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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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을 다시 읽었다.

 

<월든>을 읽었지만 소로우를 비로소 만난 것이 즐겁다.

누가 누가 읽었더라는, 누구의 서재에 이 책이 있더라는 말에 기대지 않고도 이제 이 책은 나의 책에 꽂아둘 수 있어서 기쁘다.

 

소로우가 전하는 메세지는 간소하게다.

옷도 가구도 집도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사는 것이 간소한 삶의 본질이다.

남에게 맡기지 않고 그가 지은 그의 오두막은 비를 피하는 나무 그늘이거나 인디언의 천막이다.

문앞까지 자연을 끌어다놓고 사는 삶 속에서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살 수 있음을 실험하고 성공한다.

 

<공자> <맹자>가 대표하는 동양의 고전, 서양의 <그리스로마신화>, 인도, 인디언의 삶까지 소로우가 닿아있는 지적 깊이가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밑줄 그을 데가 많아서 옮겨적다가 말았다는 것.

그만큼 <월든>은 알뜰하게 읽어야 하는 책이다.

 

번역을 하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월든>은 네 권의 책이 한 권에 들어있다.

모험기, 자연을 묘사한 에세이, 풍자서, 자서전인데, 그만큼 <월든>은 내면이 풍요롭다. 그 말은 읽지 않고 보기만 하거나 풍문으로 들어서는 결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는 말이다.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그가 느끼고 겪은 체험을 묘사한 글은 그의 말대로 '선택된 말'(고전, 좋은 책)들이 주는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그가 붉은 개미와 검은 개미의 싸움을 묘사한 글은  한편의 스펙타클한 영화를 본 것 처럼 흥미진진했다. 그의 글은 때로는 유머가 넘치고,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더러는 비유와 풍자로 독자를 골치아프게도 하지만 인간이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소로우처럼 숲 속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다.

내가 사는 곳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월든>을 읽으면서 도시에 사는 우리가 자연에서 멀리 떠나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도시에 살지만 자연에 가까운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채우기 위해 소비하는 것은 돈만이 아니다. 아까운 시간,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단지 채우기 위해 소비되고 낭비되는 것이다.

 

오늘도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남들이 읽는다고 덩달아 사들인 탓이다.

내가 눈을 돌려야하는 것은 세상 밖이 아니다. 그곳은 온통 나에게 자기를 가져달라고하는 곳이다.

소로우가  전하는 말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 속에 여태껏 발견못하던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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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꼭 읽으라며 <월든>을 쥐어주셨는데 이년 전에 받은 걸 아직도 안 읽고 있답니다.
호기심에 첫 페이지를 펼쳤다가 기겁을 하고는 놔두었던 게 기억이 나요.
너무 어렵습니다...

수수꽃다리 2012-05-0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진씨에게 <월든>을 건네신 어머니가 궁금해지는군요^^ 읽은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지의식?!
기겁할만한 첫 페이지가 맞아요.
저도 역시!
언젠가 만날 때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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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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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화와 문명의 시대가 어디에서 갈라지는 지 잘 알지 못한다. 적어도 알래스카 선주민들은 신화의 시대 마지막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할 뿐이다.

 

인간위주의 시대가 문명 시대라면 신화의 시대에는 모든 것의 시대였다. 바람과 돌에도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던 시대에 인간은 그 모든 것의 일부분이었다. 문명은 오래된 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들어섰다. 힘에 밀린 신화 시대 사람들은 이 책속의 밥 샘의 처지가 되었다. 백인(문명인)의 옷을 입고 가죽 구두를 신고 린치를 당하지만 끝내 그들 세계로 진입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사라지는 것이 신화 시대의 운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알래스카에 살고 있는 신화의 시대를 취재한다. 큰까마귀 신화로 묶인 알래스카 원주민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알래스카 선주민의 먼 조상이 아시아에서 건너간 인류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는 현존 하는 원로들이 사망하면 끝날 것 같다. 신화의 시대는 입에서입으로 전해지는 시대다. 시간을 이어주던 원로들이 세상을 뜨면 그 시대는 막을 내린다.

자연을 파괴하고 시간을 파헤쳐 욕을 보이는 문명이 야속하지만 이 또한 거스를 수 없는 현상이다. 더 좋아지든 더 나빠지든 시대는 가고 오는 것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신화의 시대가 완전히 사라지면 소중한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이 우주의 시대에 진입했다고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은 지금 우리 보다 우주를 훨씬 강하게 의식하지 않았을까?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깊이 맺어진 신화적 차원에서 말이야.” (169쪽)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구분이었다. 큰까마귀의 신화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겪어온 사람들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들의 토템도 밥 샘의 말처럼 20년 안에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사라짐을 바라 보는 것이 현재다. 다만 신화의 시대, 즉 영혼의 시대가 문명의 시대에 눌려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서글프다.

