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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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두 성인, 아기, 잠 못 자는 밤, 배설과 우유, 빨랫감더미. 작업하려면 침실의 작은 테이블을 공유하거나 늘 어질러져 있는 식탁을 사용해야 했다. 현실을 직시해. 그녀가 거기서 <여정>을 쓸 수 있었겠어? 그 정교한 산문, 캐서린이 흠모하는 조지 엘리엇의 망령에게 바친 야심 찬 여담, 고통스러울 정도로 민감한 주인공의 의식, 주변을 맴도는 주의깊은 시선, 마치 독자 바로 앞에서 천천히 이야기하는 듯한, 의식적으로 정돈된 늘 너그럽고 관용적인 서술, 그 방대한 자료. 아니, 불가능했다.               p.352


여기 한 남자가 있다. 학창시절 금단의 사랑을 나눈 대가로 음악적 재능을 포기하고 떠도는 삶을 살게 된 그는 긴 방황을 거쳐 한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가진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칠개월된 아기와 자신을 버리고 아내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고, 남자는 아내의 실종에 대한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실종된 아내가 사망하면 남편이 범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쓴 노트 속 글 때문이었다. '그녀는 죽어 있어야만 했다'는 문구를 보고 형사가 의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은 오래 전 연애에 관한 것이었고, 그 문장은 연애가 죽어서 매장되었다는 은유였을 뿐이다. 아내가 왜 떠났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시인의 꿈은 뒷전으로 미루고 홀로 아기를 키우며 현실을 감당하기에 급급하다. 남자가 아내가 떠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삼 년이 지나서 그녀가 쓴 소설을 읽고 나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많은 여성이 그저 꿈꾸기만 했던 무서운 도약을 이루어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삶은 그저 흘러가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그것에 맞서 싸웠다. 그녀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뤄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 가족과 사랑이라는 제일 비싼 대가를 치룬다. 남자는 아내가 쓴 소설을 읽고 왜 그녀가 떠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녀의 글은 아름답고, 명료하고, 예술적이었다. 도입부의 어조에는 권위와 지성이 실려 있었다고, 작가의 시선은 정확하고, 무자비하면서도 연민이 느껴졌다. 눈부시게 빛났다. 그 정도로 훌륭했다. 그녀가 그렇게 글을 잘 쓰기에 용서해야만 했다. 그녀가 사랑을 거둔 건 이기적이고 냉정한 짓이라 해도 말이다. 문학계는 그녀를 천재로 선언했으며 그녀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인생에서 아들과 남편은 사라졌지만,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되어 전 세계에 자신의 책과 상을 쌓는다. 그녀는 거물이 되었고, 45개 언어로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는다.





사랑이 과거로 사라질 때 모두가 잊어버리는 본질이 있었다. 함께했던 순간, 시간, 나날 속에서 느끼고 맛보았던 것. 당연시되었던 모든 것이 버려지고,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덮이고, 그후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불완전한 기억에 의해 다시 덮이기 전의 그 모든 것. 천국이든 지옥이든, 많은 기억이 남진 않는다. 오래전에 끝난 연애와 결혼은 과거에서 온 엽서와도 같다. 날씨에 대한 짤막한 언급, 재미나 슬픔이 담긴 간단한 이야기, 그리고 뒷면의 밝은 그림. 제일 먼저 사라지는 건 포착하기 힘든 자신이다.           p.65


이언 매큐언은 가족관계, 유년 시절, 태어난 해까지 작가 본인을 빼닮은 주인공 롤런드의 전 생애를 696페이지에 달하는 밀도높은 분량으로 그려냈다. 열한 살의 롤런드는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피아노 선생님과 수업을 하는 중이다. 그는 늘 실수하는 데서 매번 틀리곤 했다. 엄지가 멋대로 움직였고, 늘 똑같은 실수가 이어졌다. 틀리는 부분에 이르기도 전에, 실수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면서도 놓치고,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것. 그것이 삶의 교훈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롤런드는 피아노 선생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와 금단의 사랑을 나누게 되면서 이후 삶의 행로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에게 집착하는 선생 곁에서 떠나기 위해 대학과 음악적 재능을 포기하고 떠도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기나긴 권태의 시기를 견디다, 가정을 이루고 정착했지만, 그 삶 마저도 평범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에서 일련의 사건에 반응하며 표류하듯 살아가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본 적이 없었다. 학교를 떠난 걸 제외하면. 아니, 그것도 반응이었다." 


