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스러운 돌봄 - 잘 키우려 할수록 나빠지는 불행에 대하여
신성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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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세상에 부모 마음 다 같은 마음'이라 해도 모든 부모는 부모이기 전에 시민이고 개인이다. 자식 또한 부모의 분신이 아니라 고유한 타인이다. 우리는 아이와 좋은 이별을 맞기 위해 사랑한다. 사랑을 줄 수 있지만 생각을 심을 수는 없다. 부모이기 전에 각자의 '나'들이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돌보는 그 마음을 돌이키기를 제안하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뿐 아니라 우리를, 이 사회를 함께 돌아보면 돌봄이 조금은 덜 힘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p.7


아무리 많이 공부하고, 책을 읽으며 준비하고, 타인으로부터 조언을 들어도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바로 돌봄, 육아가 아닐까.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으며, 세상의 속도를 아득바닥 따라잡아야하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며, 불안과 공포는 익숙한 감정이 된다. 온갖 매체에서, 각종 책에서 육아에 관련된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이지만, 사실 이론으로 배우는 육아 정보란 현실에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기 전부터 수많은 육아서들을 섭렵했지만,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 적은 거의 없었다. 아이는 언제나 내 맘 같지 않고, 어디선가 배운 대로 아이에게 잘해보려고 해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마음의 여유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저 아이가 안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잘 키우고 싶은 것뿐인데, 왜 이리 챙겨야 할 것도 많고, 눈치봐야 할 것도 많으며,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아등바등 쫓아가야 하는 것일까. 전작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로 아픈 딸을 간병하며 돌봄을 둘러싼 사회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던 신성아 작가는 이 책에서 내 아이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사회의 불안과 결합해 ‘탐욕스러운 돌봄’이 되는지 짚는다. 저자는 정성과 유난, 책임감과 욕심은 그 경계가 모호하고 기준도 저마다 다르기에 무결하고 이상적인 돌봄이란 성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진심을 욕심이라 부르면 탐욕스럽지 않은 돌봄은 없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돌봄의 어려움은 개인이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당장 해결되거나 개선될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답답해지기도 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대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 더이상 내게 없기에 간절하고, 유한하기에 애틋한 것이다. 그러나 형태를 잃었어도 사랑은 오랫동안 온존할 수 있다. 기억은 사건을 연결하고, 관계를 완성하며, 서사를 완성한다. 페이지를 넘겼다고 앞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내가 사랑했던 아이는 우리 이야기 속에 계속 남아 서사를 끌어간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미래의 우리가 기억하고 다시 부를 옛 시절이 될 것이다. 아기에서 아이로, 소녀로, 미성년으로 커가는 아이의 성장 궤도는 마치 나선형 계단 같아서 아래를 보지 않고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p.166


이 책은 사적인 헌신에 가두지 않고 모두의 책임으로 재사유하자고 제안한다. 저자와 그의 아이가 겪는 개인적 경험들은 사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거나, 고민해봤을 법한 문제들이라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수시로 돌발한다는 점, 우리는 부모가 줄곧 아이를 관찰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도 부모를 관찰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아이와 엄마의 관계 역시도 결코 쉽지 않다. 정답이 없는 문제가 대체로 그렇듯 나만의 답을 찾는 데는 늘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는데, 엄마로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왔지만 아직도 쉽지 않다. 그래서 더 이 책이 와 닿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딸맘들은 딸의 독박 육아를 한탄하고, 아들맘들은 아들이 결혼할 때 집 한 채 해주지 못하는 상황을 비관한다. 한정된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자식 세대를 위해 구조적 성차별과 역차별을 거론하며 입씨름을 계속하며, 모든 제도들이 오로지 당장 나에게, 혹은 우리 딸이나 아들에게 유리한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계량되고 판단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작 이러한 불행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국가와 사회가 뒷짐 지고 있는 동안, 애꿎은 개인들만 싸우고 서로에 대한 혐오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 한국 사회 돌봄의 구조적 결함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최소 두 번은 돌봄이 필요하다. 취약할 수밖에 없는 미성년과 노년의 삶만큼은 차별 없이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소수의 탐욕 앞에서, 경제적 쓸모를 낼 수 없는 이들은 한없이 무력해진다. 사랑이 경제로 환원되면서 발생하는 돌봄의 양극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책 속에 담긴 내용들은 지금도 누군가는 겪고 있는 일이며, 우리 모두 언젠가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안이 아니라 밖을 향해야 하는 돌봄의 의미에 대한 사회적 확장이 필요하기에, 더욱 의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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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자 뱀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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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들수록, 마틸드의 보호막은 갈수록 완벽해진다.