밥 샘과 저자가 주노 대빙원에서 오로라를 보면서 나눈 대화.

 

 

“어떤 시대가 올까.......”

“그러게 말이야......어떤 시대가 오려나?” (176쪽)

 

 

빙하와 고래, 곰과 어둠, 큰까마귀 전설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곳이 알래스카다.

저자의 표현은 영혼의 세계를 경험하거나 지켜본 사람의 깊이가 있다. 함께 실린 사진 속 알래스카의 이끼긴 원시림에 오래 눈길이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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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 2012-04-26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한 기회에 수수꽃다리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쩜 글을 이토록 잘 읽고, 글을 맛있게 잘 쓰시는지 부럽고 샘이 나네요. 앞으로도 수수꽃다리님의 울림이 있는 글들 잔뜩!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수꽃다리 2012-04-26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운영님!
혹시 이 댓글을 보실까요?
제가 이런 감사의 말을 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알라딘에서 책을 사고 읽고 짧게라도 메모라도 할 요량으로 적기 시작한 책읽기 였어요.
그동안 많은 독서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턱없이 모자라는 제 글에 심한 좌절을 하였습니다.
그만 나갈까도 생각하던 중이었지요. 그래도 내가 산 날들의 흔적인데 용기를 못내고 미적대고 있었지요. 그랬어요. 그러던 중에 자운영님께서 적어주신 응원의 말씀이 가뭄 끝 단비처럼 달고 맛있어서 잠시 취해있고 싶을 정도입니다.
얼떨떨해서 이게 뭔일인지^^
봄날이 간다고 안달나 있었는데, 자운영님 덕분에 저의 봄날에도 꽃이 피었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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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인생 -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우석훈의 액션大로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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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자 나이 마흔은 청바지를 입고 싶으나 비어져나오는 뱃살을 감당 못해 태가 안나는 나이일까. 조국은 전생에 나라를 몇 개나 구했길래 얼굴 되지, 몸매 되지, 게다가 머리에 든 것까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중년은 남자들의 로망일까.

우석훈의 1인분 인생은 마흔에 들어선 남자 우석훈의 이야기다. 그가 키우는 고양이 야옹구에 대한 이야기며 활동가 출신 태권도 유단자 부인에 대한 이야기다. 한마디로 지극히 개인적인 그의 이야기다. 우석훈 1인의 인생.

우석훈을 알고 싶다면 퍽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여성이며, 그에 관한 이야기는 소문과 같이 듣고, 전형적인 가정주부에다 남편은 가부장적인 사람과 사는 나한테 사실 이 책이 그닥 소용이 있지는 않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자기 얘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대한민국에 사는 마흔 이후의 남성이란다.

남성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와 어떤 얘기를 나누고 공감할까 궁금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뾰로통하니 고개를 외로 꼬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가 분통터져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들은 남자 여자 따로 놓고 볼 일이 아니니 말이다. 책을 다 읽을 즈음에 가서야 나는 이게 그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한 이유를 알았다.

 

김규항의 글들이 시대를 개탄하면서도 그 잘못을 지식인에게 묻는 것에 내가 큰 소외감을 느꼈다면 우석훈의 화는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 내가 지식인이 아닌 그냥 아줌마라고 지금 이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에 성을 내는 걸 우습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우리는 모이면 “이게 다 MB탓이야” 소리 높여 욕을 한다. 거기에 무슨 지식인이니, 성찰이니 뭐 그런 고민 같은 것은 없다. 상대가 분명하다. 그런데 우석훈도 그런다는 것. 눈높이를 낮춘 건지, 워낙 개인적인 글쓰기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게 편하게 읽힌 이유다.

게다가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의 중심에 있어본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나같은 아줌마와 같은 피로감을 느끼고 말을 하니 나, 잠깐 위로까지 받은 것 같다.

교육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에 나는 동의한다. 공교육을 강화시켜야 함에도 교육을 이 난장판으로 만든 것에 좋아 죽는 것은 사교육 뿐이라는 지적도 맞지 싶다.

