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원에 드리는 보고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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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소설을 쓰게 된 후로 나는 줄곧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왔는데, 그것들은 주로 분노나 수치, 혐오와 죄책감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어렵고 고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또 그런 글들을 써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때때로 그것들이 그저 내 안에서만 해결되고 마는 감정은 아닐까, 의심이 들 때가 많았다. 누군가의 불쾌와 부끄러움을 그저 이해하고 헤아리는 일.            -'마음은 언제 휘어지는가' 중에서, p.50~51


소설가인 '나'는 K군에 위치한 작은 서점에서 북토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15번 국도의 한 터널에 막 들어설 무렵, 차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젊은 여자 유령을 발견하고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놀란다. 게다가 그 유령은 그날 있었던 북토크에서 만났던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모객이 안 되었던 그날 현장에 모인 독자는 총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과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요즘 소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독자의 말에 이십칠 년 차 작가인 '나'는 상처를 받고 발끈했던 것이다. 독자는 소비자일까, 심판일까, 그도 아니면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일까에 대해 고민하던 그에게 불쑥 독자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어떤 글도 쓸 수 없게 되는데... 과연 유령과의 기묘한 동행은 어떻게 끝이 날까. 


이기호 작가의 페르소나인 소설속 '이기호' 들은 정부청사 주차장에서, 경찰서 앞에서, 북토크 현장에, 그리고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트에서 밀키트를 사와서 요리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며, 욕실 바닥 청소와 베란다 청소도 했다. 계속 집안일만 하느라 짧은 소설 밖에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일상은 집안일 잊고 딱 한 달만 글을 쓰다 오라는 아내의 말에 들어간 문학 전문 창작 공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집안일에서 해방되더라도, 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더라도, 소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는 거다. 집필실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문학은 계속되고, 삶이 그렇듯 문학을 한다는 것도 대부분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을 둘러싼 우리 모두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이 한 개인의 고유한 창작물인 거 같지만, 실상은 다 구조와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수백 종의 시집이 발간되는가? 왜 수백 편의 단편소설이 발표되는가? 저 수많은, 수지타산 맞지 않는 문예지는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 없는 구조와 환경 탓이다. 이제 그 구조와 환경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K는 그런 말도 적었다. 구조와 환경에 잘 적응한 작가만이 살아남는다, 아니, 살아남았다……             -'우리는 왜 엉망이 되어가는가' 중에서, p.235


이 작품은 이기호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이기호 소설가’가 필자인 보고서 형식의 소설이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역사부터 시작해 존립과 위상 강화 도모를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으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 낸다. 폐쇄적인 회원 선출 방식, 예산 대부분이 회원 수당으로 쓰이는 데 비해 협소한 사업 기능,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임에도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의아한 존재감까지 언급하며 예산안을 개혁할 것을 제안하고, 소수에게 조용히 집중된 권력과 자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나마 동료 예술인 인식 조사라는 항목에서 소설가, 동화작가, 시인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대목이 소설처럼 느껴질 뿐,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서처럼 쓰인 독특한 작품이었다. 소수에게 조용히 집중된 권력과 자원에 문제 제기하는 이 작품은 2021년 발표 당시 예술원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과 작가•예술가들의 공동성명으로 이어지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니 흥미로웠다.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역시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 작가와 독자, 국가와 예술 등 '문학'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일종의 보고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예술품인 동시에 소비재인 문학 단행본의 위상을 짚고, 독자를 의식하며 독자와 공생해야 하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 그리고 오늘날 출판 생태계의 현실까지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정의롭고, 대부분은 끔찍하다. 이 책은 그 마음에 대한 기록이다. 끔찍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진실도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라고 이기호 작가는 썼다. 다정함 속에 섞인 인간의 위선을 간파하고, 사랑해온 것들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 그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에게 소설쓰기란 어떤 의미인지, 독자에게 문학이란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갈등과 곤경과 지리멸렬함으로 가득한 매일의 삶을 어떻게 문학이 구원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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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터가이스트의 죄수 ㅣ 아시야 초자연현상 2
가미조 가즈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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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폴터가이스트...라는 게 정말로 있나요?"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지."

