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죽인 남자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줄리안 시먼스 지음, 정향 옮김 / 엘릭시르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프레이컷에 사는 지인이 찾아오기로 마음먹으면, 그곳에 사무실이 있었고 사무실 생활이라는 무대 장치 가운데 앉은 아서가 있었다. 아서는 그곳에서 과거의 살인 사건에 대한 책을 읽으며 한참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언제나 범인의 정체를 알면서도 유죄를 선고할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짜인 살인 사건에 흥미를 느꼈다. 사무실에는 '영국의 유명 재판' 시리즈가 들어찬 책장이 있었다. 아서는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완전범죄를 꿈꾸던 범인들이 어디에서 실수를 저질렀는지 관찰했다.               p.66


아서 브라운존은 위압적인 아내 클레어에게 억눌려 살아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조차 아내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는 그를 안타까워하지만, 클레어가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자기보다 못한 남자와 결혼했으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아서는 참을성 있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한 남자였지만 점차 숨막히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즌비 멜런 소령은 결혼중개업체를 운영하는 대담하고 단호한 성격의 남자였다. 그의 아내 조앤은 그가 첩보원이라고 알고 있었고, 가끔 떠나는 해외 출장을 비롯해 그가 만들어낸 첩보의 세계를 너무나도 쉽게 믿었다. 


