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탁샘 - 탁동철 선생과 아이들의 산골 학교 이야기
탁동철 지음 / 양철북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스쳐지나가도 만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탁동철 이름 석자도 그렇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보리출판사에서 어른용으로 내는 잡지 <개똥이네 집>에서다. 딱 한번 이름을 보았고 그 때 그는 그림책 <야쿠바와 사자>를 읽고 아이들과 무슨 연극을 하였다고 했다.

그즈음 나도 그 책을 읽고 이 좋은 그림책을 아이들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터라 그의 글은 놀라움과 부러움으로 인상에 남았다. 글로 남은 사람을 <달려라 탁샘>의 저자로 확신한 것은 자세하게 말할 수 없다. 그냥 그랬다.

 

교사가 쓴 교단 일기는 학생과 교사에게 우선 소용된다. 그 학교의 학부모까지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 들어간다면 독자의 자리는 조금 더 밀려난다. 그러나 교단 일기에 대해 선입견을 가진 독자에게 이 책은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시골 분교 학교 아이들과 생활하는 탁쌤은 자주 자기 머리를 쥐어뜯는다. 아이들과 선생이 투덕투덕 싸우는 것은 다반사고 더러 선생은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학생과 맞짱을 뜨기도 한다. 학교 운동장에 쓰레기를 버리는 얌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일이 편지를 쓴다. 아이들을 몽땅 앞세워 경찰서에 가서 시위도 한다. 막대과자 주는 날에는 애들하고 떡볶이를 만들어 먹는데, 이 과정도 볼만하다. 우선 읍내에 맛있다고 소문난 집 세 군데를 정해서 그 집 떡볶이를 맛본다. 물론 차비는 탁쌤이 낸다. 그대로 따라 하거나 입맛대로 손맛을 내도 된다. 이렇게 모둠이 만든 떡볶이는 급식소에 가서 전문가(?)에게 심사를 받는다. 빼빼로데이가 어쩌구저쩌구 잔소리는 단 한마디도 없다. 그냥 그날은 지들 멋대로 맛대로 떡볶이를 만들어 먹은 날이다.

 

우리 동네 알아보는 사회시간에는 누구는 어른들의 별명을 조사하고, 누구는 처마에 무엇이 있나 조사하고 누구는 김장을 몇 포기 했고 거기에 무슨 재료가 들어갔나 조사한다. 옛날에 쓰던 농기구에 대해 알아볼 일이 있으면 아이들을 앞세워 동네 아저씨를 찾아간다. 아저씨는 말도 천천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아이들의 일일 선생님이 되어준다.

 

밤낚시도 가고 밤 떨어지면 밤주우러 가고 눈 내리면 비료푸대 들려서 눈썰매 타러간다. 온도에 따라 물고기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보려고 얼음과 실험도구를 챙겨 냇가로 간다. 직접 잡아 실험하고 냇가에 다시 풀어준다.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는다. 일이 생기면 바로 토론에 들어가고 반장은 일주일씩 돌아가며 한다. 사정에 따라 상황극을 펼쳐 한 가지 일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게 돕는다. 방학숙제도 시 몇 편 쓰겠다하면 그게 그 아이의 방학숙제다. 단 30편을 쓰겠다하고 세 편만 써오면 30편을 다 쓸 때까지, 쓰지 못하고 졸업해도 반드시 채워야한다. 맨 이런 식이다. 짧은 사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웃기고 신나고 재미있다. 사계절의 변화가 교과서고 그와 아이들이 사는 동네가 교실이다.

 

부럽다고 하고 말 일이 아니고 시골이니 그렇게 즉석 현장 체험이 가능하지 하고 말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교사로서 학생을 대하는 태도이며 부모로서 자식을 대하는 태도다.

