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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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아침 풍경에 드리운, 피가 낭자한 칼 한 자루가 눈에 선하다. 내 눈은 문장으로 칼끝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한 남자의 손에 일본도가 들려있었고, 그가 입은 셔츠는 붉고 눈은 빨갰다. 그날 그의 칼에 사망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잔인한 사건에 사람들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중에 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부부 중 남편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훗날 이날의 장면은 어떻게 기록되었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매년 칠석이 다가올 무렵, 나팔꽃 시장이 열리는 다이토 구 이리야. 부모님이 반드시 치러야 할 행사처럼 매년 나팔꽃 시장을 찾는 게 불만이었던 소타는 우연히 유카타 차림의 다카미를 만난다. 같은 학년에 같은 이유로 나팔꽃 시장을 찾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두 아이는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가끔 만난다. 이 설렘이 첫사랑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카미에게 빠져있던 소타는 아버지의 검열에 걸려 다카미와 이별한다. 사실 아버지에게 걸렸어도 소타는 다카미를 계속 만날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다카미가 아버지보다 더 단칼에 소타를 잘라낸다. 이유가 뭐지?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소타는 집안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한다.


소설은 세월이 흘러 이십 대를 살아가는 소타를 비춘다. 그리고 한때 수영선수였던 리노의 등장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리노의 할아버지가 타살되면서 등장한 형사 하야세와 그가 맡은 노인 살인 사건은 소타와 리노, 하야세 세 사람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어떻게 하나로 연결될까 궁금했다. 꽃을 키우며 사는 게 노년의 낙이었던 리노의 할아버지 죽음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과거 소년과 소녀가 만났던 나팔꽃 시장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 이 살인 사건과 만나게 될까. 모든 것은 리노의 할아버지가 살짝 보여준 노란 나팔꽃 때문이었다. 우연히 꽃 피운 노란 나팔꽃이 놀라워서 리노에게만 보여준 할아버지. 이 신기한 꽃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도 좋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비밀에 두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랗게 꽃피운 나팔꽃 화분이 사라졌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이 노란 나팔꽃 때문일까? 이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던 리노는 소타와 손을 잡고 이 사건을 추적한다. 물론 이들은 형사가 아니다. 형사 하야세는 그만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쫓고, 그 과정에서 여러 인물이 다시 등장하면서 오십여 년 전 일어났던 MM 사건과 맞물려 새로운 단서를 쏟아낸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궁금증은 나팔꽃이 노란색이 없었나 하는 거였다. 나팔꽃을 자주 보지도 못했지만, 꽃잎이 무슨 색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에도 시대에 존재했다는 이 꽃이 왜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지. 자연스럽게 퇴화하여 인간 지구에서 사라진 식물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이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건 자연스러운 소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세상에서 사라진 꽃이라는 거다.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굳이 인간의 손으로 멸종시켜야 했다면 그 이유도 있을 터. 한 노인의 사망으로 확인하는 식물의 양면성이었다. 그동안 들어왔던 의학 이야기에서, 원래 독은 약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독을 적당히 쓰면 약이 되고 과하게 쓰면 그대로 독이 된다고. 오래전에 사라진 노란 나팔꽃의 존재도 비슷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꽃, 하지만 그 씨앗은 새로운 꽃을 피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약물로는 사용하면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라진 꽃을, 씨앗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몽환(夢幻)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210페이지)


얼핏 이해가 되기도 할 것 같다. 몽환화. 말 그대로 꿈과 환상을 좇게 하는 꽃이 되겠지. 그 꽃을 쫓다 보면 자기가 멸한다는 경고를 깊게 새기지 않은 이의 잘못을 죽음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자기가 멸한다는 경고를 듣고서도 그 꽃을 쫓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간절함을 아예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 소타와 리노를 보면서 어쩌면 인간은 자기 앞에 닥친 절망과 포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더 간절해지지 않을까 싶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대지진과 탈원전 방향을 겪으면서 더는 자신의 공부가 의미 없다고 여기는 소타와 더는 수영을 할 수 없다고 여기며 겁에 질려 있는 리노는 미래를 고민하는 청년이다. 고민한다는 건, 현재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고 싶기에 하는 일이다. 동시에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타가 그동안 해온 공부를 그만둔다고 해서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건 아닐 테다. 리노 역시 오랜 세월 자신의 업이라고 여긴 수영을 다시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 더 나은 실력으로 현재의 모습을 발전시키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니 이 청년들이 공부든 수영이든,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리노 할아버지의 죽음을 중심으로 소타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면서 이야기는 완성된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오랜 노력을 엿보면서, 현재까지 대대로 이어진 그들의 임무를 생각해본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써왔을까. 그 노력의 결실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내일의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할지. 무엇보다 주인공 두 사람이 고민하던 오늘의 문제가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다행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 장래의 문제를 의외의 방향에서 접근하는 느낌도 있다. 작가가 들려주는 미스터리한 이야기에서 인간의 많은 고민이 들려와서 좋았다. 천재적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싶은, 아름다운 꽃을 개발하는 기쁨, 오랜 세월 달려온 인생의 변화 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고민이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 다 녹아있다. 그 결말까지 만족스러워서, 마치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작가의 많은 작품이 그랬듯이,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독이는 것 역시 놓치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인간의 도리라고 말해도 좋을, 그들이 찾은 빚이라는 유산을 앞으로 어떻게 청산해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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