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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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는 경계의 글이다. 타이르고 주의를 주는 글이라 우화는 두려운 글이다. 그 결과를 비극으로 맺기 때문에 독자는 그 서슬에 놀라 몸과 마음을 단속한다.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화가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섬뜩했다. 현실의 정곡을 파고드는 작가의 가슴이 그의 손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하나같이 새겨 볼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굴한 삶을 사는 2011년 지금 여기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도끼질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처럼 누구한테도 싫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늘 끌려다니기만 하던 나 아닌가.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 앞 뒷말이 다르고 제대로 속물의 모습을 보여준 이웃 언니한테 ‘난, 당신을 만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지 못해(사실 쉽게 이런 말 못하지) 찌질하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나다.

싫다는 말을 처음 해 본 사람이 남편이 된 남자다. 그것도 남편이 되고 나서야 감히 ‘싫다’는 말을 했다. 그게 뭐든지 오케이, 그게 내 장점이고, 사람 좋다는 말은 관계 유지를 위해 내가 확보해야 했던 태도였다. 참고 용서하며 살라는 천사의 말에 속아 죽음 직전에야 그걸 깨달은 노인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개인의 문제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이 집단의 문제다. 당연히 개인은 집단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자주 그 집단의 논리 속에 개인을 희생당한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늘 희생양을 요구한다. <가위바위보>에서처럼 집단은 개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바위를 못내는 나약한 개인을 철저히 희생양으로 삼고 그 덕으로 집단은 유지된다. 집단이 공공성을 잃고 전체 권력이 되었을 때 손을 다친 개인은 즉 집단에 끼일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개인은 무력하게 희생된다. 더 우화적인 상황은 1%의 집단을 위해 99%의 개인이 희생당하는 시절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99%의 개인이 그들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염소와 늑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검은 염소, 흰 염소 구분 없이 모두 함께 힘을 모았을 땐 늑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가르고 한 쪽만 공격했을 때 상황은 검은 염소들이 흰 염소를 돕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 늑대의 공격을 받는 흰 염소와 동류(동무)라는 걸 잊은 채 늑대에게 희생당하는 흰 염소를 남의 일로 여기는 것. 심지어 흰 염소가 숨어있는 곳을 일러바치기까지 한다. 검은 염소들이 생각하기에 흰 염소가 잡아먹히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늑대는 결코 자애롭지 않다. 오로지 목적은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다. 흰 염소가 모두 잡아먹히고 힘의 절반이 빠진 검은 염소들도 흰 염소와 같은 운명이다. 검은 염소가 그 이유를 자기들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섬뜩한 경고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힌다면 그놈이 왜 잡아 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도 못할 거야. 뿔이 굽어서 먹혔는지, 다리가 짧아서 먹혔는지, 암놈이라서, 아니면 수놈이라서 먹혔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겠지. 스스로 먹힐만한 이유가 있어서 잡아먹히는 거라고 여기는 놈들을 사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끔찍한 상황이다. 실체가 분명한 늑대를 못보고 제 동료가 먹히는 게 이유가 있어서라니, 이렇게 우매한 족속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가난하고, 지방대를 나오고, 외국어를 못하고, 취업을 못하는 그들을 루저라고 조롱하고 비웃지 않았던가. 너만 잘해봐라, 그게 다 노력 부족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지적질만 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간교한 늑대였던 것이다. 그 늑대를 바로보고 함께 물리쳐버리리지 못하는 한, 흰쥐, 검은쥐 또한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그림과 글이 적절히 섞여있고 그림의 선이 좋아 책장이 잘 넘어가지만 읽는 내내 우울하였다. 열을 받아 확확 달아오르던 마음이 한 모금의 물로 달래지느니, 차기 추장을 노리는 두 아들에게 물을 길어오라 한 아비가 서로 제가 잘했다고 싸우는 두 아들에게 혀를 차며 이른다.

 

“ 첫째의 맑은 물은 병들거나 너무 많이 쇠약해진 사람들에게 먼저 먹이고, 둘째의 탁한 물은 아직 건강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단다. 한 그릇에 모았다면 모두가 탁한 물을 먹어야 했을 거야.”

