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대학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7
김동식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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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악마로서의 내 권능은 ‘사랑을 공략하는 힘’이니까. 인간은 사랑이 인연과 운명이라고 믿지만, 사랑은 그렇게 순수한 게 아니라 그저 공략할 게임에 불과하다. 난 지금 당장 그녀가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정말입니까?"

"하지만 알고 있겠지? 악마와의 거래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p.17


매년 6월, 악마대학교에서는 ‘창의융합 경진대회’가 열린다. 지옥을 대표하는 기업의 쟁쟁한 악마들이 한쪽에 마련된 귀빈석에 앉아 있고, 학생들은 '어떻게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발표한다. 이 자리에서 주목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따라 지옥 대기업 스카우트 여부가 갈리기에 교수에게도, 학생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한 행사이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열린 사전 점검 발표 날, 지각한 악마 '벨'은 인간들이 가장 욕망하는 '영생'을 주제로 발표를 하지만, 교수 악마에게 여러가지 문제점만 지적 당하고 엉망진창으로 깨진다. 


실망한 벨은 수업이 끝난 뒤 '인간 욕망 연구회' 동아리방으로 향해 친구 악마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각자 준비한 '사랑'과 '도박'이라는 주제로 인간계로 내려가 시뮬레이션 한 것을 보여준다. 악마 '아블로'는 인간들이 최고의 가치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같은 과 친구를 짝사랑하는 청년에게 다가가 '사랑을 공략하는 힘'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한다. 그 대가는 수명이 줄어드는 것이었고, 아주 조금씩 사용되었던 수명은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성을 공략하는 방법에 취해 점점 더 능력을 빈번하게 사용하던 청년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한 결과였다. 악마 '비델'은 인간이 가장 크게 욕망하는 건 '돈'이라고 자신한다. 그는 평범한 3년차 회사원에게 접근해 도박을 제안한다. 도박의 룰은 특정 대상이 언제 죽는지를 맞히는 거였다. 간단해 보였던 도박은 큰 돈을 벌고, 잃게 되면서 평범한 인간을 점점 괴물로 만들게 된다. 벨도 친구들의 도움으로 인간계에 내려가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테스트해보기로 하는데, 과연 그는 발표일에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저를 만난 그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겠죠. 고민하다가, 시간을 역재생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을 말입니다. 그것까지도 정해진 결과였으니까. 그렇게 과거로 돌아간 그는 또다시 같은 삶을 반복하다가 다시 저를 만나 과거로 돌아가고, 또 똑같은 삶을 반복하다가 다시 저를 만나고, 다시 또, 다시, 다시, 영원히 맴돌게 되는 거예요. 제 제안을 받아들이자마자 그 인간은 현실에서 영영 사라져 끝나는 겁니다. 그 사라짐은 죽음보다도 더합니다. 영혼의 안식조차 없을 테니까요. 그야말로 영원히."                 p.108~109


당대 한국 문학의 가장 현대적이면서도 첨예한 작가들과 함께하는 <현대문학 핀 장르>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그동안 수많은 초단편 소설을 발표해 온 김동식 작가의 첫 중편소설이기도 하다.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은 정보라 작가의 <밤이 오면 우리는>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단요 작가의 <케이크 손>,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이희영 작가의 <페이스>, 네 번째 작품은 조예은 작가의 <적산가옥의 유령>, 다섯 번째 작품은 황모과 작가의 <언더 더 독>, 그리고 여섯 번째 작품은 연여름 작가의 <부적격자의 차트>였다. 


