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스 우즈의 그림들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9
패트리샤 레일리 기프 지음, 원지인 옮김 / 네버엔딩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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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한 생명이 태어났고 아이는 살아가야한다. 출생의 근원을 따지는 일조차 의미가 없다. 이미 그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의미를 잃어버렸다. 태어난 곳(홀리스우즈)에서 아이는 버려졌다.  

이금이의 <주머니 속의 고래>를 읽다가 공개 입양된 준희를 만나고, 김려령의 <내 가슴에는 해마가 산다>를 통해 공개 입양된 하늘이와 한강이를 만나다가 <홀리스 우즈>까지 만나게 되었다. <고래>에서 준희는 세 인물 중 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개입양에 대해 생각꺼리만 제공했다. <해마>는 선천성심장병 수술을 한 뒤 생긴 수술 자국이 해마와 닮았다는 이미지에 공개 입양된 하늘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자라는 상태에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고래>와 <해마>는 공개 입양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두 작품 모두 공개입양의 양면을 다루지만 결국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끝난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말로 한다는 점에서 독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가족이 되어가는 지일텐데, 둘 다 입양된 아이의 눈과 입을 통해 말하되 가족이 될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 가족이 되는 것으로 결말이 나지만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그 과정이 궁금한 독자들은 아쉬운 마음을 어쩔 수 없다.  

<홀리스 우즈>가 두 작품과 조금 다른 것은 주인공이 '위탁'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공개입양이 당사자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면 '위탁'은 입양 될 사람이나 할 사람의 의지, 확신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위탁되었다가 기간이 지나서 다시 입양기관에 돌아오는 과정은 버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홀리스>도 위탁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상처받는다. 그러면서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먼저 도망을 치게 되는 것이다. 자존감은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으로 홀리스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내가 이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위탁의 과정이 공개입양을 하게되는 과정에서 필요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 눈에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가족이 되기도 하지만 버려진 아이들 모두가 가슴으로 만나 가족이 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위탁 기간이 끝나고도 가족을 못 만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 위탁 기간 동안 서로를 알아보고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풀어내고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고래>나 <해마>가 주로 주인공의 생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나 가족의 구체적인 행동, 상황이 부족해서 중간 과정이 생략된 느낌이라면 <홀리스>는 위탁된 가정의 가족들과 위탁된 홀리스 사이에 여러가지 상황들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가족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지는지 그 상황들, 행동들, 구체적인 말들을 통해 독자는 쉽게 몰입한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홀리스가 스티븐과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된다. 피해의식과 상실감으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홀리스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스티브와 엄마, 아빠가 평소에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다. 이야기에서 주인공과 등장 인물이 겪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게 빠진 채 하나의 사건(물론 결정적인 사건), 혹은 주인공의 내면을 말로만 풀어놓은 이야기는 감동도 적고 재미도 없다. 결정적인 사건이 효과를 내려면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결정적인 사건을 키워가야 한다.  

가족이 되는 것은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해야하는 것이다. 입양 기관이 위탁 가정을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결국은 입양을 원하는 쪽과 입양 될 아이가 서로를 알아봐 줘야하는 것이다. 부부로 사는 일은 연애기간이라는 위탁의 과정을 겪고 비로소 가족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억지스러운 비교지만 굳이 이렇게 생각을 해 본 것은 입양이 별스러운 과정이나 대단한 비밀, 혹은 희생이나 봉사라는 인류애적인 의미로 커진다면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홀리스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스티븐과 리건 가족이 보여준 모습은 있는 그대로였다. 특별한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홀리스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홀리스가 그린 그림을 제대로 봐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홀리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구제를 한다거나 보살펴야 할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홀리스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했다. 세상에 버려지고 여기저기 위탁 가정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은 홀리스의 잘못이 아니다. 홀리스는 그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스티븐과 남매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의 말처럼 홀리스는 가족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가족은 나때문에 네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잘났어라고 말 할 수 있고, 그게 인정받는 곳이 가정이고 네가 제일 잘났다고 추켜세워주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홀리스는 아마 타고난 화가일 것 같다. 치매를 앓고 있는 조시 아줌마를 보살피는 열 두살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아픔을 감당할 수도 있다. 얼굴도 예쁘다. 누군가는 그런 홀리스를 거칠다고 버리고 누군가는 그런 홀리스를 알아본다.  

