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표 영어에 입시를 더하다 - EBS 스타강사 혼공샘의 우리 아이 영어 공부법
허준석 지음 / 북폴리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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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의도한 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는 부모가 의기소침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시행착오는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엄마표 영어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엄마 아빠들은 오랜 시간 끈기 있게 영어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바로 '시작점 낮게 잡기!'

'숫자'는 중, 장기 목표이지 시작할 때의 분량이 아니다.    p.39

이 책은 현직 고등학교 영어교사이자 EBS 스타강사로 활동해온 혼공쌤 허준석 선생님의 '엄마표 영어'에 대한 새로운 영어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중.고등학교에서 15, EBS에서 12년을 가르치며 특별한 교육 경험을 쌓았고, 공교육과 사교육 현장에서 체득한 소중한 경험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학교 선생님들과 소통하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EBS에서 다양한 강사들을 만나면서 학교 밖의 교육 생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가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나서 학부모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취학 전부터 초등 고학년까지 영어 교육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수학과 마찬가지로 영어도 초등학생 때부터 속칭 '영포자(영어 포기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런 아이들에게는 공교육 자체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부모가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사교육 걱정 없이, 아이들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거북이형' 공부법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일반 부모들도 충분히 따라 할 수 있도록 천천히 영어 걸음마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자녀의 영어 교육에 관심이 많은 모든 부모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한국의 중, 고등학생들은 '내신 영어' '실제 영어'를 병행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2가지 모두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에 부모는 '내신 영어'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초등학교 때까지 잘 만들어왔던 '실제 영어' 근육이 점점 퇴화한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6년을 보내고 나면 시험 영어만 잘하게 된다.

중학교 입시 영어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영어 독서 근육을 튼튼히 키우는 일이다.    p.170~171

그렇다면 '엄마표 영어'란 과연 무엇인가. 보통 공교육에서 영어를 배우는 시점은 초등학교 3학년이다. 이 시기 '이전'부터 집에서 오디오 자료와 원서를 활용해서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을 소위 '엄마표 영어'라고 한다. 물론 부모가 직접 가르치거나 함께 영어 공부를 하기 힘든 경우도 있으니, 사교육도 보완재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기준 없이 사교육 시스템에 맡겨버린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는 거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어떤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토론해서, 부모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해 그에 맞추어 영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교육이 완성되는 시대는 지났으니 말이다. 학원을 보내야 하는 타이밍, 아이가 영어를 거부할 때 공부로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법, 영어 공부의 적기는 언제인가, 그리고 초등학교 전부터 1~2학년, 3~4학년에서 중,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별로 영어 공부의 중요한 키포인트를 짚어주고 있어 매우 실용적인 팁이 되어 주는 책이었다.

엄마표 영어는 사실 초등학교까지가 최적기이고, , 고등학교에는 방목형으로 가되 온 가족이 소통하는 부분적 참여형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이에게 영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은 아마도 모든 부모들이 절감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시작할지, 중간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서 로드맵을 그려야 할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이의 특성을 고려하고, 비용과 목표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하게 조절해야 할 것이다. 영어 자체를 위한 '인생' 보다 인생을 위한 '영어'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저자의 말이 와 닿았다. 물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느리고, 천천히 가려면 흔들리지 않고 뚜렷한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현실적으로 꼭 필요한 책이 될 것이고, 아이가 없더라도 영어에 대한 거부감 없이 쉽게 배울 수 있는 방법 자체를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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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이찬혁 지음 / 수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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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바다야?"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거든."

