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스 우즈의 그림들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9
패트리샤 레일리 기프 지음, 원지인 옮김 / 네버엔딩스토리 / 2010년 2월
평점 :
품절


어쨌든 한 생명이 태어났고 아이는 살아가야한다. 출생의 근원을 따지는 일조차 의미가 없다. 이미 그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의미를 잃어버렸다. 태어난 곳(홀리스우즈)에서 아이는 버려졌다.  

이금이의 <주머니 속의 고래>를 읽다가 공개 입양된 준희를 만나고, 김려령의 <내 가슴에는 해마가 산다>를 통해 공개 입양된 하늘이와 한강이를 만나다가 <홀리스 우즈>까지 만나게 되었다. <고래>에서 준희는 세 인물 중 한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개입양에 대해 생각꺼리만 제공했다. <해마>는 선천성심장병 수술을 한 뒤 생긴 수술 자국이 해마와 닮았다는 이미지에 공개 입양된 하늘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자라는 상태에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고래>와 <해마>는 공개 입양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두 작품 모두 공개입양의 양면을 다루지만 결국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끝난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를 말로 한다는 점에서 독자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가족이 되어가는 지일텐데, 둘 다 입양된 아이의 눈과 입을 통해 말하되 가족이 될 사람들과의 상호 관계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 가족이 되는 것으로 결말이 나지만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그 과정이 궁금한 독자들은 아쉬운 마음을 어쩔 수 없다.  

<홀리스 우즈>가 두 작품과 조금 다른 것은 주인공이 '위탁'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공개입양이 당사자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진행된다면 '위탁'은 입양 될 사람이나 할 사람의 의지, 확신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위탁되었다가 기간이 지나서 다시 입양기관에 돌아오는 과정은 버림이 반복되는 것이다. <홀리스>도 위탁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상처받는다. 그러면서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먼저 도망을 치게 되는 것이다. 자존감은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으로 홀리스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내가 이 작품에 주목하는 것은 위탁의 과정이 공개입양을 하게되는 과정에서 필요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첫 눈에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가족이 되기도 하지만 버려진 아이들 모두가 가슴으로 만나 가족이 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위탁 기간이 끝나고도 가족을 못 만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 위탁 기간 동안 서로를 알아보고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풀어내고 있어서 좋았다. 무엇보다 <고래>나 <해마>가 주로 주인공의 생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거나 가족의 구체적인 행동, 상황이 부족해서 중간 과정이 생략된 느낌이라면 <홀리스>는 위탁된 가정의 가족들과 위탁된 홀리스 사이에 여러가지 상황들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가족이라는 형태가 만들어지는지 그 상황들, 행동들, 구체적인 말들을 통해 독자는 쉽게 몰입한다.  

그러다 보니 독자는 홀리스가 스티븐과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된다. 피해의식과 상실감으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홀리스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스티브와 엄마, 아빠가 평소에 어떤 행동, 어떤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다. 이야기에서 주인공과 등장 인물이 겪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게 빠진 채 하나의 사건(물론 결정적인 사건), 혹은 주인공의 내면을 말로만 풀어놓은 이야기는 감동도 적고 재미도 없다. 결정적인 사건이 효과를 내려면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결정적인 사건을 키워가야 한다.  

가족이 되는 것은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해야하는 것이다. 입양 기관이 위탁 가정을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결국은 입양을 원하는 쪽과 입양 될 아이가 서로를 알아봐 줘야하는 것이다. 부부로 사는 일은 연애기간이라는 위탁의 과정을 겪고 비로소 가족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보았다. 억지스러운 비교지만 굳이 이렇게 생각을 해 본 것은 입양이 별스러운 과정이나 대단한 비밀, 혹은 희생이나 봉사라는 인류애적인 의미로 커진다면 너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홀리스를 입양하는 과정에서 스티븐과 리건 가족이 보여준 모습은 있는 그대로였다. 특별한 것이 없었고 무엇보다 홀리스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홀리스가 그린 그림을 제대로 봐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홀리스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구제를 한다거나 보살펴야 할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홀리스와 함께 사는 것이 행복했다. 세상에 버려지고 여기저기 위탁 가정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은 홀리스의 잘못이 아니다. 홀리스는 그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스티븐과 남매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스티븐의 말처럼 홀리스는 가족이 뭔지 모르고 있었다. 가족은 나때문에 네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내가 제일 잘났어라고 말 할 수 있고, 그게 인정받는 곳이 가정이고 네가 제일 잘났다고 추켜세워주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홀리스는 아마 타고난 화가일 것 같다. 치매를 앓고 있는 조시 아줌마를 보살피는 열 두살 여자아이는 누군가의 아픔을 감당할 수도 있다. 얼굴도 예쁘다. 누군가는 그런 홀리스를 거칠다고 버리고 누군가는 그런 홀리스를 알아본다.  

나는 나의 가족들을 얼마만큼 알아볼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이 지금, 내 옆에서 나를 귀찮게도하고 열받게도 하지만 목젖이 보일 만큼 웃게도 만드는 그들이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의 소중함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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