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한다 - 만물의 평등에 관하여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 쌤앤파커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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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과학 문제의 어려움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것보다 당연해 보였던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은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틀렸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확실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지식의 발전을 방해하게 됩니다... 과학은 확실성에 기반해 발전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발전합니다. 절대적 확실성은 우리 삶과 무관하고, 도달할 수 없으며,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장애물이 됩니다.                 p.62~63


지구에 사는 우리는 공통된 시간이 존재한다고 느낀다. 지구 내에서는 전화만 하면 뉴욕에 있는 사람과도, 상하이에 있는 사람과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통화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넓은 우주로 범위를 확장하면 그렇지 않다. 가장 가까운 별까지도 신호가 왕복하는 데 수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된 시간이라는 개념은 지구의 이웃들 사이에서는 통하지만, 우주 전체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사실 지구는 우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곳이다. 지구에는 대륙의 견고함으로 고정된 장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의 다른 곳에서는 통하지 않는 방식으로 공간을 생각한다.


여기서 카를로 로벨리는 흥미로운 가정을 시작한다. "나는 같은 자리에 있다"는 말은 '나는 지구의 단단한 표면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딛고 설 표면이 없는 거대 가스 행성 목성에서는 "나는 같은 자리에 있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불분명해진다는 거다. 그는 철학과에서 공부하는 한 청년과 토론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카를로 씨, 어떤 물체가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분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 학생은 관찰할 수 없음에도 절대운동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어느 부분이 오류일까? 그 친구가 간과한 것은 개념이 경험의 산물이며, 우리의 경험이 항상 그렇듯 제한적이므로, 개념으로 현실 세계를 온전하게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2024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진행된 카를로 로벨리의 강의를 엮은 것이다. 과학혁명의 철학적 의미에 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의 전작들처럼 과학을 인문학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가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할 때,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초월적 주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묘사하는 세상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낯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편안하게 자리 잡고 있는 존재입니다. 제가 이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한 것처럼, 주관적 관점은 물리학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현실의 관계적 본질과 그로 인한 관점주의를 인식하면, 현대 과학과 일관되게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가 바로 주관적 관점입니다. 진리는 주관적입니다.                  p.230


이 책에는 총 일곱 번의 강의가 담겨 있다. 양자 물리학의 이질적 핵심을 다루고, 지식과 세상 사이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이을 수 있을지 논의하며, 20세기의 두 가지 개념적 도약인 양자와 아인슈타인의 공간, 시간, 중력에 관한 개념을 살펴본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물리적 기반을 논의하고, 오늘날 우리가 자연에 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며, 확실성과 궁극적 근거를 갖추기 어려운 지식을 종합해 본다. 강의를 엮은 것이라 그만큼 수월하게 읽히지만, 여러 번 곱씹어 생각해 볼 만한 대목들이 많았다. 간단한 상황을 가정하거나,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는 강의들이 많았는데 굉장히 싱거운 질문인 것처럼 느껴져도 이어지는 내용을 읽다 보면 계속 생각에 빠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 신기했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은 확실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틀렸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과학 문제의 어려움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것보다 당연해 보였던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확신을 의심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것을 배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 우리 시대 과학의 핵심 메시지라고 그는 말한다. 어떤 관점에서도 옳은 진리, 변치 않는 고유성, 절대적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 모두가 서로를 통해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우리가 과학책을 읽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던 통찰이다.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 세상과 함께 상호 작용하며 서로를 마주하고 살아간다. 무엇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세계와 과학이 설명하는 세계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과학을 통해 알게 된 사실과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분명 양자역학을 비롯해서 각종 과학적 정보들로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사유를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 놀라웠다.  물리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느껴보고 싶다면, 과학을 문학처럼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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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공원, 농구하는 소녀 ㅣ 여행그림책
천선란 지음, 이주향 그림 / 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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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밤의 새벽'과 '아침의 새벽' 그 어디에 붙여도 밤의 고요함이나 감미로움, 아침의 활기참이나 싱그러움이 붙지 않은 고독한 적막의 시간. 나는 꽤 오래전부터 그 시간을 멈춘 시간이라 여겼다. 시간의 빈틈이라 불렀고, 우주를 지배한 순간이라 느꼈다. 지구의 시간이 통하지 않는 시간 축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 시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가끔은 새벽 세시 사십분, 조금 더 자면 새벽 네시 이십분. 어쨌든 새벽 네시.                    p.20