동작은 굼떠지고, 시력은 약해지고, 조금만 더워도 땀을 뻘뻘 흘리고, 차창에 눈을 바짝 들이대고 운전하는 그녀가 실제로는 어떤 존재인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누구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p.88


포슈 가 한복판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피해자는 프랑스의 거물 실업가 모리스 캉탱이다. 살해된 방식을 보면 격한 감정에 의한 범죄라고 보여졌다. 대구경인 44밀리 매그넘을 사용했고, 소음기를 사용했기에 계획적인 살인이었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살인, 거의 전문가에 가까운 자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형사 바실리에브는 생각한다. 함께 있던 닥스훈트도 살해되었는데, 모두 총구를 몸에 바짝 들이대고 쐈다는 건 명백히 어떤 강한 증오, 파괴의 욕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앙리는 거실의 안락의자에 앉아 자정 뉴스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TV 뉴스 주요 타이틀이 시작되자마자 쉰 살가량 된 남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난다. 살해된 모리스 캉탱이었다. 범죄 자체만큼이나 끔찍한 것은 그것이 실행된 방식이다. 캉탱은 여러 발의 총알을 맞았고, 그 중 한 발은 목 한가운데 맞아 머리가 거의 날아가 버렸다. 앙리는 한숨을 내쉬며 욕설을 내뱉는다. 이건 그가 원하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순 셋인 마틸드는 세월과 함께 몸 전체가 조금씩 느슨해졌지만,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하다. 물론 체중이 많이 늘었고, 과거의 아름다움은 흔적을 감췄지만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노년 여성처럼 보이는 마틸드는 사실 레지스탕스 출신 '킬러'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목표를 살해하고, 흔적도 없이 움직이며, 교묘하게 수사망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작업을 하면, 한 발도 총알이 빗나가는 법이 없고, 아무 문제 없이 깨끗하게 일이 처리되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계획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교통 체증이 없다는 방송을 듣고 고속 도로에 들어섰으나 차들이 엉금엉금 기고 있는 상황과 마주하게 되었고, 겨우 시간에 맞춰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평소처럼 한 발로 일을 끝내지 않았고, 함께 있던 닥스훈트까지 처리해 버리고 말았다. 무기를 처리하는 방식도 평소와 달랐는데,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최근 그녀에게 조금씩 기억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통제를 벗어난 그녀가 조직의 위험이 되면서, 결국 타깃이 되기에 이른다. 과연 마틸드는 경찰의 수사와 조직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일어나게 될 일은 불가피하다.

결코 풋내기가 아닌 뷔송이 당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삶이 그에게 가르쳐준 것은, 일이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 집에서 자신을 완전히 보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흡연을 마치며 그는 어느 정도 운에 의지해야 하리라는 다소 체념 어린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그는 차고로 가서, 소소한 것들을 수리하는 작업대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꺼낸다.                p.276


이 작품은 피에르 르메트르의 미발표 초기작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를 매우 좋아한다. 시리즈 외에 스탠드 얼론으로 발표했던 추리소설들도 모두 다 읽었고,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추리 장르를 벗어나 쓴 작품인 <오르부아르>로 공쿠르 상을 수상하고, 문학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뒤로는 더 이상 추리소설들을 발표하지 않아 매우 아쉬웠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에 집필한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너무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의 추리소설에서는 항상 개성있는 캐릭터가 등장했었다. '카미유 베르호벤' 시리즈의 카미유 베르호벤 반장은 키가 14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단신으로 화가였던 어머니가 임신 중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댄 탓에 영양 장애성 발육부진의 결과라고 한다. 아들보다는 자신의 예술세계에만 관심이 있었던 어머니 덕에 외롭게 자랐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 작품의 형사 바실리에브는 193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지고 있는데, 근육이 거의 없어 마르고 후리후리한 체형이다. 그는 아빠에게서 외형적인 부분을, 엄마에게서는 약간 무기력한 성향, 무한한 인내심, 그리고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직함을 물려받았다. 


