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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우리 국민들의 삶 중 어떤 부분에서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리스펙트풀 기자. 우리는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부자와 특권층뿐만 아니라,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공정한 사회입니다. 요즘 흑인의 힘이니 여성의 힘이니 이런저런 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태아의 힘은 어떨까요? 비록 세포에 불과하다 해도, 그들 역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위해 싸울 겁니다. p.30
이 작품은 '개인적 종교적 신념에 의거하여 나는 인구통제의 수단으로서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연설 내용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 또한 법적으로 인정되는 권리를 분명히 갖고 있다는 그의 말은 극중 미국 대통령인 트리키와 국민과의 대담에 의해 보다 더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보여진다. 트리키는 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낙태 또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며, 세포에 불과한 태아 역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위해 싸울 거라고 주장한다. 급기야 태아에게도 투표권을 주게 될 헌법 수정안을 제안하겠다고 나서는데, 태아들이 어떻게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건지, 태아들이 야당인 민주당 후보보다 대통령에게 표를 줄 것이라고 믿는 근거가 뭔지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늘어놓는다.
이러한 대통령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에 국민적 반감이 거세지며 정부를 향한 소요 사태까지 발생하자, 그는 백악관 지하 로커룸에 측근들을 모아 작전회의를 열기로 한다. 정치 코치, 마음 코치, 군사 코치, 법률 코치, 교양 코치가 모여 대책 회의가 시작된다. 대통령을 비방하는 무리를 모두 총으로 쏴버리자고 하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다섯 명의 명단을 만들어 정의를 실현하자더니 야구선수와 보이스카우트가 국가를 위협하는 폭도 무리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얼마 뒤, 대통령이 아침 7시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망 원인이나 발견 장소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표가 없었고, 언론은 대통령의 사망에 관련된 여러 추측을 보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백악관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제각각 자신이 대통령을 죽였다고 주장하는데, 급기야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면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태까지 벌어지며 나라는 대혼란 상태가 되어 버린다. 온갖 평범한 사람들이 대통령을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고, 체포해달라면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상한 상황의 진실은 무엇일까.
음, 저는 그냥 여기 서서 제 볼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살해한 범인이 바로 저라고 경찰관에게 자백하려고 했죠. 그때 단춧구멍에 꽃을 꽂은 화려한 남자가 리무진을 타고 나타나서 저와 경찰관 사이에 끼어들어 자기가 범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떤 흑인 남자가 나타나서, 저는 흑인 남자들한테 전혀 불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정말 건방졌어요. 그놈이 하는 말이 우리 둘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자기가 바로 범인이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가 그 남자한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라고 말했는데, 그게 시발점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 열다섯 명이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면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더라고요. p.212~213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실제 발언을 모티프로 삼은 이 작품은 필립 로스의 초기작이다.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직위에 부여된 존엄성, 그 갑옷을 깨부술 생각'이라고 이 작품의 집필 의도를 밝혔던 필립 로스는 미국 대통령을 ‘사기꾼’이라는 의미의 ‘트리키Tricky’로, 국방장관을 ‘돼지기름’을 뜻하는 ‘라드Lard’로 지칭하며 출간 당시 대통령이었던 닉슨과 당대 내각을 향한 조롱과 풍자를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자기과시적 성격과 부족한 지능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대통령과 그에게 과잉 충성하는 장관들의 대화는 일종의 코미디처럼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고, 폭소를 유발시킨다. '이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대량의 무지입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대통령이라니, 수파 진영의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후안무치한 모습에 그저 기가 막혔다.
낙태를 ‘인구 통제 수단’으로 규정하고, 태아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겠다는 주장을 비롯해 나라가 위대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대량의 무지라는 발언에 이르기까지 오직 재선만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파렴치한 행보는 사실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지금의 정치판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것은 이 작품이 미국의 정치판을 그리고 있고,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도착한 이유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직 재선만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처절하고도 우스꽝스러운 행보는 다소 극단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허구보다는 현실에 가깝다는 것이 서글픈 진실이다. 실제로 이 작품이 출간되고 3년이 지난 뒤, 사상 초유의 워터게이트 사건 발발로 리처드 닉슨은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 자진 사임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야말로 이 작품이 무능한 지도자를 향한 필립 로스의 문학적 테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터무니없이 불공평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상식을 말살하는 이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통쾌한 지점들이 있다. 현실에 만연한 정치 언어의 교묘한 변용과 조작을 문학적으로 실연한 필립 로스의 놀라운 작품을 놓치지 말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