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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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는 경계의 글이다. 타이르고 주의를 주는 글이라 우화는 두려운 글이다. 그 결과를 비극으로 맺기 때문에 독자는 그 서슬에 놀라 몸과 마음을 단속한다.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읽는 동안 우화가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이 신기하고 섬뜩했다. 현실의 정곡을 파고드는 작가의 가슴이 그의 손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하나같이 새겨 볼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말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비굴한 삶을 사는 2011년 지금 여기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도끼질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처럼 누구한테도 싫다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늘 끌려다니기만 하던 나 아닌가. 입만 열면 자기 자랑에, 앞 뒷말이 다르고 제대로 속물의 모습을 보여준 이웃 언니한테 ‘난, 당신을 만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지 못해(사실 쉽게 이런 말 못하지) 찌질하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나다.

싫다는 말을 처음 해 본 사람이 남편이 된 남자다. 그것도 남편이 되고 나서야 감히 ‘싫다’는 말을 했다. 그게 뭐든지 오케이, 그게 내 장점이고, 사람 좋다는 말은 관계 유지를 위해 내가 확보해야 했던 태도였다. 참고 용서하며 살라는 천사의 말에 속아 죽음 직전에야 그걸 깨달은 노인의 모습이 나와 다르지 않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개인의 문제보다 더 경계해야 하는 것이 집단의 문제다. 당연히 개인은 집단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자주 그 집단의 논리 속에 개인을 희생당한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늘 희생양을 요구한다. <가위바위보>에서처럼 집단은 개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바위를 못내는 나약한 개인을 철저히 희생양으로 삼고 그 덕으로 집단은 유지된다. 집단이 공공성을 잃고 전체 권력이 되었을 때 손을 다친 개인은 즉 집단에 끼일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개인은 무력하게 희생된다. 더 우화적인 상황은 1%의 집단을 위해 99%의 개인이 희생당하는 시절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99%의 개인이 그들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결국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염소와 늑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검은 염소, 흰 염소 구분 없이 모두 함께 힘을 모았을 땐 늑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을 가르고 한 쪽만 공격했을 때 상황은 검은 염소들이 흰 염소를 돕지 않게 된다. 내가 지금 늑대의 공격을 받는 흰 염소와 동류(동무)라는 걸 잊은 채 늑대에게 희생당하는 흰 염소를 남의 일로 여기는 것. 심지어 흰 염소가 숨어있는 곳을 일러바치기까지 한다. 검은 염소들이 생각하기에 흰 염소가 잡아먹히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늑대는 결코 자애롭지 않다. 오로지 목적은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다. 흰 염소가 모두 잡아먹히고 힘의 절반이 빠진 검은 염소들도 흰 염소와 같은 운명이다. 검은 염소가 그 이유를 자기들 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섬뜩한 경고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힌다면 그놈이 왜 잡아 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도 못할 거야. 뿔이 굽어서 먹혔는지, 다리가 짧아서 먹혔는지, 암놈이라서, 아니면 수놈이라서 먹혔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겠지. 스스로 먹힐만한 이유가 있어서 잡아먹히는 거라고 여기는 놈들을 사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끔찍한 상황이다. 실체가 분명한 늑대를 못보고 제 동료가 먹히는 게 이유가 있어서라니, 이렇게 우매한 족속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가난하고, 지방대를 나오고, 외국어를 못하고, 취업을 못하는 그들을 루저라고 조롱하고 비웃지 않았던가. 너만 잘해봐라, 그게 다 노력 부족이라고 개인의 문제로 지적질만 하지 않았던가.

문제는 간교한 늑대였던 것이다. 그 늑대를 바로보고 함께 물리쳐버리리지 못하는 한, 흰쥐, 검은쥐 또한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그림과 글이 적절히 섞여있고 그림의 선이 좋아 책장이 잘 넘어가지만 읽는 내내 우울하였다. 열을 받아 확확 달아오르던 마음이 한 모금의 물로 달래지느니, 차기 추장을 노리는 두 아들에게 물을 길어오라 한 아비가 서로 제가 잘했다고 싸우는 두 아들에게 혀를 차며 이른다.

 

“ 첫째의 맑은 물은 병들거나 너무 많이 쇠약해진 사람들에게 먼저 먹이고, 둘째의 탁한 물은 아직 건강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단다. 한 그릇에 모았다면 모두가 탁한 물을 먹어야 했을 거야.”

 

우화가 전하는 경계를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다. 이 시대의 말로 하면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이것과 저것 중에 단 하나만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것의 쓰임이 있고, 저것은 저것의 쓰임이 있는 것이라는 지혜의 말씀은 위안이 된다.

작가의 바람처럼 그의 이야기가 열 번의 도끼질이 되어 너와 내가 ‘이드거니’ 어우러져 서로에게 스며들어 소외받는 개인이 없이 ‘대동 사회’가 될 수 있기를.

그러자면 우선 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가 두루 읽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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