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의 조각
이다 투르페이넨 지음, 정보람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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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들은 반짝이는 물고기들, 투명한 물고기들, 날아오르는 물고기들, 집채만 한 물고기들, 촉수로 거대한 전투선을 휘감고도 남을 괴물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고래만 한 바다소에 대해서는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탐사대가 출발하기 전에 스텔러는 아바차만의 원주민들과 면담하며 그들이 진저리를 칠 때까지 그 지역에 사는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고, 실제 동물들의 이야기가 다 떨어지자 그들은 지어내기까지 했지만, 스텔러에겐 그것도 괜찮았다... 어떻게 이런 동물이, 인간에게 알려진 바닷가에,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을까?                p.59


어릴 때부터 사라져 버린 존재들에게 이상하게 관심이 갔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 뼈들과 화석, 발자국들을 보면서 우리가 잃어 버린 세계에 대한 상상을 해보곤 했었다.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던 시대는 현실에서 전혀 체감되지 않는 아득한 옛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인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마치 과거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1741년, 태평양과 북극해 사이,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바다를 거쳐 베링의 탐사선이 항해를 시작한다. 북방 항로 대탐사 여행의 참가자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 생긴 과학 아카데미의 저명학 학자 세 명과 여섯 명의 조수, 여섯 명의 토지 측량사, 그 외에 화가와 군인, 통역, 기술자 등등이 충분한 물질적 지원을 받으며 떠났다. 길고 힘겨운 5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여정의 반도 통과하지 못했고, 동쪽으로 향할수록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진다. 병자들이 늘어갔고, 건강한 선원들도 피로와 탈수로 사망하기 시작했을 즈음이다. 날씨도 안 좋고, 돛은 찢어졌고, 선원들도 다 죽어 가고 있었으니 모두가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짐승들이었다. 바다에서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준다는 전설 속 인어가 길 잃은 탐사선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훗날 '스텔러바다소'라 불릴 거대 포유동물이었다. 




그뢴발은 여러 날을 사라진 것들과 함께 보낸다. 동물들은 가버렸지만, 그는 동물들의 기억을 보관하고, 나중에 올 사람들이 그 앞에 멈춰서 동시대를 투영해 볼 수 있도록 뼈와 껍데기의 부식을 정지시킨다. 스텔러는 바다소에게서 신의 손자국을, 거대한 사슬로 이어진 세계의 연결 고리를, 변하지 아 ㄶ는 것의 일부를, 아름다운 질서를 보았고, 그는 죄책감이나 걱정을 모르고 바다소의 배를 열고 머리뼈를 갈랐을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가시 돌기를 바로잡고, 부서진 척추뼈 자리를 대체할 석고를 새로 주조하고, 몸을 구부린 자세를 바다소에게 새로 부여한다.                p.333


핀란드 작가 이다 투르페이넨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사라진 세계를 우리 눈앞에 완벽하게 데려다 준다. 역사상 가장 빨리 멸종한 동물인 스텔러바다소의 발견과 실종, 추적과 복원에 이르는 긴 여정을 그리고 있는데, 역사와 픽션을 오가며 자연 탐사와 동물의 멸종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과학과 예술의 역사를 문학으로써 정교하고 아름답게 엮어 낸 결과물'이라는 문구처럼,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책처럼 느껴져 더 좋았다. 이미 오래전에 멸종되어 만나볼 수 없게 된 동물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복원된 뼈대를 통해서이다. 누군가 그것을 찾아 바다를 누비고, 흩어지고, 파묻힌 뼈들을 모아 한데 이음으로써 그것을 되살리고, 박물관에 전시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 존재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3세기에 걸쳐 과학자, 수집가, 복원가들이 부단히 노력해온 과정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지구에 생명이 태어난 뒤로 약 40억 년이 지났고,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물들이 사라졌다. 멸종과 진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모든 세대가 죽은 것들과 사라진 것들을 복원시키기 위해 자기들만의 방법을 고안해 낸다. 우리는 박물관에 전시된 그 과거의 시간들을 통해 사라진 종들을 우리가 영원히 잃어버린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바라본다. 1741년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길을 떠난 탐사대의 여정으로 시작된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라앉은 뼈들을 현재의 우리들에게 다시 복원시켜 보여준다. 저자는 헬싱키 자연사 박물관에서 스텔러바다소의 웅장한 골격을 보고 완전히 사로잡힌다. 인간이 처음으로 멸종시킨 해양 생물이자, 발견된 지 27년 만에 종적을 감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완전한 골격은 단 3구뿐인 거대 포유동물. 이 동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인간에 의해 멸종된 존재를 다시 인간의 손으로 되살리려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자연과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사라진 모든 존재들에게 바치는 가장 특별하고 아름다운 부고'를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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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서점이니까 - SE.1 페가수스 서점 기치조지점
아오노 케이 지음, 임지인 옮김 / 오픈하우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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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다들 평대만 신경 쓰지만 서가에 책을 꽂아두는 방식도 중요하다. 5밀리만 튀어나오게끔 정돈한 뒤 일직선으로 책등이 보이게 한다. 가름끈이 책등 쪽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매출 전표도 튀어나오지 않게 책 마지막 페이지에 끼워 넣는다. 그런 세세한 부분을 챙기는 것이 바로 서점 직원이다. 시간을 들여 한 단씩 정돈한 서가는 보기만 해도 즐겁다. 손바닥의 감촉으로 책을 실감하게 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 작업을 게을리하면 그 근처는 공기가 침체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p.49


