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
김진명 지음, 박상철 그림 / 새움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지 않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는 그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구판 출간 때 읽었더라.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봤다. 지금 찾아보니 참 오래된 영화던데, 아마, 그때 나는 소설의 흥미를 영화로 이어가려고 봤던 것 같다. 그 작품을 시작으로 한동안 그의 소설을 꾸준히 읽었다. 역사에 문외한인 내가 그나마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던 거다. 요즘에야 그의 작품을 덜 읽기도 하고(그때보다 출간작이 적기도 하고), 비슷한 분위기의 소설들이라 피해가려고도 했지만(사실이 그러하니 고백한다), 이번 신간 『김진명 한국사 X파일』을 읽다 보니 그의 작품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읽었던 그의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 거다.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자료조사가 필요하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닌데, 그가 여러 곳으로 향한 발걸음은 소설을 위한 자료조사인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 그가 찾으려 애썼던 우리 역사의 진실을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소설이 소설로만 보이지 않는다. 추측건대, 그는 독자들에게, 더 넓게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런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우리 역사를 지키는 이도, 오랫동안 계속된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을 이도 오직 우리뿐이라고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그런 마음으로 태어난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그가 어떤 간절함으로 취재해왔는지 확인시켜준다. 읽기 쉽게 그림으로 구성되어서 더 빠른 이해를 부른다. 모두 7장으로 구성하여 그가 그동안 의문을 갖고 파헤쳐온 우리 역사의 뿌리를 듣게 한다. 가장 먼저 한국의 한(韓)은 어디서 왔는지 파헤친다. 한 씨의 유래를 찾은 것부터 시작한 게 중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만 여겼던 그 이름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발견하게 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그건 우리가 가진 역사의 기록이 거의 없는 데서 비롯한 일이기도 하기에 안타까운 일이다. 기록이 없었거나 기록이 사라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역사의 진실은 기록에서 증명한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거듭 강조하는 것이리라.

저자가 임나일본부 조작의 역사를 파헤친 소설 『몽유도원』을 취재하면서 밝힌 사실로 일본의 교과서에서 임나일본부설을 빼게 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사실 이 부분 읽으면서 (이 책에서 소개된 다른 근거들을 보면서도) 한 나라의 역사학자들이 분명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자기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게 먼저라는 사고를 갖는데 놀랐다. 소설로만 대할 때와는 달랐다. 진실을 알고서도 묻어버리려는 마음은 학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덮기도 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했다. 그렇게 덮여진 진실들은 또 얼마나 될까 싶어서 의심이 자꾸 쌓이기도 하고...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읽으면서도 많이 흥분했었는데,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자료를 찾아다니던 작가의 노고를 이 책으로 듣고 보니 더 아팠다. 명성황후 최후의 순간을 그리는 일은 소설로만 머물기를 바라지 않게 된다. 그가 그 순간을 찾으러 다니면서 발견한 진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한 나라의 왕비가 어떤 모습으로 죽어갔는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학자조차도 차마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 없었음을 확인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간'이나 '사후능욕'이 아니라, 에조보고서에 기록된 그대로 '칼로 몇 군데 상처를 내고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했다'는 만행을 확인하게 된 거다. 이 소설의 일본 출간이 무산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작가는 무엇보다 일본인에게 읽혔으면 하고 바랐겠지만, 역사의 기록조차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드러내놓은 정도라면 이 소설이 불러올 파장을 알기 때문이겠지.

박정희의 죽음을 김재규의 반란 정도로만 여겼는데, 그가 찾은 박정희 죽음의 진실은 뜻밖이었다. 이미 소설로 읽을 당시에도 놀라웠는데, 그의 진실 추적 과정을 듣고 보니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으스스했다. (이 부분은 그의 소설 『1026』에서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박정희 죽음에 가려진 배후와 진실을 듣고 보면, 수많은 '만약'을 떠올리게 된다.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현재는 어떠했을까, 만약 박정희가 핵 개발을 성공했더라면 우리는 북한과 어떤 관계가 되었을까, 등등.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은 채로 진행되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떠올려본다.

김정남 암살 사건으로 떠들썩한 요즘이다. 그만큼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에 대한 관심도 높다. 또 누가 죽어 나갈까, 북한의 정권은 어떻게 흐르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저자가 말하는 북한 정권의 내막을 듣고 보니 더 궁금해지더라. 정말 김정은이 실세일까? 김정은은 그가 마음먹은 대로 정권을 휘두르고 있는 게 맞나? 뉴스로 접하는 소식이 전부였던 나에게 저자의 설명은 북한 내부 구조와 그 안에서 힘을 발휘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한다. 여전히 다 알 수 없는 곳이 북한이지만, 폐쇄된 그곳의 흐름을 이렇게나마 접할 수 있다니 다행이다.

함흥차사를 오래된 속담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저자가 전하는 진실은 놀랍기도 했고 권력 앞에서는 부모·자식도 없다는 씁쓸함을 안겼다. 『하늘이여 땅이여』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태종(이방원)이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유폐시키면서 들을 욕을 차단하고자 만든 유언비어였다니... 역사가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도 아니겠지만, 그 내막을 알고 다시 보는 역사는 우울하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나 싶을 정도로, 권력을 위해서는 역사 왜곡도 아무렇지도 않구나.

