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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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욕망을 일으키는 것은 굉장히 즐겁다.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버터가 녹듯이 상대의 눈이 빛나며 드러나는 달콤한 굶주림이 눈에 보인다. 자신의 힘을 동원하여 누군가를 열광하게 하는 것은 나쁜 일, 비열한 일, 더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그런 식으로 느꼈더라... 줄곧 눌러두었던 순수한 감정이 피부로 배어나는 걸 느꼈다. 이거, 멈출 수 있을까, 불안해진다.     p.82~83

 

주간지 기자인 리카는 최근 몇 년 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한 수도권 연쇄 의문사 사건의 피고인 가지이 미나코를 취재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가지이 미나코는 결혼 사이트를 통해 만난 남자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세 사람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30대 여성으로 주거불명에 무직이었던 그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꽃뱀'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체포 직전까지 글을 올린, 맛있는 음식과 사치품 사진으로 넘치는 블로그와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데다 뚱뚱한 여성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리카는 세간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꽃뱀 수법’이 아니라, 그 사건에 떠도는 여성혐오를 다루고 싶었다.

 

이 사건은 실제로 2009년 일어나 일본을 경악시켰던 꽃뱀 살인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결혼을 미끼로 만난 남자들에게 10억 원이 넘는 돈을 갈취하고 교묘히 살해한 범인은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여성이었다. 유즈키 아사코는 살인범이 유명 요리교실에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건의 배경에 요리 잘 하는 가정적인 여자에 대한 환상과 가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 것이다. 작가는 그녀가 정말 남자들을 죽인 게 맞는지에 대한 미스터리와 함께 피해남성들이 모두 '여성의 돌봄'을 필요로 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들은 여자가 정성껏 차린 다정한 집밥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혼자서는 처량하고 볼품없는 가공식품이나 먹었던, 가부장제에서 틀어박힌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순수하게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게 즐거웠던 여자와 그녀의 요리를 숭배하고 보살핌을 받았던 남자들의 이야기는 왜 비극이 되어 버렸을까.

 

 

 

단 한번의 요리가 사람의 마음을 구한다? 그런 건 환상이다. 만약에 가능하다 해도 비할 데 없이 훌륭할 경우에나 그럴 터다. 여자들이 그 환상에 얼마만큼 괴로워하고, 속박되고 있는지. 자신의 서툰 요리가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니, 자기만족과 자아도취가 심하다. 리카가 아무리 정성을 다했어도 아버지의 고독은 해소되지 않았을 터다. 그날 벼락치기로 착한 딸인 척했어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의 죽음을 비극으로 단정해도 되는 걸까.      p.405

 

리카는 가지이 마나코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내고 도쿄구치소에도 방문하다가 마침내 그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가지이의 독점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그녀가 제안하는 음식들을 먹어보거나, 요리를 해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에쉬레 버터를 사용한 버터간장밥을 시작으로 명란젓 파스타, 한정판으로 주문 제작되는 고급 크리스마스 케이크 등을 요리를 하고, 직접 가서 먹어 보기 시작한다. 그러느라 체중이 5킬로그램이나 찌게 되지만, 그 동안 몰랐던 '버터'가 들어간 요리의 풍미와 맛, 그리고 직접 만드는 요리의 가치를 점점 깨닫게 된다.

 

갇혀 있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없는 자의 명령에 따라 대신 움직이며 음식을 먹어주는 관계라니 다소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관계는 그러면서 묘한 동료애가 생기기 시작한다. 기자인 리카가 살인 용의자인 가지이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그녀가 무죄가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연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지, 리카와 가지이의 관계는 어떻게 될지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몰입해서 읽었던 작품이다.

 

 

그 동안 유즈키 아사코의 작품은 꽤 많이 읽어본 편이다. <서점의 다이아나>, <나는 매일 직장상사의 도시락을 싼다>, <나일 퍼치의 여자들>, <책이나 읽을걸> 등등의 작품으로 만나왔던 작가인데, 이번 신작 <버터>를 읽으면서 굉장히 감탄했다. 여자들의 삶에 관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이야기들을 주로 그려내는 작가라고만 생각하고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탄탄하고 묵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필력은 여전했고,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들여다보는 깊이까지 더해졌으니 말이다.

