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증인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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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로등은 길 양쪽에 세 개씩, 모두 여섯 개가 늘어서 있는데 그중 하나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도스가와에게는 그게 우연한 고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이곳에 데려온 사람은 아주 주도면밀한 자다. 외딴섬에 실제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 아니라 바 '로맨스' 안에는 작년 달력에 작년 살인 사건 기사가 실린 신문까지 갖춰 뒀다. 이 모든 게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 '역시' 하고 도쓰가와는 생각했다. 범인은 1년 전 살인 사건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려는 것이다.                p.41


경시청 수사1과에서 일하는 도쓰가와 경부는 새벽에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던 중 둔기에 맞아 그대로 쓰러진다. 얼마 뒤 낯선 섬에서 깨어 난다. 그곳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콘크리트 도로 끝에 건물이 늘어서 있고,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사거리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있어 꼭 죽은 도시 같았다. 실제 도시의 한 구역을 통째로 떼어다 옮겨 놓은 듯한 이곳은 어딜까.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걸 만든 걸까. 곧 도쓰가와는 자신 외에 일곱 명의 남녀가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노인이 나타나 1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감옥에서 병사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고 싶다고 말한다. 


일년 전, 스물한 살인 사에키는 바 '로맨스'에서 술을 마시다 같은 자리에 있던 남자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인다. 마담의 중재로 그 자리는 일단 가라앉았지만, 가게를 나선 뒤 치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피해자를 뒤쫓아 당시 지니고 있던 15센티미터 남짓한 칼로 그의 등을 찔러 살해했다. 가해자는 강도 전과 1범으로 주소 불명, 무직으로 전형적인 살인범의 프로필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피해자는 손꼽히는 대형 상사의 영업과장으로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다. 사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두 사람의 사진과 약력만 보더라도 영랑없는 범인과 전형적인 피해자로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일곱 명의 증인이 하나같이 그의 범행을 증언해 9년행을 받는 걸로 사건은 끝이 났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 사건을 다시 재조명하겠다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증인이었던 사진작가, 재수생, 바의 마담과 단골, 은행 부지점장과 여직원까지 일곱 명과 사건과 관련이 없는 형사 한 명이 필요했다. 그렇게 증언이 차례로 재현되면서 조금씩 모순이 드러나는데... 과연 그는 죽은 아들의 무죄를 밝혀낼 수 있을까.




“내 아들을 위한 일이니까. 남의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매달리지 않았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사사키 씨의 반론이 훌륭했다고 해서 그 추리가 옳다고 증명된 건 아닙니다. 그 점은 사사키 씨도 잘 아실 겁니다. 다만 증명은 아니더라도 아드님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은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증인 다섯 분도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p.278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이다. 데뷔 이후 6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누적 판매부수 2억 부를 돌파한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인 니시무라 교타로는 열차나 관광지를 무대로 도쓰가와 경부가 활약하는 트래블 미스터리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을 꽤나 오랜 전에 읽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국내에 2014년에 소개되었던 <종착역 살인사건>과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작가이고, 이후 <살인의 쌍곡선>을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그게 2020년이었으니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블루홀 6에서 2022년 <화려한 유괴>, 2024년 <묵시록 살인사건>으로 꾸준히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을 소개해 오고 있는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놓쳤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이번 작품은 살인 사건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실제 거리와 건물 들을 외딴섬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뒤, 증인들을 한 곳에 모아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본다는 설정부터 매우 흥미로운데, 이미 재판이 끝나고 범인까지 확정된 사건이 다시 무대 위에 올려지는 과정이 굉장한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1977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하니 니시무라 교타로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전 초기작인데도, 수준급의 완성도와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 새삼 감탄하며 읽었다. 거의 5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낡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 지 않는 것도 대단했고, 고전적인 플롯으로 만들어 나가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인상적이었다. 법정에서 오간 증인들의 증언은 정말 진실일까, 아니면 각자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왜곡된 사실의 조각일까. 각자의 발언이 복원되고, 대조되고, 비교되는 과정을 통해 모순점이 드러나고, 논리가 무너지는 과정이 대단히 흡입력있게 전개된다. 사적인 재심이지만, 그 과정은 흠잡을 데 없이 논리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무인도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논리 대결이 궁금하다면, 고전 추리소설과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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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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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일에는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아."