나는 나의 가족들을 얼마만큼 알아볼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이 지금, 내 옆에서 나를 귀찮게도하고 열받게도 하지만 목젖이 보일 만큼 웃게도 만드는 그들이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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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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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읽는 방법>을 읽다보면 책 중간도 못가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앞서 발표한 <책을 읽는 방법>을 사서 읽어야 할 것이다. 미처 읽지도 않은 책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자꾸 언급되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또다시 읽어야 할 책을 만나는 일 또한 책을 읽는 방법으로 소개된다. 책을 ‘잘’ 읽고 싶은 생각이 있는 독자라면 히라노가 말하는 <책을 읽는 방법>이 도움을 줄 것 같다. 핵심은 슬로 리딩(천천히 읽기)이다. 속독을 할 때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걱정하면서 제시한 책읽기 방법인데, 결국 보다 ‘앞으로’가 아니라 보다 ‘깊게’로가 슬로리딩의 목적이다. 

“무작정 활자를 좇는 빈약한 독서에서 맛을 음미하고 생각하며 깊이 느끼는 풍요로운 독서로 나아가는 것”이다. (<책을 읽는 방법 10쪽>

<소설 읽는 방법>은 소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히라노의 생각과 실천이다. 그는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메커니즘, 발달, 기능, 진화에 대해 생각하며 읽기를 권한다.

메커니즘은 소설이 소설로서 기능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작가가 제시하는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면 소설이 재미있고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작품이 작가의 인생에서 어떤 타이밍에 나왔는가(발달), 이 소설이 사회와 문화의 역사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가(진화),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소설이 나와 작가 사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기능) 이 네 가지 방식을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한 권의 소설 무게가 달라지고 책 읽는 속도는 자연스럽게 늦춰질 것이다. 

소설 한 권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적인가 의문을 갖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가끔 시간 아까운 소설을 읽었던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자신들이 책을 잘못 읽은건가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내가 그렇다. 히라노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작가여서 그런지 소설 작품을 완전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인상이 짙다. 소설은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생각 속에서 창조된 세상이다. 거기에 잘못된 배치는 없다. 다만 독자들이 천천히 읽지 않고 꼼꼼히 읽지 않아서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내 소설읽기, 혹은 책읽기가 무엇이 문제인지 되돌아 봐야 했다. 은근히 반발심도 생기는데, 그는 ‘창조적 오독’으로 독자의 권리를 인정해 버린다. ‘창조적 오독’은 할 수 있으되 비판이나 비난을 받을 작품은 없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작가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소설을 얼마나 사랑하는 작가인지 알 수 있어서 그가 제시하는 소설 읽는 방법을 적극 수용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딴지를 걸고 싶어도 작품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소설은 그림이나 조각 등과 달리 감상하는 데 하루든 일주일이든 반드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예술이다. 첫 행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행까지 가닿은 시점에야 비로소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하나의 작품이 독자에게 무사히 도착하게 된다.

아무리 다양한 사건들이 터져도 혹은 옛날 일을 떠올리거나 미래를 망상해도 우리는 담담히 현재를 살아가며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 끄덕끄덕 앞으로 나아간다.

이 작은 화살표를 따라 우리는 감춰진 궁극의 술어 ‘......이다’를 찾아 울고 웃고 화내고 생각에 잠기며 마지막 한 행까지 가려고 한다.“

(<소설읽는 방법> 23쪽~30쪽)

  작은 화살표들이 모여 거대한 화살표에 이르는 과정이 소설이다. 독자는 화살표를 잃어버리지 말고 잘 찾아가야 한다. 
 

소설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받아들였지만 오늘 듣는 히라노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좋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소설을 읽을 때 좀 더 바른 자세로, 좀 더 천천히 생각하며 읽게 될 것이다. 저자도 고백하지만 소설을 사랑하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주는 일은 어렵다.