달 출판사의 여행그림책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이병률 시인의 파리 편이었던 <좋아서 그래>, 나태주 시인의 탄자니아 편이었던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에 이어 이번에는 천선란 작가의 뮌헨 편이다. 나태주 시인의 책을 읽었었는데, 시인이 탄자니아에서 보낸 시간들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붉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흙먼지와 그 속에서도 예쁘고 싱싱하고 깨끗하게 피어난 꽃들, 선인장도 말라죽는 땅에서도 견디며 사는 바오밥나무들, 가시나무 우거진 산 비탈길을 넘어 만난 소와 염소와 당나귀 떼,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벌판 사막길에 느닷없이 열린 샘물... 그리고 먼지와 바람과 햇빛,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낸 시와 담백한 그림들 덕분에 꼬박 21시간을 날아가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천선란 작가는 문화 교류 프로그램으로 독일 뮌헨에서 한 달을 보내게 된다. 항상 창작과 강연, 행사 등 꾸준히 일해온 소설가로서의 삶도 최대치였고, 십 년 넘게 재활병원에 입원중인 치매에 걸린 엄마를 돌보는 딸의 삶도 만만치가 않았기에, 내가 나로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직업인으로서의 사회적 가면과 가족을 돌봐야 하는 자식의 가면을 벗고, 비로소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독일 마트에서 매일 사 먹었던 묵직하고 심심한 흑빵과 뮌헨에서 지내는 동안 낮의 절반 이상을 보냈던 수많은 공원들이 낯설고도 고요한 시간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소설가도, 딸도 아닌, 온전히 ‘한 명’ 혹은 ‘한 개’로 존재하며 자신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몇백 년 전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다.'라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작가가 서른 번의 날 동안 매일 비슷한 공원에 앉아 깨달은 것이기에 더 와닿았다. 기대에 부응하고 싶고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다는 생각에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그냥 나인, 시시하고 허무한 사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라는 가면이 아니라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나도 존재한다는 것을 하염없이 공원에 앉아 느낀다. 몇백 년 전까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면, 이제 너무도 많은 기대를 품고 사는 우리에게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딸로서 혹은 엄마로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너무 오랫동안 내 민낯을 보지 못한 우리에게 말이다.              p.74


한국어는 물론이고 그나마 익숙한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도 들리지 않는 세계. 작가는 그곳에서 완벽한 이반인으로서의 삶을 경험한다.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조차 물살이나 새소리처럼 배경음악이 되는 시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일인 팀'이 된 기분을 느끼며 한 달이라는 시간을 경험한다. 새벽 네 시에 눈을 뜨고, 공용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해 먹고 외출 준비를 마치면 일곱시쯤, 숙소를 나온다. 일찍 문을 여는 근처 카페에서 소설을 쓰고, 정오가 되면 식료품 마트로 가서 매일 다른 메뉴들과 요거트를 사서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다른 작가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각자의 시간을 보낼 때는 전시를 하나씩 보고 온 뒤, 해가 조금 내려간 네시쯤 공원에 간다. 정해진 루틴 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들이 느껴져 부럽기도 했다. 




작가는 늘 같은 장소에서 농구공을 던지는 소녀를 만난다. 다 해진 농구 골대에 계속 농구공을 던지던 소녀는 끊임없이 실패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소녀는 그날 이후로도 계속 농구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에 몰두해서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얼굴을 한 채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그렇게 마음뿐만 아니라 온몸이 그것으로 향하게 되니까. 출국 전날 마지막으로 들른 공원에서도 소녀를 만났는데, 역시나 공은 골대를 빗나가고 있었다. 소녀에게는 농구가, 작가에게는 글쓰기와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패해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은 것, 그저 내가 나를 만족시킬 때까지 끝없이 하는 것, 마음과 몸이 전부 다 쏠리는 것이니까. 잘하든 못하든 매일 한다는 건, 좋아한다고 당당해 말해도 된다는 것을 말이다. 


