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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벅 ㅣ 창비청소년문학 12
배유안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1. 다르지만 같은 이야기
스프링벅은 남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영양의 일종이다. 초식동물인데 이들은 무리가 거대해지면 이상 행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마리씩 모여들어 거대한 무리가 형성되면 갑자기 한 마리가 껑충 뛰어오른다. 그러면 옆에 있던 동료가 같이 뛰고 어느새 이 무리 전체가 다같이 껑충껑충 뛰어오르기 시작한다. 선두를 따라 계속 달리는데 이들은 이미 풀에는 관심이 없다. 풀을 뜯는게 그들의 목적임을 잊은 채 이들은 계속 뛰어오르며 달려간 사이 절벽에 다다른다. 위험을 알고 선두가 멈추지만 뒤이어 달려오는 동료들에 밀려 떨어지고 그러기를 되풀이하면서 스프링벅은 속절없이 절망의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
소설 <스프링벅>은 삶의 원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 없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습관 혹은 습성이 목적이 되었을 때 생기는 비극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스프링벅의 절망을 거부하려는 아이들의 간절한 외침의 기록이다.
청소년들에게 성적, 좋은 대학은 그들이 선택한 목표가 아닌데도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그 목표를 향해 현재의 삶을 누리고 생각하지 못한 채 앞으로만 달려갈 뿐이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스프링벅의 슬픈 운명이 사람살이에서도 똑 같이 일어나고 있다.
2.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야기는 고등학생 동준이의 형 성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동준과 형 성준은 여러면에서 서로 다르다. 모범생(몹시 잘난 형) 형 성준과 평범한(잘난 형 동생) 동준이지만 정작 형 성준은 동생 동준에게 “네가 부럽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도 둘 사이는 차별과 질투 그런 말이 끼어들 틈이 없이 좋다. 잘난 체 하지 않고 아주 착한 형과 자유롭고 긍정적인 동생이 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동준이는 그런 형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그 형이 죽었다. 이해되지 않는 죽음이어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형의 죽음에 다른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이제 동준과 엄마의 갈등이 시작된다.
형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 대리시험으로 합격한 대학에 대한 죄책감이었고 절망의 언덕으로 내몬 사람이 엄마임을 안 동준은 혼란과 원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대학에 대한 집착이 대리 시험이라는 부정을 선택하고 그 길은 절망으로 향해 있는 길이라는 것을 형 성준이 죽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대학이 지나온 학창시절의 결과물이고, 미래의 성공 열쇠가 된 우리의 현실이 빚어낸 비극이다. 그 참담한 현실의 피해자인 성준은 부모에게 반항 한 번 해보지 않은 착한 아들이다. 동생에게 잘난척 한 번 하지 않은 맘 좋은 형이다. 나쁜 현실의 피해자가 착한 사람이라는 상황이 이야기 흐름에 더 빠져들게 하고 감정이입하게 한다. 우리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대부분은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고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이 우리들 모습이다. 또한 그 나쁜 일의 결과로 우리가 결코 행복해 지거나 그 일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뻔뻔하게 살아남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성준이 더 안쓰럽다. 자식을 위한 일이 자식을 죽게 한 것에 대해 엄마가 겪어야하는 고통 또한 나쁜 일에 대한 대가로 충분할 만큼 가혹하다.
성적과 대학에 대한 집착으로 아들을 공부로 내몰고 결국 그 아들의 손에 죽음을 맞은 한 어머니의 비극적 결말이 겹쳐진다. 성준의 엄마가 평생 안고 살아야하는 고통과 엄마를 살해한 아들의 고통이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이만큼 현실의 모습을 담아낸다.
3. 연극 <스프링벅>과 현실의 ‘스프링벅’
동준은 연극을 한다. 연극을 잘해서라기 보다는 좋아서 하는 경우다. 우연히 주인공 역을 맡은 창제가 가출을 하고 그 역을 맡으면서 연극에 몰입한다.