 

우화가 전하는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다. 이 시대의 말로 하면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이것과 저것 중에 단 하나만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것의 쓰임이 있고, 저것은 저것의 쓰임이 있는 것이라는 지혜의 말씀은 위안이 된다.

작가의 바람처럼 그의 이야기가 열 번의 도끼질이 되어 너와 내가 ‘이드거니’ 어우러져 서로에게 스며들어 소외받는 개인이 없이 ‘대동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그러자면 우선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두루 읽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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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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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칼과 황홀>을 며칠에 걸쳐 띄엄 띄엄 읽었다. ‘띄엄 띄엄’ 읽었다는 것은 아마 다른 일을 좀 미루고서라도 이 책에 매달리게 할 무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이유를 생각하느라 설거지 하면서 그냥 흘려보낸 물이 몇 바가지는 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정확한 연유를 모르겠다. 이 글을 마무리할 때 쯤이면 생각이 떠오를라나.

‘성석제의 음식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나는 깊게 읽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속도마저 느린 독자다. 1부와 2부를 넘어가서는 심지어 다른 책을 끼워 읽는 비리를 저지르기도 했다. 3부에서는 주로 술 이야기를 해서 그나마 흐리멍텅 해지던 눈이 조금 밝아지고 더러 입맛이 다셔지기도 했다. 그리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마치 막걸리 원주라도 마신 것처럼 얼얼해졌다. 이십여 년 년 전 대낮에 어느 허름한 짜장면 집에서 짜장면 대신 빼갈을 먹었을 때처럼. 감동 때문이 아니라 3부를 거의 채운 술 이야기 때문에.

이 책은 꽤 두툼하다. 책갈피마다 여행과 여행지에서 먹었던 잊지 못할 음식과 술에 관한 얘기가 잔뜩 들어있어 어느 순간에는 황홀하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 미국, 칠레를 오고가며 머물렀던 곳과 그곳에서 먹었던 그 곳의 일상의 음식들은 가보지 못한 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아, 그 맥주 한 모금 마셔봤으면 하게 만든다.

물론 내 나라의 음식과 사람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석제가 누구던가. 빼어난 글 솜씨는 최고 숙수가 휘두르는 칼의 솜씨라고 멋을 부려 표현할 수 있다. 유머와 재치가 적당히 버무려져 한 맛 더했지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 되지 않았던 나의 여행을 되돌아 보았다. 나의 여행은 몇 년에 한번 이루어질까 말까다. 그것도 겁 많은 자라서 현지 곳곳을 탐색하는 일은 애초에 텄고 숙소에 들어가면 다음날 까지 출입을 안 할 ‘지경에 이르렀기에, 나의 여행은 여행이라 말하기에 다소 부끄럽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돌아오면 본전 생각에 한동안 입맛만 다셔야한다. 그러니 내 생각으로는 여행하는 자라면 돈보다 두둑한 배짱을 앞서 준비해야할 목록이지 싶다.

어찌되었든 그나마 기억에 남아 더러 추억에 잠기게 하는 여행에는 본 것 보다 먹은 것이 더 오래 남아 있었다. 여수에서 먹었던 돌산갓김치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맺히고 코끝이 그야말로 쨍하게 매워온다. 일본 어느 거리에서 먹었던 길거리표 라멘은 아들과 내가 두고 두고 떠올릴 맛이 되었다. 다시 가고 싶은 나라에 일본이 끼는 것은 바로 그 라멘 때문이다. 하긴 가 본 나라가 다섯 손가락이 다 채워지지 못하니 선택에 여지가 없긴 하다만.

