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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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이제 안 돌아와." TV피플이 같은 말투로 말했다.

"어째서?" 내가 물었다.

"어째서라니, 이미 틀렸으니까지." TV피플이 말했다. 호텔에서 쓰는 플라스틱 카드 키 같은 목소리였다. 평면적이고 억양 없는 목소리가, 가느다란 슬릿에서 칼날처럼 슥 들어온다. "이미 틀렸으니까 안 돌아와."

이미 틀렸으니까 안 돌아와, 라고 나는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매우 평평하고 리얼리티가 없다. 문맥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원인이 결과의 꼬리를 물고 삼키려 했다.           - 'TV피플' 중에서, P.46~47


<TV피플>은 어느 일요일 해 질 녘, 갑자기 집에 나타난 기묘한 존재들로 인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의 체구보다는 20, 30퍼센트 정도 작은 몸을 가진 그들은 노크도 하지 않고,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그저 슬며시 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들고 왔는데, 그것을 연결해서 화면을 테스트하는 동안 내내 집에 있던 남자의 존재를 무시했다. 그들은 셋 다, 그곳에 남자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TV피플의 존재는 아내도, 회사 사람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TV피플들은 출근하는 도중에, 회사의 회의 시간에 계속 나타나기 시작한다. 급기야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나타났다가, 텔레비전 밖으로 나와서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TV피플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그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잠>에는 17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치과의사인 남편과 초등학생인 아들은 그녀가 한잠도 못 잔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술을 마시고, 과일을 먹고, 책을 읽는다. 긴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어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 든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날이 밝으면 다시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연속되는 각성이 2주째에 접어들자 불안해졌지만, 이상하게도 피부가 전에 비해 훨씬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있었으며, 몸에서도 터질 듯한 생명력이 넘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점차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 던 것이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니나>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으며 새삼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억하지 못했다. 등장인물도, 장면도, 대부분 기억에 없었다. 완전히 다른 책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신기하네, 나는 생각했다. 읽었을 때는 제법 감동했을 텐데 결국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 있었을 감정의 떨림이며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전부 술술 떨어져 말끔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시절, 내가 책을 읽으면서 소비했던 막대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 '잠' 중에서, p.175~176


이 책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베스트 단편으로 손꼽은 <TV피플>과 <잠>을 포함해 총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몸집이 작고 파란색 옷을 입은 세 명의 TV피플이 나타나 텔레비전을 두고 말없이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TV피플>, 아이가 있는 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와 만나고 있는 스무 살 남자의 이상한 오후를 담은 <비행기>, 소설가인 '나'가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해 듣는 그 시절의 이야기인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두 자매가 한 남자를 죽이게 되는 과정을 그린 <가노 크레타>,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의 꿈에 얽힌 이야기 <좀비>, 그리고 십칠 일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한 여성의 일상을 담고 있는 <잠>이다. 


살다 보면 뭔가 잘못됐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릿속이 지독히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은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6편의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9년~1990년에 발표한 단편들이다. '질감이 제법 서늘하지만 어딘가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는 온기의 예감이 담겨 있는 소설집'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은 혼란과 상실을 헤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비록 그 방향이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멀어지더라도, 등 뒤에서 문이 영원히 닫혀버린 기분이 들더라도 말이다. 일상 속 풍경이 일그러지고 앞뒤가 뒤바뀌면서 현실과 환상의 균형이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을 느껴보자. '마치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뒤돌아 앉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색다른 독서 체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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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배자 - 사피엔스를 지구의 정복자로 만든 예지의 과학
토머스 서든도프 외 지음, 조은영 옮김 / 디플롯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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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은 사실상 일종의 타임머신이다. 이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 번 더 경험하고,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없어도 미래를 상상한다. 사람들은 여름휴가를 꿈꿀 때마다, 다가올 저녁 데이트 생각에 설렐 때마다, 시험 결과를 곱씹을 때마다 끊임없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한다. 인간은 정신의 시간여행자이기에 외치가 그랬듯 미래를 자신이 계획한 대로 설계하며 기회와 위험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예지력은 어쩌면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일지도 모르겠다.             p.14