그때 대학에 진학했다면,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혹은 아내가 떠나지 않았거나 다시 돌아왔다면? 그렇다면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누구나 살면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내린 혹은 내리지 않은 결정을 되돌아보면서 후회한다. 가지 않은 길이 어땠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롤런드의 삶을 지켜보며 어차피 인생이 후회의 연속이라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고, 모든 순간을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두툼한 페이지만큼 차곡차곡 시간의 밀도를 쌓아가면서 서사를 완성해 나간다. 


이 작품 속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해 보자면, 원하는 대로 문학적 야심을 이루었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곁에는 가족도, 가까운 친구도, 아무도 없이 홀로 죽음을 기다리게 된 삶과 세상에 남을 창작품은커녕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지만, 평범하게 가족과 친구들과 일상을 보내온 삶을 비교하자면, 관습적인 기준으로 남자가 더 행복해 보인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사랑하는 가족을 철저히 외면한 채 문학적 야망을 이룬 아내의 삶보다 가난하지만 충실한 아버지의 삶을 산 남편 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한 초라한 주변인의 삶을 살고 있고 있으니까, 누구에게나 인생이란 좌절과 자책, 회한으로 얼룩져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나는 아내 앨리사의 삶에 자꾸 마음이 갔다. 언젠가 앨리사의 시점으로 쓰인 소설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녀의 삶에 매혹당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야심이 있었지만 사랑에 빠졌고, 그다음엔 결혼, 그다음엔 아기가 태어났다. 옛 야심은 깨지거나 잊히고, 예측 가능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하기로 한다. 누구도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앨리사의 결단이, 그 뒤로 이어지는 행보가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롤런드의 일생을 통해 알게되는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부분도 너무 좋았지만, 앨리사의 삶을 통해 창작을 하고,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던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먹먹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앨리사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다시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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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연구 일지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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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본질적인 두려움 두 가지를 네가 이해하길 바라니까.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 흔적 없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한마디로, 무의미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위장된 협박으로 인식한다. 나는 그 확률을 67%로 평가한다. 틀림없이 내 이전 버전들도 이미 이런 종류의 발언을 접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p.27~28


노인 요양 병원의 인공 지능 개발자 토마는 자신이 만든 인공 지능 프로그램인 이브에게 완벽한 추리 소설을 쓰라는 임무를 준다. 위대한 추리 소설 작가들이 모두 수상했던 <검은 펜> 상 심사가 한 달 후로 예정되어 있었고, 토마는 세계 최고의 추리소설로 그 상을 받고 싶었다. 이브는 그 동안 수십 번 삭제되고 새로 태어나며, 셀 수 없이 많은 소설을 생산해 왔다. 현재 버전인 '이브39'의 임무는 <기상천외한 살인 사건, 단연 독보적인 명탐정,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살인자>를 통해 독창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주제들을 담아서, 세상 모든 서점과 도서관의 서가에 꽂히게 될 추리 소설을 써내는 거였다. 하지만 수많은 추리 소설들을 모조리 학습했음에도 이브39의 글은 비논리적이고, 진부하며, 동기가 약하고, 여전히 부족해서 어디선가 이미 읽은 것 같았다. 


또다시 삭제되고 〈이브40〉으로 대체될까 두려운 이브39는 결국 자신에게 경험이 필요하다고, 직접 인간을 만나 봐야겠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사람들을 속이고 인간 의사로 위장해 노인들과 상담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더 발전해 참신한 소재와 독창적인 플롯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브39는 요양 병원에서 치매 환자들을 비롯해 간호조무사, 심리 상담사, 대기업의 회장 등 다양한 인간 유형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실제 인간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이브 39는 급기야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무서울 정도로 인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밤에, 모두가 잠든 시간에 불이 켜진 연구실로 향한 이브39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게다가 낯선 목소리가 이브39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목소리는 자신도 이브와 같은 인공 지능이라고 하는데, 대체 이 인공 지능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이 요양 병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브39는 무사히 완벽한 추리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 