소령은 어느 날 고객으로 온 퍼트리샤 파커라는 젊고 예쁘장한 여자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되고, 그때부터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아서 브라운존과 이즌비 멜런 소령은 사실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정반대되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내고 두 여자와 각각의 삶을 나름대로 완벽하게 영위해 왔던 그에게 정체성의 위기가 닥치게 된 것이다. 애초에 두 가지 삶을 한 사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그는 아서 브라운존으로 금요일에서 월요일까지, 이즌비 멜런 소령으로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살았다. 늘 나긋나긋하고 폭신한 쿠션 같은 조앤과 남편을 지배하려는 성향의 클레어라는 완전히 다른 두 여자를 아내로 데리고 말이다. 결국 궁지에 몰린 아서는 결국 한쪽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결심하는데, 과연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이 유의미한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전에 읽은 기묘한 소설을 떠올렸다. 자기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내면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겉으로는 완벽하게 기능하였고 심지어는 성공하기까지 했기에, 교수 자리를 제의받았을 때 "교수진은 그들의 대열에 들어온 것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차가운 껍데기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역시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인가? 아서 브라운존은 클레어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즌비 멜런은 반드시 빠져나가야만 하는 그물에 갇혔다.                   p.218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사를 다루었던 명작 <블러디 머더>를 쓴 줄리언 시먼스의 대표작이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 42번째 작품으로 나왔다. 나 역시 <블러디 머더>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줄리언 시먼스가 추리 소설 작가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게다가 국내에는 그의 '소설'이 이번에 처음 출간되는 것이니 그 동안 줄리언 시먼스를 비평가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미스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뛰어난 작가이기도 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전형적인 황금기 고전 미스터리 스타일을 따랐다고 한다. 그러다 점차 인간 심리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작품 역시 인물의 내면에 주목하는 스타일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는 작가이자 비평가로서도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기존 스타일을 답습하는 작가들에게 통렬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직접 새로운 스타일의 미스터리를 집필하게 된다. 이 작품은 그가 비평가로서 역설한 범죄소설 작법이 집대성된 대표작이다. 그는 영웅적인 탐정 캐릭터 대신 평범한 소시민을 범죄소설의 주인공에 두었다. 그의 작품에서 미스터리의 핵심은 '누가 범인인가'가 아닌 '왜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만들어지는가'에 놓여있다. 그러한 특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다. <자신을 죽인 남자>는 평범한 한 인물이 범죄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심리소설로서도,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위선과 모순을 가차 없이 드러내는 범죄소설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추리소설에서 이중생활이라는 소재는 매우 고전적이지만, 시먼스는 거기에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의 유머를 더해 색다른 미스터리를 탄생시켰다.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를 즐겨 읽어 왔다면, 이 작품도 놓치지 말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린츠하우스 ANGST
강지영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벌건 대낮이었다. 프린츠하우스에선 굿을 준비하고 이곳 가평에선 구마의식이 시작될 참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를 설계하는 개발자였다. 이젠 누군가 억지스럽게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현실로 돌아갈 길을 궁구하는 처지가 되었다. 여사의 얼굴을 애써 지워내려 마른세수를 한 뒤 전원주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코가 떨어져 나갈 만큼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코와 눈은 물론이고 피부가 얇은 목까지 따갑고 간지러웠다.             p.130~131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 19세기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지어진 4층짜리 고급 빌라 프린츠하우스는 수백 년 전 유럽 귀족 소유의 대저택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벽난로와 선룸, 프라이빗 풀에 비상용 안전공간인 패닉룸까지 구비된 이 곳은 평당 1억 원으로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선우가 게임제작사 근무 3년 차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약간의 현금과 주식, 상가 그리고 프린츠하우스를 상속 받았다. 상가 임대료가 월급과 엇비슷한 덕에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개발자가 되었는데, 몇 년만 착실히 모아 이민 간 전 여자친구 이소를 따라 스웨덴으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홀로 프린츠하우스에서 지내며 강한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꼈던 선우는 세입자를 들이기로 한다. 단정한 이목구비의 젊은 여성인 전승아는 마치 프린츠하우스에 와보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 저기 아는 척을 했다. 열네 살까지는 여기 살았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첫날부터 방안에 붙어있던 부적들을 발견해낸다. 과감하게 벽지를 뜯어내자 부적 열두 장이 있었던 것이다. 방마다 이만큼 있을 거라고, 싹 태워 묻어버리라는 그녀는 무속인이냐는 선우의 질문에 자신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고 대답한다. 몽유병 때문에 잘 때 가죽으로 된 손목 스트랩을 손목에 끼우고 잔다는 것부터 이것저것 수상한 게 많았지만, 이제 와 계약을 무르기도 힘드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그녀가 세입자로 프린츠하우스에 들어오면서부터 평화롭게 지냈던 선우의 일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미카엘이 왜 악마의 말에 공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내쫓아도 놈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뿐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불티가 옮겨붙은 인간은 단순히 미쳐 날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유능함을 앞세워 권력을 움켜쥐고, 더 많은 사람을 지배했다. 내가 프린츠하우스를 떠나지 못했기에 놈의 목표물이 된 것이었다. 나 같은 인간은 허구했다. 전쟁 없어도 대량살인은 매일 벌어졌다. 돈, 신뢰, 가족, 사랑, 우정을 잃은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천 명씩 자기 자신을 살해했다.               p.237


세입자가 들어온 뒤 선우는 원인 모를 환시와 환청에 시달린다. 친한 형인 무당 한신은 전승아가 여자가 아니라고, 그녀의 몸에 잡귀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요사스러운 짓거리를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과거를 보고는 승아가 '고독'에 빙의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고독은 독을 가진 생물을 독 안에 모아 서로 다투고 죽이길 기다렸다 살아남은 한 마리로 강한 저주를 걸 수 있는 영적 무기라고 했다. 악귀와는 조금 다른데, 생명이 다른 생명을 죽여 힘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원과 한이 쌓이기 때문에 고독을 잘 키우면 큰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권력을 쥘 수도 있으며, 살인도 가능해진다고 했다. 고독은 젊은 사내를 원했고, 그들의 바람대로 젊은 사내인 선우가 프린츠하우스에 오게 된 것이었다. 선우는 부모의 실종과 연인과의 이별을 겪으며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지배욕과 권력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과연 선우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킬러들의 쇼핑몰> 시리즈를 쓴 강지영 작가의 신작이다. 영주의 성을 본떠 지은 최상류층을 위한 고급 빌라 프린츠하우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를 자본주의와 욕망으로 엮어내 굉장히 강렬한 공포를 선사한다. 밀도 높은 서사가 흡입력있게 전개되는 가운데, 마치 눈앞에 보여지는 것처럼 그려지는 문장들로 인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던 작품이다. 귀신 들린 집과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저주라는 호러 장르에서 익숙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당장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다는 오싹함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순간 훅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라 여름에 읽기 좋은 소설을 찾고 있다면 추천해주고 싶다. 자, 일상을 잠식하는 유채색의 공포를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이티브 영어어휘력 사전 네이티브 영어표현력 사전
이창수 지음 / 다락원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락원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학습 후 작성한 후기입니다.