페가수스 서점의 부점장 리코는 올해 마흔으로 최근에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남자는 거래처인 대형 출판사의 영업부 차장으로 서글서글하고 평범한 면을 좋아했었지만, 결국 어린 여자 직원과 바람이 나서 삼류 드라마같은 결말에 이르고 말았다. 더는 젊지 않은 나이에 다음 연애가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게다가 이제는 남자 보는 눈도 까다로워졌고 자존심도 강해져 남자에게 연애 감정을 품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스물일곱인 직원 아키는 예쁘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타일로 여직원들 사이에서 겉도는 존재다. 서점에서 인기있는 남자 직원과 사귀다가 헤어지고 출판사의 만화부 편집자와 사귀더니 몇 개월만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말이다. 


아키의 결혼식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보수적인 워커홀릭인 40대 싱글 부점장과 자유롭고 솔직한 20대 직원, 이렇게 두 여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현실판 서점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평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리코와 아키가 부딪히는 일이 벌어져 결혼식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작은 오해로 아키는 음치인 게 만천하에 들통나버렸고, 전 남자친구의 이름이 식장 내에 울려 퍼지기도 해서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본의아니게 아키가 던진 부케가 리코 쪽으로 가서 받게 되는데, 일부러 자신을 망신 주는건가 싶어서 리코도 기분이 확 상한다. 그렇게 말다툼이 시작되어 급기야 아키가 리코가 낸 축의금 봉투를 돌려 주는 사태가 벌어지는데 과연 이 파란만장한 결혼식은 무사히 끝날 수 있을까. 




"그래도 상관없어. 좋은 책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게 우리 일이니까. 게다가 이왕이면 우리가 좋아하는 책을 좀 더 응원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야?"

"잘못돼다는 게 아니라, 그 의욕을 이용당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아. 서점 직원을 홍보에 이용해서 싸게 해치우려는 출판사도 많으니까. 교정지를 읽거나 감상을 보낸다한들 돈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 자기가 쓴 문장이 홍보 문구로 쓰여도 원고료가 나오는 것도 아닐 테고."                   p.174


이 작품은 출판사 편집자였던 저자의 경험이 녹아든 현실판 서점 이야기로, 1권의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가 7권까지 나왔다. 일본에서 누계 5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곧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상과 관계에서 빚어내는 갈등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고, 서점과 출판사의 리얼한 디테일들이 담겨 있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한번쯤 책장에 꽂힌 책등을 만져보며 책들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기울여 본 적이 있다면, 좋아하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베껴 쓰며 그런 글을 쓰는 기분이 어떤지 느껴본 적이 있다면, 책을 펼치고 상상 너머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을 사랑한다면, 서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에 매혹되지 않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서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작품들은 판타지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비해 이 책은 정말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세상에 재미있고 매력적인 책은 많지만, 그런 책을 소개하는 것은 재미있거나 매력적이기 쉽지 않다. 서점은 책을 '판매'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잘 몰랐던 책을 '발견'하거나 좋은 책을 '소개'받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서가에 책을 진열하는 방식부터 잡지 부록을 일일이 래핑하고, 클레임 손님을 대응하고, 재고를 확인해 반품시킬 종류를 선택하고, 새로 주문을 하며, 이벤트를 기획하고, 작가와 행사를 계획하는 등 실제로 서점과 출판사에서 책을 팔기 위해 하게 되는 모든 과정을 하나씩 보여준다. 또한 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고민들은 여느 회사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서 직장인들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삼사십대가 된 커리어 초중반의 여성들이 겪게 되는 고민들과 스트레스도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누구나 어떤 일을 하고 있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선택한 일인데 왜 이렇게 힘들지,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는 건가 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니 말이다. 