입을 꾹 다물고 들을 준비가 된 표정을 짓는 나에게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음악이 없으면 서랍 같은 걸 엄청 많이 사야 될 거야. 원래는 음악 속에 추억을 넣고 다니니까.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추억도 새로 산 서랍 속에 넣고는 겉에 '작은 별'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여놓아야 할걸. 아마 번거롭겠지. 근데 그럴 필요까진 없어. 우리에겐 바다가 있으니까. 바다는 아주 큰 서랍이야. 우린 먼 훗날 바다 앞 모래사장에 걸터앉아서 오늘을 떠올릴 수도 있어."   p.52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우리 삶은 어땠을까. 글쎄, 한 번도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적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낯설고 삭막할지 아마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최초의 음악은 기록되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음악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고대문명에도 갖가지 형태의 음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고학자들이 찾아 냈으니, 음악이란 우리가 짐작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 분명하다.

 

이 소설에서 극중 해야는 선에게 묻는다 만약에 음악이 없으면 어떨 것 같냐고. 그에 대한 대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럼 난 터벅터벅 걸었을걸?"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일까 싶었다. 극중 해야 역시 흥미가 번진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 난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땐 조금 다르게 걷거든. 예를 들면 '타닷타닷' 이라든가 '퐁퐁퐁' 걷는 거지."

이 한 장면에 이 작품의 특별함이 모두 담겨 있다. 저자가 그 동안 음악을 계속 만들어오던 사람답게 소설에서도 특유의 리듬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문장에서, 단어에서, 그리고 장면마다 어디선가 음악이 흐르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잊어버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걸 두려워해. 예를 들면 자신을 따돌리는 아이나, 제시간에 마감하지 못할 업무 따위를."

그녀는 여전히 정면을 응시하였다.

"이런 걸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지. 내가 두려워하던 건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아무것도 아니구나. 심지어 내 죽음도 여기서는 너무 작은걸."    p.81~82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소설 데뷔작이다. 얼마 전에 발매된 악동뮤지션 정규앨범 <항해>와 세계관을 공유한 작품으로 삶의 가치관과 예술에 대한 관점을 이 소설을 통해 은유적으로 녹여냈다고 한다. 실제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의 제목이 소설 속 차례의 제목들과 공유되고 있어서, 소설과 노래가 하나로 흐르는 듯한 느낌도 든다. 거센 파도가 부서지는 새파란 바다의 질감이 고스란히 표현된 표지의 이미지부터,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파란색 글씨까지 이 소설은 바다의 푸른빛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극중 앨범 발매를 앞두고 녹음 작업을 하던 선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가로서의 삶이 지금 이곳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작업을 중단하고 1년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행을 하며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세계에 도취되어 있었고 선의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예술 그 자체보다 '모든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단발 머리의 한 여자를 구하게 되면서, 그토록 헤매던 삶의 답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게 된다.

 

귓가에 넘치는 바다, 눈을 감고 느낀다

난 자리에 가만히 앉아 항해하는 법을 알아

 

가짜로 살기에는 허상에 가득 찬 그들을 증오하며 인정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진짜로 살기엔 아직 진짜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던 나, 선은 그런 자신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바다 소리가 가장 음악 같다고 말하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하며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 간다. 예술가의 감성과 깊이, 그리고 음악에 대한 고민이 묘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 소설이라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뮤지션 이찬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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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나는 나일 때 가장 편해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투에고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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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구름이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 보니 구름도 하늘 밑에 있더라.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내가 가진 불안과 긴장도 다시 보면 별거 아닐지도 몰라. 모두 내 안에서 비롯된 거잖아.    p.51

카카오프렌즈 에세이 시리즈 그 네 번째 작품은 토끼옷을 입은 단무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무지가 주인공이다. 그 동안 라이언과 전승환, 어피치와 서귤, 튜브와 하상욱이라는 조합에 이어, 무지는 투에고 작가와 만났다. 무지는 그냥 보면 장난기 가득한 토끼처럼 보이지만, 사실 토끼옷을 벗으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단무지이다. 그리고 묵묵히 무지의 뒤를 지켜주는 캐릭터인 콘도 함께 등장한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카카오프렌즈의 캐릭터들이 젊은 작가들과 만나 진행되는 이 시리즈는 툭툭 가볍게 읽히는 글들이지만, 페이지 구석구석에서 사랑스럽고, 귀여운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느낌을 안겨 준다.

