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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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린 여자는 이제 눈물을 멈출 수 없다.(「입동」) 아이가 쓰다가 만 이름을 보는 순간 견디고 있던 슬픔은 폭발했다.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아이지만, 다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믿지만, 아니다.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않을 상실의 고통이라는 것을, 같은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그 순간, 슬픔을 견디는 이에게 해줄 말은 없다. 그냥 울게 내버려 두는 게 해줄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오래전에 산 도배지를 입동이 되어서야 꺼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아는 사람, 누구일까?
 
뜻밖이었다. 그동안 읽은 김애란의 소설에서 서늘함과 추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번 소설도 역시 우리 인생의 꼬질꼬질함을 유쾌함으로 들려줄 거로 생각했다. 착각이었지. 예상하지 못했던 쓸쓸함이 밀려왔다. 안쓰러웠다. 저절로 알게 되며 스미는 슬픔에 공감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고통을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것. 그게,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좀 울어보니 어때? 이제 그 슬픔은 좀 덜어졌니?'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작가의 말처럼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하면 안 되는 말과 해야 할 말이 인물이 되어 나타난' 순간을 지켜볼 뿐이다. 그렇게 작가가 전하는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여전히,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 희망을 대입시키는 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고.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희망은 우리가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면, 오늘을 살아갈 의미도, 내일을 기다릴 이유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런 까닭으로 받아들이자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지만, 간혹 이야기에서 강요된(?) 희망이 현재의 삶과 괴리를 느끼게 한다면, 소설 속에서 외치는 희망은 공감하지 못한 불편으로 남을 뿐이다. 김애란의 이번 작품이 담백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렇게 강요된 희망으로 섣불리 위로를 꺼내지 않아서다. 슬픔 뒤에 바로 희망을 놓지 않고 현재의 상태 그대로를 전할 뿐이다. 슬프면 슬픈 채로, 아프면 아픈 채로. 나의 오늘이 타인의 삶과 동떨어진 것 같이 보여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수밖에, 뭘 더 하겠냐고 묻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들려주며 우리의 오늘을 보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듯,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이국의 열기 속에서 교수 임용 소식을 기다리는 화자의 서늘함과 분노로 여름을 느끼는 듯했다.(「풍경의 쓸모」) 타국의 더위 속에서 보는 핸드폰 문자의 한글은, 마치 스노우볼 속의 눈 내리는 풍경 같다. 지금 그와는 아무 상관 없이 흘러가는 계절을 눈앞에서 마주한 것처럼, 쓸모없는 풍경만이 그의 문자함을 계속 채운다.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피하고 싶은 소식이 도착한다. 이런 게 인생인가, 라고 묻고 싶은 표정을 그린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멀어지는 이국의 불빛이 보였다. 비행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다 유대용 안대를 쓰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섯 시간 동안 일단 아무 생각도 안 할 작정이었다. 잠을 청하려 천천히 숨을 고르는데 속에서 기체인지 액체인지 모를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그것을 내려보냈다. (182~183페이지, 「풍경의 쓸모」)
 
여기에서 우리가 슬픔을 감당하는 하나의 방법이 전해진다. 그는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마른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내려보내는' 것으로 그 순간을 통과한다. 임용에서 탈락했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다는 걸 안 순간에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 순간을 참아낼 뿐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고통을 건너가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작가는 어떤 대책을 남겨 두지 않는다. 그런 모습은 「건너편」과 「가리는 손」에서 현재 상황이 무엇을 선택하게 하는지 보여주며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어떻게 할래? 다른 선택이 있어?’라고 묻는 것처럼. 「건너편」의 여자는 매번 남자와 헤어질 타이밍을 놓치지만, 결국 헤어진다. 그를 생각나게 하는 '노량진'이라는 한 단어에 시선이 머물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오늘 남자 없이 지나가야 내일이 열 수 있다. 「가리는 손」의 엄마는 '설마 내 아들이?'라는 의문을 품지만 확인할 수 없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을 거다. 내 아이가 그럴 리 없어, 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보내지만, CCTV 속 아이의 표정에 의문을 품는다.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으니까.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면 안 되나?' 하는 불안을 남긴 채로 머문다. 그렇게 오늘만 모른 척하면 다 지나가게 될 거야. 그러다가 불안은 죽음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듯, 마지막 순간으로 이어진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할머니는 집에 늙은 개를 들여 그 과정을 나날이 실감하고 싶지 않았다. (50페이지, 「노찬성과 에반」)
 
