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도시 - 역사, 예술, 문화, 미식을 넘나드는 인문 기행
김지윤.전은환 지음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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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동이 준비되면 허리가 굽은 종업원이 다정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그 단순한 순간에 찾아오는 무장 해제된 것 같은 감각이 좋다.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토의 노포 식당을 찾다 보면, 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가끔 찾아오는 여행객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조금 더 젊었던 그들의 모습과 또 조금 더 젊었던 우리의 여행이 남아 있다.              p.61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완전히 낯선 곳에 있을 때 발견하게 되는 내 모습이 한국에 있을 때의 나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여행자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자신 안에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탈로 칼비노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그렇게 여행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된 두 저자가 들려주는 세계 각지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권력이 예술을 사랑했던 순간들이 남아 있는 도시 피렌체, 사람들로 붐비는 명소보다 조용한 골목에서 더 잘 보이는 교토, 지루하다고 믿었던 도시의 반전을 보여주는 워싱턴 D.C., 그리고 불세출의 화가들을 낳은 도시 암스테르담 등 이 책은 8개 도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볍게 읽히는 여행 에세이 같으면서도, 도시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깊이 있는 내용들이 가득해 인문학서로도 훌륭한 책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이 책이 색다른 가이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명하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가기 때문에 정한 여행지에 대한 흔한 정보가 아니라,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줄 테니 말이다. 두 저자가 들려주는 세계 각지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와 예술, 문화와 미식을 넘나들며 8개의 도시를 우리가 알고 있던 그것에서 보다 입체적이고 넓게 시야를 확장해준다.




세계에는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도시들이 몇 있다. 파리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냄새가 좀 날지언정, 일단 너무 예쁘지 않은가. 그런데 낭만과 로맨스가 넘실거리는 파리는 사실 19세기 중반 이후에 완성된 도시다. 중세 시대의 파리는 어둡고 비좁으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로 가득한 곳이었다. 제대로 된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악취가 심했고,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목조 가옥들은 화재에도 취약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미로 같은 골목길이 있었기에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볼 수 있듯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p.194


많은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곳으로 여겨지는 피렌체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이다. 문화적, 역사적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도시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문 간의 암투가 얽혀있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피렌체는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꽃의 도시였다가, 어느새 압도당하는 마성이 도시이기도 하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 관한 정보를 알고 나서 여행하는 피렌체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피렌체는 단순한 행정 지역이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알아가면 갈수록 더 재미있는 여행지가 될 것이다. 피렌체뿐만 아니라 교토의 ‘금각사’가 소설의 소재가 된 배경, 왕조와 종교, 갈등의 드라마가 펼쳐진 에든버러, 정치 도시 워싱턴 D.C의 또 다른 모습, 지금의 주식 열풍을 만들어낸 네덜란드,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이라 불렸던 상하이 등 가볍게 산책처럼 시작해서 깊이 있는 지식 인문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저자는 30년지기 친구이자 함께 유튜브를 운영 중인데, 정치학 박사와 국제 경영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배경만큼 밀도 있는 사유와 지적인 수다를 보여준다. 이 책 덕분에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하게 될 도시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사람의 여행이 저마다 다른 모습이며, 한 사람이 같은 도시에 다시 갔을 때 얻는 경험도 매번 달라지는 것처럼, 도시를 경험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다양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 넓어진다면, 그 여행길이 조금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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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예술가들 - 변기에서 바나나까지, 100년의 창작 전쟁
캐슬린 김 지음 / 작가정신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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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87억 원짜리 바나나는 그렇게 몇 초 만에 사라진다. 이 장면을 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웃었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예술이냐'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이 행위는 단순한 기행도, 돈 많은 컬렉터의 장난도 아니었다. 오히려 작품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행위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처음부터 사라지도록 설계된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개념 미술은 예술을 대상이 아닌 '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p..77


