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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평점 :
"부인은 이제 안 돌아와." TV피플이 같은 말투로 말했다.
"어째서?" 내가 물었다.
"어째서라니, 이미 틀렸으니까지." TV피플이 말했다. 호텔에서 쓰는 플라스틱 카드 키 같은 목소리였다. 평면적이고 억양 없는 목소리가, 가느다란 슬릿에서 칼날처럼 슥 들어온다. "이미 틀렸으니까 안 돌아와."
이미 틀렸으니까 안 돌아와, 라고 나는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매우 평평하고 리얼리티가 없다. 문맥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원인이 결과의 꼬리를 물고 삼키려 했다. - 'TV피플' 중에서, P.46~47
<TV피플>은 어느 일요일 해 질 녘, 갑자기 집에 나타난 기묘한 존재들로 인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의 체구보다는 20, 30퍼센트 정도 작은 몸을 가진 그들은 노크도 하지 않고,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그저 슬며시 방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텔레비전을 들고 왔는데, 그것을 연결해서 화면을 테스트하는 동안 내내 집에 있던 남자의 존재를 무시했다. 그들은 셋 다, 그곳에 남자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TV피플의 존재는 아내도, 회사 사람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TV피플들은 출근하는 도중에, 회사의 회의 시간에 계속 나타나기 시작한다. 급기야 텔레비전 화면 속에 나타났다가, 텔레비전 밖으로 나와서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TV피플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그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일까.
<잠>에는 17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여자가 등장한다. 치과의사인 남편과 초등학생인 아들은 그녀가 한잠도 못 잔다는 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가족들이 잠든 밤에 술을 마시고, 과일을 먹고, 책을 읽는다. 긴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어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 든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기에, 그녀는 한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날이 밝으면 다시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해내고 있다. 연속되는 각성이 2주째에 접어들자 불안해졌지만, 이상하게도 피부가 전에 비해 훨씬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있었으며, 몸에서도 터질 듯한 생명력이 넘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지만, 점차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고 있었 던 것이다.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니나>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으며 새삼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억하지 못했다. 등장인물도, 장면도, 대부분 기억에 없었다. 완전히 다른 책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신기하네, 나는 생각했다. 읽었을 때는 제법 감동했을 텐데 결국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거기 있었을 감정의 떨림이며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전부 술술 떨어져 말끔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시절, 내가 책을 읽으면서 소비했던 막대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 '잠' 중에서, p.175~176
이 책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베스트 단편으로 손꼽은 <TV피플>과 <잠>을 포함해 총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몸집이 작고 파란색 옷을 입은 세 명의 TV피플이 나타나 텔레비전을 두고 말없이 떠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TV피플>, 아이가 있는 일곱 살 연상의 유부녀와 만나고 있는 스무 살 남자의 이상한 오후를 담은 <비행기>, 소설가인 '나'가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에게 전해 듣는 그 시절의 이야기인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 두 자매가 한 남자를 죽이게 되는 과정을 그린 <가노 크레타>,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의 꿈에 얽힌 이야기 <좀비>, 그리고 십칠 일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한 여성의 일상을 담고 있는 <잠>이다.
살다 보면 뭔가 잘못됐다..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알 수 없다. 머릿속이 지독히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려고 필사적으로 애쓰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싶은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순간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6편의 작품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9년~1990년에 발표한 단편들이다. '질감이 제법 서늘하지만 어딘가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는 온기의 예감이 담겨 있는 소설집'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각각의 이야기들은 혼란과 상실을 헤치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비록 그 방향이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멀어지더라도, 등 뒤에서 문이 영원히 닫혀버린 기분이 들더라도 말이다. 일상 속 풍경이 일그러지고 앞뒤가 뒤바뀌면서 현실과 환상의 균형이 흔들리는 바로 그 순간의 감각을 느껴보자. '마치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뒤돌아 앉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색다른 독서 체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