「노찬성과 에반」으로 늙어감과 죽음을 적나라하게 들려주며, 결국에는 「침묵의 미래」의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게 된 사어(死語)로 우리의 미래를 보게 한다. 늙어가다, 죽는 게 우리의 미래이자 순리라는 듯. 할머니가 찬성이 데리고 온 유기견 에반을 보기 싫어했던 것은, 에반을 보는 게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다. 늙고 병들고, 살리려 애를 써도 결국 죽고야 마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그렇게 마주한 사어로 마지막을 확인한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하는데, 매번 찾아오는 슬픔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상실을 심는다. 창밖 저들의 행복이 왜 나에게는 찾아오지 않는지 서글퍼 하면서도 용기를 내지만, 그 용기는 행복이라는 답으로 돌려주지 않는다. 잃은 자의 아픔은 아픔으로 남아있고, 절망을 느끼면서도 감당하는 게 답인 것처럼 또 다른 아침의 눈을 뜬다. 이렇게 살아지겠지, 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오늘을 또 한 번 견뎌야 하는 걸까? 마치 일 년 내내 추운 겨울인 것처럼?
 
그 겨울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작가는, 바깥은 뜨거운 여름인데 안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계절을 멈췄다. 상당한 시차로 더는 흐르지 않는 계절을 이 순간에 고이게 했다. 웅덩이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겨울의 폭설이 얼어붙은 듯이, 지금 계절이 여름이라는 것을 아주 잊은 듯이.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소설집의 처음과 끝에 배치된 작품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다른 듯하지만 닮은 두 작품에서 작은 틈을 본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이제 겨우 감정을 추스를까 하는 순간에 처음 슬픔을 마주한 그때로 돌려놓는다.(「입동」) 그들의 눈물이 아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상실감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가 벽의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위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만든다. 어쩌면 부부는, 그렇게 한 번씩 예상하지 못한 순간을 겪으며 치유의 자리를 넓힐 것이다. 가슴 속 서늘함은 그렇게, 조금씩 온도를 높여갈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잊은 것이 지금 생각났다는 듯,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마지막에 놓아 그 위로의 틈을 조금 더 만들고 글을 닫는다.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명지는 죽은 학생의 누나가 보낸 편지에서 밖의 계절을 본다. 이해할 수 없던 남편의 선택을 원망하면서 보낸 안의 풍경 너머, 비로소 밖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겨울 속으로 여름의 열기가 뛰어들 것을 보여준다. 차가움 속으로 뛰어든 뜨거움 때문에 어느 정도 미지근해진 온도. 이제 어느 쪽으로든 가능해졌다. 더 추워질 수도, 더 더워질 수도 있다. 계절을 잊은 듯 살아온 시간이 변할 문을 살짝 열어놓는다. 바깥에 흐르는 계절을 이렇게 보기 시작했으니, 더 열든 아예 꽁꽁 걸어 닫든, 그건 오롯이 각자의 몫이니 어느 쪽으로든 알아서 가보라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중략) 그러니까 거기 사 인용 식탁에서. 식탁과 맞붙은 산뜻한 올리브색 벽지 아래서. (20페이지, 「입동」)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266페이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여전히, 우리의 계절은 흐르겠지. 때로는 겨울의 추위에 움츠러들었다가, 가끔은 봄과 가을의 바람에 몸을 맡겼다가, 여름의 햇볕에 검게 그을렸다가. 내가 체감하는 계절은 매번 다를 수 있다. 겨울 속 여름을 살거나, 여름 속 겨울을 지내거나. 어쩌면, 그때마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소한 것들로 현재의 계절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불편한 손으로 꼭꼭 눌러쓴 편지의, 위로와 안부의 몇 글자가 미움과 분노를 그리움으로 변하게 한 것처럼... 소설 속 주인공들은, 밖으로 나가 현재의 계절에 뛰어드는 방법을 몰라 허우적대던 사람들에게 온기가 스미는 방향을 가르쳐 준다. 답이 아니라, 여전히 질문을 남긴 채로 돌아선다. ‘자, 이제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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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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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진구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진구의 배경이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백수 탐정이라는 진구의 소개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캐릭터니까 말이다. '진구 시리즈'의 네 번째인 이 작품은 그런 궁금증을 없애준다. 현재 의뢰받은 사건과 새로운 인물의 등장,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주는 이야기로 진구의 과거가 밝혀진다.