김동식 작가는 소설집 <회색 인간> 이후 굉장히 다작을 해왔는데, 개인적으로는 핀 장르 시리즈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일단 가독성이 굉장히 좋고, 짧은 분량임에도 임팩트가 있으며, 무엇보다 기발한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었다. 악마들조차 대학에 가서 교육을 받고 인간을 연구한다는 색다른 설정부터 매우 기대가 되었다. 두꺼운 전공 서적을 품에 안고 학구열에 불타는(의미 그대로 진짜 불타기도 하는) 악마들이 한가득 앉아 있는 강의실을 상상만 해보더라도 흥미진진한 그림이 그려지니 말이다. 게다가 악마들도 학점을 따야 하고 취업 걱정을 한다면, 가장 ‘악마적인 수법’을 겨루는 것으로 졸업 후 진로가 결정된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김동식 작가는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에 대해 사유한다.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악평만 받던 '벨'의 아이디어가 대반전되면서 펼쳐지는 결말 부분이 특히나 재미있었고, "정말 인간은 대단히도 어리석은 존재구나."로 마무리되는 마지막 페이지에 가면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을 진정 파멸로 이끈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추천해주고 싶다. 김동식 작가의 작품들을 재미있게 보아왔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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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꼬미 동물병원 6 - 기묘한 동물 편 쪼꼬미 동물병원 6
권용찬 지음, 이연 그림, 최영민 감수 / 서울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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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51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SBS TV 동물농장 X 애니멀봐>의 오리지널 콘텐츠 중 하나인 '쪼꼬미 동물병원' 시리즈, 그 여섯 번째 책이다. 곤충과 동물에 관심이 많은 아이 덕분에 다양한 반려동물들과 함께 지내왔기에, 정말 재미있게 챙겨보고 있는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여러 동물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사람과 동물의 세계를 더 가깝게 연결해준다는 컨셉으로 병원을 찾은 소동물 친구들의 치료 이야기를 담아 왔다. 지난 5권에서는 처음으로 병원 밖으로 나가 야생 동물의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이번 6권에서도 놀라운 동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싹오싹 동물 테마파크>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초대권이 생기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물 테마파크에서 만날 동물들은 하나같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다고 해서, 하루와 햄지는 테마파크에 가기 전 시간이 날 때마다 공포 영화를 보며 담력을 키운다. 열심히 담력을 키워서 이제 강심장이 되었다고 자신만만한데, 과연 이들은 오싹오싹 동물 테마파크에서 무사히 동물들을 만나고 올 수 있을까.


첫번째 등장하는 것은 바로 지상 최악의 독을 가진 동물이다. 방울뱀보다 15배 더 강한 맹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검은과부거미를 시작으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독사 검은맘바까지 등장하는데... 이 무시무시한 동물들도 탈수증과 치통으로 고생 중이었다는 것이 반전이다. 무사히 이들을 도와주고 나면 다음 장은 기이하게 살아가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조류와 포유류를 섞은 듯한 묘한 모습을 한 오리너구리, '새끼 용'이라는 별명으 붙을 정도로 신비로운 외모를 가진 올름을 만날 수 있다. 




쪼꼬미 시리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학습 만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 더 친근하게 동물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주인공이 되는 동물의 사연이 학습만화로 소개되고, 각 장의 마지막에 해당 동물에 대한 실제 사진과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만화 자체도 재미있지만, '하루'의 쪼꼬미 일지가 이 시리즈의 백미라고 볼 수 있다. 실제 만화 에피소드로 등장했던 동물들의 모습을 만나는 것이니 말이다.


이번 6권에서는 무섭고, 기이한 동물들 외에도 천연 악취 폭탄 스컹크, 갈고리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긴 중지 때문에 악마처럼 여겨졌던 아이아이 원숭이,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을 낳는 피파개구리, 오래 살고 노화도 오지 않는다는 온몸에 털이 없는 벌거숭이두더지쥐 등 기묘하고, 특별한 동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정보와 병원 이야기를 만화로 유쾌하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아이들이 자연스레 귀여운 쪼꼬미 동물 친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십만 종의 동물도 함께 살고 있기에,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으로 동물을 대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이번 6권에서는 멋잇감을 잡는 동물들의 신통한 사냥법이 정리되어 있고, 동물에게 물렸을 때 응급처치 및 치료방법에 대해서도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정보들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어 동물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에필로그로 쪼꼬미의 소소한 일상 만화도 아주 귀여우니 놓치지 말고 챙겨보자. 쪼꼬미 동물 친구들과 더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는 특별한 안내서, <쪼꼬미 동물병원> 시리즈를 통해 특별한 동물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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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용골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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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크의 말대로 에드릭이 작정하고 숨었다면 쉽게 찾아낼 수 없으리라. 