책에 수록된 아름다운 수채화 그림들이 계절의 온도와 공원의 공기, 드넓은 숲의 푸르름과 바닥에 공 튀는 소리, 모래의 촉감, 새벽 네시의 적막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줘 더 좋았다. 누구나 직업과 관계와 책임 속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러다보니 잃어버린 나 자신을 다시 마주볼 수 있게 해준다. '자기만의 공원'이 필요한 당신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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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의 트릭 해부학 - 추리소설의 트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ㅣ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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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싹하고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다. 이처럼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수수께끼를 합리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소설 속 밀실 트릭이 탄생한 계기다. 탐정소설의 묘미는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기묘한 수수께끼를 기지와 논리로 명쾌하게 풀어내는 데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밀실 사건이다... 밀실은 기하학 도식처럼 구체적이어서 애매한 부분이 전혀 없고, 그 불가능성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p.150~151


에도가와 란포는 현대 일본 미스터리의 기반을 닦고 대중화시킨 일본 추리 문학의 아버지다. 그는 아직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대중들에게 뿌리 내리기 전 영미 추리 소설의 영향이 짙은 탐정 소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본명은 히라이 다로, 그의 필명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에드거 앨런 포'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가 창조한 아케치 고고로는 일본 최초의 사립탐정으로, 그의 작품들은 일본 추리소설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역사상 최초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을 탄생시켰듯, 란포 또한 이 작품들 속에서 아케치 고고로라는 일본 최초의 명탐정을 낳았다.


이 책은 에도가와 란포가 탐정소설 속 트릭에 관해 썼던 평론 및 수필을 편집하여 수록한 것이다. 에도가와 란포가 세계의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섭렵하고 연구해서 트릭을 유형별로 해설하고 정리한 책이라 추리소설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귀중한 자료다. 또한 이 책에는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와의 대담도 수록되어 있다. '탐정소설을 말하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자료를 축적할 생각으로 영미 탐정소설을 읽으며 작품 속 트릭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읽은 작품들의 목록을 만든 뒤 수록된 트릭의 빈도표를 작성한다. 그렇게 해서 단편소설 속 트릭 4~500여 종을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런 자료를 이렇게 편하게 읽어도 되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수집한 작례의 수가 총 821건이나 된다고 하니, 그야말로 트릭 대백과 사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줄거리만 늘어놓아서는 그 진정한 묘미를 전할 수 없다. 직접 읽어보라고 권할 수밖에 없지만, 나는 이 스릴을 무척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스릴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이것이 떠오를 정도다. 그 안에는 비늘처럼 층층이 포개진 수많은 스릴이 겹쳐 있다. 그리고 그 여러 겹의 스릴 한가운데서 뱀의 눈처럼 번뜩이고 있는 스릴이 바로 이것이다. 말 그대로, 스릴 중의 스릴이다.           p.277


본격 추리소설의 진수는 작품 속 트릭의 독창성에 있다. 아무리 기발한 트릭을 떠올렸더라도 선례가 있으면 가치를 잃는다. 그래서 작가가 늘 경계하며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자신이 고안한 트릭이 다른 작품의 그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그러니 유형별 트릭들을 체계적으로 모아 정리해둔 이 책은 전문 추리작가들에게 더없이 유용한 참고서가 되어줄 것 같다. 또한 추리, 미스터리 장르를 즐기는 독자들에게도 작품 속 정교한 트릭의 매력을 한껏 즐길 수 있기에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탐정소설이라는 소설 형식이 탄생한 지 110여 년 만에 세계 각국의 탐정소설 작가들이 앞 다투어 트릭의 창의성을 겨루면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트릭은 거의 다 나왔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완전히 새로운 트릭을 고안할 여지가 없다는 걸까. 이 책에 수록된 수백 건의 트릭들을 하나씩 읽다 보면 익숙한 방법도 있고,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었다. 범인의 인물에 관한 트릭부터 범죄 현장과 흔적, 범행 시간, 흉기와 시간에 관한 트릭 등 종류도 굉장히 많았다. 탐정소설은 수수께끼가 어려울수록 흥미롭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법한 일을 가능한 것처럼 그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가 밝혀졌을 때는 그것이 분명 실현 가능한 것이라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트릭에 관련된 내용 이외에도 이상한 범죄 동기, 탐정소설에 나타난 범죄 심리, 마술과 탐정소설, 기이한 독살 등 다양한 기법 들이 담겨 있다. 워낙 추리 소설을 오래 읽어왔고, 미스터리 장르 자체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그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탐정소설과 범죄 문학에 대해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스릴을 만들어 내는 장치라던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통해 장르 자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꼭 놓치지 말고 소장하길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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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ㅣ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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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좀 쉬어요, 틸리. 내일이면 이 좆같은 걸 셜록 홈즈처럼 조사해야 할 거예요."

브래드쇼가 낄낄거렸다.

"전형적인 포네요. 트위터에 올려야겠어요."

"어림없는 소리."