나의 의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폴터가이스트라는 말 자체는 들어봤다. 분명 독일어로 '소란스러운 유령'이라는 뜻으로, 물체가 공중에 뜨거나 정체 모를 소리가 들리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걸 가리키는 용어다.                 p.89


도조 쇼고는 20대에 배우로 잠깐 유명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마흔을 앞둔 지금은 별볼일 없는 단역을 하며 살고 있다. 낡은 연립주택의 월세조차 내기 어려워져 부득이하게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살던 집으로 돌아온 참이다. 21년 만에 돌아온 2층짜리 목조 가옥은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허름해져서 폐가로밖에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게다가 분명 혼자 있는 집에서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진다. 아무도 없는 위층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리거나, 사진이 떨어지고, 전등이 꺼지더니 인형이 혼자 계단을 굴러 내려오기까지 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 갔더니 거울 속 여자가 식칼을 들고 있다는 수수께끼같은 말을 하는데, 점점 두려워지는 참에 초자연현상 관련해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인 마케팅 담당자를 소개받게 된다. 


마케팅을 담당하는 고시노 소타와 마케팅 프로듀서 아시야 하루코는 시리즈 첫 번째 작품에서도 등장했었다. 일명 '아시야 초자연현상 조사' 콤비인 두 사람 외에도 역시나 전작에서 나왔던 구라모토와 이누이 등이 등장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물론 이들의 배경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언급되기 때문에, 전작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번 작품을 즐기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두 사람은 도조가 겪은 초자연현상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직접 그의 집에 가서 현상을 기록하고 분석하며 조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 도조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 초자연현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 장비를 설치한 결과,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이상한 일들이 모두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대부분의 폴터가이스트의 피해는 물건에 집중이 되어, 사람이 직접적으로 해를 입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물건들을 치우고 나서 현상에 변화가 있는지 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렇게 괴현상이 잠잠해진 다음 날, 도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데, 대체 이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가즈코가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다시 한번 잘 부탁드려요, 도조 씨."

왠지 그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서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별생각 없이 백미러를 본다. 거기 비친 걸 본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거울에 비친 뒷좌석에서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식칼을 치켜 들고 있었다.                p.276


<심연의 텔레패스>에 이은 가미조 가즈키의 아시야 초자연현상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이다. 초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검증하려는 학문인 초심리학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는데, 괴담과 초자연능력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추리 과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가미조 가즈키는 사와무라 이치의 <보기왕이 온다>로 호러문학에 빠진 후 호러 기사와 단편소설을 써오다, 오직 그가 심사위원이라는 이유로, 난생처음 장편소설을 집필하여 소겐 호러 장편상에 응모해 수상을 하게 된다. 일본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도쿄소겐샤’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21세기 일본에 걸맞은 걸작’을 발굴하겠다는 취지로 개최한 '소겐 호러 장편상'에 수상한 것이 바로 시리즈 첫 작품은 <심연의 텔레패스>이다. '호러로서도 오락소설로서도 아주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심사위원 전원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전작에서는 대학교 오컬트 연구회를 배경으로 괴담을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중심으로 오싹한 일들이 벌어진다. 유령이 정말 존재하는지, 저주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그걸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사건을 대하는 시각은 크게 달라진다. 유령이나 저주가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것을 실험으로 검증하거나 과학적인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초자연현상이 실제로 벌어졌으니,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증명해내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이 시리즈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 다각도로 들여다보고, 해결할 방법은 없는지, 굉장히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매우 논리적이기 때문에 설득력있게 느껴지고, 그 과정이 재미도 있거니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오싹함도 빼놓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 시리즈는 3부작으로 구상되었고, 일본에서 곧 완결편인 <고스트의 계승>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텔레파시와 사이코키네시스에 이어 완결편의 주제는 '심령 연구'라고 하는데,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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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도시 - 역사, 예술, 문화, 미식을 넘나드는 인문 기행
김지윤.전은환 지음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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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이 준비되면 허리가 굽은 종업원이 다정한 말 한마디와 함께 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그 단순한 순간에 찾아오는 무장 해제된 것 같은 감각이 좋다.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교토의 노포 식당을 찾다 보면, 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시간의 흐름을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가끔 찾아오는 여행객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는 조금 더 젊었던 그들의 모습과 또 조금 더 젊었던 우리의 여행이 남아 있다.              p.61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 수많은 이유 중 하나는 완전히 낯선 곳에 있을 때 발견하게 되는 내 모습이 한국에 있을 때의 나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여행자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자신 안에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이탈로 칼비노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그렇게 여행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세상을 더 이해하게 된 두 저자가 들려주는 세계 각지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권력이 예술을 사랑했던 순간들이 남아 있는 도시 피렌체, 사람들로 붐비는 명소보다 조용한 골목에서 더 잘 보이는 교토, 지루하다고 믿었던 도시의 반전을 보여주는 워싱턴 D.C., 그리고 불세출의 화가들을 낳은 도시 암스테르담 등 이 책은 8개 도시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볍게 읽히는 여행 에세이 같으면서도, 도시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깊이 있는 내용들이 가득해 인문학서로도 훌륭한 책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이 책이 색다른 가이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유명하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가기 때문에 정한 여행지에 대한 흔한 정보가 아니라,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줄 테니 말이다. 두 저자가 들려주는 세계 각지의 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와 예술, 문화와 미식을 넘나들며 8개의 도시를 우리가 알고 있던 그것에서 보다 입체적이고 넓게 시야를 확장해준다.