 

진구는 대형 벤처투자회사 제이디애셋 회장에게 의뢰를 받는다. 회장의 의뢰는 자기 아들이 결혼하고자 하는 여자의 뒷조사다. 그 여자는 회장의 비서이자 회장이 후견했던 인물인데, 회사에서 그 여자를 후원하고 그 여자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것까지는 좋지만, 아들의 배우자로는 인정할 수 없다. 아들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될 여자가 필요한데다가, 금수저로 태어난 것 말고는 볼 것 없는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한 여자는 필요 없던 거였다. 그 여자의 꼬투리라도 잡아서 아들의 결혼을 반대할 명분이 필요했던 회장은 이 바닥에서 유명한 진구에게 의뢰를 한다. 하지만 진구는 회장의 의뢰를 거절한다. 할 수 없었다. 회장이 뒷조사를 의뢰한 여자는 유연부였다. 그럼, 유연부가 누구냐... 진구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장이자 라이벌이었고, 연부의 아버지와 진구의 아버지가 역사를 전공하는 동료 교수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리고 오래전, 실크로드 탐사 현장에서 사망한 두 사람 유상호(연부의 아버지)와 김민준(진구의 아버지)의 일이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때 그 사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기에 절친이자 라이벌이자 애매한 연인 사이처럼 지냈던 연부와 진구는 헤어지게 된 것일까.

 

유연부의 등장은 뜻밖이었다. 여느 때처럼, 진구 시리즈는 새로운 등장인물과 새로운 이야기로 또 한 편의 추리 드라마를 보여줄 거로 여겼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추리소설로도 충분했지만, 과거를 들추며 진구의 이야기까지 더했다. 험난한 여정이었다. 중학생이 따라가기에 역부족인 탐사 현장이었지만, 두 아버지의 욕심과 라이벌 의식은 자식이 아니라 동료 탐사 대원들처럼 여기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연부와 진구가 그 탐사에 흥미를 느낀 게 오히려 다행이었을까. 어쨌든 탐사라는 모험이 연부와 진구에게 인생의 큰 사건이 된 것은 틀림없다. 수학에 모든 것을 바친 듯한 진구는 변했다. 고등학교도 중퇴했다. 진구는 어떤 의미를 잃어버린 것일까? 연부도 마찬가지다. 다르지만 비슷했다. 두 아이에게 그 탐사는 아버지를 잃게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침묵했다. 그 사막에서 마주한 모래바람이 모든 것을 일으켰고, 모든 것을 덮었다. 그 시간은 그곳에서 덮인 채로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해미는 잠시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주변을 분간 못 할 정도로 모래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사막. 차 안에는 온통 흙먼지, 몸 안에는 구석구석 모래가 끼어들고……. 자신이 꼭 그 안에 들어가는 것 같아 진저리를 치며 눈을 떴다. (91페이지)

 

모래는 000에게 살인을 속삭였고, 00에게 살의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래바람 안에서 000는 죽어갔다. 아니, 거의 죽었었다. (331페이지)

 

진구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이 소설은 새로운 사건인 듯 시작되었지만, 진구의 과거를 교차로 보여주면서 현재의 사건과 연결 짓는다. 갑자기 등장한 유연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진구에게 남겨진 언젠가 한번은 풀어야 할 숙제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동시에 진구의 과거를 탈탈 털어내듯 보여준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틈을 파고들어 사건을 해결하던 진구의 모습보다는, 그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현재의 사건을 하나씩 되짚어 보게 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진구의 과거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인 '연부'가 있다. 여자 친구인 해미의 질투와 다그침에도 다 말할 수 없는 연부와의 기억이다. 소설의 뒷부분에서는 마치 친절한 작가가 등장한 것처럼, 읽으면서 놓친 부분에 대해 설명하는 듯한 부분이 있지만, 그전까지는 나도 해미와 같았다. 보고 듣고 있되, 어디서 그 틈이 보이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건의 시작과 누군가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일들 속에서 결국 보게 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자 죄였다는 것을...

