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엔 인근 대학에 있는 평생교육원을 찾아간다. 퇴근 시간을 무려 2시간이나 앞당겨가기 때문에 담날부터해서 몇 일간은 손님들의 잔소리를 들어야한다. '매일 늦게까지 문 열어주던 양반이 왠 일이래? 선 보러 갔어요?' 부터 해서, '기껏 왔는데 문 닫혀 있으면 얼마나 허전한지 알아요? 당신이 없는 다른 약국은 가기 싫어서 그냥 아파도 참고 집에 갔어요. 담부턴 일찍 문 닫지 말아요.' 까지.
그런 애정어린 잔소리를 다 들어주고 나서 "왔는데 껌껌하니 문이 닫혀 있으면 기분이 좀 그렇죠? 미안해서 어떡하죠. 죄송해요. 음..실은, 제가 뭘 배우고 싶은데, 시간이 하도 안 나서요. 다행히 인근 대학교에서 밤에 수업이 있길래 요즘 거기 다녀요. 앞으로 금요일은 항상 이렇게 조금 일찍 마칠 거에요. 조금만 봐주세요"
물론! 이런 식의 뉘앙스만 서로 왔다갔다 했을 뿐이지 실지 대화는 절때루!! 이렇진 않다. 위의 대화는 그저 멀건 곰국일 뿐이다. 그렇게 싱거운 건 촌사람들은 못 먹는다. 촌사람들 특유의 투박하고 퉁명스러운 말투가 양념으로 팍팍 뿌려져야 맛있는 곰국이 된다. "아이고 마. 약방을 그렇게 비우믄 우짜요. 찌랄염병이네 마. 고마이나 많이 배우고 공부는 또 무신 공부를 한다꼬. 내가 몇 번이나 여기 왔다갔는 줄 알아요? 내가 왔는데 말이야 문이 팍 닫쳤고 말이야, 아이고 마. 여가 단골이라 어데 따른 데 가도 못하고 마. 밤새 끙끙 앓았다 아니요. 내가 약방을 바꿀 수도 없고 말이지. 아이고 참말로. 남사스러버서" 뭐 대충 이런 정도? 물론 내 대답도 투박하긴 매한가지다.
문을 닫고 나오는 길에 나를 찾아온 손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이 없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약을 주고 나오려면 시간이 또 몇 분 허비되기 때문에, 안 그래도 늦은 마당인지라 무척 미안해하며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겨우 약국 문을 나서며 자전거를 집어탄다. 강바람이 시원하다. 어디 가는 길인지는 금새 잊어버리고 시원한 강바람에 신이 난다. 후후 휘파람을 불어가며 등 뒤에 짊어진 가방을 으쓱이며 신나게 페달을 밟다가 또 금새 얼굴이 찡그려진다. 다리가 아프다.ㅜ.ㅜ 저질 체력 표내는 것처럼 다리가 욱씬거린다. 에잇에잇. 할 수 없이 기어를 풀었다. 이제 좀 낫다. 신호들을 몇 개를 지나고나니 전문대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자전거를 내려야한다. 45도 각도의 비탈길을 헥헥거리며 오르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둘이서 꺅꺅거리며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다. 발도 페달에서 뗐고 브레이크도 잡지 않고 그저 젊음의 패기 하나로 내려온다. 뒷자리의 여자는 거의 실신의 목소리를 내지른다. 걱정이 되어 잠시 멈추고 바라봤더니 다행히 무탈하게 끝까지 내려갔다. 지금은 이렇게 힘들게 오르막길을 오르지만 나도 나중에 집에 갈 때는 저래야지, 불끈!
조금 많이 늦었다. 강의실 뒷문으로 살짜기 들어가니 책들을 펴놓고 수업 중이다. 구석진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지난 학기 신청 때 받았던 책을 미처 못 들고 왔다. 지난 번 수업 때는 강의가 지루하더니 임상경험이 좀 생겨서 그런지 이번 수업은 꽤 재미있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나보다 늦은 지각생이다. '34평'이다. 지난 번에 같이 수업을 들었던 소 키우는 34살 남자다. 반갑게 눈인사를 했고 그 역시 내 뒤 구석에 앉았다. 수업이 끝났고, 스트레칭 시간이다. 다들 베드 위에 올라갔고 교수님의 동작을 따라서 몸 구석구석을 풀었다. 자고로 타인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려면 자신의 근육이 먼저 풀려져 있어야 된다, 는 교수님의 지론에 따라 매번 임상 수업 전에는 꼭 스트레칭을 한다. 몸이 개운하게 풀린다.