"하지만 미니언을 발견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술을 건 자와 마술에 걸린 자 사이에는 한 조각의 빵을 반으로 나눈 듯 일종의 연결고리가 생기기 때문이죠. 미니언을 산 채로 붙잡을 수 있다면, 술자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미니언과 암살기사는 마술의 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이 실을 눈에 보이게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만, 시간을 들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p.168



브리튼섬 동쪽, 런던에서 출항해 북해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사흘 밤낮을 가면 두 개의 섬, 솔론제도가 있다. 이 황폐한 섬에서 도시의 기반을 닦아 발전시킨 것은 북해 무역을 장악한 에일윈 가문이다. 어느 날 솔론섬에 동방에서 온 방랑기사 팔크 피츠존과 그의 어린 종사 니콜라가 찾아와 자신들이 쫓고 있는 ‘암살기사’가 솔론의 영주를 노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그날 밤 솔론의 영주가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솔론섬은 북쪽과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동쪽은 암초가 많아 바이킹조차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지역이었다. 밤이면 외부와 단절되는 섬에 숨어든 자는 누구일까. 솔론 영주의 호기심 많은 딸 아미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히기 위해 팔크와 함께 사건 조사를 시작한다.


팔크는 마술을 통해 살인 현장에서 찍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발자국을 찾아낸다. 은빛 가루를 뿌리고 숨을 불어넣자, 돌바닥에 어지러이 찍힌 발자국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사실을 토대로 살인자가 어떻게 영주관에 침입했는지, 살인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찾아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악한 마술을 사용하는 암살기사는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을까. 팔크는 암살기사가 사용한 마술의 종류가 '강제된 신조'라 불리는 사악한 마술이라고 단언한다. 암살기사가 점찍은 인간의 피를 입수해 그 피를 은으로 만든 단검에 발라 납그릇에 채운 포도주에 담근다. 그러면 피의 주인은 가엾게도 암살기사의 앞잡이, 미니언이 되는 것이다. 바로 그 미니언이 암살기사에 의해 조종당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고는, 그 일을 잊어 버리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살인을 행하고도 그 사실을 잊어 버린 '미니언'이 누구인지부터 찾아야 했다. 현시점에서 의심스러운 인물은 모두 여덟 사람이었고, 그들 중 누군가가 영주를 죽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영주의 허락을 받은 이들만 머무르고 있었을 ‘작은 솔론’이라는 거대한 밀실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영주를 살해할 수 있었던 자는 과연 누구일까?





"요컨대 그곳에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밤중에 젖은 발로 작은 솔론에 침입한 자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것은 즉 큰 솔론에 있던 다섯 명 중 누군가가 롤렌트 님을 살해한 미니언이라는 뜻입니다."

"그럴 리 없소!" 

한 기사가 버럭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론은 철벽수비를 자랑하오. 동이 트기 전에는 큰 솔론에서 작은 솔론으로 건너갈 수 없지. 그게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는 한, 당신 이야기는 전혀 믿을 수 없소."              p.502


요네자와 호노부의 <부러진 용골>이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판타지에 미스터리를 접목시킨 특수 설정 미스터리인데, 지금이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았지만 출간 당시(2010년)만 하더라도 흔치 않았다.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논리에 입각한 수수께끼 풀이, 즉 본격 미스터리의 골격이 자리잡고 있다. '타인을 조종해 살인을 지시하는 암살기사와 그를 쫓는 마법기사'라는 설정이 중심에 있기 때문에 논리와 이성으로 풀어 나가는 본격 미스터리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인데, 요노자와 호노부는 물과 기름처럼 어우러질 수 없는 두 가지를 한 작품 속에서 구현해낸다. 