 

그 순간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이 만들어낸 사건과 결과를 용서할 수 없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얹어준다. 순간 혹하는 감정일지라도, 그 순간이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만들어버렸을지라도, 그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이므로. 그 안에 진구가 있었다는 게 조금 의외이기는 했다. 진구는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도 않고, 감정에 지배당하는 인간이 아닐 거로 생각했는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진구 역시 사람이고 남들과 다르다는 점이 점점 희미해지는 건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이 '모래시대'야 말로 이 땅에서는 가장 무서운 재앙인 것이다. 사막의 한 도시, 한 나라를 별일 아니란 듯이 집어삼켜왔다. (123페이지)

 

지나고 나면, 서로가 한 발 물러서서 보게 된다면, 시간이란 약을 삼키면 어느 정도 회복되는 게 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난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때도 있다. 진구가 의뢰를 거절했지만 기어코 일어난 일, 누군가를 살해하고 가해자가 되는 사람, 그 순간에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겼던 순간까지. 찰나의 순간에 인간의 욕망이 발휘한 힘이겠지만, 그에 이유가 되는 것을 찾다 보면 또 그럴 수 있는 일로 된다. 사막에서 일어난 그 일도 검은 모래 폭풍이 모든 것을 뒤덮으며 욕심도 죄도 다 덮어주었다. 그땐 그런 걸로 믿었다. 오랜 시간 가슴 속에서 불편함으로 남아있을 줄도 모르고... 이번 사건으로 모든 것은 드러나고 많은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모래바람이 덮어주었다고 믿었던 것들도 착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모든 것을 다시 풀어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진구 앞에 다시 나타난 사람들, 시간이 그걸 증명한다.

 

그냥 백수 탐정인 줄로만 알았던 진구가, 과거와 함께 상당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인물이라는 게 밝혀져 속이 다 시원하다. 간혹 진구가 감정이 없는 인간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앞으로의 진구 시리즈가 더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진구의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의뢰받는 사건을 대하고 해결하는 진구의 모습에서 혹시 변화를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현재의 진구의 모습이 어떤 시간이 흘러 형성된 것인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할 진구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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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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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방 안에는 보통 200페이지 이하의 책을 넣고 다닌다. 집에서 읽다가 만 책 중에서도 얇으면 가지고 다니고 두꺼우면 그냥 집에서만 읽는다. 무거우니까. ㅠㅠ 그런데 이기호의 이 소설은 얇고 잘 읽히는데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까워서 일부러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았는데도 너무 금방 읽혀서 속이 상했다. 아, 정말 몇 년 동안 계속 연재되었으면 지금부터라도 일부러 찾아 읽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재밌게 읽었는데도, 막상 이 소설이 어떤 느낌일지 설명하려니 고민이 생기더라. 뭐라고 딱 한마디로 말하고 싶은데 그렇게 또 한 마디만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아서 고민스럽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여동생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동생이 둘째 아이(초2)에게 물었단다. "00이는 크면 엄마랑 결혼할 거야?" 유치한 질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자랄 때 많이 들어왔던 말이지 않아? 아들 가진 엄마는 아들에게 그렇게 묻고, 딸 가진 아빠는 딸에게 그렇게 묻고. 그렇게 어렸을 적부터 이상형이 정해지는 것처럼 여겼다. 아들에게는 엄마가 이상형, 딸에게는 아빠가 이상형. 그러다가 자식이 크고 결혼 상대자를 인사시키려 데려오면, "너는 아빠(엄마)랑 결혼하겠다며?!" 하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고. 이런 경우 아빠들이 느끼는 배신감이 더 크다던데, 뭐, 정확히는 알 수 없고.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이런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대목이다. 그만큼 아낌없이 키우다가 보니 애착이 심한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가도, 온전히 내 품 안의 아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할 때라고 인정해야 할 순간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암튼 아홉 살 조카 아이가 저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뻔한 대답을 예상하기도 했다. "나는 엄마랑 결혼할 거야!" 뭐 이런 거. 그런데 조카 아이의 대답은 엄마와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는 거다. 그에 또 나는 생각했지. '아, 엄마와 아들은 결혼할 수 없는 사이구나, 하는 걸 말하려는 거 아닐까?' 전혀 아니었다. 조카 아이의 말은 이랬다. 자기가 커서 결혼할 때가 되면 엄마는 너무 늙은 사람이 되니까 자기와 결혼을 할 수가 없다는 거다. 아, 이런... ㅠㅠ 엄마와 아들을 결혼을 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아는 것과 별개로, 가슴이 싸~해졌을 것 같다. 이때 느꼈던 감정이 뭐였더라, 하는 이야기를 여동생과 한참 했었다.