 

 

 

한자의 주인을 찾는 문자의 기원을 둘러싼 역사 전쟁도 흥미롭다. 마지막 장인 이 내용은 『글자전쟁』에서 확인한 바 있다. 이 내용 역시 그 뿌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찾아낸다. 그래서일까. 한 번씩 이런 내용을 확인할 때마다 궁금해진다. 도대체 우리가 모르는 우리 역사, 왜곡되어 관심조차 없는 역사가 얼마나 많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 궁금증에 이어, 그렇게 감춰진 우리 역사를 찾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어야 한다는 과제를 떠올려본다. 저자가 하는 말, 저자가 발 벗고 나선 행동 역시 그 과제를 수행 중인 거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가 하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저자는 우리가 길든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자각과 이성의 눈으로 역사를 보고 현실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관심 두고 끈질기게 취재한 역사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유도 똑같다.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25년 동안 뛰어다닌 그가 소설이란 기록으로 들려주려는 흔적을 이렇게 확인하고 보니, 그의 소설이 태어나기 위해 참 많이도 애썼구나 싶다. 게다가 하나의 이야기로만 남는 게 아니라, 역사까지 관심 두게 하니 소설 그 이상의 역할을 해왔던 것 아니겠나.

 

혼란스러운 정국에 한국사 열풍이 이는 건 낯설지 않다. 그건 아마도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게 아닐까. 현재의 오류를 바로잡고 제대로 된 나라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싶은 바람이 담긴 듯하다. 넉 달이 넘게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현실에 지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을 역사에서 보고 싶은 거다. 역사 속 우리는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왔는지 듣고 싶기도 할 테고, 수많은 문제의 해결을 어떻게 이뤄내어 오늘의 대한민국까지 이어져 왔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라고. 그 안에는 왜곡된 역사도 포함된다. 저자가 취재로 밝혀온 역사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오해와 오류를 바로잡은 일들을 이렇게 증명하는 게 힘이 된다. 오늘의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 힘, 의지가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게 저자의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쉽고 편하게 읽게 만들어진 이 책이 마냥 쉽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다. 마음이 무겁다. 그의 노고를 확인하게 되어 미안하면서도, 내가 사는 이 시간이 어디서 비롯되어있는지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성과 기회의 시간을 동시에 만드는 책이다.

 

기존 출간된 그의 소설과 함께 읽으면 더 많은 이해와 공감을 불러올 것이니, 기회가 된다면 그의 소설과 함께 차근차근 읽어보길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문학 브런치 -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 브런치 시리즈 3
정시몬 지음 / 부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의 정의로 문을 여는 저자의 의도가 분명하게 보인다. 저절로 공감을 부른다. 고전은 '나이를 2천 살 정도 먹어야' 나, 좀, 고전이네~ 하고 이름을 올릴 수 있다거나, '지속적인 탁월함'을 가진 작품이라고 인용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가 가장 공감했던 고전의 정의는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 '고전. 사람들이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는 않는 책.' 이보다 더 매력적인 고전의 정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고전을 구매했는데도 읽지 않았거나, 혹은 도서관에서 대출해왔어도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나는 마크 트웨인의 고전에 대한 정의를 첫 번째로 뽑고 싶다. 실제, 『세계문학 브런치』를 읽다 보니, 고전의 맛보기나 재미있게 읽을 요소를 끄집어내서 밥상을 차려놓은 저자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고전 속 메시지들을 찾아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원전으로 토핑까지 얹어놓으니 저절로 빠져든다. 그 결과로 칭찬은 하면서도 읽지 않는 책을, 읽고 나서 칭찬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겠냔 말이다.

 

모두 7개의 챕터로 나누어 그 흐름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그 포문을 열고, 단테와 괴테의 삶을 비교하면서 선과 악, 지옥과 악마를 말한다. 장르 문학에서 인간의 내면을 보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소개한다. 근대 소설의 거장들을 불러오고, 세계문학의 악동들이라 부르는 작가의 생애를 이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시를 읊으며 그들의 문장에서 감정을 읽는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 유명한 제목에 여러 번 읽어보자 마음먹으면서도 방대한 분량에 감히 첫 페이지를 열지도 못한 작품이다. 영화로 만나면서 흥미를 시도할 수는 있으나, 저자의 말에 멈칫거리게 된다. 실제 우리가 알고 들어왔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이야기는 왜곡되었건, 빠져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원전을 읽어야만 제대로 그 작품을 판단할 수 있다는 건 여기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게다가 이 작품들을 검열해야 한다던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놀라웠다. 예나 지금이나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억압하려 했던 건 변함이 없구나. 그래서 고전이라는 말이구나 싶기도 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후대의 작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온갖 장르에서 재해석과 재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깊이와 작품성이야말로 고전의 힘이다. 독자 여러분이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향해 당긴 분노의 활시위처럼 힘차게 울리는 이 고전의 내공을 이번 챕터에서 조금이나마 느껴 봤기를 바란다. (76페이지)

