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를 하게 되면 이전과 조금 다른 글 읽기가 되는 듯하다. 이전에는 소설의 경우, 등장인물이 정말 실존인물로 느껴졌고 그들의 의아한 행동이 나올 경우 그 이유에 대해 골몰히 생각을 했으며, 작가가 미리 복선으로 깔아주는 내용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알아내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을 필사하면서 그 느낌이 조금 달라졌다. 착각증후군이랄까? 나는 스스로 작가라도 된 듯, 작가가 이런 구상을 위해서 이 부분을 넣었겠군, 이라는 생각을 무심코 한 것이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따박따박 옮겨 적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작가는 아이들 손에 왜 노트를 쥐어줬을까? 그 이유는 분명 있다. 아래의 장면이 소설의 큰 줄거리에서 꼭 필요한 장치로서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괜히 좋다. 작가의 비밀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랄까. 음..어쩌면 다른 읽는 이들은 단박에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도 아니니까. 그러나 이런 장치를 생각조차 않고 읽던 나에게는 이게 첫 발견이기에 왠지 뿌듯한 것 같다.

할머니 집에는 종이도 연필도 없다. 우리는 '서점-문구점'이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로 그것들을 사러 갔다. 모눈종이 한 묶음, 연필 두 자루, 커다랗고 두꺼운 노트 한 권을 골랐다. 우리는 뚱뚱한 아저씨가 서 있는 계산대 위에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 우리는 이것들이 필요한데, 돈이 없어요.
 주인은 말했다. - 뭐라고? 그래도........돈을 내야지.
 우리는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 우리는 돈이 없지만, 이것들이 꼭 필요한 걸요.
 주인은 말했다.
 - 학교는 문을 닫았어. 이제 노트와 연필은 아무한테도 필요치 않아.
 우리는 말했다.
 - 우린 집에서 서로 가르쳐요. 우리끼리 공부하거든요.

                                                                                                                                                   29페이지

 (상)에서 주인공들은 쌍둥이다. 그들은 한 몸처럼 움직이며 그들은 머리가 하나인 것처럼 생각한다. (상)에서는 심지어 아이들의 이름조차 없다. 그냥 '우리'라는 지칭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노트가 필요해서 서점에 갔다. 우리에게 노트가 필요한 이유와 우리에게 처한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적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노트가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 통에 부모님과 떨어져 시골 할머니 댁에 와 있다. 할머니는 엄마와 사이가 안 좋다. 우리는 학교는 가기 싫지만 공부는 하고 싶다. 책을 많이 읽고 싶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를 글로 옮겨 적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트가 필요하다. 우리는 엄마가 우리를 두고간 슬픔도 잊고 싶고,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마귀라고, 우리에게 마귀의 손자들이라고 욕하는 것에도 상처 받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그 시간들을 견디고 싶다. 우리는 신체훈련도 하며, 정신훈련도 한다. 신체훈련의 과정으로서는 서로를 때리기, 뺨을 때리면 반대 뺨을 내어주기, 기절할 때까지 때리기 등이 있다. 정신훈련의 과정으로서는 말로 서로에게 욕을 하며 욕먹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도 있지만 무엇보다 숨어있는 연약함마저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글로 서로의 정신무장을 테스트할 필요가 있다. 글은 치장으로서 상대를 속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어느 한 구석에는 본연의 솔직함을 드러내기 때문에 글로 테스트하는 방법이 여러모로 좋다. 게다가 우리는 아직 어리다. 우리는 공부를 봐줄 사람이 없다. 아니, 필요없다. 우리에겐 노트와 책만 있으면 가능하다. 우리는 성경까지 통독했으니 말이다. 우리는 문구점에 노트를 사러 갔다. 

'우리'에게 노트라는 '무기'가 생기면서 그들은 노트에 글을 쓰는 법에 대해 논의를 했고 감정을 배제한 채 글을 쓰는 법을 배운다. 그들이 무감정하게 써내려간 글들은 그래서 사진을 찍듯이 세세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써내려갔고 그 글들이 바로 (상)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상)은 그들이 쓰는 자전일기이자 동시에 정신훈련의 방법인 것이다. 결국 (상)의 저자가 그들인 셈이다. 무채색 같기만 한 이 소설은 그러나 읽는 중간중간에 독자의 마음 속 깊숙이 숨어있는 유채색의 감정을 찾아낸다. 쇠로 된 자석이 철가루를 찾아내듯이 아무리 꽁꼼 숨겨놨던 감정이라도 여지없이 끄집어낸다. 왜냐면, 그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솔직한 맨얼굴과 투명한 눈을 잠시는 속일 수 있지만, 오래는 속일 수 없다. 거울처럼 투명한 그들의 눈(일기)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거울처럼 자신의 숨겨진 방에서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무엇을 찾는 건 읽는 자의 몫이다. 나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상)(중)(하)를 읽었고, 다시 (상)을 읽기 위해서 이제는 '필사'를 한다. 그들이 노트에 한 자 한 자 써내려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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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9-2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사르님, 이 책 정말 좋지요? 좋은데 개운하게 좋다, 라고 말할 수가 없는 책이에요.
필사 사진은 에궁... 언제든지 올려주세요. 눈 부릅 뜨고 지켜볼게요 ㅇ_ㅇ!!

달사르 2011-09-26 19:59   좋아요 0 | URL
ㅎㅎ 방금 올렸어요. 올리고보니, 악필이 표가 많이 납니다. ^^;

넹. 이 책 정말 좋아요. 개운하지 않고 가슴을 먹먹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너무 오래 이 책에 빠져있으면 안 될 것 같긴 해요.