 

아이가 커가는 게 기적 같으면서도 슬퍼지는 일. 가족이 함께여서 행복하지만 힘든 시간. 부모님의 건강이 걱정되면서도 기대고 싶은 순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현실에 답답하면서도 안도가 되는 마음의 모순. 이 소설은 딱 그런 느낌이다. 여동생이 둘째 아이의 말에서 느낀 많은 생각을 듣고 공감했던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게 한다. 엄마가 너무 늙어서 자기와 결혼할 수 없다는 아이의 말에 드는 많은 생각. 아이가 자란만큼 부모가 늙는 것은 당연하지만 함께할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 슬퍼지고, 계속 아이로 있었으면 좋겠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대꾸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의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게 아쉽고, 또 아이가 자라는 게 당연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점점 부모의 지분이 줄어드는 게 섭섭할 것 같고... 아이를 키우면서 겪었던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행복하고 아쉬운 순간이 동시에 찾아오는 그때.

 

그날 밤 늦게 서재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가보니 아내와 세 아이들이 침대 바로 아래 좁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자면 아이들이 따라 올라올까 봐, 그러다가 해여 아래로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아내는 항상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다닥다닥 붙어 자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자니 무언가 뭉클한 것이 가슴 한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나도 침대 위로 오르지 못하고 그들 틈에 살짝 모로 누웠다. 쌕쌕거리는 앙들의 숨소리가 들리고 아내의 콧김이 내 뺨에 와닿았다. 아이들의 살 내음과 아내의 살 내음도 와닿았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68페이지)

 

말 그대로 '유쾌한 기호씨네'이다.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도 조금은 어리바리한 아빠와 온몸과 마음이 중무장한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엄마.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게 취미인 큰아들과 중간에 끼인 둘째 아들, 존재 자체가 너무 예쁜 막내딸. 몸이 아픈 것을 말하지 않고 자식 힘든 일에 손을 보태러 오시는 부모님. 단순하게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가족이 성장해가는 이야기더라. 소소한 그들의 일상에 웃다가, 어느 순간 보니 울고 있더라는 이상한(?) 이야기.

 

언제나 '가족'이 화두가 되는 이야기는 비슷하다. 거의 두 가지로 나뉘기도 한다. 고발 프로그램에서나 볼 것 같은 이기적인 집단이거나, 울고 웃다 보니 이렇게 함께해왔다는 훈훈함이거나. 당연히 기호씨네 가족은 후자다. 분명 살면서 힘든 시간이 있었을 테지만,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환히 보이게 한다. '이래서 웃을 수밖에 없군!' 아니면 '이렇게 울다 보니 우리 집 얘기였네!' 하는 공감이 저절로 따라오는 에피소드. 늘 양가의 감정이 같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가족이 사는 이야기는 웃음이 훨씬 많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도 한글을 다 떼지 못해서 걱정되는 건 그들의 부모가 아니라 나였다. 우리 자랄 때와는 분명 다른 요즘이지 않은가. '유쾌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면 좋지'라고 하는 건 마음속 말들이고, 현실 속 초등학교 입학생은 그게 아니니까. 과도한 교육열이 아니라 이제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 떼기는 기본 중의 기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기호씨 부부도 인정하더라.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는 속담을 말하는 아이에게 웃음으로 답하긴 했지만, 뭐 그 정도는 괜찮겠지. ^^

 

44편의 소소한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늘 마지막은 있기 마련인가 보다. 또 다른 순간들이 오면서 그들의 시간도 흐른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 담기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는 더 많을 거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기호씨 부부도 늙어가고, 부부의 부모님도 점점 더 약해지겠지. 그런데 아직은 그런 슬픔을 떠올리기 싫게 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조금 천천히 자랐으면, 우리가 조금 천천히 늙어갔으면, 우리의 부모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계셨으면 하는 마음들. 힘든 순간을 상쇄할 알콩달콩 세세한 순간들이 더 많이 쌓였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가족으로 엮인 우리가 서로를 보고 배우며 자라는 시간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품게 한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서글픔보다는 애틋함이, 눈물보다는 웃음이 차지하는 순간들이 계속 쌓였으면 하는 바람을 품으면서 읽게 되는 기호씨네 이야기다.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건 기쁜 일은 더 기뻐지고 슬픈 일은 더 슬퍼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지금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에게, 그리고 슬픔에 빠져 있는 부모들과 아이들에게도 언제나 포스가 함께하길.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다. (247페이지)

 