 

메피스토펠레스를 데리고 와 우리 마음에 사이다 한 잔 뿌리기도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파우스트에게 던진 유혹에 메피스토펠레스를 악으로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얇고 두꺼운 가면 하나를 쓰고 사는 우리 모습을 대변하는 게 메피스토펠레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체면이나 분위기상, 해서는 안 될 일이나 말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 잘 안다. 그렇게 쌓이다가 뱃속에 엄청난 양의 고구마가 축적된 것처럼 만성 변비에 이르면 결국 성능 좋은 변비약 몇 알, 혹은 대장 청소를 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 닿지 않게 살려면,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의 거칠 것 없는 입담이나 느물거리는 만사 오케이 태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지금 우리 삶의 위치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을 불러오는 것. 고전의 힘은 여기서 발휘되는 게 아닐까.

 

문학에서 찾는 어떤 메시지나 가르침이 아니라, 그 맛을 즐기면서 접근하는 게 우선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서 왜 이렇게 무겁게 다가오나 싶었는데, 그 분위기는 언급된 작품의 제목과는 사뭇 달랐다. 고전이라고 해서, 첫 부분에 언급한 것처럼 2천 살 이상 잡순 작품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까지 끌어들인다. 흔히 장르문학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차려놓고 왜 그 작품들이 꾸준히 인기를 먹고 살아오는지 찾게 한다. 애드거 앨런 포, 애거서 크리스티를 비롯한 추리 소설의 대표 주자들이 말하는 냉혹한 현실을 상기하게 하면서도, 셜록 홈스 시리즈의 작품을 분석한다. (여기서 '분석'이라고 하는 건 깊은 연구라기보다는 맛보기 정도다)

 

『보물섬』을 쓴 스티븐슨과 『솔로몬 왕의 보물』을 지은 해거드가 활동하던 당시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이라 불리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가 탐험가, 모험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이야기 속에 반영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 루카치(György Lukács)는 소설을 '부르주아 계급의 서사시(bourgeois epic)'라고 불렀는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모험 소설은 말하자면 '제국주의자들(imperialists)의 서사시'이기도 했다. (172페이지)

 

네 번째 챕터에서 다룬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더 흥미롭다. 유명한 저자의 이름과 작품들에서, 마치 그 작품들을 읽은 것처럼 착각이 들게 하는 게 나에게 각인된 셰익스피어였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은 게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한두 편이 전부다. 그런데도 마치 '내가 혹시 그의 작품을 읽진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자주 갖게 한다. 너무 유명해서, 너무 많이 각색되어 대중에게 알려졌기에 내용을 다 알아서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또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 작품의 일부분이거나, 내용을 변형했기에 원전과 다르게 알게 되고 또 그게 사실이라고 굳어지는 내용.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이 '그 상인'이라고 생각했던 적 없는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나이를 보면서 '에구구, 어린 것들이 공부나 할 것이지~'하면서 읽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의 절대적인 사랑 앞에서 한 번쯤은 나에게도 그런 사랑 찾아오기를 바란 적 없었나? 살벌한 요즘을 살아가기에 너무 철없는 생각인가? ㅎㅎ 이번에 앤 타일러의 『식초 아가씨』를 읽으려고 하다가 원전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먼저 제대로 읽고 나서 읽으려고 아직 펼치지 못했다. 희곡 버전과 소설 버전의 비교도 재밌을 것 같다.

 

특히 다섯 번째 챕터인 근대 소설의 거인들에서 소개한 작품의 목록이 토마스 C. 포스터의 『미국을 만든 책 25』에 언급된 목록과 겹치는 작품들이 몇 권 있었다. 그걸 보면서, 근대 소설에서 미국이 빠질 수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문학의 역사적 흐름이나 특히 이 책에서 말하는 고전들을 읽은 게 거의 없어서, 근대 소설과 미국 관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겹치는 목록만 봐도 그 연관성에 관심 두고 싶어졌다. 문학과 역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또 한 번 이렇게 배운다. 『주홍 글씨』를 통해서 본 불륜의 공동 책임, 어떤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다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그 여자의 인생과 사랑이 궁금하게 하는 『보바리 부인』과 『안나 까레니나』, 원전을 읽어야 그 인물과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다짐하게 하는 『레 미제라블』, 오디세이아를 바탕으로 했다는 『율리시스』 등 읽고 싶은 목록이 더 늘었다. 2천 살까지는 아닌 이 작품들과는 나이 차가 그래도 덜 할 터이니 부담이 적지 않을까? ^^

 

『율리시스』는 이렇게 작품을 둘러싼 주변의 엄청난 찬사와 담론에 휩쓸려 오히려 독자를 많이 놓친, 전형적인 저주받은 고전의 하나다. 독자 입장에서는 일단 기죽지 말고 책을 집어 들어-이렇게 말하기에는 책이 좀 두껍기는 하다. 보통 8백 페이지, 거기다 후대 평론가나 편집자의 상세한 주석이 달린 경우에는 1천 페이지를 훌쩍 넘어가기도 하니까-시작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297페이지)

