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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독서법 - 분열과 고립의 시대의 책읽기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3년 3월
평점 :
내가 어렸을 때, 책은 도피이자 안식이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데 익숙한 외동아이였다. 아버지가 옆면에 문과 창을 내 장난감 집으로 변신시킨, 판지로 된 냉장고 상자 안에서 책을 읽었다. 밤에 담요 밑에서 손전등을 켜고 책을 읽었다. 운동장에서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쉬는 시간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차멀미를 하면서도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게다가 식탁에서도 읽었다. 어머니가 식사를 하는 동안 책읽기를 금지했기 때문에, 식탁에 앉아 가까이에 있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곤 했다... 나는 늘 읽을거리가 고팠다. p.17~18
어린 시절 나는 책으로 집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놀곤 했었다. 글자들이 울타리가 되고, 그림들이 지붕이 되어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 지면 그 속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곤 했다. 이야기로 만든 집은 나만의 놀이터였고,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안식처였다. 조금 더 자라서는 주말마다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미로처럼 빼곡한 서가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책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고, 가본 적 없는 도시를 여행하게 해주며, 경험해 본 적 없는 미래를 보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정말 순수하게 책읽기의 기쁨을 만끽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평가’라고 불리는 미치코 가쿠타니의 본격 서평집이다. 고전부터 동시대 작가가 쓴 소설, 회고록, 기술, 정치, 문화 분야 논픽션을 아우르는 99개의 서평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계 미국인 문학비평가이자 서평가인 가쿠타니는 <워싱턴포스트>와 <타임>을 거쳐 <뉴욕타임스>에서 무려 35년 가까이 서평을 담당했으며, 1998년에 비평 분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유명 작가들을 향해 독설과 혹평도 서슴지 않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서평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과 여러 드라마에서 언급이 될 정도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된 존재이기도 해, 그의 예리하고 신랄한 서평들이 궁금했다.
서사의 독창성, 음악적인 언어의 구사, 나보코프가 좋아하는 두 가지 취미인 나비 연구와 체스 게임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세부와 정확성에 대한 애정, 회화와 같은 직접성과 대가다운 솜씨로 장면, 기억, 감각, 또는 분위기를 그려내는 능력 등 나보코프가 작가로서 가진 수많은 재능이 이 눈부신 단편집 전반에서 드러난다. 이런 재능이 나보코프가 존 업다이크, 토머스 핀천, 마틴 에이미스, 존 드릴로, 제이디 스미스처럼 다양한 작가들에게 지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p.259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를 시작으로,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호프 자런 <랩 걸>,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이언 매큐언 <속죄>, J.K. 롤링 해리 포터 시리즈, 모리스 샌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도나 타트 <황금방울새>,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등 이 책에 수록된 아흔아홉 편의 글들은 길지 않지만,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서평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고전, 문학, 동화 등 국내에도 이미 출간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각각의 서평은 한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나의 테마로 여러 권을 묶어서 소개하는 글도 있다. 한 작가의 시리즈를 소개하기도 하고,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글로 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걸까. 이 서평집을 읽다 보면 아주 오랫동안 책을 사랑해온 저자의 애정이 글 곳곳에 묻어나서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자연스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는 책에 대해 '종이, 잉크, 접착제, 실, 판지, 천, 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벽돌 크기의 이 마술 같은 물건은 실로 작은 타임머신'이라고 말한다. 책은 우리를 과거로 데려가 역사 속의 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순간을 체험하게 해주니 그야말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책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 국경과 역사를 가로지르고, 문화와 종교, 정치와 인종을 초월하게 해주는 장치이니 독서야 말로 '분열과 고립의 시대'를 무사히 살아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치코 가쿠타니의 글은 우리가 처음 읽은 책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주는,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페이지의 단어들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을 선사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