서툴지만 귀여운 아빠, 어설프게 전하는 마음이 기특한 남편, 마흔이 넘고서도 그저 막내로 존재하는 아들. 기호씨네 가정에서 그가 서 있는 자리다. 금방 '뻥'하고 터질 풍선만 불어대도, 뭔가를 뚝딱 해낼 것 같지만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여전히 배울 게 많은 아빠다. (이렇게 말하면 그의 아내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아빠 기호씨가 늘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왠지 기호씨가 지금 모습 그대로 존재할 때 그 가족에게 웃음이 더 많이 생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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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6-20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지가 넘어가는게 아깝다,고 하신 얘기 격하게 공감합니다~~

구단씨 2017-06-21 16:30   좋아요 1 | URL
깔깔대며 웃다가 보니까 마지막 페이지였어요. ㅡ.ㅡ;;;
 
흉터의 꽃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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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또 하나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생각해보니 이미 들어왔던 이야기 말고는 어떤 역사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았다. 배워왔던 것 말고는 더 알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늘 하루 먹고 사는데 그게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난가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서는, 오늘 하루 끼니를 채우는 일이 사는 전부가 아님을 많이 느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모이니 나라가 바뀌는 기적(?)을 보고, 우리가 사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먼저인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시간에 반드시 봐야 하는 것들. 제대로 아는 것, 큰 그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여기 또 있었다.

 

정현재는 히로시마 원폭 관련된 소설을 쓰려고 합천을 찾아간다. 그 자신이 원폭 피해자 2세인 것을 숨긴 채로 살아왔는데, 소설을 위해 그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거다.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 합천 원폭피해복지관에서 만난, 심하게 화상을 입은 얼굴로 그동안 고개 숙이고 살아왔던 강분희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그는 캄캄하게 가려진 그때 그 시간을 본다. 전쟁 통에,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강분희의 아버지 강순구는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히로시마로 향한다. 거기 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히로시마로 갔다. 유독 합천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던 히로시마. 어려웠지만 열심히 살았다. 거기서 자리 잡고 살면서 아이도 낳고, 어느 정도 살만해졌던 그때.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트린다.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쏟아졌고, 터진 원폭으로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사람들은 다쳤다. 다쳤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엉망이 되었다. 원폭 사건으로 강분희는 몸에 화상을 입고, 강분희와 마음을 나눴던 동철은 발을 다쳤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딸의 모습에 강순구는 가족을 데리고 합천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합천에서도 먹고 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랴. 강순구는 온몸을 다해 가족을 보살피려 애쓴다.

 

소설은 정현재의 현재와 강분희 가족의 역사가 교차로 진행된다. 단순히 소설 한 편 쓰겠다고 찾아간 합천에서 자기도 모르게 원폭 피해자들의 현실을 마주한 정현재는 자기가 피하려 했던 고통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의 내면에 변화가 생긴 거다. 그의 변화는 원폭 피해자, 원폭 피해자 2세, 3세들의 이야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있는데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서, 아니, 그 사실에 책임을 질 사람이 없는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원폭 피해자의 고통을 그대로 들으면서 그 자신이 부정하려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폭 투하로 일본은 항복했고 대한민국은 해방되었다는 사실 이면에 자리한 것을 이제야 본다. 거기서 끝났다고 여긴 전쟁이 원폭 피해자에게는 계속되고 있던 거다. 비극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은 후련하게 끝났다고 여긴 게 잘못되었다. 그때 거기 있던 조선인들을 잊고 있던 거다. 7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일본은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원폭 피해자가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란 게 마음 아프다. 물론 나도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몰랐다. 일본이 '유일'이 아니라 그냥 피폭국이라고 해도 그런가 보다 했다. 더군다나, 그때의 고통은 거기서 모든 상황을 평정하고 끝난 게 아니었다는 걸 이 소설로 새삼 알게 된다.

 