매일 새로운 책이 나오고 세상에는 책이 넘쳐흐르니까 어지간해서는 눈에 잘 안 띈다. 좋은 책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사람이 꼭 필요한 이유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를 만나보자. 서점이라는 공간을 좋아하고, 책을 사랑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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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증인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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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로등은 길 양쪽에 세 개씩, 모두 여섯 개가 늘어서 있는데 그중 하나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도스가와에게는 그게 우연한 고장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이곳에 데려온 사람은 아주 주도면밀한 자다. 외딴섬에 실제 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았을 뿐 아니라 바 '로맨스' 안에는 작년 달력에 작년 살인 사건 기사가 실린 신문까지 갖춰 뒀다. 이 모든 게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 '역시' 하고 도쓰가와는 생각했다. 범인은 1년 전 살인 사건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하려는 것이다.                p.41


경시청 수사1과에서 일하는 도쓰가와 경부는 새벽에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던 중 둔기에 맞아 그대로 쓰러진다. 얼마 뒤 낯선 섬에서 깨어 난다. 그곳은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콘크리트 도로 끝에 건물이 늘어서 있고,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사거리 신호등이 깜빡거리고 있어 꼭 죽은 도시 같았다. 실제 도시의 한 구역을 통째로 떼어다 옮겨 놓은 듯한 이곳은 어딜까.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걸 만든 걸까. 곧 도쓰가와는 자신 외에 일곱 명의 남녀가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 노인이 나타나 1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감옥에서 병사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고 싶다고 말한다. 


일년 전, 스물한 살인 사에키는 바 '로맨스'에서 술을 마시다 같은 자리에 있던 남자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인다. 마담의 중재로 그 자리는 일단 가라앉았지만, 가게를 나선 뒤 치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피해자를 뒤쫓아 당시 지니고 있던 15센티미터 남짓한 칼로 그의 등을 찔러 살해했다. 가해자는 강도 전과 1범으로 주소 불명, 무직으로 전형적인 살인범의 프로필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피해자는 손꼽히는 대형 상사의 영업과장으로 아내와 어린 딸이 있었다. 사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두 사람의 사진과 약력만 보더라도 영랑없는 범인과 전형적인 피해자로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일곱 명의 증인이 하나같이 그의 범행을 증언해 9년행을 받는 걸로 사건은 끝이 났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 사건을 다시 재조명하겠다는 거였다. 그러기 위해서 당시 증인이었던 사진작가, 재수생, 바의 마담과 단골, 은행 부지점장과 여직원까지 일곱 명과 사건과 관련이 없는 형사 한 명이 필요했다. 그렇게 증언이 차례로 재현되면서 조금씩 모순이 드러나는데... 과연 그는 죽은 아들의 무죄를 밝혀낼 수 있을까.




“내 아들을 위한 일이니까. 남의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매달리지 않았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사사키 씨의 반론이 훌륭했다고 해서 그 추리가 옳다고 증명된 건 아닙니다. 그 점은 사사키 씨도 잘 아실 겁니다. 다만 증명은 아니더라도 아드님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은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증인 다섯 분도 지금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p.278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이다. 데뷔 이후 6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누적 판매부수 2억 부를 돌파한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인 니시무라 교타로는 열차나 관광지를 무대로 도쓰가와 경부가 활약하는 트래블 미스터리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을 꽤나 오랜 전에 읽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국내에 2014년에 소개되었던 <종착역 살인사건>과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작가이고, 이후 <살인의 쌍곡선>을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그게 2020년이었으니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블루홀 6에서 2022년 <화려한 유괴>, 2024년 <묵시록 살인사건>으로 꾸준히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을 소개해 오고 있는데, 이번 작품을 계기로 놓쳤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이번 작품은 살인 사건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실제 거리와 건물 들을 외딴섬에 고스란히 옮겨 놓은 뒤, 증인들을 한 곳에 모아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본다는 설정부터 매우 흥미로운데, 이미 재판이 끝나고 범인까지 확정된 사건이 다시 무대 위에 올려지는 과정이 굉장한 몰입감을 주는 작품이었다. 게다가 1977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하니 니시무라 교타로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기 전 초기작인데도, 수준급의 완성도와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 새삼 감탄하며 읽었다. 거의 5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낡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 지 않는 것도 대단했고, 고전적인 플롯으로 만들어 나가는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인상적이었다. 법정에서 오간 증인들의 증언은 정말 진실일까, 아니면 각자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왜곡된 사실의 조각일까. 각자의 발언이 복원되고, 대조되고, 비교되는 과정을 통해 모순점이 드러나고, 논리가 무너지는 과정이 대단히 흡입력있게 전개된다. 사적인 재심이지만, 그 과정은 흠잡을 데 없이 논리적으로 펼쳐진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무인도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논리 대결이 궁금하다면, 고전 추리소설과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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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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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일에는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아."

