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낙천이 아저씨, 순옥이 언니, 매표소 여자, 도우미 아줌마, 그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함이라면 이들은 그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독자는 이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위로 받는다.

<세상 끝의 신발>에 등장하는 낙천이 아저씨는 소년병 동료를 위해 자신의 신발을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동료의 딸에게는 겨울 눈밭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새끼줄을 감아준다. 따뜻하고 인정 많은 심성을 가졌다. 낙천이 아저씨 덕에 목숨을 구한 아버지는 그와 친구가 되어 의지가 되고 그의 딸 순옥이 언니는 주인공 화자에게는 친정 언니 역할을 한다.

삶이 공평한가 의문을 갖게 하듯이 마음 착하고 예쁜 순옥이 언니는 결혼해서 힘들게 사는 데 착한 그녀는 결국 버림받고 힘든 생활 끝에 퇴행성 치매를 앓게 된다.

착한 사람 낙천이 아저씨와 착한 언니 순옥이 겪는 불행은 그들이 착한 사람이라서 더 비극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극은 혼자 만의 삶에 갇힌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계기가 된다. 발레리나의 인터뷰 기사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화자는 자신의 삶이 20년 후에도 똑같이 닫힌 방안에 있으면 안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세상 속으로 사람과 소통하면서 관계 맺으면서 살아야 함을 깨닫는다.

<어두워진 후에>에 등장하는 매표소 여자는 떠돌이 남자에게 이유도 묻지 않고 거리도 두지 않은 채 그를 위해 먹여주고 재워주고 돌아갈 차비를 준다. 반신 불구가 된 엄마를 챙기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혹은 그녀의 마음에 위로 받은 그 남자는 다시 자신의 생활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이유없이 살해된 가족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던 그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상처를 받은 남자다. 포기 직전의 삶에서 여자를 만나고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역시 이유없이 사람을 돕는 여자를 만나 위로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모르는 여인들>의 도우미 아줌마는 채의 부인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화도 내지 않고 채의 아내의 요구 보다 더 많은 것을 해 놓는다. 채의 아내는 그 도우미에게 마음을 열고, 도우미 아줌마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해 간다. 두 여자가 주고 받는 메모는 만날 수 없는 그녀들이 주고 받는 속깊은 대화다. 그녀들의 대화와 채의 아내가 병 때문에 사라지는 행위는 채의 이십년 전 애인이었던 나의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떨어뜨린다. 사랑이 무언지 모르고 살아가던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모르는 여인이었던 그녀들이 말이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혹은 원래 있었으나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낙천이 아저씨나 순옥 언니, 매표소 여자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사이에 있어야 하는 인정이다. 나와 너인 것을 그들은 구분하지 않는다. 나와 남의 구분이 없는 것,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이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인정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신발 혹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숨막히다가 결국 기형이 되는 맨발을 돌보는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신발 속의 맨발을 돌보지 않아서 발레리나의 맨발은 기형이 되었듯이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착한 부인은 외계인 손 증후군에 걸렸다.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가 안타까운 것은 그녀처럼 자신을 위한 일을 하지 못한 채 상처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상대에게 얼마나 잔인한 일이 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화분이 있는 마당>의 주인공을 보면서 언어 장애와 섭식 장애 즉 말하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르는 여인들>의 채는 이십 년 전 애인이 도망친 이유를 이십 년간 모른 채 살면서 지금 다시 아내가 도망친 이유를 몰라 이십 년 애인을 찾아와 묻는 일이 생긴다. 긴 세월 동안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한 사람의 현재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안타깝게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다.

만남에도 예의가 있는 것 처럼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다. 갑작스러움은 그 순간 단절이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죽음이 되었든 말없는 사라짐이 되었든 우리가 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과제를 남기는 것이 갑작스러운 단절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의 창, <숨어 있는 눈>의 A, <성문 앞 보리수>의 수미(그녀는 억척스럽게 살았고 소원이던 내 집을 장만하던 날,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남은 남편은 어떻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해소할까), 갑작스럽게 떠난 경은 갑작스럽게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병으로 죽었거나 사고로 죽은 것도 아닌 자기의 의지로 단절을 선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A의 남편, 경과 수미를 보는 S, 수미의 남편은 오랜 시간을 물음표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화분..>의 주인공은 말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는 지경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아내는 생각지도 않은 이혼을 요구한다.

무엇이 이렇듯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하게 했을까. 소통이 되지 않아서 일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했을까?

더러는 단절의 원인을 알았으나 회복하기에 늦은 경우도 있다.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남편은 죽음 직전에야 아내의 외로움을 알아챈다. 아내가 외계인손증후군에 걸릴 만큼 자신과 단절된 슬픔으로 고통 받았음을 늦게야 깨닫는다. 착한 아내였다. 어쩌면 소통이 단절된 사람들에게 작가는 그를 통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들도 이렇게 죽음 직전에 가서야 알 것인가. 아니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어서 그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특히 이 작품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자각하는 순간을 그가 겪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누워있는 그가 구조되면 그가 그 관계를 회복할 것 같은데, 어둠은 찾아오고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그 남자 처럼 지금 풀숲에 누워 있는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늦기 전에 깨닫는 것이다. 소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거나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선택할 시간 조차 갖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폭력이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느닷없는 이별 통보나 일방적인 연락 단절을 선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홀로 남겨짐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역할이 있다면 상대도 해야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사랑이겠지만 피하는 것 보다는 그 죽음 조차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물론 이 지점 또한 선택의 문제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든가, 함께 죽음을 지켜보든가.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은 우연한 친절만으로도 해결된다. 사람이 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받는 것이 우리 삶이다.

죽은 사람한테 조차 위로 받는 것이 우리들이다.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 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주인공이 죽은 여인을 통해 위로 받고 치유를 받는 장면은 관계에서 사람이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소품 혹은 매개가 신경숙의 작품에서는 원초적인 것, 즉 먹는 것과 말하는 것으로 자주 나타난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에 대단한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돈, 혹은 멋진 외모, 아니면 든든한 사회적 배경이 아니라 정성들여 차린 밥상과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상대가 있다면 먹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외로울 수 있다.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말을 들어 주지 않을 때 우리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가 잘 보여준다. 어쩌면 말을 들어주는 일이 중요한 만큼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가 ..>에서는 아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다루지만 <모르는 여인들>에서 채는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보이지만 그를 둘러싼 여인들은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들어주는 것과 하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소통이 되는 것이다. 소통이 이루어 져야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남편에게만 자신의 맨발을 보여준다는 발레리나는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화자가 순옥과 자신이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수 없다는 것과 발레리나가 몇 십년 후에도 똑같을 거라는 말의 대비를 오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잠깐 보이고 마는 무대에서 본인이 아닌 그 때 그 때 주어진 역할로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그 모습 그대로(구부러진 맨발을 보이며)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 주인공 화자는 후자를 선택할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읽는 재미는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들추어보는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소설의 어느 지점에서 내 감정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지 들여다 보는 일이 썩 재미 있다.

그리고 그 반응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받아들이는 일, 가령 내가 이런 소설을 읽었는데, 이런 장면이 나오는 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고,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 이런 반응이 가능한 소설이 나한테는 좋은 소설로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