동물들도 사람처럼 서로 만나면 인사를 한다. 포옹을 하거나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헤어질 때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경우는 없다. 인간은 '각자의 길이 내일 다시 교차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격차는 바로 예지력, 즉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정신은 사실상 일종의 타임머신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을 한 번 더 경험하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멘탈 타임머신' 능력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로 사피엔스가 지구의 정복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책은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멘탈 타임머신' 능력이 인간 진화의 핵심적인 원동력이었다는 개념을 제안한다. '시간여행'이라는 개념을 물리학적으로 풀어내는 책은 꽤 읽어 왔지만, 진화생물학과 인지심리학, 뇌과학을 토대로 인간의 정신적 시간여행이라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은 처음이라 굉장히 놀라웠고,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왜 그 동안은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감탄하면서 읽었다. 인간의 멘탈 타임머신은 사실상 언제든, 어디서든, 무엇이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주는 복잡하고 강력한 장치이다. 우리는 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할 수도 있고, 창의력을 발휘해 기억을 재구성하기도 하며, 미래를 설계하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현재를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지난 1만 년 동안 우리 행성은 홀로세라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인간의 활동이 이런 평형상태를 뒤흔들어 마침내 인류세를 불러왔다. 우리는 기후변화, 대기의 에어로졸 축적, 해양 산성화, 대량 멸종까지 돌이킬 수 없는 티핑포인트 앞에 있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예컨대 동물과 식물, 비와 계절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좀 더 지속 가능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급속히 변화할 것이다. 광범위한 탄소 방출, 산림 파괴, 플라스틱 오염처럼 해롭다고 알려진 활동을 대폭 줄이지 않았을 때 세계가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라.           p.300


샌드위치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으로도 돌아가는 인간의 뇌는 사실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장치이다. 이 장치는 수십 억 개의 뉴런이 모여 어지러운 네트워크와 회로를 조직한다. 뇌와 정신의 관계는 오랫동안 모든 철학적 문제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것으로 손꼽혀왔다. 게다가 이제 뇌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시간상의 현재 위치와 상관없이, 작업을 처리하는 과정에 끊임없이 예측을 생성하는 것이다. 뇌는 그렇게 현재를 살기 위해 계속해서 다음을 예측해야 한다. 그리고 예측은 지각과 동작의 협응에 관여할 뿐 아니라 내일과 그 이후를 시뮬레이션하는 놀라운 뇌의 능력을 분명히 보여준다. 오직 인간만이 과거와 현재 너머의 내일을 설계하는 것이다. 


인지심리학과 진화생물학의 가장 뜨거운 주제인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이 그에 대한 아주 훌륭한 대답이 되어줄 것 같다.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기회와 위협을 준비하게 하는 예지력은 종종 실패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자본주의와 결합해 끊임없이 자연을 개발하고 파헤쳤으며, 그로 인해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감소, 삼림 파괴, 플라스틱 오염 등 자연의 평형상태를 뒤흔들게 되었다. 인간의 예지력이 도리어 인류세의 재앙을 앞당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것도 인간의 그러한 능력에 달려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우리가 예지력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내어, 더 잘 사용하게 된다면, 지금 지구에 닥친 위기와 역경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이고 말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인간이 지닌 가상의 타임머신이라는 개념은 과학이 얼마나 매혹적인 학문인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인간의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덜 탐구된 능력'에 관한 빛나는 통찰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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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내복야코 맞춤법 절대 안 틀리는 책 2 빨간내복야코 맞춤법 절대 안 틀리는 책 2
빨간내복야코 원작, 박종은 글, 이영아 그림, 샌드박스 네트워크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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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캐릭터와 중독성 높은 노래로 108만 구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빨간내복야코의 어린이 맞춤법 교양 툰 <빨간내복야코 맞춤법 절대 안 틀리는 책> 두 번째 책이 나왔다. 1권에서 ‘붙이다 vs 부치다’, ‘역할 vs 역활’, ‘있다가 vs 이따가’처럼 어린이들이 직접 뽑은 헷갈리는 맞춤법 60가지를 담았었다면, 2권에서는 사자성어와 관용구 속 맞춤법은 물론,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 맞춤법까지 살펴본다. 누적 조회수 500만 뷰를 자랑하는 야코의 노래와 QR 코드, 그리고 맞춤법 활동지까지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성대모사 vs 성대묘사, 풍비박산 vs 풍비박살, 호박이 넝쿨째 vs 호박이 덩쿨째, 무릅쓰다 vs 무릎쓰다, 안절부절못하다 vs 안절부절하다 등 누구나 가끔 헷갈릴 수 있는 맞춤법 사례들과 계산은 결제인지 결재인지, 등장할 때는 출현인지 출연인지, 그리고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흔한 다르다 vs 틀리다, 머지않아 vs 멀지 않아, 한번과 한 번, 못하다와 못 하다, 큰 형과 큰형 등등 일상 속에서 자주 접하는 표현들과 초등 교과서 속 필수 맞춤법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생활 밀착형 실전 맞춤법들이라서 바로 활용해 볼 수 있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들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 유익하다. 