지카가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면서 툭 내뱉었다. 말은 들었지만 뜻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야?"

이즈미가 묻자 지카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직은 말 못 해. 어쩌면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조사해 볼 가치는 있어... 네가 나한테 찍은 배신자라는 낙인을 기필코 지우고 말겠어."                  p.41


스물한 살 여대생이 스토킹하던 남성이 휘두른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와 손님으로 알게되어 집요하게 치근덕거리다가 급기야 협박하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토킹 행위가 점점 더 악질적으로 변하자 부모가 경찰을 찾아갔지만, 담당자는 여러 달 동안 피해 심고서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고, 수사 결정을 하고 나서 얼마 뒤 살해당했다. 언론은 경찰의 부실 대응으로 인해 여대생이 목숨을 잃었다고 몰아붙였고, 경찰 조직 전체가 거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거기다 경찰이 신고 접수를 미룬 이유가 직원들의 워크숍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찰서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항의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현경 홍보과 직원 모리구치 이즈미는 사건을 단독 보도해 특종을 얻은 요네자키 신문사의 기자이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쓰무라 지카를 의심한다. 경찰 내부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기사화되었으니 말이다. 이즈미와 지카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둘 다 모자 가정이라는 공통점으로 더욱 가깝게 지냈던 친구 사이다. 대학을 진학한 뒤로는 소원해졌다가, 두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재회하게 되면서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사이였다. 저녁을 먹다가 자신이 무심코 워크숍 건에 대해 말을 했었고, 절대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했었다. 그런데 이 사단이 났으니 이즈미 입장에서는 친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카는 자신이 기사를 쓰지 않았다며, 이 일에는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으니 자신이 조사해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 지카는 강 하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고통스러운 숨 사이로 간신히 짜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헨미는 눈앞에 놓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잔이 비었다. 이소카와가 술을 채웠다. 

이소카와가 따라 준 술을 단번에 비운 헨미의 고개가 푹 꺾였다.

"넌 이 일에 더 이상 깊이 개입하지 마."

그건 불가능하다. 절친이 살해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이즈미를 생각하면 여기서 손을 뗄 수는 없다.              p.265


이즈미는 친구의 말을 믿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지카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으로 그녀가 죽기 전에 무엇을 조사하고 있었는지 추적해보기로 한다. 분명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지카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오명을 벗기 위해 그 점을 조사할 거라고 말했었다. 절친을 잃었다는 슬픔보다 절친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물론 자신은 형사도 아니었고, 지카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이 최선을 다해 수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짝 친구였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주인공이 형사도 수사관도 아닌 경찰 홍보과의 사무직원이라는 점이 진실을 향한 추적을 더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경찰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내부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약간의 거리감과 피해자의 친구라는 입장에서 정의를 밝히고자 하는 마음이 서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작품이었다. 