그가 말했다.                       p.114


크리스마스 시즌, 도시 곳곳에서 신체 일부가 발견된다. 손가락 한 쌍이 #BSC6이라는 문구가 쓰인 종이와 함께 각기 다른 장소 세 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범인은 무슨 이유로 신체를 훼손해 전시하는 걸까. 곧 피해자들의 신원이 밝혀지지만 여성 피해자 두 명과 남성 피해자 한 명 사이에서 그 어떤 연관성도 찾을 수가 없다. 중범죄수사국 형사 워싱턴 포와 데이터 분석가 틸리 브래드쇼가 수사에 투입되지만, 범행 수법에도 공통점이 없었고, 별다른 증거도 없어 수사는 난항을 겪는다. 범인은 각각의 피해자에게 서로 다른 절단 방식을 썼고, 피해자들의 성별도 달랐고, 마취된 상태에서 사망한 피해자도 있었으며, 마취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극심한 고통 속에 절단을 당해 죽은 피해자도 있었다. 한마디로 범행 수법에 일관성이 없었으니, 뭔가 연결 고리를 발견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는 거다. 


범인은 길거리 싸움꾼이 아니라 돌처럼 차가운 살인자였다. 두 사람은 범인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과정 속에서 '블루 웨일 챌린지'라는 게임에 대해 듣는다. 이 게임은 50일 동안 하루 하나씩 일련의 시험을 하는 것으로 마지막에는 피해자가 자살하게 유도한다. 전체 숫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러시아에서만 100명이 넘는 취약자들이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유일한 용의자였던 남자는 자신은 그저 게임에 참여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틸리는 그가 '안와전두피질 조절장애' 즉, 세뇌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FBI 요원의 말에 따르면 포와 틸리가 쫓는 그자는 단순 연쇄살인마가 아니라 훨씬 더 위험한 존재, 스스로를 '큐레이터'라고 부르는 자, 악의 근원인 무언가라고 한다. 자, 과연 포와 틸리는 '큐레이터'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매번 독보적인 트릭을 완벽한 설계로 선보여온 크레이븐은 이번 작품에서 보다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보여주며 이어질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는 머리 감기를 멈췄다. 포는 자신의 머리가 브래드쇼의 맞춤 프로그램과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읽은 것을 절대 멈추지 않고 계속 처리했다. 들은 것도, 본 것도.......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생생해서 꼭 과거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두 눈이 번쩍 뜨이고, 하나하나 연결되면서 각각의 증거가 지금 펼쳐지는 악몽에 깔끔하게 맞아떨어졌다.              p.447


<퍼핏 쇼>, <블랙 서머>에 이은 '워싱턴 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현재 8권까지 출간되어 있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첫 작품으로 '골드 대거상'을 수상했고, 3회 연속으로 골드 대거상 후보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탄탄한 서사와 겹겹의 반전, 독특한 캐릭터의 힘이 잘 어우러진 이야기를 보여준다. 특히나 포가 자신의 직관을 이용해 수사하는 과정이 인상적인 시리즈이다. 작가가 차곡차곡 쌓아온 단서들이 퍼즐 조각들이 되어 하나로 맞춰지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너무 흥미로웠다. 작고, 겉보기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이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서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짜임새있게 그려내고 있어 수사 과정 자체에 더 즐기면서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밀레니엄>을 넘어설 강력한 수사 듀오의 탄생이다. 뛰어난 지능으로 수학을 전공했지만 아이큐가 150 미만인 사람과는 대화하는 걸 힘겨워할 정도로 사회성이 부족한 데이터 분석가 틸리 브래드쇼와 뛰어난 직관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이지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 문제인 브래드 쇼는 각자 다른 이유로 친구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잘 맞는 수사 듀오이다. 틸리는 포와 콤비가 되면서 점차 사회성을 키워나가고 있어 시리즈를 거듭할 수록 보다 정상적인(?) 캐릭터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포는 알고 있다. 그녀가 이따금 평범해 보이더라도 그건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시리즈 첫 번째 작품 외에는 틸리의 비중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색다른 두 사람의 케미와 독특한 캐릭터의 매력으로 극에 몰입감을 더해주는 존재임에는 분명하다. 개인적으로는 틸리의 분량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마도 틸리가 서사의 중심에 있었다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만들어졌을 것 같긴 하다. 시리즈 4편인 <데드 그라운드>는 최고의 스릴러소설에 주는 '이언 플레밍 스틸 대거상'을 수상했고, 또 다른 주요 범죄문학상 후보에도 올랐다고 해서 매우 기대 중인데, 국내에서도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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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의 언어 - 소리, 몸짓, 냄새로 소통하며 진화해 온 생물들
롭 던 지음, 송근아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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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수천 가지에 달하는 상리공생 파트너들에게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그런 존재답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상리공생 관계들을 잘 돌봐야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당연한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 인간은 마치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의 다른 생명들과 동떨어져 우리만의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행동한다. 나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망상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몹시 외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p.15