세계에는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도시들이 몇 있다. 파리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냄새가 좀 날지언정, 일단 너무 예쁘지 않은가. 그런데 낭만과 로맨스가 넘실거리는 파리는 사실 19세기 중반 이후에 완성된 도시다. 중세 시대의 파리는 어둡고 비좁으며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로 가득한 곳이었다. 제대로 된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악취가 심했고,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목조 가옥들은 화재에도 취약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미로 같은 골목길이 있었기에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볼 수 있듯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p.194


많은 사람들에게 로맨틱한 곳으로 여겨지는 피렌체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이다. 문화적, 역사적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도시이지만, 그 이면에는 가문 간의 암투가 얽혀있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피렌체는 한없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꽃의 도시였다가, 어느새 압도당하는 마성이 도시이기도 하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이야기와 <군주론>의 마키아벨리에 관한 정보를 알고 나서 여행하는 피렌체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피렌체는 단순한 행정 지역이 아니라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의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알아가면 갈수록 더 재미있는 여행지가 될 것이다. 피렌체뿐만 아니라 교토의 ‘금각사’가 소설의 소재가 된 배경, 왕조와 종교, 갈등의 드라마가 펼쳐진 에든버러, 정치 도시 워싱턴 D.C의 또 다른 모습, 지금의 주식 열풍을 만들어낸 네덜란드,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이라 불렸던 상하이 등 가볍게 산책처럼 시작해서 깊이 있는 지식 인문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두 저자는 30년지기 친구이자 함께 유튜브를 운영 중인데, 정치학 박사와 국제 경영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배경만큼 밀도 있는 사유와 지적인 수다를 보여준다. 이 책 덕분에 우리가 사랑하고, 사랑하게 될 도시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사람의 여행이 저마다 다른 모습이며, 한 사람이 같은 도시에 다시 갔을 때 얻는 경험도 매번 달라지는 것처럼, 도시를 경험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이 다양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는 시각이 더 넓어진다면, 그 여행길이 조금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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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예술가들 - 변기에서 바나나까지, 100년의 창작 전쟁
캐슬린 김 지음 / 작가정신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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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87억 원짜리 바나나는 그렇게 몇 초 만에 사라진다. 이 장면을 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웃었다. 누군가는 분노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예술이냐'는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이 행위는 단순한 기행도, 돈 많은 컬렉터의 장난도 아니었다. 오히려 작품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 행위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처음부터 사라지도록 설계된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개념 미술은 예술을 대상이 아닌 '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p..77