그래도 이 책 실천편에서 저자가 구체으로 작품의 일부분을 예로 들어가면서 천천히 읽어주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한 권의 소설을 만났을 때 어떤 독서법으로 그 소설을 대해야 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가 작가의 작품 속에 개입할 수는 없지만 천천히 읽으면서 그 소설에 맞는 독서법을 찾아 낼 때 작가와 작품, 독자의 행복한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설 읽는 방법>이 없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한 명의 독자와 만나는 순간이 중요하다. 일반적인 책이 되기도 하고 특별한 책이 되기도 하는 그 순간이 책과 독자의 인연이 맺어지는 순간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와 인연을 맺지 못한 책들 때문에 괴로웠다. 나의 모자람으로 내게 오지 못한 그 책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아서 책 때문에 괴로운 경험을 다 하다니.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도 눈이 마주칠까봐 모른 척 하고 있다.

분명 한 건 나는 많이 읽는 것보다 천천히 읽기를 해야 하는 독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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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 책 -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
박균호 지음 / 바이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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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새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이 때의 ‘책’은 내용 보다는 ‘사물’이 된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책은 인격을 갖는다. 마치 생명이 있어서 지고 태어 나는 것 같다. 안타까운 건 저자가 이야기 하는 책들이 지금 우리가 만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구병 등이 쓰고 뿌리깊은 나무에서 출간한 <숨어사는 외톨박이>는 어쩌면 더 이상 우리와 관계를 맺지 못할 것만 같다. 이렇듯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래서 절판된 책에 바치는 헌사는 더 애절하고 그(책)를 다시보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에 쉽게 공감이 간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리라.

  책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을 쓴 사람의 책장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내가 읽은 책을 그도 읽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독자는 내 책꽂이에 책 하나를 더 꽂기도 한다. 그런데 <오래된 새책>은 기쁨 보다는 절망을 더 많이 경험해야 한다. 이토록 읽을만한 책들이 절판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 책들을 알아보지 못한 시력에 절망하고, 어찌 어찌 해서 구한다고 해도 그 값이 너무 비싸다. 오로지 필요에 의해 헌 책방을 뒤져 고가에도 구입하는 책 수집가들도 있지만 후일, 교환가치를 생각해서 투자를 하는 사람도 있을테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지극한 책 사랑을 실천하는 수집가라는 확신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절판된 책이 다른 옷을 입기는 해도 오래된 새책으로 출간된 책들이 적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신영복의 <엽서> 영인본, <서재결혼시키기>, <채링크로스 84번지> 같은 책을 샀다. 물론 다른 책들도 알아보았더니 가격이 내 수준을 넘어서서 저자의 말을 확인하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신영복 선생의 ‘청구회추억’을 자필로 읽는 맛이 특히 좋았다. 한글자 한글자 자필에 담긴 선생의 마음까지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오래된 새책>을 읽고 <엽서>를 사게 된 것이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이다. 

많고 많은 책에 대한 책 이야기 중에서 이 책만의 매력을 꼽으라면 ‘책’자체에 얽힌 사연들이다. 저자의 사인본이 남겨진 책이 어쩌다 헌 책 수집가의 손에까지 왔을까, ‘다 읽고 빌려달라’는 메모를 적어 친구에게 선물한 책이 이 세상 어느 구비를 돌아 저자에게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저자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듣다보면 책은 더 이상 글자가 인쇄된 종이 뭉텅이가 아니다. 정말 구하기 어려운 책을 구하고 나면 책을 얻은 기쁨도 있지만 한 때 이 책의 주인이었던 그가 이 세상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책을 넘어 그 책의 임자였던 사람까지 더불어 생각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그래서 헌 책은 그저 낡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아니다. 헌 책이 되기까지 그 시간이 더해져서 새 임자에게 다가 오는 것이다. 어쩌면 헌 책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매력 때문에 헌 책을 수집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난 저자는 책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안다. 그래서 아깝지만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내 책을 내어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을 생각해 보았다. 초판이니 재판이니 그런 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값나갈 만한 책들은 없다. 여전히 지금도 잘 나오는 책들이다. 물론 몇 권 정도는 절판이 되었다. 나또한 그 좋은 책이 어쩌다 절판이 되었을까 의아하다. 그래도 한 권 한 권 그 책을 샀을 때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오래전에 조카 녀석에게 빌려주고 못 받은 책이 생각나서 무척 아깝다. 골라서 준 책이었으니 내 책 목록에서 저자의 말을 빌려 말하면 “내 생에 잊지 못할 그 책”들일 것이다. 이걸 어떻게 돌려받나 조금 심란하다. 아니, 많이 속상하다. 신영복의 <사람아, 아, 사람아>도 끼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우라질.