'소설계의 셰프'라 불리는 작가 유즈키 아사코 답게 그 동안의 작품에서도 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등장해왔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각종 음식에 대한 묘사가 페이지 곳곳에서 넘쳐 흐른다. 체중 관리를 위해, 살이 찔까봐 두려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등등의 이유로 먹고 싶지 않은 것만 먹고 있는 여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게다가 자신이 먹고 싶은 요리를 시간을 들여 만드는 여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부분 가족들을 위해, 혹은 누간가를 먹이기 위해 요리를 하게 되니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여자들을 위한 대리 만족과 판타지를 실현시켜 준다. 극중 가즈이는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먹었고, 자신이 먹고 싶은 것만 먹었다. '이 팔도 가슴도 엉덩이도 모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라니 놀라웠다. 가즈이의 욕망의 대상은 과거 연인이나 동경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었던 것이다. 여자는 날씬해야 한다고 세뇌하는 사회 속에서, 뚱뚱한 몸으로 살아가겠다는 가즈이의 당당한 선택은 압도적인 아우라를 발산한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황금색 달콤함으로 가득한 이 소설을 읽고 고칼로리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면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유즈키 아사코의 이 황홀한 이야기가 당신의 죄책감을 가져가 줄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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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웅진 당신의 그림책 1
안경미 지음 / 웅진주니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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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가 문 앞에 섰다. 문을 열자, 신기하게도 또 다른 문이 나왔다. 여러 번 문을 열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문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고, 열어도 열어도 계속 문이 나올 뿐이었다. 입구만 있을 뿐 출구가 없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세 자매는 두려워진다. 같은 상황에서도 세 자매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셋은 성격도,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던 것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보고 느끼는 것도 각각 다르고, 주어진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모두 다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도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이용하는 지에 따라 각자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신을 위한 그림책'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작가의 개성이 돋보이는 스토리텔링과 그림을 바탕으로 하는 작가주의가 돋보이는 작품을 출간하는 시리즈라서 어른들이 읽기에 더 좋은 그림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연필과 콩테만을 사용해 그려낸 작품이라 흑백의 독특한 질감이 돋보이는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지만, 우리 인생의 많은 것들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어 우화로서도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내 앞에 존재하는 문을 없애거나 벗어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는 망부석처럼 지켜보기만 할 테고, 누군가는 해결책을 찾아 떠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문제에 맞설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하루하루의 문을 열고 있을까.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책 속의 문을 열고 닫으며, 한번쯤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각자의 앞에 주어진 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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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와일드카드 1~2 - 전2권 와일드카드
조지 R. R. 마틴 외 지음, 김상훈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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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야말로 현대의 마녀사냥이었고, 17세기 말 세일럼의 마녀재판에 회부되었던 그들의 정신적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에이스라는 죄목 아닌 죄목으로 테일거너 조 앞에 끌려온 에이스들은 스스로 무죄임을 증명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 당신이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란 말인가? SCARE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 중에서 그 질문에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증언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블랙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 1권, p.332~333

 

평균적인 체격을 가진 평균적인 소년, 크로이드 크렌슨은 8학년까지 학교를 다녔고, 9학년이 되었지만 첫 달을 넘기지 못했다. 다른 많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9학년 과정을 수료하지 못한 것은 전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폭탄이 터진 것 같다고 했고, 도로에는 차들이 멈춰 서 있었으며, 공습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집에 가려고 거리로 나온 크로이드는 길모퉁이에 세워진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는 파충류의 얼굴을 목격한다. 어떤 차들은 비어 있었으며, 인도를 가득 채운 인파의 움직임은 빠르고 시끄러웠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뉴멕시코주의 미사리 시험 발사장에 괴상하게 생긴 로켓기가 착륙했다. 그걸 타고 온 외계인은 자신이 타키스라는 행성에서 왔다고 말했다. 외모를 봐서는 누가 봐도 인간처럼 보였고,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았던 그는 대통령을 만나 추락한 로켓기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행성에서 숙주가 되는 생물의 유전자 구성과 상호작용하도록 특별 설계된 인공 바이러스를 개발했고, 그것은 사람들을 죽이는 대신에 기형으로 만드는 위험한 물질이었다. 바이러스를 실은 우주선이 지구를 향해 출발했고, 타키온은 그걸 막으려고 지구에 왔다는 거였다. 하지만 결국 '와일드카드' 바이러스가 유출되고 말았고, 바이러스애 노출된 이들의 90퍼센트가 사망한다. 생존자의 9퍼센트는 돌연변이체 조커로 변했으며, 나머지 극소수 1퍼센트는 초능력자 에이스로 거듭난다.