공동 창작극인 <스프링벅>은 비보이를 꿈꾸는 주인공 ‘미키’ 이야기다. 연극에는 다양한 현실의 모습이 겹쳐진다. 1등을 하지 않으면 팀을 해체하겠다고 협박하는 교장은 성적과 1등 지상주의 학교의 모습이다. 하버드에 입학하는 것이 최고 목표인 미키의 아버지는 당연히 미키의 희망을 무시한다. 연극 속 미키와 동료들은 교장과 아버지에게 맞서면서 꿋꿋하게 자신의 희망을 찾아 대결한다. 연극 속 인물들은 현실의 인물과 닮았지만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꿈과 희망을 말한다.
연극 <스프링벅>의 주인공 미키는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대입된다. 특히 성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미키와 성준이 여러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과도 다르다.
연극 속 ‘미키’는 현실의 성준이 엄마 같은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자기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아버지의 관심과 간섭을 당당히 거부한다. 아버지가 가꾸는 정원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현실의 성준이는 엄마에게 정원수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절망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과 대비된다.
이유도 모르고 오로지 하버드가 목표가 되는 현실을 거부하고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미키는 풀을 찾는다.
동준이는 형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괴로운데 연극은 형의 죽음과 엄마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연극 <스프링벅>은 동준의 현실을 담아내는 상황극 역할을 한다. 상황극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을 겪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상황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입장을 바꾸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하고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고 느낀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잠시 멈춤의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4.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
청소년과 성인은 끊임없이 갈등한다. 갈등의 원인도 다양하고 입장도 분명하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어른은 애들을 괴롭히는 존재다. 어른의 눈에 보이는 청소년은 잘못된 길로 가는 어리석은 스프링벅이다.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의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그 가짓수는 몇 개나 될지 궁금하다. <스프링벅>에 등장하는 애들 괴롭히는 어른 하나는 자신의 권위에 반발하는 학생의 뺨을 때려 자존심을 세우는 지학 선생이다. 애들이 보기에 지학 선생은 수업은 하지 않고 끊임없이 헛소리만 하는 선생이다. 그걸 꼬집는 똑똑한 학생 현우에게 어른이 한 짓은 뺨이 부풀어 오르도록 때리는 것이다.
아내의 자질과 능력을 무시하는 예슬이의 아빠도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이다. 밤늦도록 아들을 감시하는 창제의 엄마, 아들이 하는 일은 죄다 대학가는 일에 도움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애들 괴롭히는 어른’이다. 사는 일에 바빠 아들에게 관심을 쏟지 못하는 민구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가장 극단적인 인물이 대리 시험을 쳐서 아들을 대학 보낸 동준의 엄마가 아닐까. 그 바탕에 사랑이 없는 부모가 없는데 아이들은 그 사랑을 괴롭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 사이에 무엇이 빠진 것일까?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등장하는 손장하 선생과 정미은 선생의 모습이 <스프링벅>에서 찾은 해답이 될 것이다. 손장하 선생의 말대로 현실에는 더 많은 성숙한 어른을 찾을 수 있다. 애들을 괴롭히는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들의 상처를 달래고 보듬는 어른도 있다. 길은 항상 두 갈래 길이고 어느 길을 선택할 지는 그 길 앞에 선 우리의 몫이다. 다만 그 길이 과연 그 길이 맞는 지 어떻게 알겠는가 하는 것이다. 둘 다 못 가본 길이니 말이다. 아마 많은 아이들이 이 순간 앞에서 혼란스러워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애초에 길이 딱 두 개 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매 순간 길은 갈래가 나있고 우리는 늘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잘못 선택한 길 앞에서도 또다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과 믿음을 갖는다면 단 한번, 단 하나의 답답함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단 하나, 단 한 번의 몰아침이 가져온 결과가 성준의 죽음이다. 성준의 엄마가 또 하나의 길로 재수를 선택할 용기가 있었다면 성준은 그의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최고인 단 하나의 대학에 대한 집착도 벗어냈더라면 말이다.