누구나 한두 가지쯤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이나,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란 사실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고, 부끄러워서 피하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무지가 단무지인 자신의 모습을 토끼옷으로 감추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콘은 가장 미스터리한 캐릭터인데, 항상 곁에서 무지를 지켜주는 모습은 누군가의 뒷모습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곁에 있을 때는 공기처럼 소중함을 모르다가, 그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누군가의 소중함을 깨닫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무지와 콘은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투영해볼 수 있는 내 모습, 혹은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다.

우리는 무지해. 나도, 너도 무지해.

모든 걸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때로는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고, 때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전제하고 출발해보기로 했어.

그러면 다수가 손을 들었다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지.

'우리' '모두' 같은 말로 뭉뚱그려서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어.   p.122

이 책에 수록된 글들 중에 가장 마음이 와 닿았던 것은 바로 기억의 옷장에 관한 대목이었다. 어쩌면 나 역시 '걸려 있는 옷의 개수만큼이나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제법 괜찮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고민이 많은 진지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슬픔에 젖어 우울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줬던 매정한 사람으로..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나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물론 모두에게 좋은 모습으로 남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모습이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 내가 나를 기억하는 것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를 기억하는 것이 그다지 나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진심과 가식과 거짓과 진실이 모두 뒤섞여 있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자신의 모습이라면 그것도 그런대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모든 사람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하게 된다면, 세상은 더 심각한 소통 불능으로 아마 대혼란이 일어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내 마음 속 두 얼굴, 내 속의 서로 다른 ''들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 받지는 말자. 세상이 나를 바라보고, 누군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필요한 것은 스스로 가장 편한 모습으로 있는, 보이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찾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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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현재의 탄생 - 오늘의 세계를 만든 결정적 1년의 기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지음, 김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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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스톡홀름, 마당이 내다보이는 방에 앉아 한 여성이 글을 쓰고 있다. 사방에 장식이라고는 없는 리넨 천을 널어놓은 아주 작은 주방이다. 둥지, 마음, 내부. 마치 안팎을 뒤집어놓기라도 한 듯, 이 방은 방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차분하고 고요하며 외로운 밤이 되면 그는 글을 쓴다. 어머니의 숨소리와 벽 안쪽 파이프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뚫고 들려온다. 조만간 적대적으로 변하게 될 또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그는 밤을 쓴다. 아니면 밤이 그를 쓴다고 해야 할까?   p.249

팔레스타인의 작은 마을에 사는 열여섯 소녀 함므다 좀마는 사진을 움직이는 마법에 푹 빠져든다. 움직이는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남자에게 이야기 값을 내느라 엄마 몰래 빵을 훔치기도 하고, 상점에서 렌틸콩을 슬쩍하기도 한다. 그녀는 영웅과 자유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을 느낀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 앉아 일기를 쓰는 중이다. 그곳은 희고 거대한 감옥, 홀로 지내기에는 지옥 같은 곳이다. 노령의 대통령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수심으로 가득하다. 런던 교통국에서는 근무하는 여성 500명에게 해고 통보를 한다. 이제부터 수개월에 걸쳐 런던의 모든 버스 및 전차의 여성 안내원들이 직장을 잃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1947 1 1, <타임스>는 영국인들을 향해 더 이상 시계를 믿지 말라고 알린다. 사람들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BBC 방송에 다이얼을 맞춘다. 전기식 시계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전의 영향을 받았고, 기계식 시계는 정기적으로 점검을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지만, 유럽 전역에 걸쳐 피해가 속출했다. 수십 만 채의 건물이 사라졌고, 소도시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수천 명의 노숙자가 생겼고, 모두들 물과 전기의 제한적인 공급에 대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시계를 훔치고, 숨기고, 엉뚱한 곳에 두고, 잃어버린다. 이 책은 바로 그 사라진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12, 뉴욕, 시간은 균형을 이루어 흐르지 않는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되돌릴 수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과 같아서, 깨진 조각들은 이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복원될 수 없다. 또한 어떤 시점이 다른 시점보다 더 현재인지를 가리기란 불가능하다.

