지의 그늘에서 계속 자랐다면 또 한 명의 범죄자가 되지는 않았을까?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저자의 길모어 가족 역사는 끔찍했다. 게리가 괴물이 되었던 배경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한 가정의 이런 모습이 그 안에서 자란 아이를 모두 범죄자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모, 환경이 아이의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 같다. 비단 저자가 들려주는 길모어 가정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서다.

 

사형제도가 거의 사라지던 때 부활한 사형제도의 첫 번째 사형수가 된 게리 길모어. 이미 게리의 이야기가 한번 나왔음에도 저자는 형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근원을 찾아내어 정리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모든 저주 같은 흐름을 끊어내고 싶은 걸까? 저자의 형들은 변해간다. 그들 중 게리의 살인은 그들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드러낸 위험의 경고처럼 보였다. 사형대에 오름을 선택한 게리의 마음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궁금했지만,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듯하다. 이렇게 한 번 다 쏟아내고, 자기가 속한 가족의 역사를 풀어내고 나면 게리의 잘못도, 자기 가족의 어둠도 조금은 걷히지 않을까 싶은...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저자가 이 책으로 건넨 이야기가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는 저자 자신만이 알 테니까. 다만, 이 이야기로 우리가 듣고 느끼게 되는 게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어떤 범죄자의 탄생 이면에 상당히 다양한 배경이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족, 그 부모의 영향으로 기인하는 경우, 남겨진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 거기에 저자 자신의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여기는 부분의 답을 찾는 일까지. 아프지만 꼭 한 번은 확인하고 싶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책이다. 동시에 여러 가지 말로 대신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죽음이 끝일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이쯤에서 끝이었을 것 같은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다. 읽는 중간 중간, 나의 어떤 이야기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선뜻 말문이 트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읽기도 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적나라한 그들의 가족사가 분명 어떤 답을 줄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분노가 일기도 했다가, 시무룩 절망하기도 하면서 기분이 널을 뛰고 있었다. 결국, 끊어낼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된 게 우리 운명인 건지,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시작된 운명을 거둬낼 수 없다는 건지... 저자의 글은 끝났는데, 나는 이제부터 이 글이 시작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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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경을 걸었다 - 푸시킨에서 카잔차키스, 레핀에서 샤갈까지
서정 지음 / 모요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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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여행을 꿈꾼 적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거나, 좋아하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추적하듯 찾아가는 길. 오래전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이미 어떤 소설 속 장소들을 밟아갔더라. 그것도 내가 참 좋아하는 소설이어서 더 관심 두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바랐던 일을 그 블로거는 상상으로만 멈추는 게 아니라, 그 바람을 실행으로 옮겨 이미 이뤄낸 여행이었다. 그냥 발을 내디디면 되는 거였다.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 일이었는데, 나의 게으름은 그걸 이루기 어려운 꿈으로만 새겼던 듯하다. 근데 정말 괜찮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게 멋져 보이지 않나? 이 책의 저자 서정이 들려줄 『그들을 따라 유럽의 변방을 걸었다』도, 나는 그런 흔적을 밟는 거로 생각했다. 유럽의 어느 곳을 따라 걷는 길. 어떤 작가의 흔적을 찾아 차곡차곡 밟아가는 시간. 낯설지만 친숙하게 새겨지는 글귀들을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뭐, 나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러시아에 거주하는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유럽과 러시아 문학, 예술을 가까이할 수 있었나 보다. 푸시킨, 톨스토이, 카잔차키스, 고흐, 샤갈, 쇼팽 등 다양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각 작가와 예술가의 고뇌를 풀어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의 흔적까지 들춰낸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아는 독자도 많겠지만, 나처럼 평소에 즐기지 않은 분야의 독자라면 이런 이야기가 생소하면서도 흥미롭게 들린다. 앞에서 내가 말했던, 작가나 작품 속을 따라가는 여행을, 저자는 두 가지 다 이뤄내고 보여준다. 예술가의 삶을 좇다가, 소설 속 주인공을 비추는 여행도 풀어낸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여정까지 보탠다. 뭐랄까, 저자가 그곳에 사는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느껴진다고 말해도 되려나. 고전 속 주인공의 모습이나, 평범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에 저자의 발자취까지 같은 흐름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건 아마도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문 저자에게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비슷한 향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아쉬운 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좋았지만, 그리 편하게만 읽히지는 않았다는 거다. 내가 너무 무지해서인지 공부하는 마음으로 따라가야 하는 부분이 많았고, 이것저것 찾아가면서 읽기에는 에세이라는 분야의 편안함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뭔가를 좀 덜어내고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풀어내던지, 아니면 뭔가를 더 보태 전문적인 장르로 엮어내든지 했다면 좀 더 분명한 책으로 남았을 것을... 어쩌랴, 내가 이 책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건 그저 나의 무지함이 첫 번째 원인인 것을.

 

저자가 언급한 작가, 예술가의 흔적들을 따라가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만 본다면, 거장이라 불리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기에 조금 더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느리게 페이지를 넘길 시간이 있다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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