바나나 한 개에 87억 짜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2019년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처음 공개된 <코미디언>이라는 이 작품은 치열한 응찰 끝에, 약 620만 달러, 한화로 87억 원에 낙찰됐다. 작품의 구성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전날 인근 과일 가판대에서 구매한 바나나 한 개, 그리고 그것을 벽에 고정한 회색 덕트테이프가 전부다. 이 '바나나'의 구매자인 중국계 암호화폐 사업가는 낙찰 직후, 예상 밖의 행동을 한다. 벽에서 바나나를 떼어내, 껍질을 벗기고, 그대로 먹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87억 원짜리 바나나는 몇 초 만에 사라진다. 이것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념미술은 예술을 대상이 아닌 '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이나 기술, 물리적 완성도 등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던지는 질문, 즉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예술가와 작품은 전시장만큼이나 법정에 자주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이것도 예술이냐'라는 질문은 더 이상 조롱이나 논쟁의 언어가 아니라, 판결문의 첫 문장이 되었다. 이 책은 <월간미술>에 연재했던 '변호사 캐슬린 김의 예술법 세상'과 <매일경제>에 연재했던 '캐슬린 김의 예술 법정', 그리고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칼럼에서 시작되었다. '뜨거운 예술'이 '차가운 법'을 만나는 순간의 기록이라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외치고, 판사들은 그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고 답한다. 그런데 대체 예술의 가치는 누가 정할 수 있는 걸까. 치열한 공방 끝에 남는 것이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면, 법정에서 벌어지는 그 치열한 싸움은 무엇을 향해야 하는 걸까. 예술과 법이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어 보이는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 엄숙한 법정의 문을 열고 그 낯설고도 치열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AI가 그려낸 밤하늘에는 고흐가 정신병원 창살 너머로 바라보던 고독과 광기가 없다. AI가 묘사한 여인에게는 박수근이 화강암 같은 질감 속에 새겨 넣은 시대의 가난과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AI가 조합한 전쟁의 참상에는 피카소가 <게르니카>에 쏟아부은 분노와 시대정신이 부재한다. 예술은 데이터의 조합이 아니라 삶과 죽음, 환희와 고통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렇기에 AI는 인간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대체할 수는 없다.                 p.372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벌어진 일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전 세계 미술계의 큰손들이 모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차지하기 위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풍선을 놓친 소녀가 있었다. 하트 모양의 빨간색 풍선이 막 하늘로 떠오르려는 찰나를 포착한 뱅크시의 대표작 <풍선과 소녀>다. 이름 없는 반역자, 거리의 시인이자 체제의 적이라 불리는 예술가인 뱅크시의 작품이 자본주의의 성전인 경매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낙찰을 알리는 세 번의 타음이 울린 뒤, 경매장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캔버스가 액자 아래로 빨려들어가 파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이 절반쯤 잘려나갔을 때 기계는 작동을 멈췄다. 미술시장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작품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재창조했다고 주장하는 뱅크시의 기행을 비롯해 NFT를 팔기 위해 프리다 칼로 작품을 불태워버린 암호화폐 업자의 기괴한 쇼를 비롯해서 예술의 역사를 뒤흔든 브랑쿠시, 앤디 워홀, 클림트의 사건들과 AI가 만든 작품을 둘러싼 최신 사례까지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AI가 만든 결과물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소유자는 작품을 파괴할 권리까지 가지는 걸까. 예술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서부터 표절인 것일까. 이 책은 미술사의 운명을 바꾼 세기의 예술 재판들을 여섯 개의 법정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예술가의 평론가의 명예 전쟁, 무단 도용의 벽, 위작 논란, 파괴가 창조가 된 역설, 도난과 장물 스캔들, 블록체인 사기극 등 실제 사건과 판결을 살펴보며 법이 예술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난해한 법률 용어나 골치 아픈 미학 이론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라 예술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쉽게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 현대미술이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을 통해 미술관 밖에서 벌어지는 진짜 리얼한 예술 현장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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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곁에 두어 좋은 말 - 100년의 문학 작품에서 길어 올린 마음들
나민애 지음 / 북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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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뜨다, 달뜨다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비슷한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다른지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어려운 것을 글로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정리하려고 '들떴던 나'와 '달떴던 나'를 적어보았다. 그것은 사금처럼 추억에 묻혀 기다리고 있다가 단어라는 곡괭이에 의해 발견되고 만다... 소풍으로는 들뜨고 눈빛으로는 달뜬다. 들떴던 것이 언제인가. 달떴던 것은 언제인가. 둘 다 어리거나 젊은 단어다. 나이 든 사람이 그리워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단어인 셈이다.                p.17