 

 

 

옆길로 들어서니 가면을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위아래가 뒤집힌 얼굴이나 멜론만 한 머리들로부터 도전적인 시선이 되돌아왔다. 다 새로운 형제자매들이야.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에이스 한 명당 열 명은 족히 되는 조커들이 존재했다. 운이 좋은 작자들이 망토를 걸치고 시답잖은 전문 용어로 대화하고 하늘을 날며 서로와 싸우는 동안, 이들은 이렇게 골목길에서 숨어 다녀야 한다. 에이스들은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토크쇼에 출연하지만, 괴물들과 불구자들은 조커타운에 있다.       -  2권, p.109~110

 

와일드카드 바이러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시무시했고, 끔찍했다. 이 미지의 병원체에 감염된 사람 열 명 중 아홉 병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떤 치료법도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 확률을 피해 살아 남았다고 해도 역시 그리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생존자 열 명 중 아홉 명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과정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변신해서,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리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생존자 열 명 중 한 명,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초능력자들의 삶 역시 만만치가 않다. 각국 정부에서 이들 에이스들을 통제해 이용하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초능력자 에이스들은 하늘을 날고,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흡수하고, 엄청난 생체 역장을 갖게 되는 등 초인간적인 능력으로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는데.. 영화 '엑스맨' 시리즈를 비롯해서 슈퍼히어로물을 좋아한다면 너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1987년 시리즈의 제1권 《와일드카드(Wild Cards)》에서 시작되어 2021년 현재 제29권 《조커 문(Joker Moon)》까지 출간된 초대형 SF 슈퍼히어로 시리즈 〈와일드카드〉의 첫 권이다. 이 시리즈는 하나의 거대한 SF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와일드카드 트러스트’라고 하는 40명 이상의 작가군이 집필에 참여하고,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조지 R. R. 마틴과 〈와일드카드〉 TV 시리즈의 책임 프로듀서인 멀린다 M. 스노드그래스가 공동 편집한, 앤솔로지 연작 형식의 SF 슈퍼히어로물이다. 각 장마다 다른 작가들에 의해 쓰인 단편들이 거대한 하나의 세계관 아래에서 엮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굉장히 색다르고 인상적이었다. 완전히 다른 매력을 지닌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으면서도, 이 모든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시도인지 감탄하면서 읽었으니 말이다. 마블이나 DC의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이 시리즈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계속 이어질 와일드카드 시리즈의 이야기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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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높이뛰기 -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신지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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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편함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써야 한다면 우리는 왜 그간 우리의 세계관을 담지 못하는 그 많은 표현들을 새로고침해 왔을까? 우리는 그렇게 배웠지만 다음 세대에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위해 잠시의 불편함을 감내했던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우리가 지양하는 세계관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향하는 세계관이 반영된 표현으로 고쳐가기 위해 우리는 그간 많은 표현들을 바꿔왔다.       p.154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이 옷은 신상품이세요, 사장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자리에 앉으실게요. 진료실로 들어오실게요.. 등등 무언가 어색한데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자주 듣는 말들이 있다. 계산대에서, 회사에서, 식당에서 이처럼 어색하고 문법에 맞지 않은 언어 표현들을 자주 듣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한 번쯤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이 가려운 곳을 속 시원하게 긁어줄 것 같다. 지난 20년 동안 언어 탐험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온 언어학자 신지영은 나이, 성별, 위계에 따른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단한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의식을 갖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안일하게 써온 말들을 10가지 주제로 설명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구입하면 본인의 언어 표현에 대한 민감도를 측정할 수 있는 '언어 모의고사지'를 받을 수 있다. 총 10문제로 진짜 시험지 형태로 되어 있어서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책을 읽고 나면 문제에 대한 힌트가 있을 것 같아, 책을 읽기 전에 문제지부터 먼저 풀어 보았다. 사실 책을 많이 읽는 편이고, 평소에 언어 표현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이 정도는 가뿐하게 다 맞힐 수 있지 않을까 자신했다. 결과는.. 두 문제나 틀렸다. 각 문제 별로 점수가 있어 합산한 결과는 '언어 감수성 최고!' 라고 나오긴 했지만 아쉬웠다. 하지만 덕분에 평상시에 무심코 흘려 들었던 언어 표현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언어 모의고사 덕분에 책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의 탓이 아니다. 언어 사용자들의 탓이다. 언어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지만, 언어 사용자들 사이에는 우열이 분명히 존재한다. 한 언어권 내의 언어 사용자들도 그렇지만 언어권 사이에도 그렇다. 해당 언어 사용자들이 그 언어를 가지고 얼마나 다양한 표현을 해 보았는가에 따라서 언어의 표현력은 달라진다... 따라서 한국어가 어떤 분야에 대해 표현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한국어 탓이 아니라 한국어 사용자들의 탓이다.      p.240~241