본 것 보다 먹은 것이 더 오래 각인되는 건 본능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곳에서 지칠대로 지친 몸이 다음날 다시 여행을 하도록 생명의 기를 넣어주는 음식이니 여행의 마침표는 음식을 먹음으로서 찍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여행기를 읽는 것은 낯선 곳으로의 초대에 응하고 싶기 때문이다. 독자는 저자의 여행기에 몸을 싣는 것으로 저자의 안내를 받으며 여행을 하는 것이다. 이런 여행의 장점은 비행기가 하늘에 떠 있어도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칼과 황홀>을 읽는 동안 아주 잠깐 잠깐 그만 내려가고 싶다고 느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띄엄 띄엄’ 읽은 이유를 거칠게 몇 가지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음식 이야기라고 해서 나는 칼의 주인 ‘숙수’의 모습을 기대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음식을 만드는 장인(匠人)으로서의 숙수, 그의 땀과 비경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을라나 싶었는데 숙수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열렬히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칼의 주인 숙수는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건 내가 기대했던 여행이 아니었다.

또 하나, 저자의 여행이 그야말로 사적인 것이라서 차마 그 여행에 동참하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그가 먹은 그 음식의 맛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다.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 내가 먹은 음식의 맛이 아닐까. 그건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여행이다. 저자는 1박2일처럼 놀러 오시라고 청하지 않는다. 이름난 곳이 아니라서 언제 저기 한 번 가봐야겠다는 욕망이 아예 차단된다. 그날, 그 때 그 시간, 그가 아니면 그 공간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곳이 된다. 그러니 그의 음식 이야기, 술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람 이야기에 나를 보태기가 어색하였다.

책을 읽는 행위는 저자와 독자의 대화라고 했으나 <칼과 황홀>을 읽는 동안 나는 어째 듣기만 한 것 같아 좀 피곤하다. 끼어들어 생각이라도 보태야 대화가 될텐데 그럴 여지가 없다. 스승의 면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스승의 세계는 대체 어디까지 뻗쳐있는가 궁금해 하던 어느 날의 내 모습이 그려졌다.

대개의 문제는 일상의 독자인 내게 있다. 도대체 이 촌티를 나는 언제쯤 벗어버릴 것인가.

저자의 말과 행위와 그의 일상(그가 만나는 사람, 그가 하는 여행, 그가 마시는 술)은 스무살, 처음 대처로 나와 부르조아와 쁘띠 부르조아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허무함을 닮았다.

쓸 수 있는 자와 읽기만 해야 하는 자의 단절을 나는 <칼과 황홀>을 읽으며 아주 잠깐 느껴야 했다. 마치 스윽, 칼날에 손이 베듯이 그런 느낌으로.

당대의 ‘술꾼’을 다룬 책에 성석제의 이름이 오른 광고를 본 것 같다. <칼과 황홀>에서 나는 충분히 그가 자격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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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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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살아갈 힘을 주는 맛, 상처 난 마음을 다독이는 맛 21인의 작가가 말하는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맛을 읽었으니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대답하여야겠다.

나에게 소울푸드는 상처난 마음을 다독이는 맛으로 남았다기 보다 살아갈 힘을 주는 맛으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나 후였나 기억이 가물하지만 모내기 철이었으니 계절은 알만하다. 기계화가 되기 전이라 못줄을 잡고, 손으로 모를 내던 때였으니 애 어른 할 것 없이 논으로 불려 나갔다. 내게 맡겨진 일은 양은 주전자에 되들이 막걸리를 받아 논일꾼들에게 가져가는 일이었다. 찰랑찰랑한 막걸리 주전자는 흘리지 않고 들고 가는 것이 중요했는데, 어찌됐든 나는 하루에 두어번씩 막걸리 주전자를 날랐다.
모내던 아저씨들이 뱅뱅도리 대접을 돌려가며 먹고 나면 나는 냉큼 그 주전자를 다시 들고 일어섰는데 그 때 주전자 바닥에 남은 막걸리가 내 몫이었다. 미리 먹을 수는 없어서 남은 것을 홀짝거렸던 것이 내가 투정없이 막걸리 주전자를 날랐던 이유였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바쁜 농사철에 나도 밥값을 했다는 자찬이었을 것 같다. 그게 술 심부름이었으니 상일꾼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웅덩이에 술동이를 안치고 바가지로 퍼주던 차갑고 달콤했던 막걸리 맛을 다시 보지 못했다.