과거에서 머물지 않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정현재가 만난 인물들의 인터뷰로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이, 그때 그 순간에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몇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고통이 대물림된다는 게 이 소설이 전하는 핵심이자 우리가 봐야 할 문제다. 현재진행형은 고통. 강분희의 화상은 겉으로 보이는 고통이 전부일 것 같지만, 아니다. 그녀의 첫아이는 사산되었고, 그녀의 딸 박인옥은 병명도 모를 병에 태어나면서부터 잘 걷지도 못하고 평생 고통받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병명을 알았다) 박인옥의 큰아들은 중증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 3대에 걸친 원폭 피해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끝났어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는다. 여전히 그들의 삶은 진행 중이며 고통은 역시 삶과 함께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원폭의 참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들에게서 듣는다. 동시에 우리, 아니 전 세계가 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남긴다.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 원폭 피해자의 2세, 3세들로 이어지는 피해들. '합천'이 왜 '한국의 히로시마'인가 하는 물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이야기가 흐르면서 더 깊고 오래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컸다. 그동안 보고 들어왔던 것에 가려진 것들이 들춰지면서, 고통의 시작점을 찾게 한다. 유일한 원폭 피해국이라는 일본에 가려진 대한민국의 원폭 피해자들, 더 깊고 많은 이유로 원폭을 투하한 미국, 검은 비를 맞으며 유전되는 고통. 언제 또 되풀이될지 모를 비극에 맞서 원폭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함께 관심 두고 최선의 답을 찾아야 할 문제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억은 과연 힘이 될 수 있을까. 기억은 어쩌면 땅에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기억은 미약할지라도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 수억 명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숲이 되고 산이 되고 거대한 산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진정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아닐까. 어둠을 기억해야만 빛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255페이지)

 

그의 꿈은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는 것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연애를 하거나 직장을 갖거나 가정을 가질 수 없는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물어야 했던 삶. 그가 꿈꾼 것은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지하철 계단을 힘차게 오르내리고, 아침이면 출근을 하고 퇴근시간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는 삶. 자식 노릇을 하고, 동생 노릇, 친구 노릇, 애인 노릇을 하는 것.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 작고 소소한 것을 꿈꾸는 일조차 그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206~207페이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저 안녕한 하루를 보내겠다고, 평범한 인생을 살겠다는 게 너무 큰 바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보는 일이었다. 이 얼굴로 누굴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몸으로 낳는 아이는 괜찮을까... 참혹한 현실을 겪어내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치료도 되지 않는 병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만이 겪을 수 있는 아픔이겠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리 노력해도 그 보통에 이르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계속 그 고통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현실이 감당이 안 되더라. 그런 현실이 자식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보는 마음은 또 어떨까. 사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원폭 피해를 모르는 나도 안다. 그러니 원폭 피해를 대물림받은 그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길이겠나. 그래서 이 소설이 전하는 울림이 크다. 이렇게 알게 되었으니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고 있으니 해결을 위해 나아가야 하고... 그 끝이 어디일지, 언제쯤 그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많은 시선이 모이는 힘은 우리가 이미 경험했으니 길이 보이지 않을까. 여전히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작은 손 하나씩 모여 변화를 시작한 우리였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물음과 동시에 답을 내놓는 소설이다. 2017년 5월의 대한민국을 떠올리며 희망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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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올빼미 농장 (특별판) 작가정신 소설향 19
백민석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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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잘못 배달된 편지로 시작된 소설은 미스터리한 분위기였다. 배달된 주소는 맞으나, 수신인은 달랐다. 화자인 ‘나’는 그 편지 속 장소에 찾아가기로 한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배달된 편지를 읽고 그 편지의 발송지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끌림이 있었다. 어디서, 왜, 누가 보낸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테지. 이 소설을 읽는 나도 그랬다. 그 시작을 찾아보지 않고서는 답답함이 계속될 것 같았다. ‘나’는 ‘인형’과 함께 편지 속 동생이 ‘죽은 올빼미 농장’이라고 이름 붙인 곳으로 간다. 하지만 그곳에 가서 더 혼란스러울 뿐이다. 주소가 맞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장소가 맞는다고 알려준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설은 ‘나’가 잘못 배달된 편지를 근거로 그 주소를 찾아가고, 그곳에 무엇이 있었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현재 그의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 ‘나’는 작사가다. 계약된 글을 써야 하고, 가끔 친구인 ‘민’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밤을 함께 보낸다. 동료로 보이는 작곡가 ‘손자’의 투정도 받아줘야 했고, 사무실에 나가 일정관리도 해야 했다. 꽉 막힌 듯한 일상을 보내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소설 속 문장으로 표현되는 그의 분위기를 상상하면 그것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답답할 정도로 보이는 좁은 그의 행동반경,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대화를 주고받는 ‘인형’, 여고생 신인가수의 집에 초대받고서도, 그 아이의 불법적인 행동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약한 어른의 모습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추측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너머를 잘 보지 않는, 볼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다. 좁은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세상 전부로 보일 정도다.