내가 가진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김승옥의 단편집 <야행>이다. <서울 1964년 겨울>을 다시 읽어보았다. 연도를 보니 내가 두 살 되던 해 출판되었다. 수없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내 책꽂이에서 빠지지 않은 책이다. 누렇게 바랬고 냄새도 찐하다. 오래된 책 냄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고향집에 어쩌다 그 책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누구나 자기만의 책 이야기가 있다. <오래된 새책>은 “오래되고 구할 수 없는 책들 모두가 ‘오래된 새 책’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바램에 동의하면서 아울러 내가 갖고 있는 내 책들을 오래된 벗으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책 수집가는 책을 아주 사랑해서 그(책)를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우선 내 책들에 대한 내 사랑부터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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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 시속 370㎞ - 제9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72
이송현 지음 / 사계절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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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나는 끝내 콧물이 흐르고 눈이 아파오고 가슴이 저리고 몸이 뻐근해지는 증상에 빠져들고 말았다. 처음 시작은 대충 마무리가 머리에 그려질 정도로 담담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매를 길들이는 일을 하면서 조금씩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 문제는 그 과정의 설득력일 것이다. 매잡이라는 소재가 신선했다. 대개의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가슴 졸이다가 웃는 것으로 끝나는데, 가을 단풍이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찾아와 주어서 온통 감동 무드여서 그랬나? 

돈 안되는 것을 하려는 아빠와 이혼까지 하려고 마음 먹으면서 말리는 엄마, 그 사이에서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준, 이 세 식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몫을 하지 못하는 사내를 엄마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전통을 이어야한다는 신념으로 아내와 아들을 마음 아프게 해야하는 현실을 아들 또한 이해 못한다. 아버지는 이해를 받으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는 외골수다. 그러니 갈등은 심해지고 마음의 상처는 커져간다.  

이런 뻔한 과정을 거치면서 동준은 마음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낀다. 닭대가리 보라매를 길들이면서 매잡이라는 일 자체를 즐기게 되는데, 흡사 미운정과 같다. 이혼 통보를 하고 떠나는 엄마를 잡으려다 사고를 당하면서 동준은 아버지의 고운정을 알게 된다.  미운정과 고운정이 뒤섞여 자신들조차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동준의 어머니 아버지는 비로소 조금씩 양보하게 되는데, 동준이 엄마에게 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매잡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시, 그렇다면 나는 이 소설의 어느 대목에서 흔들렸을까?  사실 사람살이든 소설 속 사람이든 꺼내보이지 못하는 마음이라고 없는 마음이 아니리라. 몰랐든, 알았든 다만 그 마음이 속엣것으로만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뜨뜻하고 진한 마음들이 서로를 알아볼 때, 그리고 그 마음의 주인에게 전달 될 때 그걸 지켜보는 독자는 감동한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가 소설 속 사람들에게 그 마음을 전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독자가 짐작한 마음, 혹은 예상하지 못한 마음이 소설 속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감동한다. 그리고 사랑과 이해, 혹은 용서의 마음에 감동한다. 그런 감동을 주는 게 예술, 문학의 힘이다.  

아내와 자식한테조차 이해 받지 못하던 한 고독한 응사가 그의 아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하는 과정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차마 대를 이어 응사의 삶을 살아달라고 못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보다 더 멋진 아들이 되겠다"고 말하면서 적어도 아버지의 삶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장하는 동준이의 모습도 충분히 멋지다.   