세상 일에서 한 발 물러나는 것 같은 분위기지만 그가 훌륭하게 1인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는 진중권의 책을 화장실에서 읽었다는데, 나 또한 그의 책을 다 읽기 전까지 손에서 뗄 수가 없었기에 화장실 갈 때도 가져갔음을 고백한다. 그 때 내 식탁 위에는 몇 권의 책이 뒹굴었지만 내가 우석훈의 책을 늘 들고 간 것은 메모하면서 읽지 않아도 대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은 남자하고 술 대신 향기 좋은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이 책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든 생각이다. 아줌마로 사는 나는 남편 말고 이렇게 수다떨 남자가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쫌 아는 사람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면 그만큼 시원한 속풀이가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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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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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이 아저씨, 순옥이 언니, 매표소 여자, 도우미 아줌마, 그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함이라면 이들은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독자는 이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위로 받는다.

<세상 끝의 신발>에 등장하는 낙천이 아저씨는 소년병 동료를 위해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동료의 딸에게는 겨울 눈밭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새끼줄을 감아준다. 따뜻하고 인정 많은 심성을 가졌다. 낙천이 아저씨 덕에 목숨을 구한 아버지는 그와 친구가 되어 의지가 되고 그의 딸 순옥이 언니는 주인공 화자에게는 친정 언니 역할을 한다.

삶이 공평한가 의문을 갖게 하듯이 마음 착하고 예쁜 순옥이 언니는 결혼해서 힘들게 사는 데 착한 그녀는 결국 버림받고 힘든 생활 끝에 퇴행성 치매를 앓게 된다.

착한 사람 낙천이 아저씨와 착한 언니 순옥이 겪는 불행은 그들이 착한 사람이라서 더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혼자 만의 삶에 갇힌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발레리나의 인터뷰 기사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화자는 자신의 삶이 20년 후에도 똑같이 닫힌 방안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세상 속으로 사람과 소통하면서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어두워진 후에>에 등장하는 매표소 여자는 떠돌이 남자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거리도 두지 않은 채 그를 위해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아갈 차비를 준다. 반신 불구가 된 엄마를 챙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혹은 그녀의 마음에 위로 받은 그 남자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이유없이 살해된 가족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던 그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남자다. 포기 직전의 삶에서 여자를 만나고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역시 이유없이 사람을 돕는 여자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모르는 여인들>의 도우미 아줌마는 채의 부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화도 내지 않고 채의 아내의 요구 보다 더 많은 것을 해 놓는다. 채의 아내는 그 도우미에게 마음을 열고, 도우미 아줌마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해 간다. 두 여자가 주고 받는 메모는 만날 수 없는 그녀들이 주고 받는 속깊은 대화다. 그녀들의 대화와 채의 아내가 병 때문에 사라지는 행위는 채의 이십년 전 애인이었던 나의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떨어뜨린다.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가던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모르는 여인이었던 그녀들이 말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혹은 원래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낙천이 아저씨나 순옥 언니, 매표소 여자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사이에 있어야 하는 인정이다. 나와 너인 것을 그들은 구분하지 않는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것,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인정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발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숨막히다가 결국 기형이 되는 맨발을 돌보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신발 속의 맨발을 돌보지 않아서 발레리나의 맨발은 기형이 되었듯이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착한 부인은 외계인 손 증후군에 걸렸다.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가 안타까운 것은 그녀처럼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한 채 상처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상대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화분이 있는 마당>의 주인공을 보면서 언어 장애와 섭식 장애 즉 말하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르는 여인들>의 채는 이십 년 전 애인이 도망친 이유를 이십 년간 모른 채 살면서 지금 다시 아내가 도망친 이유를 몰라 이십 년 애인을 찾아와 묻는 일이 생긴다. 긴 세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한 사람의 현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만남에도 예의가 있는 것 처럼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다. 갑작스러움은 그 순간 단절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죽음이 되었든 말없는 사라짐이 되었든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과제를 남기는 것이 갑작스러운 단절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의 창, <숨어 있는 눈>의 A, <성문 앞 보리수>의 수미(그녀는 억척스럽게 살았고 소원이던 내 집을 장만하던 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남은 남편은 어떻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해소할까), 갑작스럽게 떠난 경은 갑작스럽게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병으로 죽었거나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닌 자기의 의지로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A의 남편, 경과 수미를 보는 S, 수미의 남편은 오랜 시간을 물음표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화분..>의 주인공은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지경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아내는 생각지도 않은 이혼을 요구한다.

무엇이 이렇듯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하게 했을까. 소통이 되지 않아서 일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했을까?