맥주마시라는 잔에 어찌 소주를 담아 마셨는지 시작은 알 수 없다. 강릉 중앙시장 순대골목에서 처음 순대국을 접하며 마시던 소주가 주량이 늘어 지방 주간지 기자로 일할 때는 밥먹는 자리에서는 밥보다 먼저 맥주잔에 따른 소주가 한순배 돌았다. 찌르르 할 때 그 느낌은 지금도 짜릿하다. 그렇게 시작한 술은 봄이면 뭉글뭉글한 바람과 벚꽃 때문에, 여름에는 비 때문에 가을에는 붉은 기운 때문에, 그리고 겨울에는 눈 때문에 해도 떨어지기 전부터 시작되기 일쑤였다. 마감 끝내고 시작한 낮술은 한 밤중에는 눈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경포 입구에 있는 카페 박스에 우리를 잡아두었다.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어떤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 같다.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보다 동료들과 어울리고 있을 때 나는 덜 무서웠다. 그 때 사람들은 이제 전혀 소식을 모른다. 그 중 한 선배는 서른이 되면 자살을 하겠노라고 말했는데, 언젠가 나는 인터넷에 그 선배 이름을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살아있다면 뭐라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손톱을 물어뜯던 버릇이 있었던 선배다.

지방 주간지 일이 내 일이 아닌가 싶을 때 뭘하고 살아야 평생 일하고 살 수 있을까 해서 공부를 했던 때가 있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서 현대시를 전공하였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현실인식은 한 치도 발전하지 못한 채 제자리다. 그 공부의 대가로 내가 얻은 최대치가 학과 조교였다. 계약직 3년 동안 나는 버는 돈의 절반을 술값으로 썼다. 학교 근처 단골집도 생겨서 우리 패거리가 뜨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덜마른 오징어가 써비스로 나왔다. 술을 먹으면서 안주를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오징어가 내 입으로 들어간 건 글쎄, 한 마리나 되었을까.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서 마시고 또 마셨다. 그렇게 마시고도 다음날 멀쩡하게 출근한 건 그날 저녁 또다시 마실 술 때문이었을까. 그 때 고전을 전공했던 내 후배는 다섯 개 들이 요구르트를 최고의 해장으로 여겼다. 나는 생으로 굶는 것이 해장법이었다. 오백씨씨 생맥주의 맛보다 그 숱한 날들 어울렸던 후배들에게 내가 술값을 내는 것으로 낙을 삼았던 때다. 유독 마음이 통했던 후배는 내가 먼저 거리를 두었다가 아차 싶어 반성하고 연락했더니 이제는 그녀가 뭔가 화가 났는지 영영 무소식이다. 결혼식에도 서로 오고 갔는데, 그 후 몇 번 메일을 보내도 답이 없다. 수신확인은 했는데, 답장이 없어서 그녀가 내게 뭔가 화가 났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지금도 가끔 그녀가 이제는 나를 용서했을까 생각한다. 아니면 아마 그녀 성격에 나 같은 언니는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거다.
그렇게 술을 먹고 나는 더러 음주 운전을 했다. 열두시만 넘으면 시내 교통체계가 작동을 멈추고 차도 거의 없던 때의 일이다. 가장 위태로웠던 한 때였다. 술이 위험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그를 만났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강의를 오던 그는 슬쩍 내 책상에 휴게소에서 따온 꽃송이를 올려놓았다. 나는 그 꽃을 고개를 들면 바로 보이는 곳에 핀으로 꽂아두었다. 그 꽃이 마를 때 그는 또 다른 꽃송이를 따다 주었다.
어느 날은 마지막 강의로 늦은 시간 돌아오는데 어쩌다 한 송이가 피었는지 모르겠다며 품 속에서 백합 한 송이를 꺼내놓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커피 두 숟가락에 프림 두 숟가락을 넣은 커피를 내놓는 것 뿐이었다.
매화를 보러 난설헌 생가에 후배 둘과 그와 함께 들렀다. 홍매, 백매 아래서 꽃향기에 취해 내가 사들고 간 ‘카스’캔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경포 호수에서 비오리가 자맥질 하는 것도 보고 경포 바닷가에서 회에 또 ‘카스’를 마시고 그러다 또 다른 후배가 오고, 날은 저물고, 먼 바다에 오징어배는 뜨고 ‘카스’는 벌써 몇 병째 비워지고 봄바람은 뭉클뭉클 다리를 감싸오고 우리 모두 즐겁게 취해 갔다.
그와 나는 주문진 바다를 보면서도 ‘카스’를 마셨다. 어느 날은 그가 쓴 시를 보여주었고 다음에는 내가 답시를 적어 보여주며 또 ‘카스’를 마셨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바쇼의 ‘하이쿠’를 알았고, 동해 바다에도 밀물썰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알고 있는 바닷물고기가 고작 오징어 고등어 정도라면 그는 주문진 수산시장에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 동행했던 바다 낚시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카스’를 마셨다. 그때 처음 내가 조개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거기는 조개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가 말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제부도 바닷가에서 조개를 먹을 때 나는 문득 그가 생각났다. 그날도 나는 ‘카스’를 마셨다. 그를 만나고 나서도, 그 해 겨울 학기가 끝나면서 그가 더 이상 강릉으로 강의를 오지 않게 된 뒤부터도 나는 ‘카스’를 마신다. 카스를 마시는 동안 나는 그를 생각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카스를 마시기 시작한 건 오로지 그 때문이다. 서른을 한두해쯤 남겨 두었고 나는 한 두 번 사랑에 실패했고, 나는 누군가한테 사랑을 받을 사람이 못된다고 마음을 접을 때 그는 나한테 단 한번도 사랑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나에게 꽃을 준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사랑이었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 여자가 만나는 일은 사랑 말고도 또 있을 수 있다고 강변하고 싶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안만나는 것도 있지만 그저 ‘카스’를 마시면서 꽃 얘기를 하고 바다 이야기를 하고, 시 얘기를 할 수 있으면 되는 만남도 있다.
그 때 마신 ‘카스’는 추억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나이를 먹어도 설렐 수 있는 추억 한 바닥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 ‘카스’가 있었다.