어쩌면 내가 한데 모으고 싶은 것은 1947년이 아닌지도 모른다. 내가 모아 맞추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하나로 뭉쳐져야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 그리고 계속해서 떠오르는, 산산이 조각난 슬픔이다. 폭력에 대한 슬픔, 폭력에 대한 부끄러움, 부끄러움에 대한 슬픔.    p.333

1947년 한 해 동안 세계에서 벌어진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세밀한 고증과 문학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는 책이다. 스웨덴의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인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는 1947년을 오늘의 세계가 태동한 결정적 순간으로 보았고, 그 한 해 동안의 세계사를 다룬 독특한 르포르타주를 써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고, 사람들은 과거의 비극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냉전의 열기는 점점 타오르고, 미국은 CIA를 창설하고, 소련은 핵 보유국이 된다. 파리에서 디올은 뉴룩을 선보여 세계 패션계를 뒤집어놓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 2의 성>을 썼고, 조지 오웰은 죽음을 앞둔 채 <1984>를 탈고한다. 프리모 레비는 숱한 거절 끝에 자신의 회고록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만난다. 빌리 홀리데이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동시에 마약 투약 혐의로 수감된다. 최초의 컴퓨터버그가 발견된다.

이처럼 1947년은 너무 많은 일들이 너무 빠르게 벌어졌던, 역사의 또렷한 단층을 만들어낸 시기였다. 저자는 수많은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선별하고 재배치해서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역사를 현재로 가져온다. 1년 열두 달, 154개의 시공간, 220명 이상의 등장인물로 1947년의 정치, 사회, 문화적 변혁을 재구성했다는 것도 뛰어나지만, 문장이 유려하고 매력적이어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야기이다. 게다가 평범한 개인의 역사와 당대를 뒤흔든 사건들이 교차 진행되고, 모두 현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의 동시대성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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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잔혹한 어머니의 날 1~2 - 전2권 타우누스 시리즈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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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덴슈타인은 밝은색 옷감이 든 비닐봉투 하나를 들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분홍색 면 팬티임을 안 순간 그는 슬픔에 휩싸이고 말았다. 속옷의 주인은 죽은 날 아침 옷장서랍에서 이것을 꺼내 입었으리라.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이 마지막 날이 될지는 꿈에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이 세탁하고 다림질했을까? 그녀는 그날 왜 하필 이 속옷을 골랐을까? 옷을 고를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에게 사건이 개인적인 일로 다가오는 순간은 바로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 그녀를 죽이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눈 앞에 누워 있는 이 시체도 멀쩡히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을 터였다.    -1, p.200

부활절 연휴가 끝나자 마자 몰스하인의 오래된 저택에서 남성 변사체 한 구가 발견된다. 개 한 마리와 함께 홀로 살고 있던 80대 노인인 테오도르 라이펜라트는 이미 죽은 지 10여 일이 지난 듯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왜 그 동안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을까. 얼핏 보기엔 자연사인 것처럼 보였다. 노인이 키우던 개 역시 아사 직전인 상태로 발견되는데, 놀랍게도 견사에 널려 있는 뼈들이 인골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덕분에 또 하나의 고독사 사건으로 치부되어 부검 없이 서류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사건이 본격적으로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검안 과정에서 두부손상이 발견되어 그가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보이는데, 수사 결과 사망자의 자택에서 여성 유해 세 구가 발굴되었고, 그들 모두 5월 어머니의 날 전후 실종된 것으로 밝혀진다. 과연 노인은 연쇄살인범일까, 아니면 연쇄살인의 또 다른 희생자일까.