지카가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면서 툭 내뱉었다. 말은 들었지만 뜻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야?"

이즈미가 묻자 지카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직은 말 못 해. 어쩌면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조사해 볼 가치는 있어... 네가 나한테 찍은 배신자라는 낙인을 기필코 지우고 말겠어."                  p.41


스물한 살 여대생이 스토킹하던 남성이 휘두른 칼에 찔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와 손님으로 알게되어 집요하게 치근덕거리다가 급기야 협박하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스토킹 행위가 점점 더 악질적으로 변하자 부모가 경찰을 찾아갔지만, 담당자는 여러 달 동안 피해 심고서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고, 수사 결정을 하고 나서 얼마 뒤 살해당했다. 언론은 경찰의 부실 대응으로 인해 여대생이 목숨을 잃었다고 몰아붙였고, 경찰 조직 전체가 거센 비난에 휩싸이게 된다. 거기다 경찰이 신고 접수를 미룬 이유가 직원들의 워크숍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찰서에는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항의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한다. 




현경 홍보과 직원 모리구치 이즈미는 사건을 단독 보도해 특종을 얻은 요네자키 신문사의 기자이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쓰무라 지카를 의심한다. 경찰 내부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기사화되었으니 말이다. 이즈미와 지카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둘 다 모자 가정이라는 공통점으로 더욱 가깝게 지냈던 친구 사이다. 대학을 진학한 뒤로는 소원해졌다가, 두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재회하게 되면서 이제는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사이였다. 저녁을 먹다가 자신이 무심코 워크숍 건에 대해 말을 했었고, 절대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도 했었다. 그런데 이 사단이 났으니 이즈미 입장에서는 친구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카는 자신이 기사를 쓰지 않았다며, 이 일에는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으니 자신이 조사해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 지카는 강 하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고통스러운 숨 사이로 간신히 짜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헨미는 눈앞에 놓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잔이 비었다. 이소카와가 술을 채웠다. 

이소카와가 따라 준 술을 단번에 비운 헨미의 고개가 푹 꺾였다.

"넌 이 일에 더 이상 깊이 개입하지 마."

그건 불가능하다. 절친이 살해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이즈미를 생각하면 여기서 손을 뗄 수는 없다.              p.265


이즈미는 친구의 말을 믿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지카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으로 그녀가 죽기 전에 무엇을 조사하고 있었는지 추적해보기로 한다. 분명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지카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오명을 벗기 위해 그 점을 조사할 거라고 말했었다. 절친을 잃었다는 슬픔보다 절친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물론 자신은 형사도 아니었고, 지카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이 최선을 다해 수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짝 친구였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건을 추적하는 주인공이 형사도 수사관도 아닌 경찰 홍보과의 사무직원이라는 점이 진실을 향한 추적을 더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게 해주었다. 경찰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내부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약간의 거리감과 피해자의 친구라는 입장에서 정의를 밝히고자 하는 마음이 서사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작품이었다. 



<고독한 늑대의 피>, <반상의 해바라기>, <최후의 증인> 등의 작품으로 만났던 유즈키 유코의 신작이다. 여대생 스토킹 살인 사건, 경찰서 출입 기자의 죽음, 기자가 접촉을 시도한 여성의 자살, 신문의 특종 기사와 제보자, 사이비 교단의 존재 등 각각의 사건은 끊어질 듯 가늘면서도 몹시 억센 실로 이어져 있는 듯 연결되어 있다.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그것들을 연결하는 실은 뚜렷이 보이지 않는데, 흩어진 조각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경찰이 아닌 여주인공은 과연 이 조각들을 연결하는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유즈키 유코의 기존 작품들이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강했는데, 이 작품 역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탄탄한 미스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뜨겁고 치열한 남성 주인공이 많았다면, 이번에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워 죄책감과 의심, 진실을 향한 추적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죄와 맞서는 일에는 늘 부조리한 면이 섞여 있다. 범인이 확실한데도 증거가 불충분해서 체포하지 못하고 풀어 줘야 할 때도 있고, 범인을 체포하고 송치하더라도 기소까지 못 갈 때도 있다. 공판까지 원활하게 진행되더라도 말 도 안 되게 가벼운 형이 선고될 때도 있다. 선과 악을 단순하게 나눌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애쓰는 것이 삶이라는 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벚꽃이라는 암호명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이 궁금하다면,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찰소설을 읽어 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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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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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는 순간 드러나는 거대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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