황교익의 말처럼 ‘나는 내 영혼을 걸고 집착할 만한 음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딱히 소울푸드란 게 없’다. 한국인이 말할 수 있는 10여 가지 음식 안에서 술을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내 삶이 큰 굴곡 없이 밋밋해서 그럴 수도 있다. 목숨 걸만한 절박한 순간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시쓰기를 포기해야겠다고 재주 없음을 정당화시키는 짓도 했다. 어쨌든 난 그저 그런 삶을 지금도 살고 있다. 그저 그런 사람에게 그나마 얘깃거리를 있게 해준 막걸리, 소주, 생맥주, ‘카스’가 좋지 아니한가. 시쓰기를 멈추었지만 ‘카스’를 마시는 일은 내가 마지막 까지 그만두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일이다.

이 책 <소울푸드>가 유용하다면 독자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자신의 삶에도 이야기가 있음을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음식은 본능에 가깝고 본능은 가장 나다운 것의 본질일 것이다. 그 음식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면 나는 그 순간 가장 본능의 내 모습이었을 것이다. 더하고 뺄 것 없이 그 순간 가장 나의 모습이었던 그 때, 그 기억이 유효하다면 종류나 개수에 상관없이 그것이 나의 ‘소울푸드’이리라.
이 책 리뷰식탁에 다양한 소울푸드가 차려지기를 기다려본다.

 

추신) 글쓴이들이 쓴 소울푸드 이야기 보다 글쓴이를 소개한 글이 더 좋았다. 더러 본인이 직접 쓰기도 하고 누군가 써주기도 한 것 같은데, 아무튼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그 짧은 글 속에서 찾아보는 맛이 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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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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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는 때리고 맞는 일이 다반사다. 아비가 아들을 때리고, 선배가 후배를 때리고 선생이 학생을 때린다. 또래가 또래를 때린다. 때린다보다는 ‘패고 맞는다’가 더 어울린다. 그래도 다들 아무렇지 않게 얼굴 맞대고 밥을 먹고 담배를 나눠 피며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 더러는 맞고 때리면서 정도 드는데, 그러다 보니 남녀의 잠자리를 위해 방까지 비워준다. 그건 일상이고 그러면서 학생은 학생이 되어가고 선생은 선생이 되어간다. 이상하지만 거기 까지다. 그래서 독자는 남자 애들은 맞으면서, 때리면서 크나보다 한다. 침 뱉는 여자 애들도 담배 피고 술 마시는 남자 애들도 다 지나가는 한 때로 추억이 된다. 이때 아이들의 바램은 얼른얼른 커서 어른이 되는 거다. 어른이 되면 맞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주인공 ‘나’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하다.  