 

나에게 재미와 놀라움을 선사했던 여섯 번째 챕터. 오랜만에 다시 만난 도리언 그레이도 반가웠고,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는 첫 페이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설정이 시작되더라도 어려워하거나 고민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된다.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드라큘라』를 화면이 아닌 활자로 만나면 더 섬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그 섬뜩함 뒤의 마음은 혹시 또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더라. 냉소와 독설의 대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 더 궁금해진 건 물론이고, 아이들 책이라 여겼던 『걸리버 여행기』를 완독하고 싶어졌다(우리가 영화나 만화로 접한 걸리버 여행기는 원전 일부라고 한다). 『모비 딕』에 등장하는 캐릭터 스타벅이 스타벅스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도 이제 알았네. 무엇보다 나에게 이 챕터의 압권은 『돈 키호테』이다. 열린책들 판본으로 이 책을 구입했으나, 두 번 말하면 입 아플 정도인 그 말. 아직 읽지 않았다. 그냥 기사의 모험 정도로만 생각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으면, 얼마나 주인공이 멋졌으면 이렇게 오랜 시간 회자하면서 다른 판본이 거듭 나올 정도가 되느냔 말인가, 라는 궁금증과 기대가 있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에 알았다. 모험을 떠난 돈 키호테, 그는 젊고 멋지고 잘생긴 청년이 아니라 노인이었다는 걸. ㅠㅠ 뭐, 노인은 기사도 하지 말고 모험도 떠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지만, 오랜 시간 나에게 '돈 키호테'는 세상 모험을 즐기는 멋지구리구리한 배낭 여행자쯤으로 각인되었단 말이다. 정말 충격이야.

 

에이해브와 그 똘마니들의 으쌰으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스타벅. 하지만 비록 동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었는지 몰라도 그의 이름은 『모비 딕』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보다도 더 현대인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 최고의 커피 브랜드라고 할 스타벅스(Starbucks)가 바로 그의 이름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회사 창립자들 중 한 명이 『모비 딕』의 광팬이라는 인연 덕분이었다. (352페이지)

 

세르반테스는 그가 활동하던 16세기 무렵까지도 스페인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중세의 잔재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를 풍자하기 위해 『돈 키호테』를 썼다. 분명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풍차를 공격하는, 즉 이상주의에 도취되어 무모한 짓을 일삼는 일종의 '또라이'이자 반영웅(anti-hero)이다. 이 책이 동시대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향을 끌어낸 것도 예리한 풍자의 힘 덕분이었다. (390페이지)

 

마지막은 시로 그 브런치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들을 소개한다. 여전히 시를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지워지지는 않지만, 그 배경과 시인의 삶을 듣고 읽으니, 그들이 하는 말을 조금 더 들어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편하지는 않지만 계속 접근하고 싶은 장르다.

 

바이런의 시편들 가운데 지금까지도 일반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는 작품은 연애시들이다. 이들 시에는 여성 편력이 복잡했던 그의 실제 인생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를 보면 바이런은 상당한 미남이었던 것 같고, 거기다 귀족 출신이라는 배경에 아름다운 시를 쓰는 재능까지 갖추어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절름발이였지만 오히려 그의 불구는 여성들의 모성 본능을 자극해서 돌봐 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468페이지)

 

엘리엇이 뮤지컬 <캐츠Cats>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캐츠>는 고양이들의 습성과 생태를 묘사한 시를 모은 엘리엇의 시집 『늙은 시인의 영리한 고양이 안내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원작으로 한다(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서식하는 유대류 동물 '포섬possum'에서 따온 Old Possum은 엘리엇의 별명이었다). (527페이지)

 

 

시와 소설, 희곡 등 80여 편의 작품으로 우아한 브런치 차려놓은 작가의 밥상을 잘 받았다. 때로는 극과 극의 분위기로, 때로는 비슷한 부분의 비교로, 때로는 오해를 바로잡으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졌다.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확인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번 읽어봐도 좋겠다고, 이렇게 재밌는 작품들을 못 읽을 이유가 없다고 말이다. 의미나 메시지는 그다음에 찾아도 늦지 않으니 부담 내려놓고 즐겁게 시작해 보라고 말하는 듯해서 안심된다. 그래서 선뜻 도전해보고 싶은 목록이 엄청 늘었다. (인터넷서점의 장바구니가 이미 터질 지경이라는 건 안 비밀)

 

