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목요일은 조금 일찍 마쳐서 오카리나 수업을 듣는다. 강사님은 남자 간호사. 수강생은 종합병원 여자 간호사 한 분과 울 조카 두 녀석. 단촐하다. 사람이 원래 몇 명 더 있었지만, 애초에 이 모임을 주도한 사람도 있었지만, 정작 첫 수업부터 그 사람은 나오지 않고 곁다리였던 나머지들만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학교 다니랴, 학원 다니랴 나보다 퇴근이 늦은 바쁜 조카들이지만 짬을 내고 있고, 나 역시 퇴근 시간을 조금 앞당겨서 시간을 빼고 있고, 여자 간호사 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지금 아니면 배울 시간이 언제 또 날지도 모를 일이고 중요한 건 가르치는 싸부가 엄청엄청엄청 바쁜 사람이어서 시간 내기가 천금 만큼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입으로 부는 악기란 악기는 죄다 잘하며, 손으로 치는 악기도 못 치는 게 없다. 피아노에서 손을 떼면서 음악과 담을 쌓기로 했던 나였는데 나의 그 결심을 흔들리게 만든 사람이 바로 싸부다. 싸부와 우리의 첫만남이 없었으면 난 어쩜 아직도 악기를 다시 만질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은 내가 약국 오픈하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3년도 전의 시간에, 남자조카와 나는 강변길을 운동 삼아 산책 삼아 거닐고 있었다. 왕복 2시간 정도의 거리에는 볼 거리가 무척 많다. 한 켠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조금 지나면 미니 폭포가 나와서 물소리가 졸졸졸 흐르며 또 조금 지나면 개울가가 나와서 좔좔좔 소리가 들리고 조금 더 지나면 반대쪽에 산이 보이면서 각종 새소리, 코를 간질이는 산풀 냄새, 물을 가득 담아 놓은 논에서 엄청난 소리로 짖어대는 개구리 합창, 그리고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쉴 틈도 없이 재잘거리는 조카의 말에 대응하느라 입운동이 제일 많이 되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조카가 갑자기 입을 닫았다. 문득 귀를 귀울여보니 구슬피 울어대는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오카리나 소리다. 그것도 아주 엄청엄청나게 잘 부르는 소리다.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들었던 음반을 냈다는 어떤 아이의 오카리나 선율 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리다. 이 시골에서 이런 선율을 들을 수 있다니?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계속 숨죽인 채로 걸었다. 저 만치 강다리 밑에 왠 남자가 보였고 한 켠에는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카리나 음악이 듣기 좋네요. 좀 들어도 될까요?" "아이구, 네~얼마든지요." 그는 강을 내려다보이는 자리에서 계속 아름다운 선율들을 만들어냈고, 가방을 뒤적이면서 음높이가 다른 오카리나도 구경시켜줬고 연주해줬다. 어디 살고 무엇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지만 우리는 음악 이야기를 했고, 같이 음악 감상을 했고, 흐르는 강물을 같이 바라보았다. 흐르는 물소리에 얽히는 오카리나 선율에 감동받아 눈물이라도 흘릴 즈음, 갑자기 어디서 다다다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어! 생쥐다. 어디선가 나타난 생쥐는 부리나케 달음박질을 치더니 갑자기 강물로 풍덩! 빠져들었고 퐁당, 물소리에 음악이 끊어졌고 바람도 잠시 쉬었다. 그는 문득 시계를 보더니 헤어져야겠다고 했고, 우리는 다음에 우연히 만나면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자, 는 말만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약국을 차렸고, 갖가지 다양한 군상들이 약국을 방문했다. 그중에는 환자들의 처방전을 끊어서 대신 약국에 와서 약을 타서 본인에게 가져다주는, 의료서비스를 하는 직군의 사람들도 있었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노인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작금에서 각광을 받는 직군 중 하나이다. 그중에 남자가 한 분 있었는데 올 때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전직 간호사 출신인 이 사람은 시설을 하나 차려서 노인들의 전반적인 케어를 관리하고 있었다. 오픈 후 아마 일 년 가까운 즈음에 읍내와 읍외에서는 각종 공연들로 넘실거렸다. 그때 남자요양사가 팜플렛을 하나 건네준다. "이거 보세요. 우리 팀이 이번에 공연하는데요. 시간 되시면 한 번 보러 오세요" "네. 그럴께요. 무슨 공연인가요?" " 오카리나 동호회에서 하는 오카리나 공연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가만 있어봐. 오카리나? 음...나도 오카리나 잘 부는 남자 한 분 아는데? 음..그러니까 그때 강변에서...앗! 앗! 혹시! 한 이 년 전 쯤에 강변에서 오카리나 부신 적 없으세요?" "네. 강변에 자주 오카리나 불러가지요" "그럼 언젠가 어떤 꼬맹이랑 여자 한 분이 연주하는데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대화했던 적이 있지 않나요?" "네...그런 적이 있었는데요...으악...그럼 그 사람이? "
둘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들인지라 그때 본 이후로 약국에서 일 때문에 한 달에 대여섯 번 이상 보고서도 서로가 서로를 몰라본 거다. 우리 둘은 그날 일을 떠올리며 종종 웃었고, 오카리나 공연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은 나에게 팜플렛을 내밀었다. 동아리 가입 이야기도 꽤 여러 번 했지만 그때는 내가 밤 11시까지 근무할 때라 연습은 커녕 한 번 나갈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 근무시간을 앞당기는 어떤 사건이 터졌고 밤 9시로 근무가 조정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가르쳐줄 싸부가 도통 시간이 나지 않는다. 또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싸부의 이런저런 일들이 정리되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면서 싸부가 시간이 조금 나기 시작했고 마침 수업을 하나 만들자고 적극 밀어붙이는 동호회 회원도 있었다. 그 사람의 노력 덕분에 수업이 만들어졌고 우린 그제서야 수업을 듣게 되었다. 첫 수업은 무척이나 강렬했고 재미있었다. 첫 수업은 8월 5일 이었다.