더러는 단절의 원인을 알았으나 회복하기에 늦은 경우도 있다.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남편은 죽음 직전에야 아내의 외로움을 알아챈다. 아내가 외계인손증후군에 걸릴 만큼 자신과 단절된 슬픔으로 고통 받았음을 늦게야 깨닫는다. 착한 아내였다. 어쩌면 소통이 단절된 사람들에게 작가는 그를 통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들도 이렇게 죽음 직전에 가서야 알 것인가. 아니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서 그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특히 이 작품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자각하는 순간을 그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누워있는 그가 구조되면 그가 그 관계를 회복할 것 같은데, 어둠은 찾아오고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그 남자 처럼 지금 풀숲에 누워 있는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다. 소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할 시간 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폭력이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느닷없는 이별 통보나 일방적인 연락 단절을 선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남겨짐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역할이 있다면 상대도 해야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겠지만 피하는 것 보다는 그 죽음 조차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이 지점 또한 선택의 문제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든가, 함께 죽음을 지켜보든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은 우연한 친절만으로도 해결된다. 사람이 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는 것이 우리 삶이다.

죽은 사람한테 조차 위로 받는 것이 우리들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주인공이 죽은 여인을 통해 위로 받고 치유를 받는 장면은 관계에서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소품 혹은 매개가 신경숙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것, 즉 먹는 것과 말하는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돈, 혹은 멋진 외모, 아니면 든든한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정성들여 차린 밥상과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먹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로울 수 있다.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말을 들어 주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가 잘 보여준다. 어쩌면 말을 들어주는 일이 중요한 만큼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가 ..>에서는 아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다루지만 <모르는 여인들>에서 채는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지만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들어주는 것과 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소통이 되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 져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남편에게만 자신의 맨발을 보여준다는 발레리나는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화자가 순옥과 자신이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수 없다는 것과 발레리나가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거라는 말의 대비를 오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깐 보이고 마는 무대에서 본인이 아닌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로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그 모습 그대로(구부러진 맨발을 보이며)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주인공 화자는 후자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들추어보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내 감정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지 들여다 보는 일이 썩 재미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받아들이는 일, 가령 내가 이런 소설을 읽었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는 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고,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 이런 반응이 가능한 소설이 나한테는 좋은 소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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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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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지나가도 만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탁동철 이름 석자도 그렇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보리출판사에서 어른용으로 내는 잡지 <개똥이네 집>에서다. 딱 한번 이름을 보았고 그 때 그는 그림책 <야쿠바와 사자>를 읽고 아이들과 무슨 연극을 하였다고 했다.

그즈음 나도 그 책을 읽고 이 좋은 그림책을 아이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의 글은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인상에 남았다. 글로 남은 사람을 <달려라 탁샘>의 저자로 확신한 것은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랬다.

 

교사가 쓴 교단 일기는 학생과 교사에게 우선 소용된다. 그 학교의 학부모까지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 들어간다면 독자의 자리는 조금 더 밀려난다. 그러나 교단 일기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독자에게 이 책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시골 분교 학교 아이들과 생활하는 탁쌤은 자주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이들과 선생이 투덕투덕 싸우는 것은 다반사고 더러 선생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학생과 맞짱을 뜨기도 한다. 학교 운동장에 쓰레기를 버리는 얌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일이 편지를 쓴다. 아이들을 몽땅 앞세워 경찰서에 가서 시위도 한다. 막대과자 주는 날에는 애들하고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데, 이 과정도 볼만하다. 우선 읍내에 맛있다고 소문난 집 세 군데를 정해서 그 집 떡볶이를 맛본다. 물론 차비는 탁쌤이 낸다. 그대로 따라 하거나 입맛대로 손맛을 내도 된다. 이렇게 모둠이 만든 떡볶이는 급식소에 가서 전문가(?)에게 심사를 받는다. 빼빼로데이가 어쩌구저쩌구 잔소리는 단 한마디도 없다. 그냥 그날은 지들 멋대로 맛대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은 날이다.

 

우리 동네 알아보는 사회시간에는 누구는 어른들의 별명을 조사하고, 누구는 처마에 무엇이 있나 조사하고 누구는 김장을 몇 포기 했고 거기에 무슨 재료가 들어갔나 조사한다. 옛날에 쓰던 농기구에 대해 알아볼 일이 있으면 아이들을 앞세워 동네 아저씨를 찾아간다. 아저씨는 말도 천천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아이들의 일일 선생님이 되어준다.