영어를 비롯해서 외국어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단어 암기일 것이다. 하지만 모래알과 같은 수천 개의 단어를 기억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아무리 암기해놓아도 주기적으로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는 이상 오래 기억되지는 않는다. 영어 공부를 주기적으로 하려고 하는 편이라, 어휘력을 늘이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이번에 흥미로운 책을 만났다. 바로 이창수 교수의 ‘네이티브 영어’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인 <네이티브 영어어휘력 사전>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일대일 직역식 표현만을 떠올리는 한국인 영어 학습자를 위해 말의 '맥락'을 통해 어휘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보통 무엇을 '만들다'를 영어로 표현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make'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음식을 만드는 것도, 계정을 만드는 것도, 어떤 장치를 만들거나 팀을 만드는 것도 전부 'make'를 사용한다. 그러다보니 특정 맥락에 따라 내가 전달하고 싶은 말의 의도나 뉘앙스 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실제 원어민들은 상황에 따라 '만들다'를 의미할 때 work on, prepare, create, form, build, fix, set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한다. 시간이나 노력을 투입해서 만들다, 시간을 갖고 신경 써서 만들다, 있는 소재를 사용해 즉흥적으로 만들다, 보고서 등을 급히 작성하다, 그룹이나 관계 등을 형성하다, 머릿속에서 생각해내서 발명하다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 말의 '가다'에 해당하는 영어 기본 단어는 go로 'go to' 는 '~에/로 가다'는 뜻이다. go to the office, go to the hospital, go to school 등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거의 같은 의미이지만 head to를 사용하면 목적지로 향한다는 움직임의 느낌이 강조되고, run to를 사용하면 어디로 서둘러 급히 가는 것을 나타낸다. dash off to는 급히 가다는 뜻으로 미국보다는 영국, 그리고 문학 묘사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다. 계획이나 약속을 하지 않고, 잠깐 동안 들르는 상황에서는 stop by, drop by를 사용하고, 확실한 목적이 있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무를 때는 visit를 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무작정 영어 표현을 외워서 아무데나 쓰는 것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잘못된 표현을 사용할 경우 말이 맥락과 안 맞거나 의도치 않은 뉘앙스를 전달하게 오히려 해당 표현을 안 쓰는 것보다 못한 상황을 만들게 되니 말이다. 





초, 중급 학습자를 위해 만들어진 교재라 고급스러운 격식체 표현부터 사적인 대화에 어울리는 캐주얼한 표현까지 폭넓게 배울 수 있다. 단어와 뜻, 예문만 나열된 사전식 구성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어떤 뉘앙스를 전달하는지, 얼마나 격식/비격식적인 표현인지, 어떤 명사, 전치사와 함께 자주 쓰이는지를 조목조목 알려줘 차근차근 따라갈 수 있도록 해준다. 딱딱하고 오래된 표현은 제외하고, 현재 미국 영어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사용도가 높은 표현들로 엄선했기 때문에, 단어를 외우면서 회화 실력을 늘리기에도 도움이 된다.