제한된 공간과 한정된 용의자, 하지만 마법이 실재하는 세계라면 초현실적인 능력으로 어떻게 '논리와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얼핏 상상이 잘 되지 않겠지만, 그걸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특수한 설정을 사용한 미스터리라도 독자와 작가 사이에 합의된 명확한 약속이 있다면, 그 약속이 설령 이 세상의 법칙이 아닐지라도 미스터리는 성립한다. 거기에 미스터리라는 지적 유희의 심오함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작품의 재미는 바로 그런 부분에서 만들어 진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추리의 전제로 받아들여 소설적 재미를 확장시키는 것이 바로 '특수설정 미스터리'만의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는 이 작품의 이야기를 12세기 말 유럽으로 정한 이유로 수도사 캐드펠의 흔적이 남아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캐드펠 수사 시리즈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지만, 같은 시대라서 주는 재미가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최신작들을 좋아한다면, 그의 또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는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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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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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 애정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말이 지금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견은 한 종사관을 끌어내릴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한때는 너무 어려 이해하지 못했던 단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머릿속에 박혔고, 시간이 흐르며 무슨 뜻인지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감춰진 진실. 피해자가 고통에 시달리는 동안 가해자는 처벌을 받지 않는 부조리. 찢어내야 할 거짓과 오해의 장막. 누명. 날카로운 가시처럼 목구멍에 파고드는 이 두 글자는 아무리 침을 삼켜도 내려가지 않았다.               p.151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벽 근처에서 젊은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는 장신구로 달고 다니던 자신의 은장도에 찔려 죽었다. 신분패를 확인하니 오 판서 대감의 딸로 이제 열아홉밖에 되지 않은 여인이었다. 유교의 법도에 따라 여성 범죄자를 체포하거나 여성 피해자를 검시하는 역할은 남자가 할 수 없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한성부 포도청 소속 다모였다. 노비 신분인 열여섯 '설'은 포도청 다모로 종사관을 도와 사건 수사를 돕는다. 수사 과정 중에 피해자의 몸종이 도망쳐 인왕산으로 횃불을 든 관원들과 함께 설은 수색에 나서게 된다. 인왕산이라면 백호가 산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설에게 공포의 장소였다. 그리고 실제로 호랑이와 마주하게 된다. 


설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개울 반대쪽에 한쪽 소매가 피로 물든 한 종사관이 서 있었고, 바로 몇 발짝 앞에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다. 덩치가 사람만한 그 놈은 발이 솥뚜껑 같고 발톱은 날카로웠으며 가슴으로부터 깊은 으르렁 소리가 울렸다. 말은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져 몸부림치고 있었고, 그 뒤에 도망친 몸종이 웅크리고 있었다. 당장 호랑이를 겨눠야 했다. 설은 머뭇거리든 포졸 견을 대신해 망설임 없이 단번에 표적을 겨냥해 활을 쏜다.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호랑이의 몸통으로 날아가 퍽 꽂혔고, 놈이 내지른 포효에 놀란 말이 앞다리를 들고 일어나며 설을 허공에 던져버린다. 설은 그대로 정신을 잃게 되지만, 한 종사관의 목숨을 구했다는 이유로 사건이 해결되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살인사건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쌓여가는 증거가 가리키는 범인은 설을 혼란스럽게 하는데, 과연 진실을 풀어나갈 수 있을까. 





세 개의 획으로 이루어진 모음은 구분하기 쉬웠다. 가로선은 평평한 땅, 점은 하늘의 태양, 세로선은 똑바로 선 인간을 상징했다. 땅, 태양, 인간. 이 세 가지를 더한 것이 인생이라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거짓과 기만의 실로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 실을 따라가 한 종사관의 근본에 이르면 나는 어떤 진실을 보게 될까? 그가 마음 한가운데 품고 있는 진실도 가장 흔한 살인 동기인 욕정, 탐욕, 복수심, 이 세 가지처럼 단순할까?              p.295


설은 호기심이 넘치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가졌다. 설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위험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하지만 1800년 조선이라는 시대는 어린 여자 노비인 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무시와 면박을 당할 때마다 '나를 구해줄 사람은 나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고난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선다. ‘설’뿐만 아니라 세상에 노비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며 하인에게 글 읽는 법을 알려준 ‘오 소저’, 친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기꺼이 손을 내미는 ‘우림’, 두렵다는 이유로 선행을 포기하지 말라며 남장을 한 채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을 돕는 ‘강씨 부인’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서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왕이 승하한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배경으로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려는 소녀 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사라진 소녀들의 숲>으로 만났던 허주은 작가의 신작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에서 자란 작가가 15세기 초 조선을 배경으로 쓴 역사 미스터리라는 점으로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전작들처럼 이번 작품 역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작품이다. 이민진 <파친코>,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등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의 작품이 세계에서 먼저 호평을 받고 나서 국내로 소개되면서 허주은 작가의 작품들도 국내에 꽤 많이 소개가 되었다. 벌써 네 번째 작품이니 말이다.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조선 세종 대까지 존재했던 공녀 제도를 중심으로 가부장 시대 조선 여성들의 삶을 그렸고,  <붉은 궁>은 조선시대 영조 치하의 궁궐을 배경으로 의녀를 주인공으로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함께 보여주었다. <늑대 사이의 학>에서는 조선 시대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을 배경으로 불의에 저항하고 연대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았고, 이번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에선 1800년 정조 사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조선을 배경으로 여성 수사관 다모가 사건의 비밀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뛰어난 가독성으로 책을 읽는 내내 우리를 조선 후기의 시간 한복판으로 데려간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름을 다시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열여섯 소녀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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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세계문학 원정대 5 - 레 미제라블 김영하의 세계문학 원정대 5
박성일 그림, 김난영 스토리 / 주니어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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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세계문학 원정대' 시리즈 그 다섯 번째 책이 나왔다. 이 시리즈는 김영하 작가와 함께 세계 문학 작품 속으로 들어가 명작의 교훈과 가치를 느끼고 현재의 관점에서 명작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신개념 학습만화이다.


