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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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난다. 그리고 또 하루. 레너드한테 전화해야지, 다짐해보지만 몇 번이고 손을 전화기로 뻗으려다가도 그만두고 만다. 물론 레너드도 똑같은 심정이겠지, 전화가 안 오는 걸 보면. 행동이 되지 못한 충동은 차곡차곡 쌓여 신경을 망가트리고, 망가진 신경은 굳어져 권태가 된다. 복잡한 감정과 망가진 신경, 그리고 마비된 의지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그제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초조하게 올라오고 전화기를 향해 뻗는 손은 마침내 동작을 완료한다.      p.10

 

비비언 고닉은 버지니아 울프에 비견되는 문학비평, 특히 회고록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큼 자전적 글쓰기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이다. '비비언 고닉 선집' 첫 번째 작품이었던 <사나운 애착>은 중년의 작가가 노년의 어머니와 뉴욕 거리를 거닐며 담소하고, 회상하고, 언쟁하는 이야기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삶에 대한 통찰력과 뛰어난 문장들로 인해 매 순간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거의 일 년을 기다려 두 번째 책 <짝없는 여자와 도시>를 만났다. 고닉이 <사나운 애착>을 펴내고 30여 년 만에 쓴 작품으로 평생을 살아온 뉴욕을 배경으로 사랑과 우정에 대해 탐색하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게이 친구와의 에피소드들은 특히나 흥미롭다. 요즘 사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 닭뼈가 목구멍에 딱 걸린 거 같다는 대답을 하고, 나는 사는 게 적성에 안 맞아, 라는 말에 누군들 맞겠어? 라고 대꾸하는 식의 담백하고, 시크한 관계였으니 말이다. 사랑을 성배의 자리에 올려둔 엄마와는 달리 고닉은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결혼도 두 번, 이혼도 두 번 경험했다. 그리고 예순이 된 지금, 짝 없는 여자가 되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충만하게 느낀다.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 혹은 종말로 인해 굳어버린 심장이 문학비평가이자 작가로서 고닉의 문장들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의 몰입은 구체적인 일상에 추상적 사고가 맞물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양분 삼아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우리 안에서 깊어져만 갔다. 우리는 함께하는 대화 속에서 일상적인 것들에 부과된 맥락의 힘을 느꼈다. 이론에 접목되는 생활의 요소들, 그러니까 버스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 최근에 읽기 시작했거나 다 읽은 책, 엉망이 돼버린 저녁 파티 따위를 파고들수록 세계가 점점 더 확장되는 기분이었다. 거실에 앉아 있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거리를 걷거나 하는 나날의 일상에 서사적 동력이 더해져 관점을 형성해가는 원료가 되었다. 집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p.83~84

 

현대 사회에서, 특히 도시에서의 사람들간에 만들어지는 관계와 우정에 관한 글들이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전작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고닉이 어린 시절 살았던 공동주택 이웃들의 우정, 그저 말없이 필요한 순간마다 알아주는 마음들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친구란 자기 내면의 선량함에 말을 건네는 선량한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이다. 우정이라는 결속, 솔직한 자아, 문화적인 착각 등 익명으로 집결한 도시 거주자들을 향한 고닉의 시선은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것들이었다.

 

고닉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 희미하게 짐작했던 것들을 구체화시켜서 바로 눈 앞에 들이미는 듯한 느낌을 안겨준다는 점인데, 덕분에 언제나 그리 두껍지 않은 페이지가 인덱스와 밑줄로 가득해지곤 한다. 글항아리에서 출간되는 비비언 고닉 선집은 <끝나지 않은 일: 만성 재독서가의 노트>로 이어질 예정이다. 특히나 이 책은 '다시 읽기'를 통해서 지난달 중요했던 책들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당연하던 것들을 질문으로 바꾸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해서 기대 중이다. 고닉이 '만성재독서가'를 자처한다고 하니, 그 책의 목록들과 사유가 더욱 궁금해진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오는 친밀함과 날카로운 사유에서 느껴지는 보편성으로 버무려진 고닉의 놀라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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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2-24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이지만 이 깔맞춤 ㅎㅎ
👍

피오나 2023-02-24 22: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깔맞춤을 알아봐주시다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