이제 임상을 할 시간이다. 쉬는 타임에 몇 사람이 더 들어온다. 역시나 지난 번 수강생들이다. 소갈비집을 하는 '털보 아저씨' 얼굴도 보인다. 성실한 예비 물리치료사 학생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어디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서 보니 수다쟁이 운동광 '회장' 얼굴도 보인다. 한 학기 같이 수업한 위력이 대단하다. 그렇게 반갑게들 보이니 말이다. 고개를 주욱 돌려보니 지난 번과 달리 젊은 얼굴들이 제법 보인다. 이제 갓 20살 새내기들도 여럿이다. 지네 선배들 따라 수강을 한 눈치다. 30대 부부의 얼굴도 보이고, 50대 아주머니도 여럿 보인다. 다들 열의에 상기된 표정들이다.
학생 중 한 명이 임상대상으로 매트리스 위에 누웠고 교수님이 지난 번 수업 내용을 복습해주신다. 서울 다녀오랴, 이사하랴, 각종 핑계로 벌써 3번이나 빠져먹은 나는 1학기 수업 내용의 복습임에도 벌써 가물거려서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얼굴과 머리 스트레칭을 지나쳐 가슴을 누르는 시범까지 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복습을 시작했다. 둘씩 짝을 지어서 해야하는 임상이니 만큼 짝이 있어야는데 하필이면 같이 수업 듣기로 한 언니 둘 다 보이질 않는다. '34평'과 같이 하려고 머뭇거리는데 이미 다른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뒤를 돌아보니 '털보아저씨'가 보여서 급히, "같이 하실래요" 말을 건네는데 왠 아저씨가 동시에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셋이서 멋쩍어서 서로 웃다가 번갈아가며 임상을 하기로 하고 왠 아저씨가 먼저 누웠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아저씨가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하시는게 아닌가. 털보아저씨 말로는 군인출신이라서 기억력이 비상하다고 하신다. '군인아저씨' 덕분에 복습을 완벽한 수준으로 끝마쳤다.
교수님이 사람들을 다시 앞 쪽으로 불렀고 오늘의 수업인 팔 스트레칭으로 들어갔다. 군인아저씨가 선뜻 매트리스에 누우신다. 아.. 아까도 저 분이었구나. 몸으로 저렇게 익히시면서 기억을 죄다 하시는구나. 군인아저씨가 시원한지 연신 어이구야, 소리를 내셨다. 교수님이 아파서 내는 소리냐 시원해서 내는 소리냐, 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신다. 두 번의 반복 임상을 눈여겨 본 뒤 다들 자리로 돌아가 다시 임상을 시작했다. 아까처럼 세 명이 팀이 된 우리는 먼저처럼 군인아저씨를 눕혔다. 군인아저씨는 한 번 봐서는 잘 모르시겠다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신다. 털보아저씨랑 나랑 번갈아가면서 서로의 팔을 스트레칭 해줬으나 군인아저씨는 여전히 모르겠다신다. 아..이전 번까지 군인아저씨가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본인이 외우려고 부단히 노력하신 결과로구나. 군인아저씨는 모른다고 그냥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여기저기 다니시며 모르는 부분을 눈여겨보고 오시더니 당신 몸에 한 번 더 해달라고 부탁하신다. 털보아저씨가 나에게 할 때와는 달리 아주 힘을 팍팍 주면서, 설명을 섞어가면서 해주신다. 살짝 헷갈리는 부분은 셋이서 서로의 기억력을 떠올리며 상의를 했더니 과연, 이번에도 역시나 만족할 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가 갔다. 이렇게나 열심히 수업을 듣다니. 와우~ 군인아저씨와 털보아저씨 덕에 나는 졸지에 열공모드에 들었고 무척 뿌듯했다.
수업을 마치고 서로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었다. 자전거를 탔는데 저 만치 멀리서 내리막길이 보인다. 입가에 미소가 잡힌다. 야호~
이번 수업까지 듣고나면 1급 자격증이 주어진다. 이번 수업에는 <근육학 총설> 책을 수시로 뒤적이며 교수님께 질문을 많이 해야겠다. 실지 수업시간에 이 책으로 하지는 않지만, 좀더 심도깊이 들어갈 때 꼭 필요한 책이다. 알라딘에 검색해보니 품절이고 증설본이 나와 있다. 인기 짱인 책인가부다. 금액도 후덜덜인데, 이번엔 좀 제대로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