<셜록 홈즈의 모험>을 시작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오만과 편견>, <지킬 박사와 하이드/프랑켄슈타인>, <빨간 머리 앤>에 이어 이번에는 <레 미제라블>이다. 김영하 작가와 함께 엄선한 세계 문학 작품들이 계속 이어질 예정인데, 다음 이야기는 <15소년 표류기>라고 하니 또한 기대가 된다. 




사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총5권으로 나왔을 만큼 분량이 엄청난 걸로도 유명하다. 성인 독자가 완독하기에도 부담스러운 분량이라, 어린이들이 이 책을 통해서 쉽고, 재미있게 먼저 접하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은 성공했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치는 일을 하는 청년 장 발장은 벌써 일주일째 아무것도 못 먹은 상태였다. 그는 굶주리는 누나와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쳤다가 19년간 감옥살이를 한다. 처음 그에게 선고된 것은 5년의 노역형이었지만, 네 번 탈옥하려다 실패해서 결국 형량이 19년이 된 것이다. 이후 출소했지만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혀 일할 곳도, 하룻밤 머물 곳도 찾기 힘든 상태였다. 그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준 미리엘 신부의 은그릇을 훔쳐 다시 잡히고 말지만, 신부는 그런 장 발장을 용서하고 은그릇을 자신이 준 선물이라고 말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앞으로 정직한 사람, 선한 사람이 되어 달라는 신부 덕분에 장 발장의 인생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월이 더 흐른 뒤, 사업가에서 시장이 된 장발장을 비롯해 배고픔과 학대 속에서 자란 코제트, 자식을 위해 이와 머리카락까지 판 여성 노동자 팡틴, 법 수호에 목숨을 걸고 장 발장의 뒤를 끈질기게 쫓는 경찰 자베르, 코제트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 마리우스, 여관을 운영하는 악랄한 성격의 테나르디에 부부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김영하 작가와 문학부 친구들이 가상 현실 시스템을 작동해 명작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컨셉으로 진행이 된다. 정직한과 조아라를 비롯해 작가 X를 찾아 미래에서 온 로봇 김영일, 나희재까지 이들 문학부는 <레 미제라블> 속 등장인물이 되어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생생하게 체험한다. 작품 속 캐릭터와 다른 행동을 하게 되면 페널티를 받게 되고, 작품이 추구하는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어 카드를 획득하면 프로그램이 종료되어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위대한 세계 문학 작품들을 만화로 풀어내어 부답없이 작품들을 접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다. 중간 중간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학습 정보, 그리고 문학 작품과 작가에 대한 추가 정보도 수록되어 있고, 다 읽고 나면 마지막에 '김영하의 세계 문학 다시 읽기'를 통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작품 해설도 수록되어 있다. 작품의 이야기 배경이었던 프랑스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레 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이 주는 감동과 교훈에 대해서 김영하 작가의 해설을 읽다 보면 내용이 잘 정리되는 느낌이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문학부 쉬는 시간'이라고 해서 미리엘 주교 집 찾기, 알맞은 대사 넣기, 숨은그림찾기, 다른 그림 찾기 등 재미있는 놀이로 머리를 쉬게 해줄 수도 있다. 작품과 관련있는 내용으로 꾸며 더 재미있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이 세계 문학의 가치를 찾아내는 재미를 독자들도 느낄 수 있도록 실물 가치 카드를 부록으로 받아볼 수 있으니, 수집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서 세계 역사의 중요 사건인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되고, 빅토리 위고의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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