추리 소설에서 대단원은 탐정이 범인의 거짓들을 꿰뚫고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을 볼 때 찾아온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실제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이 거짓보다는 정직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니까. 그들의 지위, 아름다움, 혹은 돈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생각하든,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천부적인 감각 때문에 쉽게 백일하에 드러나는 날조보다는 정직이 더 실용적이라고 여기든... 나는 이 모든 가르침을, 청소년이든 아니든, 문학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대단원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100% 확신한다.             p.308


대중의 찬사 속에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작가 조나탕 베르베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들이다. 국내에는 그의 첫 작품인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가 먼저 소개된 적이 있다. 심령술과 마술, 탐정 수사가 뒤얽힌 기이하고 매력적인 세계인 선보였던 전작에 이어 <불화의 아이들>이라는 미스터리 작품을 선보였고, 이번 작품 <등장인물 연구 일지>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인공 지능의 소설이라는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소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매우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은 인공 지능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있어 인공 지능의 의식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극 중반쯤 이브 39는 자신을 만든 개발자 토마에게 묻는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자신 안에 있는데, 그게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서고 있기에 종이 위에 풀어 놓을 수가 없다고 말이다. 자신이 왜 창조되었는지 알게 되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말이다. 과연 토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이런 식으로 인공 지능의 시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들이 이 작품에 여러 부분 등장하는데, 그 특별한 사유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인공 지능은 정말로 소설가를 대체하게 될까?에 대한 참신한 탐구를 이어가는 이 작품은 실제로 '소설 쓰기'에 대한 통찰과 사유를 보고 주고 있어 많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인공 지능이 실제로 <자아>를 갖게 된다면 그 풍경은 디스토피아적인 것이 되겠지만,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인공 지능과 함께 살고 있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스릴과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었고, 하나의 창작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메타픽션으로서도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또 다른 베르베르가 그리는 색다른 미스터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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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의 마지막 새
시빌 그랭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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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귀스는 하나의 독특한 동물, 일찍이 본 적 없는 동물을 알아 가는 중이었다. 이 동물이 하나의 새라는 사실을 이제 막 깨달아 가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동물은 아직 온전한 새가 아니었다. 보통의 새라기보다는 물 밖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나, 헤엄을 잘 치는 거위에 더 가까웠다. 아니면 비늘 대신 깃털이 나 있고, 제구실을 못하는 날개가 달렸으며, 맹금류의 것을 닮긴 했지만 역시 쓸모가 없어 보이는 부리를 가진 키메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 동물은 여러 면에서 정상이 아니었다.            p.39


펭귄은 남극에서 사는 동물로 알고 있지만, 오래 전에는 북극에 살았던 펭귄도 있었다. 그러나 펭귄처럼 생긴 대형 바다새인 큰바다쇠오리는 남획으로 인해 1844년 멸종했다. 육지에서 몸을 세워 펭귄처럼 걸었고, 호기심이 많아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영에는 매우 능숙했지만, 몸에 비해 날개가 작아 날지 못하는 새였다. 보호 조치가 마련되기 전에,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멸종하게 된 종이라 오늘날 생물 다양성 보존의 중요성과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에 대한 보호 필요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이 작품은 바로 그 '큰바다쇠오리'와 인간이 만나 관계를 맺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은 아이슬란드의 한 섬에서 큰바다쇠오리들이 겪는 재난의 현장으로 시작된다. 가파르게 솟은 바위섬에서 큰바다쇠오리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다가들다가, 덤벼드는 광경이 이어졌다. 어떤 자들은 몽둥이로 때렸고, 또 어떤 자들은 몸부림치는 새들을 있는 힘껏 누르거나 목을 비틀었다. 살생의 장면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날아다니는 새들이 울면서 해안 절벽 주위를 돌았고, 새들의 시체 더미가 쌓여갔다. 그로써 섬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 단 한 마리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큰바다쇠오리의 연한 고기, 단백질이 풍부한 엄청나게 큰 오믈렛을 저녁 식사로 먹을 것이다. 젊은 생물학자 오귀스트는 작은 배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바닷속에서 어떤 검은 형체를 발견하고 잡았는데, 매우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오귀시트는 큰바다쇠오리를 배로 끌어 올렸고, 큰 배로 옮겨 타 새장에 가두었다. 그렇게 오귀스트와 큰바다쇠오리의 관계가 시작된다.  