 

학생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을 직접 보았어도 그 아이가 끝내 말을 하지 않을 때 그는 그 아이가 충분히 고통 받았음을 이해한다. 말을 안 하는 아이에게 억지로 말을 하라고 하지 않고 싸우는 아이에게 싸우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아이의 이유, 아이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오히려 제 할 말을 못하고 기계적으로 사는 것을 싫어한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거짓으로 꾸며 사는 것을 못견뎌 한다. 헐렁해보이지만 그 속에 단단한 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가 교사 생활을 한 양양은 그의 고향이다. 마을 어른들은 학교 선배이거나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는 그 선배의 아이들이다. 그 상황이 어색하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가 마을을 교실로 삼고 마을어른들을 다 선생님으로 생각하는데 그가 선생입네 고개들고 다닐 위인이 아님은 당연하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자신의 말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의 마음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하라는 그의 다그침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내가 어린 학생이었을 때, 나에게 그런 가르침을 준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모범생 딱지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은 얼마나 최근 일인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말은 그래도 어찌어찌 지금껏 읽어온 책 속의 스승에게 들은 말이 아니던가.

 

아직 어린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마음을 다 알리라고는 그도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좋은 선생이 되고 싶지만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하리라 마음 놓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사람에게 존재 이유가 있다면 증명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할 줄은 안다. 나는 못하고 산다는 것도 알고 그걸 하며 사는 사람을 알아볼 줄도 안다. 그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사는 사람이다. 가슴을 탕탕 치면서, 더러는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부당한 일을 보고서야 어찌 가만히 있어야하느냐는 그의 말을 따라 내가 한 짓거리를 고백한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어’ 하는 마음에 저지르는 어설픈 짓거리다.

지난 일요일,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이자해서 동네 슈퍼에 갔다. 라면을 사들고 나오는데 부동산 앞에 늘 있던 차 한 대가 턱하니 눈에 들어오겠다. 보니 그곳은 인도요, 아이들이 학교가고 올 때 드나드는 길이다. 가뜩이나 좁은데 덩치 큰 차가 길을 반 넘어 먹고 있다. 이것들이.

경비 아저씨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말 해도 듣지 않고 상가 건물이라 할 말도 없다나. 그렇겠지. 차 주인에게 차를 여기다 두는 게 옳으냐 물으니 아니라고 하고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물으니 아파트 주차장을 못쓰게 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나 참, 이사람들이.

관리소장에게 말하겠다 하고 돌아오는데 아차, 우리 집 아파트 그 부동산에 내 놨는데, 그럼 그 차 주인이 부동산 사장의 남편인가. 뭐야, 이거 집도 안나가는데 입방정을 떤거야? 처음부터 관리소장에게 말하거나 조용히 관리관청에 신고전화를 할 걸. 그나 저나 내가 왜 이랬지? 이게 다 탁동철 그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가만 두지 않을꺼라고 생각하고 내가 대신 한 거야. 계속 가? 그래도 차 주인한테 항의라도 했으니 그도 괜찮다고 할까? 그래, 그 정도면 적어도 말이라도 했으니 됐소라고 인정해줄까?

나는 이러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훈련 받지 못하고 억압된 권리는 이렇게 맥을 못쓴다. 이만한 일에도 겁을 먹으니. 그리고 권리와 이득 앞에서 저울질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비겁하다. 움추러든 마음이 펴지질 않는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와 임길택이 겹쳐 보인다고 하는데 동의한다. 자연스러움과 체하지 않는 모습, 자신 또한 한 사람의 욕망 덩어리요, 배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낮은 마음, 아이들에게 ‘나 좀 가르쳐 다오, 오늘 내가 너에게 배웠다’ 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임길택과 탁동철이 통한다.

밑줄 그을 데가 많고 배꼽 잡을 때 또한 많은 책이다. 너무나 친근한 내 고향말도 눈에 띄어 더 반갑다.

마음에 새기고 싶어 여러번 되돌아 읽은 부분을 다시 잊지 않으려고 옮겨적는다.

 

“이제부터 2학기다. 또 시작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맞는 시작이다. 굳지 않은 말, 닿아 있는 말들로 잇고 쌓아서 세계를 새로 지어 나가고 싶다.(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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