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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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시간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에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선택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삶을 낭비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삶에 플라스티네이션 처리를 했다. 고치 속에 숨은 누에처럼.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호' 중에서, p.59

 

열여섯 레나는 남자 친구와 부모의 외면 속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막상 출산 후에 느끼게 된 감정이란 바보가 된 듯한, 뭔가 실수한 것 같은 기분뿐이었고, 결국 부모님 집 앞에 아기를 두고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함께 도망치듯 떠난다. 4년을 남자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지만,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보디워크스라는 회사의 구인 광고로, 그곳은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 처리해서 해부하고, 포즈를 취하게 만들어 마치 예술품처럼 고분자 화합물 조각상으로 바꾸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레나는 그 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몇 년 후 그곳의 아트 디렉터로 승진한다. 그리고 회사 대표이자 해부 팀 책임자인 존과 함께 하게 되면서 그가 개발 중인 노화와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재생 신약을 통해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레나의 남편인 존은 유전적 결손이 있어 재생 시술을 통해서도 노화를 늦추지 못했고, 암에 걸려 결국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레나는 첫 아이를 낳고 반세기가 더 지나고 나서야, 남편을 여의고 나서야 다시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남편이 죽기 전에 냉동 보관을 해 놓은 정자가 있었고, 레나는 일흔한 살의 나이에 임신을 하게 된다. 물론 재생 시술을 통해 외모는 서른 살로 보이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그만 바의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쉰 중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말을 건넨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자식을 버린 부모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한 채로 늙어버린 자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이란 어떤 걸까, 단지 수백 년을 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기간 동안 내내 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말이다. 만약 주어진 시간이 무한하다면, 중요한 결정을 훨씬 더 나중으로 미뤄도 되고, 해보고 싶은 것들, 그 동안 놓친 것들을 만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길고 긴 나날을 흘려 버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할 수 있으니까,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무한한 시간과 기회가 있을 테니 말이다. 생명 연장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 이들은 죽음이야말로 삶이 만들어 낸 가장 멋진 거라고 말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늙어서 죽을 거라는 걸 알기에, 두려운 일에 도전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일에 뛰어 들고, 지금 당장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세상에 나 같은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 나는 무언가 품에 안을 것이 필요했다. 말하기와 걷기를 학습할 줄 아는 것, 내게 '안녕'이라고 인사해 줄 만큼만, 내 귓가의 울음소리를 잠재울 만큼만 성장하는 것. 하지만 진짜 아이는 아닌 것. 살아 있는 다른 아이를 데리고 살 자신은 없었다. 그건 배신처럼 느껴졌다. 인조 피부 조금, 합성 고분자 겔 조금, 알맞은 수량의 모터와 영리한 프로그래밍 능력을 잔뜩 동원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기술로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일.    

-'사랑의 알고리즘' 중에서, p.153

 

‘일상과 환상이 만나는 지점을 황홀하게 드러내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선보였던 <종이 동물원>에 이어 켄 리우의 두 번째 단편 선집이 출간되었다. 데뷔작을 포함하여 함께 엮인 적 없는 단편 중 12편을 선별하여 수록하고 있는 이 책은 오직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단편집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이제껏 책으로 엮인 적이 없는 켄 리우의 중단편 소설 열두 편을 엮어 만든 책이라 '원서'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이니 말이다. 게다가 너무도 근사한 표지 이미지, 띠지와 연결된 내지의 영롱한 컬러까지 시선을 사로잡는 너무도 '아름다운' 책이었다.

 

<종이 동물원>을 번역했던 장성주 번역가가 이번 단편집에 수록될 작품들을 직접 골라 엮고 옮겼다. 그는 이전 단편집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수록작들을 하나로 묶는 주제를 '초월'이라고 말한다. '수록작 가운데 굳이 나누자면 SF로 분류될 이야기들은 육체라는 존재 양식만이 아니라 시공마저도 초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초월을 이룬 후에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라고' 말이다. 바로 그 '초월'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띠지와 내지로 연결되는 이미지일 것이다. 단편들을 골라 엮은 솜씨도 대단하지만, 표지 디자인과 책의 안팎을 구성하고 있는 디자인 또한 최고의 수준이 아니었나 싶은 작품이었다. 그야말로 올해의 표지! 올해의 앤솔로지가 되겠다.

 

 

이 책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고민들, 그리고 시간과 차원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세계는 거의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고, 작품들 중에 '싱귤래리티 3부작'은 인간이 기계 속에 업로드 되는 세상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현실 세계를 포기하고 시뮬레이션이 되기를 선택할 때마다, 생명을 잃은 육체 한 구가 남겨진다. 삶이 의미를 얻는 수단이 바로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업로드된 인간은 이제 인공지능일까, 아니면 여전히 인간인걸까, 단순한 알고리즘이 되어 버린 걸까.

 

자신이 쓴 이야기가 외국어로 번역되어 머나먼 나라에 사는 수많은 독자들의 손에 가 닿는 것에 대해, 켄 리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 언어, 문화를 넘어 쓰는 이와 읽는 이가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가장 인간다워진다고, 저는 느낍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짓는 종(種)이니까요." 책을 읽기도 전부터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가슴이 설레어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놀라운 상상력과 깊이 있는 사유, 뭉클하고 따뜻한 정서와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까지, 켄 리우는 여전히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가 아직 만나 보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너무 행복하다. '민들레 왕조 연대기'의 2부인 <폭풍의 벽>, 단편 열한 편을 묶은 <신들은 죽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미국에서 발간된 최신 단편집 <은낭전>까지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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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친놈 2024-03-26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호>읽을때가 인상깊었어요.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이 문장이 저도 기억에 남아요. 책을 반납하고서 리뷰를쓰니 기억이 흐려졌는데 피오나님 글보고 정리되는 느낌이네요,잘보고갑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