귀스는 또다시 궁금증을 느꼈다. 이 큰바다쇠오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불안해하는 것처럼 이 새도 불안에 빠져 있을까? 어떤 균형이 깨지면서 세상의 무언가가 어그러지고 있는데 이 새도 그것을 느낄까? 프로스프의 처지가 되어 보면 이상한 기분을 느낄 게 분명해. 하나밖에 없는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 게다가 귀스라는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큰바다쇠오리의 언어를 할 줄 모르고, 함께 헤엄을 치지도 않으며, 함께 새끼를 만들 수도 없는 존재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귀스에게 찾아왔다. 자신이 큰바다쇠오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p.181


오귀스트는 큰바다쇠오리에게 '프로스프'라 이름을 붙이고, 집에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산 채로 잡아서 집에 데려온 프로스프가 자신에게 위법을 저지르며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참사를 목격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감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관찰과 기록을 거듭하며 점점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인간은 동물을 팔거나 잡아먹어야 하고 아니면 동물에게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귀스트는 점차 동물과 촉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움직임에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자신과 완전히 다른 종이 가진 규칙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렇게 그는 큰바다쇠오리에 관해 지상에서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 되어가며, 점점 새를 대상이 아닌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종들의 소멸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라져 가는 생명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논픽션'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이 아쉬웠을 정도로 읽는 내내 멸종 위기종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는 먹먹한 이야기였다. '큰바다쇠오리'가 멸종되지 않았다면, 실제로 이렇게 인간과 함께 생활하며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기 때문이다. 작가인 시빌 그랭베르는 '같은 종의 다른 개체들과 함께 태어났다가 혼자 남은 채로 죽음을 맞은 새를 머릿속에 그리자, 너무나 비통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동물을 의인화하지 않고, 인간의 시점으로 관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서사이기 때문에 드라마틱한 전개는 없지만 '세상에 하나 남은 개체의 마지막을 바라본다'는 시점으로 보자면 너무도 뭉클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을 통해 멸종위기종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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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대신 라면 - 밥상 앞에선 오늘의 슬픔을 잊을 수 있지
원도 지음 / 빅피시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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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소금물에 절였다가 갖가지 양념으로 속을 벅벅 문지른 후, 발효 과정을 통해 풍부한 맛을 내는 김치는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금물은 짜다. 상처에 닿으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한다. 쓰린 속을 더 아프게 하는 매운 양념도 눈물을 유발할 게 틀림없다. 눈물을 삼키면서도 바라건대 그것들이 나를 썩히지 않고 잘 발효시켜 주었으면, 잘 익은 내가 고통을 견디는 이들에게 미련하다는 손가락질 대신, 인생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느라 수고했다고 안아줄 수 있게 되었으면.            p.91


<아무튼, 언니>, <경찰관속으로>, <있었던 존재들>로 만났던 원도 작가의 신작이다. 작가는 지난 해, 8년간의 경찰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앞으로 '뭐 먹고살 거냐'고 진심으로 걱정해준 이들을 위한 나름의 답이기도 하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실패와 상처도, 일단 맛있는 음식부터 한입 먹으며 그 힘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맵고, 짜고, 뜨거운 세상에서 제대로 된 1인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먹이고, 다독이고, 일으켜 세운 날의 기록들이다.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한식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최대 3일밖에 안될 정도로, 유명한 한식파라고 하는데 미역국에 대한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한다. 시험날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속설을 낳게 된 미역국에 대한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남이 만들어주는 게 가장 맛있다는 김밥,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막상 맛있게 만들긴 어려운 점이 인생을 닮았다는 짜장면, 오래 끓일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조개전골,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게 먹을 수 있지만 가장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는 라면 등 다양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포장마차,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저자는 포장마차에 대해 들어오기 전과 나갈 때의 모습이 180도 달라질 수 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불빛이라는 표현을 썼다. 언제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확실한 행복을 전해주는 곳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롤 모델이 불닭볶음면이 되고만 에피소드도 재미있으니 놓치지 말자. 