올해는 한글날이 제정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나민애 서울대 교수가 한국 문학 100년의 작품들에서 유정한 단어들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그렇게 142명 작가의 142개 단어를 모으고, 단어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이다. 홍안, 여리다, 숙맥, 어수룩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도 있고, 물큰물큰하다, 멍멍히, 섧다, 홉뜨다, 동탕하다 등 처음 접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어떤 기회가 자꾸 닥쳐오는 모양을 '하마하마'라고 표현한다는 것도 배웠고,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흔흔하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모은 단어들을 5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나를 선연하게 만드는 단어, 다사로운 당신에게 건네는 단어, 잠포록이 평온한 하루를 위한 단어, 시나브로 흐르는 삶에 관한 단어, 그리고 찬연한 자연이 빛나는 단어이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장면처럼 무서웠거나 강렬했던 것, 아름다웠거나 지나칠 수 없었던 것들만이 선연하게 남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정도가 내 마음의 정도인 것이다. 나에게 선연했던 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지금 내게 무엇이 선연한가. 생각하며 읽어 보았다. 흥미로운 단어들이 많았지만,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낀다면 온 세상이 내게 불친절하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이방인적인 내면을 갖췄을 때 반려를 발견하기 좋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두 낯설고 적대적일 때, 그렇지 않은 한 사람이 발견된다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로맨틱하면서도, 절실하게 할 수 있구나 싶어 감탄하며 읽었다.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는 열나지 않았고, 고향에서는 급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남편은 예상되는 시간에 퇴근했고, 아이들은 인사를 대충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하루 더 입을 수 있었고, 급히 사야 할 세제도 치약도 없었다. 그 밥솥에서 그 주걱으로 밥을 푸고 그 식탁 그 자리에서 가족과 밥을 먹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도 물었고 그제도 물었던 것을 물어봤다.... 쨍하니 기쁠 일은 없었지만 잠포록이 맑고 평온했다.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p.181


스마트폰과 SNS 덕분에 말 대신 문자로 대화하는 게 더 많아졌고, 각종 줄임말이 등장하며 사람들은 점점 더 간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단어 사용 역시 제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보도 기사에서 14년간, 한 개인이 하루 동안 직접 말하는 단어의 양이 매년 338개씩 꾸준히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그렇게 깊은 고민 없이 무심코 쓰게 되는 단어들, 점차 증발하고 획일화되는 단어들을 보다 소중하게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어들은 '네 마음을 내가 다 안다, 대신 말해주겠다'고 속삭여 주었다. 각각의 단어들에 담긴 뜻과 단어가 사용된 문장, 그리고 저자의 글이 어우러져 한 단어의 인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백하고도 마흔두 개의 인생이 담겨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루에 사용하는 총 단어의 수는 약 1만 5,000개. 그중 중복되는 단어를 빼면 약 2,0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구나 싶어서 놀라웠던 수치다. 늘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한 단어들만 사용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하나씩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글에 대해 더 소중한 마음으로, 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단어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저자의 글이 에세이처럼 술술 읽혀서 더 공감되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가끔 일상에서도 어떤 단어는 사전적 정의 그 이상의 뜻을 포함해야만 의미가 전달될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그려내는 책이었다. 어떤 단어는 추억에 잠기게 만들고, 어떤 단어는 재미있어서 입가에 맴돌고, 예뻐서 눈이 가는 단어도 있고, 마음이 쓰여 곁에 두고 싶은 단어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곁에 오래도록 두어도 좋은 나만의 단어들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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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 인문학 - 고고학자가 파헤친 숟가락과 젓가락의 2만 년 연대기
오승환 지음 / 창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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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흔히 수저의 사용을 문명의 척도로 여기곤 합니다. 고대 중국인들 역시 젓가락을 쓰는 문명인과 그렇지 않은 비문명인으로 구분하며 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국 식사 예법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조차 밥을 손으로 뭉쳐 먹었습니다. 결국 음식을 손으로 먹는 것은 '옳고 그름'이나 '문명과 야만'과 같은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p.29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음식 고고학'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라진 고대 문명과 수천 년 전에 죽었던 사람의 시신, 유물 등을 토대로 인류의 기원과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 고고학이다. 음식 고고학은 이러한 고고학적 관점에서 음식과 관련된 유물 및 식생활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라고 한다. 숟가락이나 젓가락 같은 식기류를 통해 수만 년 전의 문명사를 추적하고, 유물을 발굴해 옛 사람들의 식생활과 생활 방식, 문화 등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30년 넘게 발굴 현장을 누벼온 현역 고고학자로 화려한 금관보다 옛사람의 삶과 음식에 매료되어 '음식고고학'이라는 분야를 20년 넘게 개척해 왔다. 