어른은 완강하다. 주인공의 아비거나, 학교 교련 선생이거나 사회 선생이거나 도대체 어른들은 어떻게 생겨먹은 꼬라지가 자식이거나 제자를 때리고 패고 무시하면서 길들인다. 이 폭력의 시기를 거치며 아이들은 이를 악물고 어서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데,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어른들은 처음부터 어른이 아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아마 그걸 뼈저리게 알리라. 그래도 한 줌 햇살 같은 선생도 있어서 학생은 꾸역꾸역 학교에 간다.
가출한 제자를 찾아갔다가 칼에 맞은 상처를 보여주며 생물 선생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같은 종족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짓은 동물세계에선 없다. (중략) 사람만이 먹이나 환경과는 상관없이 같은 종족에게 이런 상처를 남긴다.”  


그러는 중에도 인간 세상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상처를 남기기 위해 숨을 조여오고 있다.
오로지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고자 도시로 나온 주인공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오월 그날을 낱낱이 경험한다.
인간살인병기로 단련된 군인에게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주먹질은 애처롭다. 그건 도저히 대거리가 안되는 싸움이다. 일상이 맞고 패던 지난 시간은 현실의 폭력 앞에서는 서로 친해지기 위한 애교의 몸짓처럼 느껴진다.
광주를 읽는 것은 아직도 고통스럽다. 곤봉에 맞아 죽고 총에 맞아 죽는 살육의 현장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들여다 보는 일이 과연 괜찮아질 때가 있겠는가. 그걸 한 글자 한 글자 적어가는 작가의 손끝이 어땠을지 나는 가늠할 수 없다.
이야기는 후일담이 아니고 처음부터 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에 독자가 경험하는 폭력의 강도 또한 점점 증대된다.
일상의 폭력이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 이후 그 며칠간의 폭력은 그 행태가 가히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서 일상의 폭력 쯤이야 지나갈 일로 치부해 버릴 정도다.  


“나는 희망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다. 미움의 힘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광주를 역사교과서에서 빼버리려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나의 미움을 어디다 써먹을텐가. 째려보다 사팔뜨기가 된다해도 내 미움을 거두지 않겠지만 그런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란 말인가.  


<꽃의 나라>를 읽는 동안 한동안 잠잠하던 공황증세가 도졌다.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밀려드는 절대 고독, 혹은 외로움, 생명의 유한함에 대한 공포, 살아 있는 것의 헛헛함. 그럴땐 자리를 박차고 나가 나만 살아있고, 나만 죽는 것이 아님을 사람을 통해 위로받아야 한다. 심호흡을 하고 사람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아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며 나만 살아있고,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는 걸 빠른 시간안에 이해시켜야 한다. 시간은 단 몇 십초지만 나는 그 순간, 그 경험이 참으로 힘들다. 목숨은 또 다른 목숨에 기대어 유한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숨 쉬는 것을 꽃 모가지를 칼로 잘라버리듯 죽여 없애는 행위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꽃의 나라>는 삼십 년 전 그 도시(광주)의 그 시간을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쫓을 뿐 그 배후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때 사령관의 신분으로 대통령이 된 자는 감옥에 다녀와 지금 소리소문 없이 살고있고 역시 같이 일을 도모했던 자는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가 지금은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를 접한 것이 며칠 전이다.
주인공의 기억은 그 사령관이 대통령이 된 데에서 끊겼지만 그들은 여전히 또 다른 폭력으로 연명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제대로 미워할 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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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 - 동서양 미술의 완전한 만남
손철주.이주은 지음 / 이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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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림이다>는 남편이 먼저 읽고 내게 선물로 준 책이다. 말로는 나를 위해 샀다고 하면서 읽기는 본인이 먼저 읽었다. 속도가 무진장 빠른 사람이라 금새 읽었지만 나는 설거지 하고 나서 잠깐, 빨래하고 나서 잠깐, 화장실 가서 잠깐(이런, 실례! 하지만 가끔은 망설이기도 했다는 변명)이러다 보니 며칠 걸렸다. 쉽게 잠못들면서 그때나 좀 읽지, 한번 불끄고 누우면 꼴딱 밤을 샐 지언정 일어나지 못하는 내가 싫다. 흐~억! 