 

이 책은 언어 감수성 향상을 위한 총 열 번의 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나이가 권력인 한국어 높임법의 작동 원리로 시작해 곱씹을수록 불편해지는 단어들, 공손성의 요구 뒤에 숨은 일상의 갑질, 우리 사회가 불러온 '여성'의 변모, 가족 호칭에 숨은 불편한 진실, 코로나19 시대의 언어 풍경 등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언어 감수성을 높여서 익숙한 표현이 담고 있는 다수자의 횡포를 지적하고 소수자의 관점이 소외되어 있음을 자각하려는 것이 저자의 주요 관심사이기에, 일상에서 쉽게 깨닫지 못하고 있던 문제점들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들이 공감도 되고, 이해도 되었다. 물론 저자의 지적들을 읽다 보면 '이 말도 안 된다고 하고, 저 말도 틀렸다고 하면 도대체 어떤 말을 쓰라는 거야!'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우리가 바꾼다면 다음 세대에게는 그 부적절한 표현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팬데믹 이후 수많은 단어들이 새롭게 생겨나 사용되고 있는 요즘이다. 우한 폐렴, 코로나19, 비말, 코흐트 격리, 음압 병실, 포스트 코로나, 언택트, 웨비나 등등... 감염병이 아니었다면 전혀 접하지 못했을 어렵고 이상한 말들이다. 비일상적이던 언어가 일상의 언어가 되었으니, 언어가 지닌 권력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언어인지, 언어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권력관계와 소외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말에 민감해지고 스스로 언어감수성을 높여 ‘언어의 높이뛰기’를 시도'해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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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생겨버렸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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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너는 좀 더 나이를 먹으면 네 어린 시절에 내가 얼마나 수도 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게 될 거야. 나도 알아. 그건 포기했거든. 하지만 내가 정말로,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전장에 모든 걸 바쳤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어.
미친 듯이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으로.       p.23

 

<오베라는 남자>, <베어타운>, <불안한 사람들> 등의 작품으로 진짜 이야기꾼다운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첫 번째 에세이이다. 아내를 만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빠가 된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가족을 향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 형식이다. '25년 동안 나밖에 모르는 삶을 살다가 네 엄마를 만났고 그다음 너를 만났고, 이제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한밤중에 깨어나 두 사람이 숨을 잘 쉬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서야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어'라는 대목처럼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전 세계에 '프레드릭 배크만 신드롬'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아빠는 처음이라 시행보다는 착오가 많다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이 유쾌하면서도 뭉클하고, 진지하면서도 우스워 귀엽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부모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기에, 누구나 다 육아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좌절하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는 언제나 내 맘 같지 않고, 어디선가 배운 대로 아이에게 잘해보려고 해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마음의 여유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자신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는 진심 어린 마음만 있다면 그 어떤 물리적인 장벽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좋은 부모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야. 시행착오도 많고. 내 경우에는 시행보다 착오가 훨씬 많다만. 나는 비판을 당하면 강박적으로 농담을 늘어놓는다. 너도 지금쯤은 알아차렸을 거라고 본다만 상격상의 단점이지. 그런데 부모가 되면 절대 부족할 일이 없는 게 사람들의 비판이거든. 요즘은 애들이 그냥 애들이 아니라 부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울이야.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아무도 몰라.         p.155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란 없을 것이다. 세상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 사랑을 얼마나 자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가 마음의 크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아빠가 있는 집이라면 늘 웃음이 넘치고 사랑이 가득해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부모가 하고 싶은 대로만, 자기 방식대로만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왜냐하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서툴고, 부모 역시 처음 겪는 일들 앞에서 당황하고, 좌절하는 게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부모 노릇이라는 것이 보기보다 어렵다며, 챙겨야 할 게 미치도록 많고, 사는 게 온통 아이 위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지만, 매 페이지마다 그에게선 아들을 향한 애정이 넘쳐 흐른다. 그저 너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능력이 닿는 한도 안에서 가장 훌륭한 부모가 되고 싶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에, 실수 연발에, 일상은 매일같이 전쟁이지만 말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모든 부모가 슈퍼히어로인 줄 알지만, 아이에 얽힌 모든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소하고, 힘겨운 부모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뭉클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에서 빛나던 위트와 유머도 여전하고, 경험과 진심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이기에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도 많다. 결혼을 했건 아니건, 부모가 되었건 아니건 간에 지금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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