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나는 내 삶이 온통 고통의 가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그 가시가 실패와 절망의 가시로 다시 돋아난다고 해서 크게 원망하지 않는다. 나도 선인장처럼 가시에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좀 느긋해지고 편안해진다. 가시가 되는 과정이 없다면 선인장이 결코 꽃을 피우지 못하듯이 내 인생이라는 사막에 자라는 선인장도 반드시 가시가 있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만일 선인장이 늘 비가 알맞게 오는 사막을 원한다면, 늘 맑고 따스한 햇살이 어른거리는 봄과 같은 사막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p.142~143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유명한 정호승 시인은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이번 책은 68편의 시와 산문이 어우러진 '시가 있는 산문집'으로 시의 배경이 되거나 계기가 된 이야기들을 그 시와 함께 수록했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은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에 이어 두 번째인데 시를 읽으면서, 시를 창작할 당시의 사연을 풀어낸 산문들도 함께 읽을 수 있어 시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 모습부터 군 복무 시절, 특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운 부모님의 모습 등 시인이 소중히 간직해온 20여 컷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그야말로 인생이 시가 되어 맺히는 모든 순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시인은 산문이 시가 될 때가 있고 시가 산문이 될 때가 있다며 시와 산문은 서로 다르면서도 한 몸을 이룬다고 말한다. 이 책 역시 그렇게 시와 산문이 하나로 읽힌다. 워낙 대중적이고 쉽게 읽히는 시이기도 하지만, 함께 엮인 산문들이 단순히 '해설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깊이 있게 시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인 정호승’ 너머에 있는 ‘인간 정호승’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특별한 책이기도 하다. 심금을 울리는 주옥 같은 시들과 산문들이 시인의 삶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까지를 모두 담고 있어서 그의 인간적인 면모들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인생 자체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시가 되어 맺힌다. 이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시를 먼저 읽고 산문을 읽어도 좋고, 산문을 먼저 읽고 시를 읽어도 된다.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어디든 펼쳐서 읽어도 좋다.





실패의 과정 없이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성공에 곧장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인행의 유혹인가... 그러나 그런 직선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인생은 원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다들 그것을 알면서도 직선의 길을 원하는 것은 헛된 욕심과 허영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한낱 허상일 뿐이다. 인생의 길은 곡선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어떠한 길이든 길은 곡선을 통하여 완성된다. 비록 그 길이 고통과 절망과 분노와 상처의 길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것이 곡선의 바탕을 이룬다.            p.316


일생에 단 한 번, 단 한 벌만 입는 망자의 옷인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한다. 망자의 옷이기에 무엇을 넣고 갈 주머니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인생이니 말이다. 그런데 살아서는 왜 그렇게 필요한 게 많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생존을 위해, 혹은 필요에 의해 우리는 뭔가를 구매하고 소유하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그분들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쓴 글을 읽으며, 살아 있을 때 가능한 스스로 많이 버리고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남은 식구들을 힘들게 하지 않게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고, 죽을 때 이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갈 수는 없는 건데 말이다. 시인은 수의에 주머니가 있어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수의에 주머니가 있다면, 꼭 넣어가고 싶은 것은 바로 '남에게 받은 사랑'이라고 말이다.  살아 있을 때의 사랑과 용서를 지니고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수의에 주머니를 꼭 달아야 할 이유가 생길 것도 같다고 생각해 본다.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자주 잊어 버리고 산다.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고되고 힘들다는 핑계로 말이다. 사실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소박한데도 말이다. 이 책은 그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해주고,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들어 준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날들이다. 오늘을 사는 이들 중에 고단하지 않은 이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루를 사는 일이 한 해를 사는 일처럼 힘들고 고단할 때, 이 책을 만나보자. 누구의 삶이든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는 먹먹한 위로가 오늘을 버텨내고, 다시 내일을 향할 수 있는 힘을 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4-02-15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와 책, 엄청 예쁩니다.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 댓글 남깁니다.^^

피오나 2024-02-15 18:29   좋아요 0 | URL
ㅎㅎ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