우리는 다른 종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몸 안팎의 미생물들을 비롯해 동물과 자연과의 관계에 기대어 살고 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살아 있는 자연의 한 측면인 '상리공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상호 이익 관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상리공생'이란 둘 이상의 종이 상호작용을 하며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어떤 상리공생은 긴밀하게 얽힌 상태로 매우 오랜 기간 지속되기도 하지만, 어떤 상리공생은 아주 짧고 일시적인 만남에 불과하기도 하다. 천연발효 빵, 효모로 만든 맥주, 인간의 얼굴에 서식하는 진드기, 개미에 의한 씨앗 확산 등... 상리공생이라는 낯선 개념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인간과 다른 종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할 때, 작가나 과학자들은 흔히 경쟁이나 포식, 지배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에 두곤 한다. 하지만 인간이야말로 지금껏 존재한 모든 종 가운데 가장 많은 상리공생적 상호작용을 해온 존재다. 저자는 흰개미를 연구하며, 다양한 형태의 상리공생을 도처에서 마주했다고 한다. 수십 종의 벌새들이 꽃들의 수분을 돕는 중개자 역할을 하는 보상으로 꿀을 얻었고, 거대한 잎꾼개미 무리는 자신들이 기르고 먹는 균류와 상리공생 관계를 맺는다. 들판 나무 아래 서 있는 소들은 먹이를 소화하는 데 필수적인 세균을 몸 안에 품고 있고, 나무들 또한 땅속과 낙엽층 속에 있는 균류의 균사망으로부터 영양분을 얻으며, 그 균류들은 나무에 의존하고 있다. 벌집이 있는 곳으로 인간을 안내하는 큰벌꿀길잡이새, 물고기 떼가 나타나면 위치를 알려 인간과 함께 사냥한 범고래, 인간에게 터전을 내어주는 대신 자손을 퍼뜨리는 나무, 냄새로 자연의 언어를 통역해주는 개.... 협력으로 살아남은 자연의 역사에서 우린 무엇을 배워야 할까. 




생물처럼 생각하기의 근본에는 이해하려는 갈망, 그리고 우리의 제한된 감각이 만들어낸 장벽을 허물려는 열망이 자리한다. 모든 종에는 저마다의 움벨트, 즉 자신만이 지각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움벨트로 들어설 길을 찾아야 한다. 진화생물학자 해리 그린처럼 이렇게 물어야 한다. "검은꼬리방울뱀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집굴뚝새로, 혹은 우리집 개 라일리로 산다면 또 어떨까?" 이처럼 다른 존재의 관점에서 사고하려는 노력은 종종 과학적 돌파구로 이어진다.                  p.155


오늘날 인류는 거의 모든 열량을 단 10종의 식물과 5종의 동물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우리 몸을 이루는 탄소 원자의 거의 80퍼센트가 단 10종의 곡물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광대한 숲과 그 숲을 이루던 나무들 수조 그루를 베어 버리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곡물에 의존하는 생활 방식으로 숲을 잃었지만, 그 덕분에 인구를 늘릴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나무가 여전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알게 되었다. 인종과 문화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거주지를 확대하고, 연료와 경작지를 얻기 위해 수천 년에 걸쳐 숲을 훼손하고, 지구를 파괴해왔다. 진화생태학자인 롭 던은 이 책에서 인류의 조상이 나무 위에 살던 시절부터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협력하며 진화해온 과정을 보여주며, 기후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협력 관계를 통해 살아남은 인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금 인류는 새로운 협력 관계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시대에 발을 내딛는 중이다. 


전 세계의 숲은 인류 때문에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인류 또한 숲이 존재하느냐 사라지느냐에 따라 번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무로부터 배우고, 나무로부터 혜택을 얻는다. 사라져 가는 숲을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생태적 회한을 느끼며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더 많은 상리공생과 덜 외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 주변의 다른 종들에게 귀 기울이고, 접촉하고, 냄새 맡고, 함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다른 모든 생명과 맺는 상호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며, 미래를 함께 숙고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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