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의 인사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8
김서령 지음 / 폴앤니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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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을 못 하던 때가 있었다. 누군가의 요청이나 듣기 싫은 말에 싫다고 말할 수 없어서 얼버무리고 그냥 웃고 말았던 날들. 그게 좋은 대처라고 생각했다. 막상 거절을 쏟아내면 상대는 기분이 나쁠 것이고, 상대와 내가 서먹하게 지내야 하는 분위기가 싫어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알았다. 분명하게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이상한 상황을 만들게 되고, 내가 웃음으로 넘겼던 애매한 순간을 상대는 긍정의 대답으로 여긴다는 것을. 그래서 연습했다. 내 마음과 다른 대답을 하지 말자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가 아니라 안 한다고, 싫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기를 많이 했다. 지금의 나는 거절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만, 완벽하지 않다. 여전히 대답하기 모호한 상황은 찾아오고, 어설프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어딘가 싶기도 하다.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 한수정 대리는 평범한 스물아홉 살의 여성이다. 고향은 부산이지만 연정시가 좋아서, 사수가 좋아서 연정으로 근무지를 골랐다. 아버지와 엄마, 동생들이 있는 대한민국 평범한 집안의 첫째 딸 한수정. 좋은 사수를 만나고 연정에서의 삶이 좋았다. 혼자 살지만 외롭지 않았다.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인생 선배의 돌봄까지 더해지는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웠다. 철규 씨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도 웃어요. 나는 잘 웃는 사람이거든요. 나한테 해코지도 하지 않는데 괜히 새침하게 구는 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도 하고요. 게다가 철규 씨는 우리 한주은행 연정시장지점의 주요 고객이니까요. (27페이지)


연정 시장에서 떡볶이 가게를 하는 철규 씨는 매일 오후 3시에 현찰이 든 가방을 안고 한주은행 연정시장점으로 온다. 정확하게는 한수정 대리 앞으로 와서 그날의 매출을 입금한다. 은행으로서는 단골이니 놓칠 수 없다. 싫은 내색 해서 괜히 고객 하나 잃을 수는 없으니까. 문제는 철규 씨가 올 때마다 수정에게 치근댄다는 거다. 수정을 좋아한다면서, 이러지 말고 자기에게 시집오라고, 자기만 한 사람 없다고. 수정에게 철규 씨는 은행의 고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철규 씨는 수정을 사랑한다고, 금팔찌와 금목걸이를 휘두르고 끈질기게 괴롭힌다. 웃긴 건 주변 사람들이다. 안면 있는 시장 사람들은 수정을 볼 때마다 말한다. 너무 튕긴다고, 철규에게 시집가면 호강하면서 살 텐데 왜 그러냐고, 뭘 그렇게 재는 거냐고, 그만한 남자 없다고. 왜 수정이 바라보는 철규 씨를 그 사람들이 판단하는 걸까? 당사자는 수정인데?


참고 또 참던 수정은 철규에게 야멸차게 거절을 표현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어느 날, 스산했던 11월의 어느 밤에 철규 씨는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수정을 따라왔다. 당신을 사랑한 거 말고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며 따졌다. 그날, 수정은 죽었다.


소설은 죽은 한수정의 목소리로 서술된다. 수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철규 씨가 눈이 돌아버린 순간 어떻게 죽었는지, 수정이 죽은 후 사건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들려준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자니 두려움이 따라오는데, 동시에 수정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건 화가 난다. 누가 누구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왜 타인이 결정할 일인지 모르겠다. 수정이 철규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자기 마음 자기가 결정하는데, 왜 수정의 마음은 수정이 결정하지 못하게 하는가. 이런 상황 종종 만나다 보니, 나는 타인의 간섭과 선을 넘는 일에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칫 버릇없어 보일지라도 딱 잘라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사람들,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자주 하는 착각이 있다. 인생 좀 살아온 어른으로, 그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단정하면서 내뱉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연주시장 상인들이 수정에게 하던 말은,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일을 기어코 이루어주려는 착각에 저지르는 폭력이었다.


사람을 죽였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가 죗값을 받는 걸 지켜봐야 하는데, 오히려 보복당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철규 씨가 감옥에서 나온 후에 찾아오면 어떡하지? 수정의 동생이나 가족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어쩌지? 6년 형을 받고 억울하다며 항소하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세상이 왜 이러나. 왜 법은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나. 왜 피해자는 계속 피해자로 살아가야 하는가. 잊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날들을 누가 보상해주냔 말이다. 어떻게 살인이 청년의 순정으로 불릴 수 있는지... 자식을 보낸 엄마는 가슴을 치느라 손이 멍들었고, 동생들은 밥 한 숟가락 뜨는 거도 죄스러워 목으로 음식을 넘길 수가 없다. 수정의 사수는 이대로 있을 수 없어 탄원서를 챙긴다. 그런데도 피해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됐다. 슬픔은 끝나지 않았고,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가 세상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못한 사람은 누가 데려올 수 있지?


읽는 내내 서러웠다. 무섭고 화가 났다. 안전하게 살아가는 게 왜 간절히 바라야 하는 일이 되었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맵고 달달할 것만 같은 떡볶이가 이렇게 맵기만 하다니.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떡볶이를 좋아할 수 없을 듯하다. 떡볶이집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철규 씨가 있을 것만 같아서, 혼자 사랑하고 혼자 배신에 떨던 그가 떡볶이 판을 뒤적이며 서 있을 것만 같다. 수정의 마지막 인사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돌아간 그 자리는 처음의 그 자리가 아닐 테지. 그런데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게, 아프고 또 아프더라.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을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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