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홍천기 세트 - 전2권
정은궐 지음 / 파란(파란미디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정은궐의 첫 작품이 출간된 지 십 년이 넘었다. 이미 이 장르를 즐기던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이 아닐 테지만, 늦게 입문하게 된 나에게는 이 장르의 재미를 알게 해준 작가다. 몇 년 전 처음 로맨스소설을 접할 때 이 장르를 즐기게 해준 몇몇 작가가 있었는데, 정은궐도 그중 한 명이다. 아마도 작가의 전작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장르의 즐거움을 잘 알지 못했을지도 모겠지. 특히 취향이 많이 나뉘는 분야라고 하던데, 웬만해서는 정은궐의 작품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독자를 거의 못했던지라, 그만큼 독자들의 보편적인 취향에 두루 맞춘 작품들이 아니었나 싶다. 책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그 진가를 더 다졌으니, 아마 오랜 시간 작가의 신간을 기다려온 독자들에게는 이번 작품 『홍천기』를 대하는 게 가뭄의 단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래서 신간 소식이 더없이 반가워 고민 없이 예약판매를 신청했다.

 

세종 20년, 백유화단의 여화공 홍천기가 동짓날 밤에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를 줍게 되고, 그에게 반해 찾아다닌다. 단서는 오직 하나. 그 남자가 남겨 두고 간 신발 한 켤레. 그에 반해 하늘(?)에서 떨어진 그 남자 하람은 앞을 보지 못한다. 오래전에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한 그는 세상이 온통 붉은색으로 보일 뿐이다. 언제쯤 그의 눈은 떠질까? 아니, 그의 눈이 떠질 수가 있긴 한 걸까? 어렸을 적, 기우제에 차출되어 간 자리에서 알 수 없는 사고로 그의 눈은 사라졌다. ‘잠시만’ 빌려달라는 목소리만 남은 채로. 도대체 그 ‘잠시만’은 언제까지일까. 그 상태로 그는 경복궁의 터주신이 되어 살아간다.

 

정말로 하늘에서 남자가 떨어져 홍천기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오산이다. ^^ 홍천기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맞아떨어진 순간의 타이밍이었다. 시집 못한 딸 홍천기에게 남자 하나만 내려달라고 매일 기도를 드렸던 어머니의 마음에 하늘이 응답하신 거라 여겼다. 어찌 아니 그럴까. 정말로 홍천기의 위에서 (그대로 보면 그 위치는 하늘이 맞다. ^^) 남자가 뚝 하고 떨어졌으니, 어머니의 정성에 하늘이 답해줄 거라 여기지 않을 수가 없지.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라 여기고 의식이 없는 남자를 돌봤으나, 잠깐 자리 비운 사이 돌아와 보니 남자는 사라졌다. 그때부터 남자를 찾아다니던 홍천기는 궁금해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그 남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그는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일까?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홍천기. ‘붉은 하늘의 기밀(紅天機)’이라는 뜻이라는데, 소설의 발단에서 드러나는 이 이름이 오해하여 해석되는 부분이 흥미롭다. 아버지의 명으로 사라진 하람을 찾아다니며 발견한 그 이름 ‘홍천기’를 확대하고 오해하여 해석하기를, 그에 반역(역모)을 시도한 인물로 생각했던 거다. 어떻게 하늘에서 정해준 홍 씨의 시대가 온 거로 믿을 수 있는지. ㅎㅎ 그가 정치나 권력에 깊게 파고드는 것보다 오히려 예술을 즐기는 순진무구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심어두고 이렇게 보게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여기서 등장하는 안평대군은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 속에서 전해지는 것보다 조금 더 가벼운 캐릭터로 변신시킨 듯하다. 안평대군이 그의 형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걸 보면, 분명 그도 정치와 멀리 떨어진 인물은 아니었을 텐데, 그것보다는 오히려 시문과 그림, 가야금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사적인 매력을 더 캐릭터에 심어놓은 듯하다. 그게 화사인 홍천기와 최경, 차영욱, 안견, 화마 같은 그림과 관련한 인물들과 어우러지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 소설의 배경이 되어버린 ‘그림’이라는 장에 필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는 그의 재능이 그림에 빠져버리고야 만 그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한다. 그런 바탕에 기인한 소설 『홍천기』 속의 안평대군은 그림에 환장하는 오타쿠이자, 화사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으로 그렸다. 신분에 상관없이 그림을 매개로 교류하는 그가 왜 이렇게 멋있게 보이는지... ^^ 아마 드라마로 본다면 소설보다 더 발랄하고 경쾌한, 하지만 그 웃음 뒤에 진지함을 숨긴 눈빛을 그대로 확인하게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인 하람. 어렸을 적에 기우제에 참여한 그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되고 붉은 눈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설정은 특이했다. 거기에 신이 빚어놓은 듯한 외모라니... 그냥 시각장애인이었더라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충격으로 그의 눈도 떠지지 않을까, 그리하여 애타게 보고 싶었던 홍천기의 얼굴을 보고 만지고 실컷 품어보는 일상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온갖 상상을 하며 하람의 앞날을 그렸더랬다. 그런데 작가는 하람의 눈에 대해 처음부터 속 시원하게 풀어놓지 않았다. (왜 이렇게 잘생긴 남자에게 앞을 보지 못하는 고통을 주어야만 했는지 부르짖으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ㅠㅠ)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기이한 일, 그로 인해 잃었던 많은 것, 사랑하는 여인마저 마음껏 볼 수 없는 현실이 하람의 고통을 한층 더하게 하면서도, 그 끝을 쉽게 예상하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소설의 중반 이후로 조금씩 드러나는 일들이 그들 관계가 어떻게 가게 될지 고무시킨다. 천재 화가의 말로로 보였던 홍은오(홍천기의 아버지)의 광증이 시작, 홍천기의 탄생, 하람이 눈을 잃은 순간이 엮어놓은 이들의 운명 같은 인연의 근원을 찾고 싶게 한다. 결국, 그 끈을 찾아가면 갈수록, 꼬인 끈을 풀면 풀수록 나타나는 진실들이 허를 내두르게 하지만, 결론은 하나다. 그 진실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 이들의 운명도 자리를 찾아가리. (더 얘기하면 과한 스포일러가 될까 봐 여기서 그만...)