이 책은 우리가 매일 무심코 집어 드는 숟가락과 젓가락의 발자취를 따라 가며 역사와 음식 문화를 조명한다. 사실 나도 저자처럼 '수저'가 '숟가락'과 같은 뜻이라고 그 동안 생각해 왔다. 수저를 숟가락의 줄임말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수저'란 '숟가락'과 '젓가락' 한 벌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수저를 세는 단위도 많이들 헷갈려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모두 갖춰진 온전한 상태를 '한 벌'이라 부르며, 숟가락은 혼자도 제 기능을 하므로 낱개는 '한 개', 젓가락은 둘이 함께 짝을 이루어야 하니 '한 쌍'이라고 해야 한다. 이 책은 이렇게 수저의 진짜 이름과 유래에 대해 살펴본 뒤, 본격적으로 옛 밥상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식사 도구가 '손'이었다는 것부터 시작해 왜 인류의 절반은 아직도 맨손으로 음식을 먹는가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수저나 포크 대신 맨손으로 식사를 하는 나라고 지구촌 인구 가운데 무려 40퍼센트나 된다고 하니 놀라웠다. 수저, 맨손, 젓가락, 포크 나이프로 나누어 음식문화권을 지도 상에 색상으로 구분했는데, 손으로 식사하는 꽤나 많았다. 수저의 사용을 문명의 척도로 여겨선 안된다는 뜻이다. 




고고학자들은 "모든 증거는 유물"이라 말합니다. 저 역시 젓가락이 보이지 않으니 "정말로 사용했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물이 없으니 존재하지 않았다"고 쉽사리 단정 짓기에는 무언가 이상합니다. 젓가락은 앞선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고, 뒤이은 고려시대에도 보이는데 유독 통일신라에서만 '일시 정지' 상태라는 게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 고민은 통일신라시대에만 해당하는 건 아닙니다.              p.321 


이 책을 읽다 보니, 음식문화는 누가 더 우월하고 미개한가를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철석같이 '예의'라고 믿었던 행동조차 타인의 밥상 위에서는 이상한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일본 사람들은 밥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그릇은 상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식사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서로의 밥 먹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다는 두 나라 사이에도, 밥을 먹는 사소한 자세 하나에 거대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류는 구석기시대부터 숟가락 모양 도구를 만들어 썼다. 고고학자들은 과연 이것이 '진짜 음식을 떠먹는 도구'였는지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말이다. 사진 자료들을 보니 실제로 너무 숟가락 모양의 도구라... 인류 최초의 식사 도구가 아닐까 싶긴 했다. 신석기시대에 발견된 뼈도구는 젓가락의 시초처럼 보인다. 실물을 보면 젓가락보다는 오히려 가죽에 구멍을 뚫는 송곳이나 머리 장식, 또는 그물을 수선하던 도구일 가능성도 충분했다고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식사 도구로서 기틀을 잡기 시작한 것은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 때부터이다. 이런 식으로 숟가락과 젓가락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식탁에 자리 잡기까지의 긴 여정을 추적하는 이 책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식사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준다. 일본 젓가락이 식탁에 가로로 놓이게 된 배경, 한국인이 유독 쇠젓가락을 쓰게 된 이유 등 다양한 궁금증도 해소시켜 주었고, 한국, 중국, 일본의 음식 문화가 갈라지게 된 과정도 만날 수 있었다. 고고학자가 들려주는 유쾌한 밥상머리 수다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음식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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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서 ㅣ 암실문고
브라이언 딜런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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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린 시절의 사물들과 이후 그것들이 불러 낸 분신들 사이의 은밀한 친연성을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 삶이 그런 멜로드라마처럼 거창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삶은 사물들 사이의 숨겨진 상응 관계, 또한 어느 시기와 다른 시기 사이의 은밀한 공모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런 연결들은 오직 우리가 하나의 대상에 집중했을 때에만, 즉 그것을 '이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상상 속에서 떠올려 볼 수 있는 다른 대상과 견주어 보는 순간'에만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p.108~109