이번 2권에서는 전작에 비해 한층 성장한 모습의 사동이가 등장한다. 받아쓰기 백점을 받아온 것으로 시작해, 형들에게 맞춤법 대결을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하기도 한다. 맞춤법 대결은 무려 18라운드까지 진행되는데, 과연 사동이가 형들을 이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를 안겨준다. 그리고 잘생긴 데다 정의감까지 폭발하는 형이 등장해서 사동이를 도와주는데, 그 형의 정체는 바로 '미래에서 온 사동이'였던 것! 늘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주는 멋진 형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동이는 미래의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맞춤법 흑역사를 지우기 위해 나타난 미래의 사동이는 자신의 목표를 완수해낼 수 있을까. 




맞춤법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는 장난기 넘치는 야코, 일명 맞춤법 파괴범인 야코의 친척 동생 사동이, 잔소리로 랩을 구사하는 어머니, 야코와 사동이의 친구들이 등장해서 티키타카 카톡 대화, 맞춤법 대결, 코믹한 일상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학습 만화로 되어 있어 아이들이 지루할 틈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야코의 노래를 듣고 직접 따라 써 보거나 틀린 노랫말을 고쳐 써 보기도 하고, 쪽지 시험 코너를 통해서 배운 내용을 바로 확인해 볼 수도 있다. 맞춤법은 모든 글쓰기의 밑바탕이기에 국어 학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자주 맞춤법을 틀리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만큼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가지로 다르게 쓰이기 때문에 실수하기가 쉽다. 이제 곧 방학인데, 아이와 함께 신나고 재미있게 페이지를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맞춤법을 익힐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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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걸 은그루 웅진책마을 121
황지영 지음, 이수빈 그림 / 웅진주니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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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은 계속 일어났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아이들이 하나둘 그루를 쳐다봤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실수로 잠옷을 입고 왔나 싶어 옷도 살피고, 머리고 매만졌다. 그래도 아이들은 그루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했다. 그루를 둘러싼 공기가 평소와 달랐다. 따뜻함, 온기, 봄바람, 이런 말이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루는 흘깃흘깃 눈치를 보며 교실에 들어섰다.         p.43