여기 알라딘에 일기처럼 기록을 올려놓으니 새삼 그때의 첫 수업이 떠오르고 그 수업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주욱 떠오른다. 그날 이후로 여러 번의 수업이 있었고, 조카들과 난 저녁마다 복식호흡을 했으며, 입으로 부는 연습을 했고, 윗몸 일으키기를 했다. 한 2주를 그렇게 했을까. 이사준비로 정신없고, 조카들은 개학준비로 바빴고, 나는 약국 감사니 결제니 등으로 바쁘면서 조금씩 오카리나에 소홀해졌다. 그 와중에 몸까지 비리비리 아팠다. 가기 싫어지는 마음이 어느새 내 속을 파고 들었고 나는 몇 번 빠졌다. 아파서 빠진 건 맞지만, 그 빠짐이 얼마나 꿀맛 같은지. 그리고 빠진 이후로 다음 수업까지 오카리나를 한 번 잡지도 않았고, 복식호흡도 안 했다. 마음 한 켠엔 매일 오카리나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조금씩 무뎌져갔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핑계삼아 하나의 꿈이 사그라져 갔다.
그러다 엊그제, 간만에 오카리나 수업을 갔다. 이대로 계속 빠지느니보다 연습도 못했고 아직까지 엉망진창이지만, 이런 나를 인정하고 다시 기회를 줘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이른 시간의 퇴근이어서그런지 손님이 줄을 이어 들어와 문 닫을 타이밍을 놓쳤고, 몸도 피곤한데..가지 말어? 라는 못된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밖이 어마하게 추워. 너, 자전거 타고 거기까지 가야 돼. 그리 힘들고 내일 출근해서 제대로 일하겠어? 오늘 하루만, 딱 한 번만 더 쉬자, 응? 내 속에서 나를 부추기는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손님이 안 오는 틈을 노려 간신히 문을 닫을 수 있었고, 자전거를 힘차게 달려 추위를 잊으며 수업장소에 도착했다. 한 15분 가량 늦었다. 어? 그런데, 싸부도 없다? 이런..나는 숨찬 폐를 진정시키며 한 켠에 엎드려 휴식을 취했고 십 분이 더 흘러 싸부가 도착했다. " 실은 미리 와 있었는데, 응급 환자가 발생해서요. 병원을 잠시 들러서 일처리 한다고 늦었어요"
다시 재개한 수업은 첫수업 만큼이나 재미있었다. 하나도 늘지 않았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잔뜩 주눅들어 있었는데, 막상 수업을 해보니 의외로 내 몸이 복식호흡을 기억하는 거였다. 조금씩 연습을 거듭하니 아주 자연스레 호흡이 되었고 그 호흡에 맞춰 오카리나에서 도- 레-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맨 처음 싸부를 만났을 때 들었던 그 청아한 소리 만큼은 아니었지만 내 귀에는 최고의 음색으로 들렸다. 게다가 수업 막판에 싸부의 칭찬도 있었다. 곧바로 기고만장해진 나는 복식호흡 끝에 흉식이 조금 들어간다는 조카에 대한 사부의 지적에 마음껏 웃어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때, 포기하지 말아야겠구나. 오늘 수업 들으러 오기 잘 했다. 매번 덜렁거리고 잘 잊어버리고 곧잘 귀찮아하고 잘 포기하는 나이지만, 오늘의 나는 꽤 괜찮은데? 내가 음악에 소질이 꽤 있나봐? 그간 연습을 빠졌어도 이 정도인데 앞으로 꾸준히 연습을 하면 얼마나 잘 하겠어? 으음..달사르..너 좀 짱인듯! ^^
이런 나, 이런 못난 나이지만,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 나를 다독거려가며 다시금 일을 하게 만드는 것도 나이네요. 내 평생 함께 할 동반자인 나. 오늘 옆동네에서 본 포스팅처럼, 나를 꾸짖지 않고, 나를 주눅들게 하지 않고, 나를 좀 추켜주면서 이뻐해줘야겠어요. 가을이라, 오늘 아침 좀 쓸쓸한 느낌이 들었는데 친구님 포스팅 읽고 좀 위안이 되었어요. 시시껄렁하고 길기만 한 이야기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려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