노년의 여성 킬러 마틸드 또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그녀는 아무런 가책없이, 누구에게도 예외 없는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이는데, 그런 면모는 정말 냉혹하게 그려진다. 폭력이라는 것이 자신이 아직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일 뿐이기에, 기능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할 때 외에는 개를 산책시키며 일상을 살아가는 너무도 평범한 할머니처럼 보인다. 순수한 폭력성이 주는 쾌감과 냉혹한 행동에서 전해지는 불편함을 적절하게 느끼게 해주는 캐릭터이다. 반면 임무를 성공한 후에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으로 건강상 먹어서는 안 되는 정어리와 빵을 먹는 모습 또한 마틸드이기에 앞으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는 불안감도 서사에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 작품을 미성숙한 시절의 결점들을 고치지 않고, 처음 집필했던 그대로의 상태로 출간했다고 하는데, 너무나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작품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본격 문학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더 이상 추리 소설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의 초기작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언젠가 누아르 신작을 또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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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스크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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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정확하게, 잠시나마 주변 세계와 서로에게 나란히 맞닿아 있는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다미라는 자신이 돌보던 느리지만 우아한 코끼리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녀가 구 아르바트 거리에 서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었다. 개체수는 멸종을 향해 달려가고 모든 죽음은 찢어진 구멍으로 세상에 남았다.            p.37


다미라 박사는 코끼리 행동 연구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멸종을 향해 달려가는 코끼리들을 지키기 위해 밀렵꾼들과 맞서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한 세기가 흐른 뒤 코끼리들은 모두 멸종해 전부 사라져버렸다. 과학자들은 멸종 생물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미라로 만든 표본에서 DNA를 사용해 '복원 매머드'를 탄생시킨다. 국립 보호구역을 만들어 매머드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번식하고, 어쩌면 잃어버린 생태계를 다시 설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매머드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매머드들은 풀어놓기만 하면 혼란스러운 상태로 돌아다니며, 무리를 짓는데 실패하고, 불필요하게 서로를 다치게 했다. 계절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열세 마리를 잃었고, 더는 야생에서 새끼가 태어나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매머드들을 구하는 걸 도와달라고, 다미라 박사의 기억을 소환한다. 코끼리 문화를 아는 유일한 존재인 다미라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매머드는 그냥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인간들 때문에 멸종으로 내몰린 거다. 현존하는 다른 모두 거대 동물처럼. 멸종의 원인은 딱 한 가지였다. 바로 인간의 탐욕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다미라였다. 과학자들은 다미라의 의식이 암컷 우두머리가 되어 매머드 무리를 이끌어 주기를 바랬다. 그렇게 복원 매머드의 몸에 이식된 채 되살아난 다미라의 의식체는 그들에게 매머드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고, 그들의 슬픔을 함께 느끼고, 그들에게 분노와 복수라는 감정을 가르친다. 인간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가 평화 대신 전쟁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소년이 저질러온 죄의 냄새.

...복수. 다미라가 무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그들은 이 소년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땅에 마구 문지르고 더는 인간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밟아 뭉개버릴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때까지.

소년이 연루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었다. 코욘을 위해. 예케낫을 위해.                p.152


여기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피 냄새를 풍기며 총을 쏘고, 무고한 생명을 해쳐 탐욕을 채우려는 인간과 공감할 줄 알고 용감하며,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맞서 싸우는 인간. 자, 포식자로서의 인간과 수호자로서의 인간, 당신은 어느 쪽인가. 놀라운 데뷔작 <바닷속의 산>을 썼던 레이 네일러의 신작이다. 전작에서 언어에 대해서, 소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사로 그려냈었다면, 2025 휴고상을 수상한 이번 작품에서는 인간의 탐욕을 보다 밀도 높은 서사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오백페이지가 넘는 전작에 비해 분량은 반도 안 되지만, 더 아름답고, 더 깊고, 집요하다.


레이 네일러는 데뷔작인 <바닷속의 산>을 읽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작가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번째 소설인 <터스크>로 