다른 목적이나 수식어 필요 없이, 일단은 문학을 즐겁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와 가치는 둘째 치고, 문학의 맛에 집중하라는 저자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맛있게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영양분도 섭취가 된다. 말 그대로 '문학의 맛'을 제대로 전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발휘된 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고전 무식자인 나를 그 늪에서 건져 올릴 책으로 남을 것 같다. 이 어려운 작품들 이야기를 하면서 편하게 읽히는 책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브런치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앞서 출간된 작품들은 읽고 싶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책들도 읽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도서 상세페이지에서 본 저자의 소개가 재밌어서 이 책을 읽게 됐다. 책을 좋아하지만, 책과 관련 없는 일을 회계 일을 하게 되었고, 어느 날 한국에 출장 왔다가 우연히 출판사를 소개받고 진짜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게, 저자는 천생 책과 가까이, 아니 이렇게 책을 직접 쓰면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 대책 없는 간서치가 되었다는 저자가 쓴 책은, 그것도 고전을 얘기하는 책은 어떨까 싶어 궁금했는데 읽길 잘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승욱 2017-01-20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란 칭찬을 하면서도 읽지는 않는 책이라는 말이 정말 공감되네요. 저는 이 독서노트가 고전 같아요. 마치 소개하신 이책을 다 읽은 느낌이 드네요. 그래서 오히려 책을 사서 읽을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건 무슨 조화일까요....

구단씨 2017-01-20 19:57   좋아요 0 | URL
어쩌면 좋죠? 제가 이 책의 스포일러를 너무 과하게 드러낸 걸까요? ^^
이 책의 저자분이 들으면 슬퍼할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
이 브런치 시리즈를 한번은 다 접해보고 싶더라고요.
출간일 순으로 보면 이 책이 가장 최근 출간작인데, 그래서 저는 거꾸로 갑니다. ^^

조승욱 2017-01-20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부터는 좋은책은 칭찬만 하지 않고 직접 읽어보려고 결심했어요^^
덕분에요... 고맙습니다.

 
[세트] 홍천기 세트 - 전2권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정은궐의 첫 작품이 출간된 지 십 년이 넘었다. 이미 이 장르를 즐기던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이 아닐 테지만, 늦게 입문하게 된 나에게는 이 장르의 재미를 알게 해준 작가다. 몇 년 전 처음 로맨스소설을 접할 때 이 장르를 즐기게 해준 몇몇 작가가 있었는데, 정은궐도 그중 한 명이다. 아마도 작가의 전작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장르의 즐거움을 잘 알지 못했을지도 모겠지. 특히 취향이 많이 나뉘는 분야라고 하던데, 웬만해서는 정은궐의 작품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독자를 거의 못했던지라, 그만큼 독자들의 보편적인 취향에 두루 맞춘 작품들이 아니었나 싶다. 책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그 진가를 더 다졌으니, 아마 오랜 시간 작가의 신간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게는 이번 작품 『홍천기』를 대하는 게 가뭄의 단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래서 신간 소식이 더없이 반가워 고민 없이 예약판매를 신청했다.

 

세종 20년, 백유화단의 여화공 홍천기가 동짓날 밤에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를 줍게 되고, 그에게 반해 찾아다닌다. 단서는 오직 하나. 그 남자가 남겨 두고 간 신발 한 켤레. 그에 반해 하늘(?)에서 떨어진 그 남자 하람은 앞을 보지 못한다. 오래전에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한 그는 세상이 온통 붉은색으로 보일 뿐이다. 언제쯤 그의 눈은 떠질까? 아니, 그의 눈이 떠질 수가 있긴 한 걸까? 어렸을 적, 기우제에 차출되어 간 자리에서 알 수 없는 사고로 그의 눈은 사라졌다. ‘잠시만’ 빌려달라는 목소리만 남은 채로. 도대체 그 ‘잠시만’은 언제까지일까. 그 상태로 그는 경복궁의 터주신이 되어 살아간다.

 