비로그인 2011-09-2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근데 저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될 것 같아요. 저도 필사를 해봐야할까요... 너무 술렁술렁 읽은 것 같아요 ㅠㅠ

달사르 2011-09-26 20:09   좋아요 0 | URL
ㅎㅎ 맞지요. 매번 읽을 때마다 조금씩 더 보이는 걸 보면 처음 읽을 땐 아무래도 술렁술렁 읽혀지나봐요. 근데, 필사가 의외로 어깨통증도 유발하는 거 같아요. 요새들어 목이랑 어깨랑 아픈 것이..ㅠ.ㅠ 말없는수다쟁이님은 필사를 하시게 되면, 어깨랑 목이랑 조심하시면서 하셔요~~

blanca 2011-09-26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필사라니 너무 근사한 걸요. 저는 <태백산맥> 필사하려고 원고지까지 출력해서 한 장면 하고 말았지요^^;; 달사르님의 필사 사진을 보고 싶은데 아쉽네요.

달사르 2011-09-26 20:13   좋아요 0 | URL
앗. 안녕하세요. 블랑카님. 블랑카님도 예전에 경험이 있으시군요. ^^ <태백산맥>이 블랑카님은 마음에 드는 책이었나봐요. 지금은 어떤 책이 마음에 드세요. 지금 마음에 드는 책이 생기시면 그때 생각 떠올리면서 한번 더 도전해보실래요? ^^
히힛. 필사 사진 올렸는데 넘 악필이네요..ㅠ.ㅠ

pjy 2011-09-26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쫌 된 조립컴인데 usb인식이 영~ 앞이나 뒤나 그렇다고 블르투스도 인식못하고~ usb 연결 한번 하려면 생쑈를 한다니깐요ㅠ.ㅠ

달사르 2011-09-26 20:15   좋아요 0 | URL
아..usb인식이 안되서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음..저게요. 계속 안되더니 조금 전에는 또 되더라구요? 날도 덥지 않은데 얘가 왜 열을 받았을까? 이러면서 갸웃거렸어요. 컴맹이 새로운 거 하나 도전하려니 이래 힘이 드네요. 그치만, 어쨌든, 성공하고야 말았습니다!!!! ㅎㅎㅎㅎ pjy님은 블르투스를 쓰시는군요. ㅎㅎㅎ 대단대단. ^^

비로그인 2011-09-27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참 잘했어요' 도장 꽝, 찍어주고 싶은데요? ^^
어깨, 목 주의보만 잘 피한다면 저도 한 번 필사를 해보겠어요~~

달사르 2011-09-27 22:33   좋아요 0 | URL
ㅎㅎ 넹. 도장, 감사해요~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만 한다면, '필사'라는 것도 새로운 형식의 글읽기가 될 듯 싶어요. 말없는 수다쟁이님도 한 번 도전해보세요. ^^ 수시로 어깨 마사지는 해주시고용~

페크pek0501 2011-09-28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사, 라고 하니 몇 자 안 적을 수 없네요. 달사르님 파이팅!!!!!!!!!!!!!!!!

저는 통째로 하는 필사는 예전에 해 보았고(장편 말고 단편소설로) 요즘은 그냥 책이나 신문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노트에 하나씩 번호 매겨 필사해 둔답니다. (지금 노트 보니 79번과 84번에 이런 글이 있네요.)^^^

79) 사람은 우주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은 그 어느 별보다도 먼 것이다.(체스터턴이 한 말)

84) 사람은 외로움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한창훈 저, <꽃의 나라>, 113쪽.)

달사르 2011-09-29 19:19   좋아요 0 | URL
우왓. 노트가 그만큼이나 많으세요? ^^
저는 일단 10권! 그러니까 두 자리 수까지 가는 걸 목표로다. 불끈!

와..79번 좋은 구절에 공감입니다! 체스터턴이라..정말 멋진 마인드를 가진 사람입니다.
84번은 약간의 공감과 조금 다른 생각이구요. 종교의 매력에는 죽음이 두려운 것,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페크pek0501 2011-09-29 23:19   좋아요 0 | URL
노노노, 무슨 말씀을... 설마 제가 노트를 84권이나 가졌겠어요.ㅋ 한 노트에 번호를 매겨 쓴 게 그렇다는 것이지요.

10권, 그 목표 달성하시기 바랍니다. 즐기면서 하다보면 어느 새 그 목표에 가 닿을 겁니다. 덕분에 저도 갑자기 열정이 솟구쳐 좋았습니다.

달사르 2011-10-02 12:23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잘못 읽었군요.

넵! 조금씩이지만 매일 꾸준히 하니까 더 재미가 있네요. 어쩜 시간이 많았으면 몇 일 하고 시시하다가 치웠을지도요. 없는 시간을 쪼개니 아쉬워서 매일, 조금이라도 더! 더! 하면서 쓰게 되는군요. '열정' 이란 이렇게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짠~하고 나타나기도 하나봐요. 저도 제 속의 이런 열정에 요즘, 놀라고 있는 중이랍니다. 히힛. 펙 님의 말씀에 더욱 더 불끈! 하고 있습니닷. ^^

마노아 2011-09-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보기 좋아요.
이 책도 오랜만에 보니 좋아요.
읽고 참 좋아서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나중에 아쉬워서 상권을 다시 구매했어요. 근데 아직 중,하권은 못 읽었답니다.
그렇지만 남아 있어서 기대되고 있어요.^^

달사르 2011-09-29 19:21   좋아요 0 | URL
히힛. 노트만 잔뜩 만들어놓고 있다는..헤헤.
아. 맞아요. 선물하면 다음에 아쉬움이 남는, 그런 류의 책이에요. 아프지만 왠지 품 안에 안고 지켜주고 싶은 그런 느낌. 저는 상권 읽고 2년인가 있다가 중, 하권 읽었어요. 텀이 조금 길면 중, 하권이 더 감동으로 와 닿을지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