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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런데 좀 긴장을 했다고 할지, 런던에 있을 때랑은 달랐어. 피차가 마음을 열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다미코는 생각에 잠긴다.
"마음을, 그렇게 자주 열지 않아도 되잖아?"
다미코가 생각한 대로 말하자,
"에이, 그럼 안 되지. 절대 안 돼. 그러면 허망하잖아."
하고 바로 반박한다. 다미코는 리에답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언제나 재지 않고 상대를 대한다. p.113
오랜 만에 만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다. 대학 시절 늘 붙어 다녀서 '쓰리 걸스'라 불렸던 세 친구가 오십 대가 되어 다시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 사람은 대학 졸업 이후 30년간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 왔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리에는 외국 금융회사에서 일하느라 영국에서 오래 생활했다. 결혼도, 이혼도 두 번씩 했고, 한 달 전, 일을 그만두면서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다미코는 글 쓰는 사람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채 여전히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사키는 아들 둘을 낳아 키웠고, 치매를 앓아 요양원에 계시는 시어머니를 무심한 남편 대신 문병하며 사는 주부이다. 돌싱과 싱글, 그리고 가정주부라는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오십대 후반의 세 여자의 모습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해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들이 늘 함께 다니던 대학 시절, 자신의 수십 년 후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상상했을까. 산다는 건 마음먹은대로 흘러 가지 않게 마련이고, 꿈꾸던 것들을 다 이루는 삶이란 희박하니 대부분 예상과는 다른 인생 후반부를 맞이할 것이다. 그래서 더 정감있고, 공감하며 읽었던 작품이다.
이름도 잊었던 사람과 이렇듯 뜻하지 않게 마시고 있는 것이 스스로도 의외일 만큼 즐거웠다. 여행을 떠나온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잠두콩과 뱅어포, 흑점줄전갱이회 등의 안주를 먹으면서 최근 서로의 일에 대한 얘기며,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 얘기를 나눈다... 시간이 정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다미코는 새롭게 느낀다. 어머니와 둘이 생활하는 나날은 10년이 하루 같은데, 그 사이에도 시간은 확실하게 흐르고 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자신들 세계 밖에서만 흐르는 듯한 느낌이다. p.162~163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셔닐 손수건과 속살 노란 멜론'은 세 친구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단어다. 대학 시절 독서 동아리에서 만났던 이들이기에 당시 영어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미지의 것들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이야기했었는데, 셔닐은 정체를 알 수 없어 상상과 동경을 부추겼던 특별한 단어다. 그때는 셔닐이 앤티크하고, 로맨틱하고, 섬세한 천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화려한 색감에 도톰한 파일 천이었던 거다. 캔털루프 멜론도, 참외처럼 표면이 매끈하고 기품 있는 맛일 거라고 속살은 노란색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발견하고 사서 먹어보니 표면도, 속살의 색깔도, 맛도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표면이 매끈하지도 않았고, 속살은 빨간색에, 기품 있는 맛과도 정반대였던 것이다. 이렇듯 막연한 환상은 언젠가는 깨지게 마련이지만, 기대는 부서지고, 예측은 바뀌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디테일들 또한 삶의 진짜 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친구 관계는 좀 신기한 부분이 있다. 아주 가끔 만나고, 만나지 않는 동안은 각자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데, 만나면 공기가 옛날로 돌아가곤 하니 말이다. 오랜 만에 만나는 친구는 사람 자체가 반갑기도 하지만, 그 친구로 인해 환기되는 옛날의 나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기도 해서 더 좋은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몇 있다. 어떤 한 시절에는 매일 얼굴을 보고 통화를 하던 사이였는데, 점차 사는 곳이 달라지고, 환경이 바뀌다 보니 어느 순간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나면 바로 어제 만났던 사이처럼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 친구를 만났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작품 속 세 친구도 바로 그런 관계였다. 각자 자신의 나이에 맞게 성실하고, 당당하게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와 내 친구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 시절 내가 상상했던 대로 살고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모습 그대로 내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내 소중한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고 연락해야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