2025 휴고상을 수상했다. SF 소설이 아니라 한 편의 과학 서적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들었던 전작이 너무 좋았기에, 이번 신작도 굉장히 기대하며 읽었다. 전 세계적 멸종 위기종인 코끼리의 엄니를 얻기 위해 자행되는 집단 학살 행태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이 작품은 레이 네일러 특유의 철학적이고 서정적인 필치로 느리고 장엄하게 흘러간다. 멸종된 고대 생물 매머드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란, 더 없이 잔인하고 이기적이다. 그러니 매머드 무리가 인간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코끼리와 코뿔소를 밀렵하고, 상아와 뿔을 불법으로 거래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학살당하는 동물들을 외면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의 경이로움을 다루어 인류가 진정 '복원'해야 할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모든 걸 바로잡으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만큼이나 이 지구에 대한 권리를 가진 동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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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에 읽는 호주 범죄 소설사 한숨에 읽는 2
스티븐 나이트 지음, 장영필 옮김 / 글로벌콘텐츠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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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배경으로 한 다른 미스터리들처럼, 이 서사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범죄와 그에 따른 결말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일부 경찰의 개입이 있지만, 그들은 사건이 일어날 때만 나타나는 부패한 형사 메들이 이끌고 있다. 이 소설은 매해 가장 큰 경기인 멜버른 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며, 부패한 형사 메들은 지역 인물이 관여하는 큰 사기 사건에 휘말린다. 이것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이야기 줄기로 덥힌다.              p.115


'조 올로클린 시리즈'로 국내에도 꽤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는 마이클 로보텀을 좋아한다. 그는 실제 호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쓰기도 했고, 심리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구성, 문장, 복선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데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독보적인 아우라가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챙겨보는 작가이다. 그래서 호주의 범죄 소설하면 마이클 로보텀부터 떠오르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있었겠지만, 바로 떠오르는 다른 작가가 없는 것처럼 호주의 범죄 소설이 유독 많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궁금해졌다. 


이 책은 1818년부터 2017년까지의 호주 범죄 소설사를 정리한 것이다. 호주 문학계 최초로 200년에 걸친 범죄 소설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탐구한 책이라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사실 범죄 소설이라는 장르는 영국과 유럽, 미국, 혹은 일본, 중국 쪽이 다 이야기할 거리가 많겠지만 말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차별점은 ‘호주’라는 지역성과 역사성을 중심에 두고 장르를 조망한다는 점이다. 900여 편의 작품을 시대, 주제별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는데, 책 좀 꽤나 읽은 독자인 나에게도 낯선 작품들이 훨씬 더 많아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소개되고 있는 다양한 작품들은 문학적 가치와 호주 내 독자들의 반응에 근거해 다루었고, 호주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영향력을 가진 작품들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지나치게 정보성 위주로 쓰여 있는 책이라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다기 보다, 소설사를 시대순으로 정리한 논문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호주 범죄 소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작품의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이중 구조와 더불어, 이 작품은 이전 작들에 비해 빠르게 전개되지만 일반적인 하디 스토리가 가진 복잡한 모델은 드물다. 주인공의 개인적 생활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이 이야기 속 여인과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바비의 여아친구와 나누는 허위적 애정 관계 사이에 있다... 즉, 그는 여자들에 빠지지 않고 사건 본질에 충실했다.           p.406~407


1788년 호주가 식민지로 정착하게 된 기반이 '범죄'였다고 한다. 영국 정부 입장에서 호주는 한번 보내면 안 보여 좋은 범죄자들을 위한 유배지였기 대문이다. 그렇게 대영제국의 새로운 해외 식민지이면서 죄수들이 넘쳐났던 초기 호주 사회가 호주의 범죄 소설이 출발하게 된 계기가 된다. 호주 범죄 소설의 가장 초기 사례는 강력한 수사력을 필요로 하는 공권력 도는 수사 담당자라는 존재도 없이 범죄 사건들을 다루고, 그 결과들을 기록한 범죄 소설이었으며 문학적으로 자리하지 못한 하위 장르였다. 감옥에서 탈출한 죄수들의 성공신화, 불합리한 수형 제도 아래 부당한 판결을 받은 이들의 사연에서 시작해 이후 부유한 자유 정착민과 무법적으로 금광을 찾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스릴러 소설이 나왔고, 멜버른을 배경으로 한 퍼거스 흄의 베스트셀러인 도시 범죄 소설로 확장된다. 참고로 퍼거스 흄의 작품은 국내에 출간된 크리스마스 앤솔러지인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스터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호주 범죄 소설의 문학적 가치는 매우 미약했으나, 1980년대부터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범죄 소설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도 1980~1999년대를 다룬 장이 가장 분량이 많다. 사설탐정, 경찰, 범죄 소설, 아마추어 탐정, 사이코스릴러, 원주민 범죄 소설, 역사적 범죄 소설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호주만의 독보적 양식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준다. 2000~2017년까지를 다루고 있는 장에 이르면 드디어 알고 있는 작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브로큰 쇼어>라는 작품을 쓴 피터 템플이다. 이 작품이 나왔던 영림카디널의 블랙 캣 시리즈에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현재는 모두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책은 2017년까지의 작품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의 작품들이 언젠가 추가된다면 조금 더 대중적인 느낌으로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범죄 소설은 당대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주 범죄 소설을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국가적‧사회적 현실을 비추는 강력한 문학 장치로 진지하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범죄 소설을 좋아한다면, 호주 범죄 소설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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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
권성욱 지음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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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힘 있는 자들을 위한 기록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동안 우리가 미국 이외의 세상에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솔직히 미국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 반쪽 역사라는 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쪽은 그동안 망각했던 나머지 반쪽의 역사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약소국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미국, 영국, 소련, 독일 같은 <메이저> 이외에 많은 <마이너> 국가도 전쟁의 한 축을 맡았다.             p.23