라이펜라트 부부는 전쟁 때 전쟁고아들을 맡아 키우던 수녀원이었던 건물을 사들여 지난 20여 년간 인근 보육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입양해 보살펴왔다. 리타 라이펜라트 부인은 1995년부터 실종된 상태인데,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말한다. 하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민낯이 드러나는데, 그녀는 아무 힘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욕조에 처박고 아이스박스에 가두고 우물에 던져 넣고 랩으로 몸을 감싸는 등 무자비하고 가혹한 체벌을 일삼아왔던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과 억압이 어떻게 거대한 비극으로 발전하게 되는지를 그리고 있는 거대한 서사는 세 가지 미스터리가 교차 서술되면서 진행된다.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란 대부분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면서 어느 순간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폭력의 산사태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이 작품은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탄탄한 구성과 다양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플롯으로 인해 시선을 뗄 수 없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더욱 정교해지고, 깊이 있어지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필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저는 이 흉악한 살인자에게 희생된 피해자들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맡을 때 적어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원한은 풀어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살인사건 전담반의 동료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강력범죄의 피해자를 탈개인화하는 것은 결코 그들을 존중하지 않아서, 혹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수사를 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감정적 타격을 받지 않기 위한 자기보호 차원입니다. 세상의 악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인 겁니다."    -2, p.138~139

넬레 노이하우스의타우누스 시리즈아홉 번째 작품이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단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데, 이번 작품 역시 시리즈 정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읽었다. 이 시리즈는 '고전적인 추리소설의 미덕과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흡인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더욱 특별하다. 그리고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더 재미를 더해간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사건과 범인, 그리고 해결되는 과정만 있어도 미스터리 스릴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스토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굴러갈 때의 그 짜릿한 즐거움과, 등장인물에게 이입되어 울컥하는 감동까지 주기란 쉽지가 않으니 말이다.

출간된 타우누스 시리즈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01 사랑받지 못한여자  (원제 : Eine unbeliebte Frau)
02 너무 친한 친구들  (원제 : MORDSFREUNDE)
03 깊은상처  (원제 : Tiefe Wunden)
04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원제 : Schneewittchen muss sterben)
05 바람을 뿌리는자  (원제 : Wer Wind Sat)
06 사악한 늑대  (원제 : Boser Wolf)
07 산 자와 죽은 자 (원제 : Die Lebenden und die Toten)
08 여우가 잠든 숲 (원제 : Im Wald)
09 잔혹한 어머니의 날 (원제 : Muttertag)

넬레 노이하우스의 작품 특징은 무엇보다 퍼즐을 맞추는 즐거움에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인 미스터리 물에서 흔히 치중하는 단순히 범인 찾기, 혹은 반전이나 트릭에만 집중하지 않는 대신, 그녀의 작품은 꼼꼼한 복선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치밀하게 엮어서 한 편의 거대한 퍼즐이 완성되는 식이다.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 그냥 스치듯 지나가는 대사 한 마디, 누군가의 행동들이 결국엔 모두 한 방향으로 흘러 마지막 결론에 이른다. 단순히 깜짝쇼처럼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되어 감탄사를 불러 일으키는 결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굉장히 많은 편인데도 그들 각각이 어떻게든 관계를 가지고 있어 사건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퍼즐을 추리하는 재미 또한 굉장하다. 전작이었던 <여우가 잠든 숲>에서 수사반장 보덴슈타인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담고 있었던데 비해, 이번 작품 <잔혹한 어머니의 날>에서는 피아 형사의 가족사를 비롯해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연루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노인의 고독사, 아동 학대 등의 사회적 문제와 가족이라는 허상, 세상 모든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까지 담고 있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2권 말미에는 넬레 노이하우스 작가 인터뷰와 시리즈 각 권의 내용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아직까지 타우누스 시리즈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이번 기회에 이 작품으로 넬레 노이하우스의 진면목을 만나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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