일상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90개의 개념을 선별해 구성했으니 매일 하나의 개념씩 익히면 세 달만에 완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일대일 직역식 표현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영어 수준이 훨씬 올라갈테니 영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이 책에 수록된 90개의 한국어 개념들이 모두 일상에서 굉장히 자주 사용하는 표현들이라 바로 실제 상황에서 적용해볼 만한 표현들이었다. 잘 읽혀서 사용하면 원어민처럼 상황과 맥락에 맞게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도 들었고 말이다. 좋아하다는 표현으로 바로 떠올리는 것이 like라면 이 책에 수록된 좋아하다는 의미의 단어 표현은 무려 열한개나 된다. 무엇에 꽂혀 있다는 뉘앙스, 열광적인 관심을 갖다는 의미, 중독이라 할 정도로 매우 좋아한다는 뜻 등 생각해 보면 한국어 표현으로도 이렇게나 다양한데 영어 표현이 한가지라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직역식 영어 습관부터 고치고, 다층적인 영어 표현들을 익힌다면, 상황과 맥락에 맞게 어휘를 구사할 수 있게 될 것 같다. 


책에 수록된 다양한 예문들은 모두 QR코드를 통해 무료 음원을 활용할 수 있다. 네이티브 발음으로 예문을 들으면서 표현들을 익히면 된다. 각각의 유닛마다 단어들을 구조화해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두었는데, 상황, 맥락, 뉘앙스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정리가 되어 있어 좋았다. 기본 단어만 쓰는 일대일 직역식 영어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책을 통해 상황별로 어휘를 구사하는 능력을 키워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은 내게 삶의 목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수단이 되었다. 동시에, 가능성의 빛이 차츰 줄고 있었던 뉴욕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어주기도 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에서, 명성은 높지만 보수는 형편없는 직장에 다니면서 또 한 번 연애에 실패하고, 회의감에 빠져 다시 나 자신을 찾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안정적으로 함께 가정을 꾸릴 사람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그런 안정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태였다.                 p.56


사람들은 다양한 제각각의 이유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멀리 타국으로 떠나 다시 삶을 살아내는 것인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고, 그것은 이민자들의 2세대에게 더 크게 와 닿을 것이다. 자신이 속해 있던 곳에 대한 상실감, 잘 알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이곳에도 저곳에도 속할 수 없는 단절감이 자라오는 내내 뿌리깊게 박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은 늘 이민자의 몫이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 발전해 온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마거릿 주혜 리는 ‘너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는 질문에서 시작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파헤쳐보기로 마음먹는다. 부모님이 태어난 나라에 가서 한국전쟁 중에 할머니가 불태워버린 경찰 기록과 신문 기록을 찾아내고, 잃어버린 역사를 추적한 과정으로 책으로 쓴다. 문학 편집자이자 기자로 활동했던 이력을 토대로 탐사 보도, 구술사, 기록 조사, 가족 구성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장면 재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20세기 한국 역사 속 가족사를 담아냈다. 저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자신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넌 어디 출신이야?" 라고들 물었고,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열 살이 되어 부모님이 태어난 나라에 갔었지만, 그 나라도 역시 편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조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정작 말을 하는 것은 짤막한 구절로만 아기처럼 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2000년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는 이 탐색을 시작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는, 잊힌 가족의 과거와 대면하는 것이 미래로 길을 내는 데, 그리고 내 아이를 갖는 데 꼭 필요한 단계였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0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수차례 항일 시위를 조직했었던 독립운동가였다. 저자는 수년 동안 공부해 부모님의 언어를 어느 정도 읽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통치에 저항한 십대 공산주의 혁명가라고 기록된 할아버지의 삶을, 잃어버린 가족의 역사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잊힌 할아버지의 생애는 일제강점기와 제2차 세계대전, 분단, 미군정, 한국전쟁, 재건, 군사독재를 거쳐 세기말에 민주주의와 번영을 이루기까지 격동으로 가득 찼던 20세기 한국사와 얽혀 있었다. 그렇게 가족사를 추적하는 일은 삶의 목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수단이 된다. 저자는 편집자 생활을 그만두고 근대 한국사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관련 정보를 찾아보며 거의 알지 못했던 미국 이민 이전의 삶에 관해 아버지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진다.