정말로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져 홍천기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오산이다. ^^ 홍천기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맞아떨어진 순간의 타이밍이었다. 시집 못한 딸 홍천기에게 남자 하나만 내려달라고 매일 기도를 드렸던 어머니의 마음에 하늘이 응답하신 거라 여겼다. 어찌 아니 그럴까. 정말로 홍천기의 위에서 (그대로 보면 그 위치는 하늘이 맞다. ^^) 남자가 뚝 하고 떨어졌으니, 어머니의 정성에 하늘이 답해줄 거라 여기지 않을 수가 없지.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라 여기고 의식이 없는 남자를 돌봤으나, 잠깐 자리 비운 사이 돌아와 보니 남자는 사라졌다. 그때부터 남자를 찾아다니던 홍천기는 궁금해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는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일까?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홍천기. ‘붉은 하늘의 기밀(紅天機)’이라는 뜻이라는데, 소설의 발단에서 드러나는 이 이름이 오해하여 해석되는 부분이 흥미롭다. 아버지의 명으로 사라진 하람을 찾아다니며 발견한 그 이름 ‘홍천기’를 확대하고 오해하여 해석하기를, 그에 반역(역모)을 시도한 인물로 생각했던 거다. 어떻게 하늘에서 정해준 홍 씨의 시대가 온 거로 믿을 수 있는지. ㅎㅎ 그가 정치나 권력에 깊게 파고드는 것보다 오히려 예술을 즐기는 순진무구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심어두고 이렇게 보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여기서 등장하는 안평대군은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 속에서 전해지는 것보다 조금 더 가벼운 캐릭터로 변신시킨 듯하다. 안평대군이 그의 형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걸 보면, 분명 그도 정치와 멀리 떨어진 인물은 아니었을 텐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시문과 그림, 가야금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사적인 매력을 더 캐릭터에 심어놓은 듯하다. 그게 화사인 홍천기와 최경, 차영욱, 안견, 화마 같은 그림과 관련한 인물들과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 소설의 배경이 되어버린 ‘그림’이라는 장에 필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는 그의 재능이 그림에 빠져버리고야 만 그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런 바탕에 기인한 소설 『홍천기』 속의 안평대군은 그림에 환장하는 오타쿠이자, 화사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으로 그렸다. 신분에 상관없이 그림을 매개로 교류하는 그가 왜 이렇게 멋있게 보이는지... ^^ 아마 드라마로 본다면 소설보다 더 발랄하고 경쾌한,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진지함을 숨긴 눈빛을 그대로 확인하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하람. 어렸을 적에 기우제에 참여한 그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되고 붉은 눈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설정은 특이했다. 거기에 신이 빚어놓은 듯한 외모라니... 그냥 시각장애인이었더라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충격으로 그의 눈도 떠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애타게 보고 싶었던 홍천기의 얼굴을 보고 만지고 실컷 품어보는 일상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온갖 상상을 하며 하람의 앞날을 그렸더랬다. 그런데 작가는 하람의 눈에 대해 처음부터 속 시원하게 풀어놓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잘생긴 남자에게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을 주어야만 했는지 부르짖으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ㅠㅠ)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기이한 일, 그로 인해 잃었던 많은 것, 사랑하는 여인마저 마음껏 볼 수 없는 현실이 하람의 고통을 한층 더하게 하면서도, 그 끝을 쉽게 예상하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소설의 중반 이후로 조금씩 드러나는 일들이 그들 관계가 어떻게 가게 될지 고무시킨다. 천재 화가의 말로로 보였던 홍은오(홍천기의 아버지)의 광증이 시작, 홍천기의 탄생, 하람이 눈을 잃은 순간이 엮어놓은 이들의 운명 같은 인연의 근원을 찾고 싶게 한다. 결국, 그 끈을 찾아가면 갈수록, 꼬인 끈을 풀면 풀수록 나타나는 진실들이 허를 내두르게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그 진실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 이들의 운명도 자리를 찾아가리. (더 얘기하면 과한 스포일러가 될까 봐 여기서 그만...)

 

로맨스소설이면서도 소설 곳곳에 감춰진 단서들을 찾게 하는, 독자가 파헤쳐야만 그 결론을 보게 해줄 거라는 듯이 흐르는 추리소설 같았다. 하지만 끝까지 로맨스소설임을 놓지는 않는다. 결말을 보면서, ‘아, 역시 사랑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게 다 드러나고도 자기가 먼저가 아닌, ‘우리’의 먼저를 생각하는 이들 좀 보라지. 사랑이 없으면 선택하지 못할 결말이잖아?! 거기에 깨알 같이 파고드는 웃음의 순간들이 이 소설을 즐겁게 읽게 한다. 개둥, 개놈, 개충이라 부르며 서로의 허물없음을 드러내는 절친들의 애정이 그대로 보였다. 그림에 미쳐서 항상 일을 저지르는 안평대군의 뒤처리를 하는 청지기의 애로사항에 어깨를 토닥이고 싶었고, 만수와 돌이의 눈치 백 단 행동이 귀엽기까지 하더라. 특히, 어디서나 당당하고 서슴없이 마음을 드러내는 홍천기의 매력은 이 소설의 제목이 ‘홍천기’일 수밖에 없게 한다. 여인으로 살면서 마음껏 재능을 뽐내지도 못하던 시대, 하지만 그 재능을 숨길 수도 없었기에 늘 긴장하는 삶, 보고 싶은 사람을 보기 위해 내려놓아야 하는 것마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매력적이다. 실존 인물에서 가져온 캐릭터라고 하더라. 도화서에서 관직을 얻은 화사였으며, 절세 미녀라고 전해진다던데, 소설 속 홍천기 역시 절세 미녀라고 나온다. 그녀의 과한(?) 발랄함에 그 외모를 더해 생각하니 괜히 부러워진다. 그림도 잘 그려, 성격도 좋아, 예쁘기까지 해, 천하제일의 남자가 좋아해 주지... ‘홍천기 is 뭔들~’ 안 그래? ^^

 

실존 인물과 허구의 적절한 조화가 어우러져 소설의 재미와 진지함을 부른다. 화마의 등장은 판타지의 요소를 더하며 오직 그림을 사랑할 뿐이라는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재능이, 그림이, 어떤 힘을 가지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가지고 있으니 드러내어 좋은 것은 다 같이 보는 즐거움을 누리자는 듯이 들려서 말이다.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이미 드라마 제작이 확정되었다니, 이 소설을 기다린 건 독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읽으면서 머릿속에 영상을 그리곤 했는데, 실제로 드라마가 되어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1년 후, 드라마로 다시 만나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가족의 두 얼굴』 상처 회복의 길, 나와 마주하기.