바나나 한 개에 87억 짜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2019년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처음 공개된 <코미디언>이라는 이 작품은 치열한 응찰 끝에, 약 620만 달러, 한화로 87억 원에 낙찰됐다. 작품의 구성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전날 인근 과일 가판대에서 구매한 바나나 한 개, 그리고 그것을 벽에 고정한 회색 덕트테이프가 전부다. 이 '바나나'의 구매자인 중국계 암호화폐 사업가는 낙찰 직후, 예상 밖의 행동을 한다. 벽에서 바나나를 떼어내, 껍질을 벗기고, 그대로 먹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87억 원짜리 바나나는 몇 초 만에 사라진다. 이것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개념미술은 예술을 대상이 아닌 '사건'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아름다움이나 기술, 물리적 완성도 등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가가 던지는 질문, 즉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예술가와 작품은 전시장만큼이나 법정에 자주 불려 다니기 시작했다. '이것도 예술이냐'라는 질문은 더 이상 조롱이나 논쟁의 언어가 아니라, 판결문의 첫 문장이 되었다. 이 책은 <월간미술>에 연재했던 '변호사 캐슬린 김의 예술법 세상'과 <매일경제>에 연재했던 '캐슬린 김의 예술 법정', 그리고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칼럼에서 시작되었다. '뜨거운 예술'이 '차가운 법'을 만나는 순간의 기록이라니,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너무 기대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외치고, 판사들은 그 자유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고 답한다. 그런데 대체 예술의 가치는 누가 정할 수 있는 걸까. 치열한 공방 끝에 남는 것이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면, 법정에서 벌어지는 그 치열한 싸움은 무엇을 향해야 하는 걸까. 예술과 법이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어 보이는 두 세계가 충돌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 엄숙한 법정의 문을 열고 그 낯설고도 치열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AI가 그려낸 밤하늘에는 고흐가 정신병원 창살 너머로 바라보던 고독과 광기가 없다. AI가 묘사한 여인에게는 박수근이 화강암 같은 질감 속에 새겨 넣은 시대의 가난과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AI가 조합한 전쟁의 참상에는 피카소가 <게르니카>에 쏟아부은 분노와 시대정신이 부재한다. 예술은 데이터의 조합이 아니라 삶과 죽음, 환희와 고통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경험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렇기에 AI는 인간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대체할 수는 없다.                 p.372


2018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벌어진 일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전 세계 미술계의 큰손들이 모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차지하기 위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풍선을 놓친 소녀가 있었다. 하트 모양의 빨간색 풍선이 막 하늘로 떠오르려는 찰나를 포착한 뱅크시의 대표작 <풍선과 소녀>다. 이름 없는 반역자, 거리의 시인이자 체제의 적이라 불리는 예술가인 뱅크시의 작품이 자본주의의 성전인 경매장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낙찰을 알리는 세 번의 타음이 울린 뒤, 경매장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캔버스가 액자 아래로 빨려들어가 파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이 절반쯤 잘려나갔을 때 기계는 작동을 멈췄다. 미술시장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퍼포먼스였다. 


작품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재창조했다고 주장하는 뱅크시의 기행을 비롯해 NFT를 팔기 위해 프리다 칼로 작품을 불태워버린 암호화폐 업자의 기괴한 쇼를 비롯해서 예술의 역사를 뒤흔든 브랑쿠시, 앤디 워홀, 클림트의 사건들과 AI가 만든 작품을 둘러싼 최신 사례까지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AI가 만든 결과물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소유자는 작품을 파괴할 권리까지 가지는 걸까. 예술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어디까지가 창작이고 어디서부터 표절인 것일까. 이 책은 미술사의 운명을 바꾼 세기의 예술 재판들을 여섯 개의 법정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예술가의 평론가의 명예 전쟁, 무단 도용의 벽, 위작 논란, 파괴가 창조가 된 역설, 도난과 장물 스캔들, 블록체인 사기극 등 실제 사건과 판결을 살펴보며 법이 예술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난해한 법률 용어나 골치 아픈 미학 이론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한 편의 법정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라 예술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도 쉽게 이해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자, 현대미술이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을 통해 미술관 밖에서 벌어지는 진짜 리얼한 예술 현장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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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곁에 두어 좋은 말 - 100년의 문학 작품에서 길어 올린 마음들
나민애 지음 / 북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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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뜨다, 달뜨다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비슷한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다른지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어려운 것을 글로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된다. 정리하려고 '들떴던 나'와 '달떴던 나'를 적어보았다. 그것은 사금처럼 추억에 묻혀 기다리고 있다가 단어라는 곡괭이에 의해 발견되고 만다... 소풍으로는 들뜨고 눈빛으로는 달뜬다. 들떴던 것이 언제인가. 달떴던 것은 언제인가. 둘 다 어리거나 젊은 단어다. 나이 든 사람이 그리워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단어인 셈이다.                p.17