교실에는 두 종류의 아이가 있다. 교실에 들어섰을 때 친구들이 먼저 반겨 주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그루는 그렇지 않은 아이였다. 검정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었는데도 혼자 조명을 받은 듯 환하게 빛나는 시아는 언제나 아이들의 중심에 있는 아이였다. 교실에는 또 다른 두 종류의 아이가 있다. 교실에서 아이돌 춤을 출 수 있는 아이와 출 수 없는 아이. 그루는 출 수 없는 아이였다. 반면 시하는 학원에서 배운 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며 교실 뒤편에서 늘 춤을 추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루는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고,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새로운 안무를 늘 연습했다. 다만 남들 앞에서 나서서 춤을 출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일주일 뒤에 열리는 수련회에서 반별 장기 자랑에 시하의 팀과 그루의 팀이 함께 나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기본기가 탄탄한 시하와 늘 춤 연습을 해왔던 멤버들이 있는 시하네 팀은 걱정이 없어 보였지만, 갑자기 얼렁뚱땅 모이게 된 그루 네 팀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다. 반에서 가장 키가 큰 그루, 가장 키가 작은 아연이, 키는 그루와 비슷하지만 몸은 빼빼 마른 라희, 키도 중간, 덩치도 중간이지만 혼자만 남자인 세완이. 그루 빼고는 춤이랑은 거리가 먼 아이들. 


화려한 춤솜씨를 선보이는 시하네 팀과 비교하면 정말 의외의 조합처럼 보이는 그루네 팀이었다. 틈만 나면 책을 읽는 조용한 아연이, 인플루언서가 꿈인 SNS 중독 세완이, 못 말리는 무한 긍정의 아이콘이지만 몸치 기운이 느껴지는 라희까지... 이대로 무대에 올라가면 결론은 단 하나였다. 망신. 망신 망신 대망신. 



그루는 살면서 이런 응원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지금 그루의 주머니에는 블랙홀도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루를 응원하고 있었다. 마음이 뭉클해졌다.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울려 퍼지며 그루를 받쳐 올렸다. 정말 몸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루는 다시 암벽을 타고 올라갔다. 이제 시하가 저 종을 울렸다는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자기를 응원해 주는 아이들 앞에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p.132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루는 종종 간식을 챙겨 주었던 길고양이 짝짝이를 만난다. 그런데 짝짝이가 준 선물처럼 발견하게 된 까만색 돌을 손에 넣게 되고, 그루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여느 때처럼 학교 가기 싫다, 학교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온갖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땅만 내려다보고 걷는 그루에게 교감 선생님이 먼저 말을 건네고, 아이들이 하나둘 그루를 쳐다보며 인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존재감이 없던 그루가 갑자기 교실의 중심이 되어 버린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알고 봤더니 짝짝이가 발견하게 해준 까만색 돌이 사실은 블랙홀이라 불리는 운석 조각이었던 거다. 블랙홀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 같은 게 있었는데, 그 일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블랙홀을 가지게 된 것이 그루에게 정말 행운일까? 그루는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블랙홀을 이용해서 장기자랑에 나가도 되는 걸까.  



아무런 노력 없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하루 아침에 인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걸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우주에서 온 운석 블랙홀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말이다. 이 작품은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한 소녀가 전혀 꿈꾸지 않았던 걸 갑자기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유튜버이자 댄스 트레이너로 명성을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에 아이돌 데뷔를 하지 못한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블랙홀을 강제로 빼앗으려 하는 아랑 선생님을 비롯해서, 춤도 잘 추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있지만 자신이 들어가고 싶은 댄스팀에 두 번이나 떨어져서 꼭 합격하고 싶은 마음에 블랙홀을 탐내는 친구 시하까지... 블랙홀을 탐내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인간의 본성에 잠재되어 있는 탐욕의 얼굴을 마주하게 한다. 


투자한 시간과 흘린 땀방울의 무게만큼 언제나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노력없이 얻는 요행에 기대지 말고 그 과정을 고스란히 즐기는 것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블랙홀이 만들어 놓은 허상인 샤이닝 걸 그루와 매력은 없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뭐든 해내는 평범한 그루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사과처럼 매끄럽지 않아도, 감자처럼 울퉁불퉁해도 나는 나'라는 극중 샐러드보울의 노래 가사처럼 자신만의 색깔로 한걸음씩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진짜 내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거라는 걸 알게 될 테니 말이다. 나만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루와 친구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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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시 봉급 생활자 - 복잡한 도시를 떠나도 여전히 괜찮은 삶
조여름 지음 / 미디어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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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내 모든 허덕임은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마음 편히 음식을 음미하지 못하고 숙제를 해치우듯 꾸역꾸역 배를 채웠다. 어떻게든 스펙을 쌓기 위해, 시험에 붙기 위해, 일을 해내기 위해 밥 먹는 시간마저 아끼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스로 만들어낸 불안은 허덕이는 마음을 낳았고, 나중에는 허덕이지 않으면 되레 불안해졌다. 도시는 계속 나에게 강요했다. 더 열심히 하라고, 뒤처지면 끝나는 거라고, 너만 힘든 거 아니라고, 다들 버티고 있는 거라고.                 p.33~34