 

가장 치명적인 얘기는 안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치명적이라는 표현이 좀 강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어울리는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꼭꼭 숨겨서 거짓으로 위장해야겠다는 것이 아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주춤거림이다. 이런 내용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유독 그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 가족 이야기다. 나에게도 그렇거니와 주변 사람들을 봐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듣는다.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아프고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나 역시도, 아주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가족은 의지가 되고 안심이 되는 존재다. 반면, 나를 한없이 힘들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최광현의 『가족의 두 얼굴』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그 내용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보는 가족에 대한 시선을 드러내는데, 그게 진실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느 쪽으로든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거다. 그러면서도 이 책에 기대를 하게 된다. 오랜 시간 나에게, 내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과 아픔이란 감정을 품게 하는 가족이란 화두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었기에 말이다.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더, 지금보다 나아지는 관계 회복을 위해서라도 가족이란 관계의 양면성을 보고 싶었다. 특히,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라는 부제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은 커졌다. 치유,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싶은 바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그 문제, 그 상처의 시작이 어디부터인가를 보게 한다. 가족이 무엇이고 가족은 어떤 존재이며, 가족이란 이름에 함께 수반되어야 할 조건이 무엇인지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들을 한꺼번에 던진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발생되는 많은 문제들, 심리적 ․ 경제적 그 이상의 문제들 속에 가족이 있다. 누군가 아픔을 호소하지만 상처가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보이는 상처보다는 가슴 속에 품은 상처가 더 깊고 아픈데다 그 치료가 힘들다는 것을 한 번 더 알게 되는 순간이다. 분명 아프니까 고통을 호소하는데 그 고통의 원인을 쉽게 찾을 수가 없다. 그럼 어떤 치료를 통해 회복해야 하는지도 어려워진다. 이때, 저자가 들려준 답은 ‘아픔을 치료해야 하는 순간에 드러나야 할 것은 과거로의 회귀’였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나, 어른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야만 한다는 거다. 원인 없는 아픔은 없다. 지금 내 안에 가득한 상처들이 쌓인 이유와 근거가 분명히 있다. 그 치유의 시작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발생한 아픔의 원인들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모두 가족에서 근원하는 건 아니지만, 가족이라는 관계는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접하고 이루어가는 구성이니 그 시작이 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가족 안에서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문제들은 우리가 더 나아가서 만날 학교나 사회, 그 이후로 펼쳐져야 할 미래까지 영향을 미친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들려주던 사례에서만 봐도 그렇다. 이유 없이 슬프고 외롭다고 하지만 찾아보니 이유가 있고, 가족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 이에게는 가족과 함께이기에 짊어져야 할 아픔이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외로움을 겪어야만 하는 이도 있다. 편안하고 만만한 화풀이 대상처럼 가족을 대하는 이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가 되는 말을 쏟아 내는 모습에 상처는 더 깊어진다. 가족이니까 당연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고, 또 그래왔던 시간들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가는 인성과 환경, 가치관은 보편적으로 이어가는 사회생활이나, 배우자를 만나고 내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가족이라는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가족이라는 그 이름을 앞에 두고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었나...

 

나와 가족을 둘러싼 문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내가 나고 자란 가족이 그 상처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어쩌면 우리의 내면에서 그 답을 이미 찾아내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겪어왔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아픔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 안의 상처는 반복되어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수학문제의 정답처럼 어떤 정해진 숫자를 내놓지 않았다. 다만,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숙제 하나를 내주었다. 나와 마주하기. 내 안의 나를 직면하고, 상처의 시작이 되었던 나의 내면아이를 찾아내어 치유해야 한다는 것. 어린 시절, 나에게 시작되었던 상처를 직시해야만 하며, 그 시간을 보듬고 공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상처의 시작점을 찾아가라고. 결국 앞으로의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닌, 그 상처의 원인인 과거의 시간을 찾아가야만 치유의 시작이 진행된다는 것일 테다. 나와 가족을 둘러싼 문제들이 어떤 양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지 직면하는 것이야 말로 명의의 처방이었다. 그 다음으로 무엇이 달라질지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얼마만큼의 나를 찾아내느냐, 어떤 마음으로 그 치유의 모습을 감당하느냐, 하는.

 