2022년 2월 24일 새벽 4시, 20만 명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코로나의 여파 속에서 개막한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며 막을 내린 지 불과 한 달여 뒤였기에, 세계는 더욱 충격에 빠졌다. 스탈린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예측 불허인 푸틴은 80여 전 스탈린이 그랬듯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외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들이 무차별 폭격을 당했고,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잇따랐다. 그때만 해도 우크라이나가 질 것이 뻔한 싸움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 아니라 화근을 자초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어리석에 잘못이 있다고 미국과 서방은 생각했다. 하지만, 단 사흘이면 푸틴의 승리로 끝날거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우크라이나 지도자인 젤렌스키는 마지막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했고,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 벌어진 미국 이란 전쟁도 누가 이길지 뻔하지만, 장기화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동서고금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은 약소국의 공통된 숙명이다. 중국 춘추 전국 시대 국가 간의 온갖 모략과 암투가 있었던 때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 외교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특히 인류 최악의 전쟁이라는 제2차 세계 대전은 서구 열강과 약소국들의 민낯을 그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전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제2차 세계 대전은 강대국을 위한 역사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주만>, <더 퍼시픽> 등의 블록버스터 영화뿐만 아니라 시중에 나와 있는 주요 도서들 모두 주요 강대국들의 서사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영국, 소련, 독일 외에도 수많은 약소국들이 전쟁의 한 축이었다. 약소국이라고 해서 마냥 무력한 존재도 아니었고, 강대국들이 쓰다 버리는 장기판의 졸도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약소국들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떻게 싸웠는지 그 동안 우리가 간과했던 역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제는 전쟁에서 빠져나와야 할 때였다. 문제는 과연 빠져나올 수 있을지였다. 1918년에 불가리아의 항복을 시작으로 동맹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던 것을 기억하는 히틀러는 연합국과의 단독 강화를 시도한 이탈리아와 헝가리에 무자비하게 철퇴를 휘둘러 본보기로 삼았다. 불가리아는 진작부터 중립국인 스위스와 튀르키예를 통해 연합국과 은밀하게 협상을 탕진하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조금이라도 낌새를 눈치챈다면 결단코 내버려둘 리 없었다.             p.900


저자는 수많은 세계사 관련 책을 써왔고, 개인 블로그인 <팬더 아빠의 전쟁사 이야기>를 통해 마이너한 전쟁사를 틈틈이 쓰고 있다.  그는 '강자의 이야기만으로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나머지 세계;를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을 다시 들여다 보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란 거대한 싸움을 승패라는 단일한 서사가 아니라, 여러 국가의 충돌로 발생한 연쇄적이고 다중적인 사건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전쟁을 주도한 강대국이 아니라,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제2차 세계 대전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현장감 있는 사진과 세력권 지도, 전쟁의 흐름을 보여 주는 자료들로 가득한 이 책은 976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로 읽기 전부터 압도감을 준다. 분량이 많은 것만큼 담고 있는 이야기도 밀도 높은 서사라 차근차근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약소국들은 전쟁을 시작하지도, 전쟁의 방향을 결정하지도 못하지만, 그 결과는 가장 먼저, 제일 무겁게 떠안아야 한다. 승자의 서사에 가려져 있던 약소국들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전쟁의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세계 2위의 군사 대국인 러시아를 상대로 4년이나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보며,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일상이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을 꼭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전쟁사라는 것이 결코 읽기 수월한 텍스트는 아니지만, 이 책은 약소국이 처했던 지정학적 위치와 세력 구도를 지도로 정리하여, 각 전선의 이동과 국가 간 역학 관계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보다 입체적으로 전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세계사,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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