<고독한 늑대의 피>, <반상의 해바라기>, <최후의 증인> 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유즈키 유코의 신작이다. 여대생 스토킹 살인 사건, 경찰서 출입 기자의 죽음, 기자가 접촉을 시도한 여성의 자살, 신문의 특종 기사와 제보자, 사이비 교단의 존재 등 각각의 사건은 끊어질 듯 가늘면서도 몹시 억센 실로 이어져 있는 듯 연결되어 있다.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그것들을 연결하는 실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데, 흩어진 조각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경찰이 아닌 여주인공은 과연 이 조각들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유즈키 유코의 기존 작품들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강했는데, 이 작품 역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탄탄한 미스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뜨겁고 치열한 남성 주인공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죄책감과 의심, 진실을 향한 추적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죄와 맞서는 일에는 늘 부조리한 면이 섞여 있다. 범인이 확실한데도 증거가 불충분해서 체포하지 못하고 풀어 줘야 할 때도 있고, 범인을 체포하고 송치하더라도 기소까지 못 갈 때도 있다. 공판까지 원활하게 진행되더라도 말 도 안 되게 가벼운 형이 선고될 때도 있다. 선과 악을 단순하게 나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애쓰는 것이 삶이라는 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벚꽃이라는 암호명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이 궁금하다면,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찰소설을 읽어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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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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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 드러나는 거대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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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하는 마음 - 불확실성의 시대를 건너는 삶의 태도
장하석 지음 / 흐름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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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생각하다 보면, 지구가 참 신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은 어떤 일에는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도 또 다른 많은 일에 대해서는 별생각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땅에 붙어서 살면서도 그 땅덩어리가 정확히 어떤 형태이고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들이 없다. 그러한 내용에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과학하는 마음이다.               p.78


현대 문명은 과학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과학지식과 그것을 응용한 기술을 통해 편리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과학지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과학이 가져다주는 지식의 내용뿐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방식을 몸에 익혀야 하는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적'이라 하는 것은 정확히 무슨 의미일까.


이 책은 과학사와 과학철학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케임브리지대학교 과학사-과학철학과 석좌교수인 저자가 과학적인 태도와 사고방식의 필요성을 대중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온도계의 철학>을 비롯해 과학철학을 다루는 책들을 다수 출간해 왔다. '과학철학'이란 과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학문으로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에 대해 설명해주기 때문에 어려운 용어들이 가득한 과학서에 비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과학 분야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제목이기도 한 '과학하는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과학하는 마음에 담긴 것은 예외 없는 규칙들이 아니라 어떤 태도와 정신이라고 말이다. 경험 이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항상 끝없이 배우려는 태도이며, 내가 다 안다는 오만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것이 무한히 있음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이 바로 '과학하는 마음'이다. 




또 상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인생의 의미는 직접 경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계산기를 쓰더라도 어린이들에게는 산수를 가르쳐서 직접 계산하는 법을 우선 깨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숫자를 곱하고 나누고 해본 경험 없이 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방정식을 풀어보고 미적분을 해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그렇다. AI가 번역을 해주니 내가 애써 번역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외국어를 직접 힘겹게 배우면서 이국적 사고방식을 배우고, 또 그러한 다른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는 일은 AI가 대신 해줄 수 없다.                    p.287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중앙일보>에서 2021년 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매달 발표했던 칼럼들을 다듬고 보충한 것이다. 그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크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인공지능의 무서운 발달 등 전 세계를 휘청거리게 하는 일들이 많았기에,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통찰도 만날 수 있었다. 전체적인 흐름으로 엮인 글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하나하나 쓰였던 글들이라 독자 입장에서 읽기에는 가독성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순서대로 읽을 필요없이 원하는 주제의 글을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고, 물리학, 화학, 생물학, 천문학 등 여러 영역을 다루면서 과학사의 중요한 장면들도 짚어주고 있어 과학 교양서로 만나기에도 좋다. 또한 과학과 과학적 태도가 현실의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각종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 사고들부터 전세계적인 팬데믹과 테러, 재해, 기후 문제, 그리고 일상에서 겪는 가족 문제, 회사에서의 고민, 연인 관계,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걱정까지 우리의 삶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는 정당한 이유로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사실 불확실성은 과학지식의 본질이기도 하다고.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확답을 주지 못하는데 왜 과학을 신봉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확실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완벽하지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과학자와 그들이 얻어낸 지식에 기반해 정책을 세우는 정부를 기본적으로 신뢰하고, 이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면서도 따라주는 것이 성숙한 시민이 보여주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과학이 절대적 진리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과 그 '겸허함에서 나오는 과학의 권위'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절대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을 신뢰할 수 있고 진정한 권위가 생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과학의 정신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태도를 배우게 된다면, 인생 자체도 과학적인 태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과학하는 마음'이 왜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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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원에 드리는 보고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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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소설을 쓰게 된 후로 나는 줄곧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왔는데, 그것들은 주로 분노나 수치, 혐오와 죄책감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어렵고 고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또 그런 글들을 써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때때로 그것들이 그저 내 안에서만 해결되고 마는 감정은 아닐까, 의심이 들 때가 많았다. 누군가의 불쾌와 부끄러움을 그저 이해하고 헤아리는 일.            -'마음은 언제 휘어지는가' 중에서, p.50~51