내가 얼마만큼 나아가고 치유해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두렵기도 하다. 불확실성에 대해 거는 기대가 무모해질까봐 무섭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 상처를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내일을 만나야 한다는 현실이 무의미해진다. 이대로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 발목 잡혀 삶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 두려움, 무서움 떨쳐내고 저자의 처방대로 나를 돌아보는 그 시간으로 달려가는 것, 그게 지금의 나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이 책 속의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 아직 드러내지 못한 상처들로 아파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까지 공통으로 주어진 숙제다. 모든 것은 나에게로의 회귀에서 다시 시작한다. 가족이란 이름과 관계를 다시 쓸 기회가 주어졌으니 잡아야 한다. 이제, 가족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주어질 그 순간을 기대하며 나(우리)를 만나러 간다. 모든 상처가 시작되었던 그때의 나(우리)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밥상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으면서 계속했던 생각은, ‘아, 엄마가 참 좋아할 만한 메뉴가 가득하구나.’하는 거였다. 일요일 아침에 SBS에서 <식사하셨어요?>라는 프로그램을 참 좋아하는데, 엄마는 거기서 나오는 임지호 님의 요리를 눈여겨보신다. 가는 곳마다 뭔가를 쑥 뜯어와 요리하는데, 이제껏 풀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식재료로 만들어버리는 그분의 손끝을 엄마는 참 좋아하신다. 이런 것도 음식이 되는구나 싶은 감탄이 반복되곤 했다. 『시인의 밥상』의 버들치 시인이 만들어낸 상차림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 죄다 어디 사찰에서 먹을 것 같은 푸성귀인데, 그럴싸한 상차림이 되는 게 신기하다. 물론 그 밥상에는 생선도 올라오고, 면도 올라오지만, 대부분 푸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초록의 산물들, 산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들.

 

소박하고 정갈한 밥상을 보면서 거기에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함께하고 있음을 봤다. 밥상 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의 한가운데 사람과 이야기가 있더라. 아낌없이 마음을 던지는 사람들, 걱정과 근심, 웃음을 함께하는 게 당연한 관계들, 논과 밭에서 나오는 것들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들이 모여 시인의 밥상을 더 풍성하고 맛있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 농작물을 대하는 마음까지 더해지니 맛이 없을 수가 없지. 감자를 캐는 시기와 날씨까지 확인해가며 지키는 자세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냥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던 단순한 생각을 반성하기도 했다. 시인이 차려준 음식과 함께 들려온 이야기에 웃음까지 더해지니, 편안하고 재밌고 맛있는 밥상이 되는 거다.

 

기존의 레시피에서 봤던 것과는 약간 달랐던 가지선, 엄마가 해주는 것과 비슷했던 호박찜,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냉소면(면 요리 피해야 하는데, 정말 좋아해서 힘듦. ㅠㅠ), 온갖 나물을 다 넣고 비빈 것 같은 나물밥... 보기만 해도 담백한 맛이 난다. 작가는 버들치 시인을 찾아갈 때마다 오늘은 무슨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는지 한참 기대하지 않았을까? 지리산을 오르는 길이 숨이 차다가도 그 음식 생각에 발걸음에 힘을 싣고, 시인이 차려준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더 맛있게 먹게 되고, 누군가에게 부족한 것을 알아가며 마음을 쓰는 일이 이어진다. 시인의 밥상이라 불리지만, 결국 그 밥상을 채우는 건 그 자리에 모여 앉은 사람일 것이다. 시인이 가진 온갖 좋은 것을 나누는 시간이었을 테다. 기름이 흐르는 음식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너무 소박하여 부담 없이 받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으로 수저를 들게 하는... 그에 밥값을 내야 한다면 진심이 담긴 그 어떤 것도 좋으리.

 

 

낮술부터 시작해 자정이 넘도록 이곳에 앉아 있자니 정말로 새벽 강어귀에 앉아 모든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는 듯했다. 이 나이에 이르러 이제 나는 안다. 삶은 실은 많은 허접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내 남은 생에 소망이 있다면 그 중 무엇이 허접하지 않은지 식별할 눈을 얻는 것인데, 여기 새벽 강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중 몇 개를 건져 올리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살아 푸르른 숭어 같았다. (85페이지)

 

이 먹는 밥의 즐거움을 그대로 읊고 있다. 그 안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있고, 투박한 잔소리가 있다. 언제 어느 때 가서 문을 두드려도 ‘얼른 들어와’라는 말과 함께 녹슨 대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 이래서 푸근함까지 곁들이는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건 재주다. 뭔가 가득 차 있는 곳간을 여는 기분까지.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은 아니다. 비록 그 음식이 화학조미료 범벅이라고 해도, 빠르고 간단하게 먹는 걸 선호하는 내가 좋아할 음식들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상차림 한 번 편하고 느긋하게 앉은 자리에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버들치 시인은 야무진 손끝으로 나물을 무쳐내고, 최도사는 옆에서 간을 본다고 젓가락을 들이밀 것 같고, 그 사이에서 작가는 웃으며 밥을 푸고 있을 것 같다. 투덜거리며 힘들었던 시간을 털어내고, 오직 이 순간은 이 밥상만이 약이 된다고 여기며 아무 생각 없이 그 밥상에 충실하고 싶어지는 시간. 우리가 채우지 못한 게 너무 많아 다 열거하지도 못하는데, 그런 거 계속 마음에 두고 서글퍼지면 뭐하나. 인생에 비워진 것투성이라도, 이런 밥상 앞에 앉아있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리...

 

좋다. 이 상차림에 술 한 잔 빠지면 안 될 것 같다. ㅎㅎ 소주나 막걸리, 맥주, 와인 같은 것보다도, 지리산 어디쯤에서 수확한 자연이 푹 우러난 담금주 한잔 걸치면 딱 좋겠다. 날씨도 흐린데, 우중충한 분위기까지 안주로 더해지니 뭐가 더 필요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