직업적 야망은 제쳐두고, 가족의 비밀을 풀어 내면 삶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될까? 대체 왜 과거로 향하는 이 여정에 뛰어든 것인지, 저자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할머니와의 세 번째 인터뷰 전에 저자는 알게 된다. 왜 할머니가 남편의 신념이 담긴 물적 증거를 파기한 것인지.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과 자식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잊혀진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해내는 과정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분단 이후를 통과하며 감춰온 기억과 비밀 속에 담긴 역사를 보여준다. 개인의 가족사이자 대한민국 현대사를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 정지아 작가의 말처럼 역사와 동떨어진 개인은 없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슬픔은 다 거짓이야
대니얼 나예리 지음, 김래경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난 못생겼고 희한하게 말한다. 가난하다. 옷은 중고품이고 음식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난다. 콧구멍도 판다. 당신이 좋아할 농담이나 이야기는 모른다. 게임의 규칙도 모른다. 누가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처럼, 난 신중하게 창조되었다. 자신이 지은 것을 보고 기뻐하신 신이 나를 지었다. 

당신처럼, 난 친구를 원한다.             p.31


<천일야화>에서 셰에라자드는 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도록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일 하고도 하룻밤 동안. 왕은 왕비의 부정에 충격을 받아 매일 밤 처녀와 잠자리를 하고 날이 밝으면 그 처녀를 죽였는데, 셰헤라자데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에게 밤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에로틱하고,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왕은 그녀를 죽일 수가 없게 된다. 그녀는 밤마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멈췄기 때문에 나머지를 듣기 위해 왕은 하루하루 처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남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 속 열두살 소년 대니얼도 고대 페르시아 신화로 직조해 낸 이야기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려준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공포에 질린 소의 목에서 흐르는 시뻘건 피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를 타고 주말마다 여행길에 올랐던 가족의 여정과 커다란 베틀로 페르시아 양탄자를 짜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 위로 이란에서 탈출해 두바이,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살게 된 가족의 생존기가 그렇게 펼쳐진다. 덕분에 소년은 페르시아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세 개의 언어를 말하게 되었지만, 평생 이상하게 말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무슨 열두 살짜리가 이렇게 말한담?'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대니얼은 '조각보 같은 이야기는 난민의 수치'라고 말하면서도, 슬픔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들을 솜씨좋게 엮어 내어 아름다운 마법의 양탄자로 재탄생시킨다. 




무너진 마음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 삶에서 하도 큰 부분을 차지하기에 그 고통을 느끼지조차 못한다.

아예 무감각해졌다. 지속되기 때문이다.

지루할 만큼 사실이다.

실은 우리 뇌가 두려운 나머지 우리 가슴속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p.233


오클라호마의 한 중학교, 밀러 선생님 반 아이들은 페르시아인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만나본 페르시아인은 대니얼 밖에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아이들은 대니얼을 피부색이 어둡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도시락을 싸오며 늘 거짓말투성이인 이야기를 지어내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니얼이 하는 이야기는 동정심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허풍을 떠는 것도 아니다. 적대감으로 가득한 교실에서 대니얼은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살아남으려고, 진실을 지키려고 이야기를 엮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전부 다 사실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조각난 기억의 파편을 주워 모아 빚어낸 아름다운 신화가 된다. 


이 작품은 뉴베리 아너상 연속 수상으로 영미문학계에 가장 독보적인 거장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대니얼 나예리의 신작이다. 작가는 이란에서 태어나 난민 생활을 거쳐, 일곱 살에 가족과 함께 오클라호마로 이주했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열두 살 ‘호스로’로 분해, 어린 시절에 겪은 뼈아픈 상실과 난민의 삶을 펼쳐 보인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조차 가장 슬픈 기억으로 돌변해 버릴 수 있는,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곳에서 참혹한 기억으로 살아가야 하는 난민 소년의 이야기는 시처럼 아름답고, 동화처럼 신비로우며, 신화처럼 매혹적이다. 실제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으로 바탕으로 쓰인 이 작품은 뼈아픈 상실과 난민의 삶을 서늘하고도 유쾌한 농담으로 풀어내며 먹먹한 감동을 자아낸다. 문학이 어떻게 완벽한 구원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