결혼을 하고 한 십 년쯤 살아본 사람은 안다. 죽을 만큼 힘든 결혼의 삶을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정말 그만두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삶은 또 그렇게 하루를 뒤척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동준의 엄마가 여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지않은 것, 우리는 모두 끝을 보고싶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늘 그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고, 혹은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엄마는 혹은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쎌 때가 많다.  

응사의 삶을 사는 아버지와 그를 힘들게 지켜보는 가족의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는 똠양꿍이라는 소년이 산다. 나는 그 소년이 이 땅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아갈 지 알것같으면서도 '똥준'이 있어서 둘 다 안심이 된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이해할 수있는 사람이 생겼을 때 아마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사는 일이 수월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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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조각 창비청소년문학 37
황선미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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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조각>은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한번 읽으면 손에서 놓기 어렵기도 하지만, 등장하는 아이들에게 남겨진 상처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힘들기도하다. 

그 상처, 다 어른이 준 것들이다. 

아버지의 외도로 태어난 유라, 엄마에겐 철저히 외면당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못난 자신 탓을 하지만 오빠가 연루된 집단 성폭행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유라는 오히려 자신의 비밀을 알게된다.

이야기는 이런 과정이 하나 하나 밝혀지는 구조를 띄면서 소설적 재미를 더한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어쩔 수없이 유라다. 그리고 이 소설이 좋은 이유는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유라의 성장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그런 시시한 말이 아니라 실재로 유라의 아픔은 죽을 만큼이다. 어느날 문득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아는 만큼 사건들을 만나면서 위태롭지만 스스로를 지켜내는 모습이 나는 감동이었다.  

힘들때마다 혹은 알 수없는 힘에 이끌려 찾아간 동물원의 사자의 눈은 그래서 상징적이고 강렬하다.  

그리고 신상연, 유라의 오빠. 열달 차이로 오빠가 되었지만 공부도, 인물도 유라와 많이 다르다. 유라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좋아하는 재희가 집단 성폭행을 당하는 걸 막지 못한 충격으로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게 되는 인물이다. 상연은 어른이 준 상처가 어떻게 한 영혼을 망가뜨릴 수 있는 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청소년들에게는 어떻게 다가갔을까? 

특목고를 가기 위해 의례적 봉사를 하고, 성폭행 가해자들이지만 학교 명예를 위해 사건은 덮어지고, 부모가 가진 권력을 이용해 약자에게 대신 죄를 뒤집어씌우는 말도 안되는 어른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은 얼마나 공감을 할까?   

이렇다 보니 이 소설은 정말 힘든 소설이다.  아버지의 외도, 이복 남매, 집단 성폭행, 특목고진학을 위한 학부모와 학교의 꼼수, 가장 잔인했던 유라 엄마의 태도, 그걸 감당해야 하는 아이들.   

과거의 상처는 잊혀지지 않고 언제든 현재의 나에게 상관을 해온다는 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그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고, 상처가 아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루만져주지 못하면 언젠가 그 상처는 덧나기 마련이다.  

이 소설이 그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는 지 보여주지 않아서 아주 약간 불만이다. 다만 가장 힘들고 아픈 고개를 넘느라 어디에 어떤 상처가 났는 지 알았으니 이제 돌아가 오래 오래 그 상처에 입김을 불어 넣어주는 일이 남았다.  

어쩌면 상처가 대체 어디에 얼마만큼 났는 지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 사라진 조각을 찾는 일부터 치유의 싹은 생기지 싶다. 내 상처가 뭔지, 그래서 어디가 아픈지 병의 근원도 모르는채 시름시름 앓는 일이 숱하다.  

이 소설이 청소년들에게  쓰임이 있다면 나는 상처를 제대로 찾아내고, 감당해 내는 일에 있다고 말하겠다.  

   
  너의 사자가 남긴 갈기야. 아프리카에 가거든 야생에 뿌려 줘. 미안하다. 상처가 아픔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서.  
   

 그리고 필요한 건 진심을 담아 사과하는 일이다. 경준이 유라에게 보낸 소포속 메모에 내 마음이 오래 쏠렸다.  생각하고 느끼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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