 

밤낚시도 가고 밤 떨어지면 밤주우러 가고 눈 내리면 비료푸대 들려서 눈썰매 타러간다. 온도에 따라 물고기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보려고 얼음과 실험도구를 챙겨 냇가로 간다. 직접 잡아 실험하고 냇가에 다시 풀어준다.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는다. 일이 생기면 바로 토론에 들어가고 반장은 일주일씩 돌아가며 한다. 사정에 따라 상황극을 펼쳐 한 가지 일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게 돕는다. 방학숙제도 시 몇 편 쓰겠다하면 그게 그 아이의 방학숙제다. 단 30편을 쓰겠다하고 세 편만 써오면 30편을 다 쓸 때까지, 쓰지 못하고 졸업해도 반드시 채워야한다. 맨 이런 식이다. 짧은 사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웃기고 신나고 재미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교과서고 그와 아이들이 사는 동네가 교실이다.

 

부럽다고 하고 말 일이 아니고 시골이니 그렇게 즉석 현장 체험이 가능하지 하고 말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교사로서 학생을 대하는 태도이며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태도다.

 

학생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직접 보았어도 그 아이가 끝내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는 그 아이가 충분히 고통 받았음을 이해한다. 말을 안 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말을 하라고 하지 않고 싸우는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아이의 이유, 아이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제 할 말을 못하고 기계적으로 사는 것을 싫어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거짓으로 꾸며 사는 것을 못견뎌 한다. 헐렁해보이지만 그 속에 단단한 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교사 생활을 한 양양은 그의 고향이다. 마을 어른들은 학교 선배이거나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는 그 선배의 아이들이다. 그 상황이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가 마을을 교실로 삼고 마을어른들을 다 선생님으로 생각하는데 그가 선생입네 고개들고 다닐 위인이 아님은 당연하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자신의 말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하라는 그의 다그침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어린 학생이었을 때, 나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모범생 딱지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은 얼마나 최근 일인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래도 어찌어찌 지금껏 읽어온 책 속의 스승에게 들은 말이 아니던가.

 

아직 어린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마음을 다 알리라고는 그도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하리라 마음 놓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사람에게 존재 이유가 있다면 증명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할 줄은 안다. 나는 못하고 산다는 것도 알고 그걸 하며 사는 사람을 알아볼 줄도 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사는 사람이다. 가슴을 탕탕 치면서, 더러는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부당한 일을 보고서야 어찌 가만히 있어야하느냐는 그의 말을 따라 내가 한 짓거리를 고백한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어’ 하는 마음에 저지르는 어설픈 짓거리다.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자해서 동네 슈퍼에 갔다. 라면을 사들고 나오는데 부동산 앞에 늘 있던 차 한 대가 턱하니 눈에 들어오겠다. 보니 그곳은 인도요, 아이들이 학교가고 올 때 드나드는 길이다. 가뜩이나 좁은데 덩치 큰 차가 길을 반 넘어 먹고 있다. 이것들이.

경비 아저씨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말 해도 듣지 않고 상가 건물이라 할 말도 없다나. 그렇겠지. 차 주인에게 차를 여기다 두는 게 옳으냐 물으니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물으니 아파트 주차장을 못쓰게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나 참, 이사람들이.

관리소장에게 말하겠다 하고 돌아오는데 아차, 우리 집 아파트 그 부동산에 내 놨는데, 그럼 그 차 주인이 부동산 사장의 남편인가. 뭐야, 이거 집도 안나가는데 입방정을 떤거야? 처음부터 관리소장에게 말하거나 조용히 관리관청에 신고전화를 할 걸. 그나 저나 내가 왜 이랬지? 이게 다 탁동철 그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가만 두지 않을꺼라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한 거야. 계속 가? 그래도 차 주인한테 항의라도 했으니 그도 괜찮다고 할까? 그래, 그 정도면 적어도 말이라도 했으니 됐소라고 인정해줄까?

나는 이러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훈련 받지 못하고 억압된 권리는 이렇게 맥을 못쓴다. 이만한 일에도 겁을 먹으니. 그리고 권리와 이득 앞에서 저울질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비겁하다. 움추러든 마음이 펴지질 않는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와 임길택이 겹쳐 보인다고 하는데 동의한다. 자연스러움과 체하지 않는 모습, 자신 또한 한 사람의 욕망 덩어리요,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낮은 마음, 아이들에게 ‘나 좀 가르쳐 다오, 오늘 내가 너에게 배웠다’ 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임길택과 탁동철이 통한다.

밑줄 그을 데가 많고 배꼽 잡을 때 또한 많은 책이다. 너무나 친근한 내 고향말도 눈에 띄어 더 반갑다.

마음에 새기고 싶어 여러번 되돌아 읽은 부분을 다시 잊지 않으려고 옮겨적는다.

 

“이제부터 2학기다. 또 시작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맞는 시작이다. 굳지 않은 말, 닿아 있는 말들로 잇고 쌓아서 세계를 새로 지어 나가고 싶다.(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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