소설가인 '나'는 K군에 위치한 작은 서점에서 북토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15번 국도의 한 터널에 막 들어설 무렵, 차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젊은 여자 유령을 발견하고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놀란다. 게다가 그 유령은 그날 있었던 북토크에서 만났던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모객이 안 되었던 그날 현장에 모인 독자는 총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과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요즘 소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독자의 말에 이십칠 년 차 작가인 '나'는 상처를 받고 발끈했던 것이다. 독자는 소비자일까, 심판일까, 그도 아니면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일까에 대해 고민하던 그에게 불쑥 독자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어떤 글도 쓸 수 없게 되는데... 과연 유령과의 기묘한 동행은 어떻게 끝이 날까. 


이기호 작가의 페르소나인 소설속 '이기호' 들은 정부청사 주차장에서, 경찰서 앞에서, 북토크 현장에, 그리고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트에서 밀키트를 사와서 요리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며, 욕실 바닥 청소와 베란다 청소도 했다. 계속 집안일만 하느라 짧은 소설 밖에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일상은 집안일 잊고 딱 한 달만 글을 쓰다 오라는 아내의 말에 들어간 문학 전문 창작 공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집안일에서 해방되더라도, 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더라도, 소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는 거다. 집필실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문학은 계속되고, 삶이 그렇듯 문학을 한다는 것도 대부분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을 둘러싼 우리 모두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이 한 개인의 고유한 창작물인 거 같지만, 실상은 다 구조와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수백 종의 시집이 발간되는가? 왜 수백 편의 단편소설이 발표되는가? 저 수많은, 수지타산 맞지 않는 문예지는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 없는 구조와 환경 탓이다. 이제 그 구조와 환경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K는 그런 말도 적었다. 구조와 환경에 잘 적응한 작가만이 살아남는다, 아니, 살아남았다……             -'우리는 왜 엉망이 되어가는가' 중에서, p.235


이 작품은 이기호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이기호 소설가’가 필자인 보고서 형식의 소설이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역사부터 시작해 존립과 위상 강화 도모를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으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 낸다. 폐쇄적인 회원 선출 방식, 예산 대부분이 회원 수당으로 쓰이는 데 비해 협소한 사업 기능,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임에도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의아한 존재감까지 언급하며 예산안을 개혁할 것을 제안하고, 소수에게 조용히 집중된 권력과 자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나마 동료 예술인 인식 조사라는 항목에서 소설가, 동화작가, 시인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대목이 소설처럼 느껴질 뿐,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서처럼 쓰인 독특한 작품이었다. 소수에게 조용히 집중된 권력과 자원에 문제 제기하는 이 작품은 2021년 발표 당시 예술원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과 작가•예술가들의 공동성명으로 이어지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니 흥미로웠다.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역시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 작가와 독자, 국가와 예술 등 '문학'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일종의 보고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예술품인 동시에 소비재인 문학 단행본의 위상을 짚고, 독자를 의식하며 독자와 공생해야 하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 그리고 오늘날 출판 생태계의 현실까지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정의롭고, 대부분은 끔찍하다. 이 책은 그 마음에 대한 기록이다. 끔찍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진실도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라고 이기호 작가는 썼다. 다정함 속에 섞인 인간의 위선을 간파하고, 사랑해온 것들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 그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에게 소설쓰기란 어떤 의미인지, 독자에게 문학이란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갈등과 곤경과 지리멸렬함으로 가득한 매일의 삶을 어떻게 문학이 구원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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