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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ㅣ 하다 앤솔러지 1
김유담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9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6월이 좋아. 육월이라고 하지 않고 유월이라고 할 때의 동그랗게 내민 입술을 좋아하고 야무지게 몸피를 불려 가는 나뭇잎이 쏴아아아 바람과 만나는 소리도 좋고 땀 흘리고 돌아온 사람에게 내미는 얼음물의 차가움도 좋아. 6월이 와서 좋아. 기다리던 사람이 6월에 와줘서 좋아. 그 사람의 이름은 6월로 하자. 남자아이면 준, 여자아이면 주은이라고 부르자. 우리 영원히 6월과 함께 살자. - 이주혜, '유월이니까' 중에서, p.107
나는 스무 살 때부터 언니가 치는 사고들을 수습해 왔다. 그러다 올해 초 언니가 자신이 입양한 개를 떠넘겨 버린 것이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열세 살의 영국코커스패니얼인 하지는 얼마 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하지를 사랑하는 건 어쩐지 언니에게 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의도적으로 하지에게 정을 붙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그 늙고 커다란 개가 조금은 그리워졌다. 하지가 떠난 뒤는 한동안 밖에 나가 걸을 일이 없었다. 프리랜서가 된 이후로 외출할 일이 드물었고, 원체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지 한 달 만에 하지가 집에 돌아왔다. 희뿌연 유령 개가 되어서. 유령 개가 되어 돌아온 하지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느릿느릿 걷거나,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했다. 하지에게 뭘 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나는 우선 산책부터 시도해 보기로 한다. 목줄을 채울 수도, 옷을 입히거나 신발을 신길 수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유령 개와 산책을 시작했고, 그렇게 느릿느릿 걷다가 때때로 멈춰 서며 목적지 없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오랜만에 하는 산책은 예상외로 무척 좋았지만, 문제는 하지가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탓에 내가 수상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민망하지만 뭐 어때 싶은 마음으로 하지와의 산책을 여유롭게 즐긴다. 갑자기 공으로 변하더니 경사진 길을 빠르게 굴러 내려가는 하지가 너무 귀여웠고, 고양이 두 마리가 하지의 기척을 눈치채는 것도 신기했다. 반려견을 오래 키워봤다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였다. 나 역시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반려견이 떠난 뒤, 한 동안은 외출했다 집에 돌아오면 멀리서 짖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현관에 뛰어 나올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유령 개라니... 이토록 사랑스러운 발상이라니... 이야기를 읽는 내내 뭉클하고, 설레었다. '두 손으로 하지를 안아 올리자 갓 구운 빵을 품에 안은 듯 유령 개의 온기가 전해졌다'는 대목에서 그 따스함이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하지는 왜 유령 개가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일까. 유령 개와 나의 산책은 계속 될 수 있을까.

이따금씩 명길은 혼자 사는 그 집의 배치가 이전과는 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했다. 이 년쯤 교제하는 동안 옷장과 신발장, 욕실의 수납장마다 그의 물건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무언가를 견디거나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설거지한 그릇들은 한번씩 다시 들여다봐야 할 때가 많았다. 욕실의 젖은 슬리퍼 때문에 양말이 젖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괜찮았다. 숨기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명길이 숨길 수 있는 마음이었으니까. - 임현, '느리게 흩어지기' 중에서, p.174~175
다섯 명의 소설가가 하나의 주제로 함께 글을 쓰는 열린 책들의 '하다 앤솔러지' 첫 번째 책이다. 동사 <하다>를 테마로 우리가 평소 하는 다섯 가지 행동 즉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에 관한 책이 차례로 나올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책 <걷다> 에는 김유담, 성해나, 이주혜, 임선우, 임현 작가가 참여했다. <없는 셈 치고>에서 암을 앓게 된 고모는 보드라운 황토로 조성된 길을 맨발로 걷는다. <후보>에선 38년간 철물점을 운영한 남자가 관절에 무리가 덜 가는 방법으로 의사가 알려준 뒤로 걷기를 한다. <유월이니까>에서 아내가 갑자기 사라진 뒤 남자는 밤마다 공원의 트랙에서 걸으며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여자를 만난다. <유령 개 산책하기>에선 열세 살 늙은 개 하지가 죽은 지 한 달 만에 유령 개가 되어 돌아와 다시 산책을 시작한다. <느리게 흩어지기>에서는 독신 중년 여성의 단조롭고 일정한 생활 속에 산책은 중요한 루틴이다.
각자 배경도, 나이도, 상황도 다른 인물들이 기를 쓰고 걷는다. 살기 위해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르내리고, 앞으로 걷다 뒤로 걷고, 맨발로 걷고, 느릿느릿 걷다가 멈춰 서기도 하면서 말이다. 다섯 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모르는 사람과 함께 걷기도 하고, 유령 개와 걷기도 하며, 혼자 걷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임선우 작가의 <유령 개 산책하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뭉클하고, 좋았다. 이 시리즈는 반투명한 트레싱지로 옷을 입은 표지도 예쁘고, 책배와 위, 아래에 프린트가 함께 되어 있어 실물로 보면 정말 근사하다. 시리즈에 참여하는 25명의 소설가에 대한 라인업이 미리 나와 있어, 나올 때마다 챙겨봐야겠다 싶었다. 다음 편인 <묻다>는 어떤 이야기와 디자인으로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