 

지금 자기가 사는 곳, 그곳을 벗어난 장소와 사람에 대해 굳이 들여다볼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 어디로든 돌아갈 곳이 없고,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며 회귀의 본능을 일으키는 곳도 없을 것 같은 그다. 그러면서도 항상 느끼는 공허감의 근원을 둘러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그 근원을 찾고 싶으나 찾을 수 없던 거였을까? 알 수 없다. 그 자신도 모르게 부유하듯 자기가 있는 현재의 자리에서 사는 방법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면서 느끼는 어느 순간의 기쁨도 있을 테지만, 그렇게 살면서 찾아드는 감정의 고통이 더 클 것 같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그런 느낌이다. 작곡하는 ‘손자’는 동성 애인을 따라 현재의 삶을 정한다. ‘인형’은 현재를 잘 지내지 못하는 인물에게 적나라한 조언을 하면서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며 정리할 방법을 부추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가는 방법을, 현재의 불완전함을 변화시킬 방법을 알 수 없다, 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이다. 끝까지 모를까? 아니면, 언젠가는 알게 될까. 소설은 내내 그 불안함을 놓지 않게 한다. 처음부터 나오는, 그는 잊은 자장가를 자꾸 기억해내려 애쓰면서도 잘 떠오르지 않는데, 읽는 동안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가 그 자장가를 끝까지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의 남은 오늘과 내일은 어떻게 흘러갈까. 그러다가 소설이 진행되면서 잊힌 자장가는 그 소절을 늘려간다. 한 줄씩, 한 단락씩. 그가 편지의 주소지로 찾아가 무언가를 더 찾으려 하면서 결국 들샘을 파내기까지 했을 때, ‘손자’가 발에 줄을 묶고 베란다를 향해 달렸을 때, 자장가의 남은 부분을 적어냈으면서도 그게 끝인지 알 수 없었을 때까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소설은 분위기를 바꾼다. ‘민’이 재개발로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의 빈 곳을 보며 죽어가는 아파트라고 말할 때는 매번 어느 시간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태어나고 이별(죽음)하고, 다시 태어나고 이별하고. 낡은 아파트가 철거되고 새 아파트가 올라가듯, 우리는 계속 나아가듯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나이라는 시간만 먹어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다가 들샘의 바닥을 파헤쳐 어깨너머의 인형 목소리를 던져 넣었을 때 어쩌면 돌아갈 방법을 찾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희망을 엿본다. 현실의 팍팍함도,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의 유아성도 사라지게 할 어떤 시작점의 순간을 볼 기회가 이제는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맘에 따라선 변형도 시킬 수 있는 실체인 이 빈 땅은, 정작 무엇도 가르쳐주고 있지 않았다. 먼 길을 온 내게 정작 가르쳐주고 있는 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다라는 사실뿐이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 외의 다른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빈 땅 외의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177페이지)

 

시간은 흘렀으나, 외모는 변했으나(늙었으나), 마음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의 소외감을 느꼈다. 아껴주지 못하고 진정으로 보듬어주지 못하는 자세를 가진 우리의 모습만 확인한 것 같다. 많은 것을 보고 살면서 모든 순간 잘 건너갈 방법을 배우는 것 같지만, 정작 우리 안에 자리한 서늘함과 위태로움을 모른 채로 세상을 산다고 착각하며 지내온 건 건 아닐까 하고. 살아가는 시간만큼 어디론가 가는 듯한 인생이지만, 정작 그 자리에서 매번 반복하기만 하는 걸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을 우리 안에서 나갈 줄 모르고 쌓여가면서 그 크기를 키워갔을 거라고. 그렇게 절망하면서 읽어 가는데 조금씩 찾아오는 듯한 어떤 느낌. 그가 자장가의 구절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높아지는 기대는 인형을 들샘에 수장했을 때 정점을 찍는다. 퇴화하지 않고 진화하는 내면을 마주할 우리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게 한다.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결핍의 양을 줄여가는 내면의 성장을 불러올 것을... 여전히 미성숙하고 현실의 많은 부분에 힘들게 적응하는 모습이 남아있을 테지만, 현재를 사는 법을 보여준 것 같다. 농장이 있던 빈터, 사라진 들샘. 현재의 그곳 모습이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빈 땅에 채울 수 있는 것도, 그릴 수 있는 것도, 많다.

 

작가정신에서 ‘소설향 시리즈’ 특별판으로 내놓았다. 이번에 출간된 다섯 권 모두 궁금했지만,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과 정영문의 <하품>이 가장 궁금했다. 어쩌다 <죽은 올빼미 농장>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시리즈를 한 권씩 다 만나고 싶어진다. 짧고 매력적인 소설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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