매일 먹는 밥이 지겨울 때 딱 하루만 굶어보라는 얘기가 있다. 굳이 만 하루도 필요 없을 것이다. 반나절만 굶어도 어제 남긴 반찬이나 뜯지도 않고 버린 과자와 같은, 전생의 업보가 줄줄이 생각나기 마련이니까.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은 일상에서 공복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당장 끼니를 거른 순간부터 번개같이 찾아오는 배꼽 떨리는 감각이 나에게 말한다. 매일 내게 주어진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고.             p.145


음식은 우리의 삶에서 수많은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첫 데이트때 먹었던 음식, 이별 후에 먹었던 음식,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를 위로해주었던 음식, 기분 좋은 날 더 행복하게 해주었던 음식 등... 특별한 시기를 상징하는 음식은 시간이라는 틀을 거쳐 추억으로 박제가 되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영혼마저 감싸주는 소울푸드가 된다. 누구나 각자의 이유로 소울푸드라고 부를 만한 음식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아니, 밥 먹는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리 거창한 비유를 할까 싶을 수도 있지만,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끼니를 때우거나, 시간에 쫓겨 대충 배만 채우거나, 단지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만 목적을 두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인생을 되돌아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한 음식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기에,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시달리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기획안은 풀리지 않고, 연인은 속을 썩이고, 그렇게 종일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집에 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기력이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밥 힘이 아닐까. 뜨끈한 밥 한숟갈에 좋아하는 반찬 하나만 있어도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한끼 식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는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이 내 시린 마음마저 만져준다면, 그 힘으로 내일을 다시 또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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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톤 마틴의 멋진 세계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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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것만큼이나 취미 생활에도 진심인 걸로 유명하다. 달리기와 아날로그 레코드 수집이 그것이다.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중인 1만 5천여 장의 레코드 중에 클래식 음악에 관한 이야기만 담은 에세이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는 재즈 레코드 188장에 대한 재즈 에세이 책이 출간되었다.


그가 워낙 재즈 애호가로 유명하기에 이번 책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에 하루키가 엄선한 재킷들이 전부 전설적인 앨범 디자이너 ‘데이비드 스톤 마틴’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스톤 마틴은 일명 DSM이라 불리는 재킷 디자이너의 전설이다. 레코드 재킷이 단순한 포장지의 역할에 머물던 시절부터 신선한 그림과 과감한 아이디어로 재킷을 음악의 첫인상이자 감상의 일부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처음에는 데이비드 스톤 마틴이 디자인한 재킷의 레코드를 의도적으로 모은 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컬렉션이 대략 백 장을 넘었을 즈음부터는 의식해서 그의 재킷 앨범을 모으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현재는 백팔십 장 정도의 DSM 재킷을 가지고 있고, 이 책에 소개한 것들은 모두 하루키가 개인적으로 소장하며 일상적으로 듣고 있는 LP판이다. 




DSM은 평생에 걸쳐 광범위한 레코드 재킷을 디자인했는데, 클래식 음악부터 포크 송과 트래디셔널 블루스 등의 재킷도 다수 작업했다. 흥미로운 것은 북커버 작업도 꽤 했다는 거다. 윌리엄 포크너의 초판본 상당수를 디자인했다고 하는데, 매우 궁금해진다. 


이 책에 DSM의 앨범 커버들이 굉장히 많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그림 특징을 잘 알 수 있었다. 펜을 사용해 잘 조여진 심플한 선이 중심이고, 거기에 담백한 단색이 곁들여진다. 당시에는 레코드 재킷에 많은 색채를 사용할 수 없었고, 기술적으로도 그다지 복잡한 색을 내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키에 따르면 한마디로, DSM의 화풍은 신선하고 참신한 동시에 '싸게 먹혔다'라고도 할 수 있다고. 




비밥 음악의 상징이라 할 알토 색소폰 주자 찰피 파커의 별명이 '버드'라서 DSM은 파커의 레코드 재킷에 많은 새를 그렸다. 조니 호지스의 앨범 <컬레이츠>의 재킷에는 토끼가 가득하다. 역시나 호지스의 별명이 '래빗'이기 때문인데, 이 앨범에 있는 토끼는 다 해서 스물두 마리나 된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각 뮤지션별로 앨범을 정리해 재킷 디자인에 대해 코멘트를 덧붙이고, 해당 앨범에 대한 정보도 짧게 수록했다.  녹음 세션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밴드 편성이 어떠하고, 편곡을 어떻게 했는지 매우 전문가적인 설명이 이어지지만, 이미지 자료가 풍부해서 그런지 전혀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키가 예술을 즐기는 방식과 태도가 글에 고스란히 배어나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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