동서양의 그림을 두 사람이 주제에 맞게 골라 매개로 삼되 주거니 받거니 편지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정말이지, 글들을 잘 쓴다. 손철주의 글은 한 세상을 알고난 사람들한테 느껴지는 앎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동양화를 담당하여 그림을 통해 인간사의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는데, 특히 이 책이 좋은 것은 편지 형식이 갖는 내밀함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과 감정을 곧잘 나타내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괜히 끼었나 싶다가도 그걸 훔쳐보는 것이 또한 재미나다.  

연배가 아래인 이주은은 서양의 그림을 담당했는데, 곧잘 영화이야기를 들여와 예술과 인간사의 넘나듦의 폭을 넓혀준다.  

나는 그림이 낯설다. 어쩌다 사람들한테 묻어서 미술관에 가면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그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지 몰라 늘 당혹스럽다. 뭘 느껴야 하는지, 뭘 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낑낑대다 보면 허리만 아프고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을 훔쳐보며 몰래 그 그림을 다시 보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도 여전히 그림은 내게 너무 먼 당신이다. 급이 달라 사랑할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 같은. 그래서 슬프다. 한때는 내 문화적 토양이 척박해서 그건 고급이야, 난 순대국에 소주체질이거든 위로도 해보았지만 그때 뿐이다.  

그래서 그림 이야기를 사실 나는 좀 좋아한다. 느끼는 것을 모른다면 누가 가르쳐주는 대로 받아들여보기라도 하리라. 그러다 보니 글쓰는 이가 일러주는 대로 어떨때는 그 그림이 내게 살짝 미소를 건네기도 한다. 물론 책을 덮으면 그걸로 싹 끝나는 인연이다.  

무엇보다 이 그림 이야기가 좋은 것은 그림에서 삶, 즉 그리움, 유혹, 성공과 좌절, 나이, 행복, 일탈, 취미와 취향, 노는 남자와 여자, 어머니, 엄마까지 다루고 있어서 특별한 감식안을 가져야하는 것에서 조금 자유롭다. 그럼에도 서양의 그림에는 기본적을 알고 있어야 하는 상징 혹은 관습 같은 것이 있어서 설명이 없다면 그저 보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부러운 것보다, 혹은 이토록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부러운 것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날 정도로 부러운 것은 두 사람의 관계였다.  후배의 눈웃음을 사랑하는 선배의 마음, 그 선배를 한없는 존경으로 따르는 후배의 모습이 또 한장의 그림이었다.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책도, 그림도, 시도 아니었다. 나는 책같은 사람, 그림같은 사람, 시같은 사람을 기다렸던 것이다. 지금도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을 알기에 늘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일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림을 눈여겨 보듯 사람을 눈여겨 보는 일, 나는 그게 어렵다. 나를 눈여겨 보는 일 조차 어렵다. 그래서 나는 늘 한자쯤 땅위에 떠다니듯 헛헛하고 휘청거렸다고 생각한다.  

그림처럼 좀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김장 이야기를 주고 받든, 아이들이 어제 끝낸 야생화 이름 맞추기를 두고 뒷담화를 하든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 내게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지 오래되었다.  

<다 그림이다>는 재밌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한 몇 안되는 책이다. 그림을 볼 줄 알아서 부럽고 그림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부럽다,  

내 인생은 언제까지 부러워하고 질투만 할 것인가. 멈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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