올해는 한글날이 제정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해 나민애 서울대 교수가 한국 문학 100년의 작품들에서 유정한 단어들을 골라 책으로 엮었다. 이 책은 그렇게 142명 작가의 142개 단어를 모으고, 단어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낸 것이다. 홍안, 여리다, 숙맥, 어수룩이처럼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들도 있고, 물큰물큰하다, 멍멍히, 섧다, 홉뜨다, 동탕하다 등 처음 접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어떤 기회가 자꾸 닥쳐오는 모양을 '하마하마'라고 표현한다는 것도 배웠고,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는 뜻으로 '흔흔하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모은 단어들을 5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나를 선연하게 만드는 단어, 다사로운 당신에게 건네는 단어, 잠포록이 평온한 하루를 위한 단어, 시나브로 흐르는 삶에 관한 단어, 그리고 찬연한 자연이 빛나는 단어이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장면처럼 무서웠거나 강렬했던 것, 아름다웠거나 지나칠 수 없었던 것들만이 선연하게 남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정도가 내 마음의 정도인 것이다. 나에게 선연했던 것들이 나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지금 내게 무엇이 선연한가. 생각하며 읽어 보았다. 흥미로운 단어들이 많았지만,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방인이라고 느낀다면 온 세상이 내게 불친절하다는 뜻'이라고 말하며, 이방인적인 내면을 갖췄을 때 반려를 발견하기 좋다고 저자는 말한다. '모두 낯설고 적대적일 때, 그렇지 않은 한 사람이 발견된다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로맨틱하면서도, 절실하게 할 수 있구나 싶어 감탄하며 읽었다.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는 열나지 않았고, 고향에서는 급한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다. 남편은 예상되는 시간에 퇴근했고, 아이들은 인사를 대충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 하루 더 입을 수 있었고, 급히 사야 할 세제도 치약도 없었다. 그 밥솥에서 그 주걱으로 밥을 푸고 그 식탁 그 자리에서 가족과 밥을 먹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도 물었고 그제도 물었던 것을 물어봤다.... 쨍하니 기쁠 일은 없었지만 잠포록이 맑고 평온했다.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이것이 나의 소원이었다.                  p.181


스마트폰과 SNS 덕분에 말 대신 문자로 대화하는 게 더 많아졌고, 각종 줄임말이 등장하며 사람들은 점점 더 간결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단어 사용 역시 제한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보도 기사에서 14년간, 한 개인이 하루 동안 직접 말하는 단어의 양이 매년 338개씩 꾸준히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그렇게 깊은 고민 없이 무심코 쓰게 되는 단어들, 점차 증발하고 획일화되는 단어들을 보다 소중하게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어들은 '네 마음을 내가 다 안다, 대신 말해주겠다'고 속삭여 주었다. 각각의 단어들에 담긴 뜻과 단어가 사용된 문장, 그리고 저자의 글이 어우러져 한 단어의 인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백하고도 마흔두 개의 인생이 담겨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루에 사용하는 총 단어의 수는 약 1만 5,000개. 그중 중복되는 단어를 빼면 약 2,000개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구나 싶어서 놀라웠던 수치다. 늘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한 단어들만 사용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하나씩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한글에 대해 더 소중한 마음으로, 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단어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저자의 글이 에세이처럼 술술 읽혀서 더 공감되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가끔 일상에서도 어떤 단어는 사전적 정의 그 이상의 뜻을 포함해야만 의미가 전달될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그려내는 책이었다. 어떤 단어는 추억에 잠기게 만들고, 어떤 단어는 재미있어서 입가에 맴돌고, 예뻐서 눈이 가는 단어도 있고, 마음이 쓰여 곁에 두고 싶은 단어들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곁에 오래도록 두어도 좋은 나만의 단어들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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