아주 작은 틈까지 자본이 스며 있는 도시에서 벗어나, 기껏 차지한 평범한 정규직의 삶을 뒤로하고, 시골의 작은 도시, 아담한 동네로 삶의 터전을 옮겨온 지 6년, 아무리 애를 써도 풀리지 않던 일들이 차근차근 실현되기 시작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수도권 중심으로 펼쳐지는 요즘 같은 시대에 대도시가 아니라 작은 소도시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는, 조금은 특별한 청춘이 여기 있다. 안정적이고 순탄해 보이는 인생 경로에서 크게 이탈하는 기분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나가떨어지는 느낌과도 같았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공공기관에 입사한 지 2년 즈음, 도망갈 곳 없이 목줄로 묶인 채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던 저자는 겨우 거머쥔 정규직 자리를 포기하기로 한다. 인생의 낙오자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지만, 더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용기를 내어 가족들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고, 가족들은 그런 저자를 만류하지 않고 그저 묵묵하게 응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른셋 인생에서 저지를 수 있는 최대치의 일탈을 하고 돌아온 시골의 일상은 마치 리틀 포레스트의 그것처럼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다. 손해보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도시에서의 삭막한 마음가짐이 자연 속에서 조금씩 치유된다. 집 앞 텃밭에서 따온 채소로 느긋하게 식사를 준비하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넉넉한 먹거리가 주는 힘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재능, 건강, 물려받은 재산 등 사람마다 주어진 자원이 다르기에 살면서 체감하는 각각의 인생 난이도도 다르다. 세상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배경이나 조건 같은 한계는 뛰어넘어야 한다고, 열심히 하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며 '보통'이라는 이름으로 일률적인 목표치를 제시하곤 한다. 그렇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밤낮없이 일해도 목표에 가 닿을 수 없는 보통들이 대다수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그 보통들이 너무나 거대하고 아득해서, 감히 꿈꾸지 못한 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사실을.               p.105



그저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참고 견디며 버텨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시골에서 직장인으로 살며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며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갖고 싶었던 커리어를 경험하고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다니 그야말로 소도시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부수어주는 책이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발견한 '임기제 공무원'이라는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대부분 공무원은 시험을 봐서 들어가는 줄만 알았는데 색다른 정보였다. 임기가 정해진 공무원으로 연봉도 생각보다 높았기에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합격하게 되면서 소도시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의성이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서 시골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생활이란 어떨까. 이 책을 읽다 보면 굳이 '시골'과 '도시'를 구분하고, 스스로 선을 그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점점 들게 된다. 


저자는 대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고, 인규 유입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적극 추진하는 지역별 여러 정책을 활용하는 법을 비롯해서 소도시에 정착하는 과정을 자세히 알려준다. 그렇게 인구 1,000만의 대도시부터 50만, 10만, 5만을 고루 경험했다. 서울을 떠나 고향인 상주에서 농사를 도우며 슬로 라이프를 즐겼고, 의성의 군청에 임기제 공무원으로 취업해 시골 직장인이 되어 보기도 하고, 현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특별한 도시, 제주에서 직급까지 올려 훨씬 규모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물론 계속 제주에 정착하게 될지,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제는 어디에서 살더라도 어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곳에 정착해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는 곳을 바꾸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경험의 폭이 크게 확장된다면, 한번쯤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리얼 다큐 소도시 라이프! 지금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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