성준의 죽음과 성준 엄마의 잘못된 선택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 손장하 선생과 정미은 선생 같은 완충 작용 혹은 가교 역할을 하는 어른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이유도 모른 채 절망의 벼랑을 향해 뛰기만 하는 스프링 벅의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연극 <스프링벅>이 동준에게 대리경험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준 것 처럼 독자는 소설 <스프링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소설은 현실에서 빗겨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실을 담으려고 노력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5. <스프링벅> 심화학습
연극반 아이들은 연극을 하면서 연극을 재해석하고 인물을 재구성하면서 연극과 현실의 간격을 좁혀간다. 미키 아버지 역을 했던 민구가 연극 속 미키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현실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동준 또한 주인공 미키 역을 하면서 형의 슬픔을 이해한다. 미키 아버지를 통해 엄마의 고통을 생각한다.
연극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자기 고백은 연극을 통해 들여다 본 자기 마음의 고백이 아닐까?
물론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이겠지만 당연하게도 연극은 아이들을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 결과는 연극 공연을 통해 이뤄낸 관객과 배우의 공감으로 나타난다.
소설 <스프링벅>이 성준의 죽음으로 시작되지만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무겁지 않은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건강한 아이들 때문이다.
동준이는 형 그늘에 가려 제 높이를 모르는 것 같지만 긍정적 힘으로 자기를 잘 키워가고 있다. 질투하고 부정하기 보다 형을 자랑스러워하고 형과 같아지려고 하는 대신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연극을 통해 모두가 뛰는 순간, 나의 풀을 뜯는 것의 기쁨을 알아간다. 여자 친구 예슬이와 만들어 가는 이해와 공감의 관계도 제법 보기 좋다.
자신 또한 부모 이혼과 재혼으로 아픔을 겪었지만 소설가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예슬이는 친구의 고통을 나눠가질 만큼 성숙하다.
엄마의 간섭을 참을 수 없어 가출한 창제는 비리 청소년의 전형을 보기 좋게 거부한다. 창제가 가출해서 찾아간 곳이 치매 노인들을 보호하는 곳이라는 것은 ‘애가 어떻게’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그래, 가출한다고 다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이 아닐지 몰라’라고 생각하는 기회가 된다. 다만 그 ‘생각할 시간’을 본인과 부모가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공부하기도 바쁜데 무슨 생각할 시간이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창제는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충분히 생각한 결과를 얻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돌아온 창제가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엄마와 진짜 화해를 할 수 있는 힘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고무신 바꿔신지 않고 기다려준 창제의 여자 친구 수정이도 멋진 드러머로 성장할 것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함께 연극을 하는 연극 부원 모두가 건강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다. 아, 우리도 이런 연극부 만들고 싶은 생각에 가슴 설렐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한 까닭은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연극부원은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다. 주인공이 없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말은 그래서 당연하다. 이 말에 이 소설의 핵심이 담겨 있다. 한 편의 연극(하나의 사회)이 완성되는 것은 연극을 구성하는 모든 부원들이 자기 몫을 다 할 때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과 무대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 호흡이 맞아야 연극은 비로소 완성된다. 각자 자기가 뜯어야 할 풀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관객의 반응이다.
관객이 외면하면 연극은 완성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연극을 준비하고 마음을 모아 연극에 몰입하는 관객이 있어야 완성된다. 각자의 역할에 몰입하고 각자의 역할을 이해하고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마음을 열고 몰입할 때 감동적인 연극이 완성된다.
소설은 동준과 엄마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분명한 결말(극적화해와 해피엔딩)을 원하는 독자는 불만이겠다. 하지만 이 또한 엄마의 선택 동준이의 선택이 필요한 갈래길이다. 아프지 않고 형을 기억할 수 있기 위해 이제 두 사람의 선택이 남아있다. 물론 동준의 아버지도 이 길에 함께 있다. 희망을 대신해 소설에 담겨 있는 시로 대신하면 어떨까?
예슬이가 동준이를 위해 쓴 시, 사실은 김오민 시인의 시 <저녁바다>에 실린 한 구절이다.
“그대는 지금 젖어 있을 뿐이다. <중략> 지금 잠겨 있는 것은 절망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