 

로맨스소설이면서도 소설 곳곳에 감춰진 단서들을 찾게 하는, 독자가 파헤쳐야만 그 결론을 보게 해줄 거라는 듯이 흐르는 추리소설 같았다. 하지만 끝까지 로맨스소설임을 놓지는 않는다. 결말을 보면서, ‘아, 역시 사랑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게 다 드러나고도 자기가 먼저가 아닌, ‘우리’의 먼저를 생각하는 이들 좀 보라지. 사랑이 없으면 선택하지 못할 결말이잖아?! 거기에 깨알 같이 파고드는 웃음의 순간들이 이 소설을 즐겁게 읽게 한다. 개둥, 개놈, 개충이라 부르며 서로의 허물없음을 드러내는 절친들의 애정이 그대로 보였다. 그림에 미쳐서 항상 일을 저지르는 안평대군의 뒤처리를 하는 청지기의 애로사항에 어깨를 토닥이고 싶었고, 만수와 돌이의 눈치 백 단 행동이 귀엽기까지 하더라. 특히, 어디서나 당당하고 서슴없이 마음을 드러내는 홍천기의 매력은 이 소설의 제목이 ‘홍천기’일 수밖에 없게 한다. 여인으로 살면서 마음껏 재능을 뽐내지도 못하던 시대, 하지만 그 재능을 숨길 수도 없었기에 늘 긴장하는 삶, 보고 싶은 사람을 보기 위해 내려놓아야 하는 것마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매력적이다. 실존 인물에서 가져온 캐릭터라고 하더라. 도화서에서 관직을 얻은 화사였으며, 절세 미녀라고 전해진다던데, 소설 속 홍천기 역시 절세 미녀라고 나온다. 그녀의 과한(?) 발랄함에 그 외모를 더해 생각하니 괜히 부러워진다. 그림도 잘 그려, 성격도 좋아, 예쁘기까지 해, 천하제일의 남자가 좋아해 주지... ‘홍천기 is 뭔들~’ 안 그래? ^^

 

실존 인물과 허구의 적절한 조화가 어우러져 소설의 재미와 진지함을 부른다. 화마의 등장은 판타지의 요소를 더하며 오직 그림을 사랑할 뿐이라는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재능이, 그림이, 어떤 힘을 가지는 수단이 아니라 그저 가지고 있으니 드러내어 좋은 것은 다 같이 보는 즐거움을 누리자는 듯이 들려서 말이다.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이미 드라마 제작이 확정되었다니, 이 소설을 기다린 건 독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한다. 읽으면서 머릿속에 영상을 그리곤 했는데, 실제로 드라마가 되어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1년 후, 드라마로 다시 만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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