하나의 문장이 감정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문장은 단어들을 배열해 내용을 서술하는 것인데, 감정 그 자체가 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브라이언 딜런의 글을 읽다 보면 종종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을 읽다 종종 멈추곤 한다. 단순한 문장조차 수차례 다시 보게 만들고, 마구 펼쳐지는 생각의 향연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에세이즘>, <한 문장이 있다고 해보자>를 통해서 만났던 브라이언 딜런의 데뷔작이 암실문고로 나왔다. 전통적인 비평과 자전적 글쓰기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글쓰기를 선보여왔던 그의 전작들을 인상깊게 읽어왔기에, 그의 데뷔작인 이번 작품도 매우 기대하며 읽어 보았다. 


이 책은 브라이언 딜런이 처음으로 쓴 것으로 부모의 죽음을 계기로 기억과 상실에 대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억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루는 인문학처럼 읽힌다. '애도라는 두터운 관문 너머에 숨겨져 있는 밀실이 그의 기억 저장소이다. 그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장벽이 철저히 밀봉된 방을 만들어 냈다고, 고 썼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집을 떠올리고, 그 속에 있던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한다. 집이란 우리가 매일 같이 만들어 내고 다시 만들어 가는 무엇이다. 집에 산다는 것은 어떤 장소를 부단히 개조하고 재구성하고 잊었다가는, 다시 떠올리면서 끊임없이 변화를 주는 것이다. 집을 기억의 저장소로 여기는 관념은 오래된 것인 만큼 익숙하면서도, 일종의 가정 고고학으로서 풀어 나가는 브라이언 딜런의 문장들은 그것을 낯설고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우리가 고집스레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의 증거일 뿐이다. 그 움직임이 남긴 흔적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 곳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새겨져, 우리에게 유익하게 쓰이거나 강렬한 깨달음을 준다. 시곗바늘의 움직임, 계절들이 내보이는 생동감이나 나른함, 얼굴이나 몸에 나타나는(아주 점진적일 수도, 반대로 아주 빠를 수도 있는) 노화의 흔적 같은 것들.                 p.375


이 책은 브라이언 딜런이 십 대 중반일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대학 입학 직후에 갑작스러운 심장 문제로 작고한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담고 있다. 아버지의 서재와 거실 한구석에 있는 키 큰 장식장, 유품상자와 사진 더미들, 어머니의 성경책과 그 속에 끼워둔 내용물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물려받은 물건들은 과거로 이어지는 끊기지 않는 통로가 되어 준다. 공간이나 사물이 매개체가 되어 과거의 마음들을 불러내고, 이해와 수수께끼 사이를 오가며 지적인 사유가 펼쳐진다. 사진에 관련된 사유들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는 우연히 사들인 관광지 사진첩 속에 있는 한 여성의 뒷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치 어머니가 그곳에 마치 기적처럼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부모님의 사진들 중 대부분은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뒤에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대상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서재에 대한 에피소드도 매우 흥미로웠다. 아버지가 소장했던 대략 천 권 가량의 장서들은 어린 시절부터 강렬한 존재감을 지녔던 대상이었다. 그 서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모종의 형태를 부여하려 애써 온 방식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견고하게 구현한 장소'이기도 했다. 백 권도 넘는 책을 손에 닿는 곳에 위태롭게 쌓아 두려는 아버지의 행동은 어머니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지만, 그에게는 끊이지 않는 경이로움을 선사하는 원천이었다. 서재의 책과 오래된 기록 뭉치들이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관한 아카이브가 되어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이미지를 구축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자신의 책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아버지의 책을 보면서, 자신이 뒤늦게 아버지의 정리 원칙을 물려받았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무질서한 서재를 자신이 정확히 똑같이 재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그 동안 읽어왔던 '회고록'과는 차원이 다르다.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여러 번 읽어 곱씹어 보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했다. 자, 폄하되거나 오독되어 왔던 에세이라는 장르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브라이언 딜런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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