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행방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진짜 재미있구나, 라고 고타는 희열을 곱씹고 있었다. 마음에 든 여자와 단둘이 겨울철 최대의 취미인 스노보드를 타러 온 것이다. 오늘부터 이틀 동안, 내내 함께 지낼 수 있다. 숙소는 스키장 옆에 자리한 호텔이다. 밤에는 어떤 식으로 보낼까. 상상은 한없이 펼쳐져 갔다. 다만 그 상상이 지나치게 비약하면 스노보드는 뒷전이 될 것 같아 적당히 억눌러뒀다.

고타는 연인인 모모미와 단둘이 겨울철 최대의 취미인 스노보드를 타러 와서 들뜬 기분이다. 스키장엔 손님도 가득했고, 눈 상태도 너무 좋아 보드를 타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였고, 이틀 내내 그녀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한참 줄을 서 스키장 곤돌라에 탑승했는데 여자들 네 명으로 구성된 팀이 함께 타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들의 수다를 한참 듣다 보니 말투와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했던 것이다. 빨간 보드복의 여자가 고글을 벗자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그녀는 바로 고타의 동거 상대였다. 3년이나 사귀었고, 1년 전부터는 함께 살며 결혼 얘기가 오가는 상대를 두고 고타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거다. , 이제 그에게 천국의 시간은 지나가고, 지옥의 시간이 시작된다. 과연 그는 그 순간을 무사히 모면할 수 있을까?

같은 호텔에 근무하는 미즈키와 히다는 스키장에서 깜짝 프로포즈를 하기로 구상을 한다. 히다의 상대는 역시 같은 호텔에 근무하는 하시모토인데, 사귀기 시작한 지 석 달 정도밖에 안 되었지만 좋은 상대를 다시 놓치기 싫어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던 거다. 히다는 유독 여자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고, 고백에 실패한 적도 많았기에 미즈키는 어떻게든 그를 도와주고 싶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사토자와 온천스키장에 도착한 그들은 다른 직장 동료들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공들인 연출의 프로포즈를 받고 가슴 뭉클해질 하시모토의 모습을 기대한다. 그런데, 완벽해 보였던 그들의 계획은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의외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겔렌데 마법'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겔렌데에서 만나면 이성이 실제보다 몇 십 퍼센트쯤 더 멋있어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고글로 얼굴을 확인하기 어렵다든가 스키복으로 몸매를 가릴 수 있다든가 스키나 스노보드의 실력을 보고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이라는 등의 이유가 있다고 한다. 눈밭에서 도움을 받고 자상한 배려를 받다 보면 마음이 움직인다, 라는 것도 있다.

7편의 에피소드들은 각각 개별적인 스토리로 읽어도 흥미롭지만, 같은 호텔에 근무하는 직장 도료, 혹은 학교 동창과 옛 연인이라는 인연으로 얽힌 남녀 여덟 명의 관계들이 어떻게 연결될 지 지켜보는 걸로도 매우 재미있다. 스키장에서는 사람들이 자꾸 사랑에 빠지곤 해서겔렌데 마법이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스키장에서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는 법칙이다. 설원의 분위기가 단점은 가려주고 장점은 부각시켜주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연애 소설인데도 낯 간지럽거나 억지스러운 대목이 전혀 없었다. <연애의 행방>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은의 잭>, <질풍론도>, <눈보라 체이스>에 이은 설산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설산 시리즈의 배경인사토자와 온천스키장에서 펼쳐지는 연애 소동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랑의 화살표와 함께 그의 미스터리만큼이나 시선을 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첫 번째 연애소설이라는 점에서 읽기도 전부터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추리 소설의 제왕이 쓴 연애소설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가 되기도 했고, 사실 그의 미스터리들이 반전으로도 유명하지만 드라마가 탄탄한 작품들이 많았던 터라 어느 정도 믿음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그는 밑줄 긋고 싶은 멋들어진 문장을 쓰지도 않고, 화려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지만, 항상 인간에 포인트를 주고 그려내는 드라마라 추리 소설임에도 마지막에 감동을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보여줘 왔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 하면 한번 읽기 시작하면 절대 중간에 멈출 수 없는 속도감과 함께 평범한 인물들이 벌어지는 사건에 어떻게 엮여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드라마가 먼저 떠오르는 작가이기도 하다. 추리 소설을 쓰면서도 살인사건이라는 메인 플롯보다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만들어 졌고, 이상하게도 그 작은 모자이크 조각들이 모여 만드는 이야기가 너무도 따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도 결코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물들이 빚어내는 드라마는 매우 뭉클하게 다가왔다. 언젠가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서 순수 추리, 미스터리의 느낌보다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적인 요소들이 다분히 늘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미스터리 장르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도 만족시킬 만한 요소들이 많아진 최근의 작품 경향이 더 많은 이들을 그의 작품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연애 소설까지 완벽하게 써내고 있으니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최고의 엔터테이너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클라베 - 신의 선택을 받은 자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운구가 구급차에 도착할 때쯤, 로멜리는 작금의 세계 교회를 그려보았다. 교황 성하와 25억의 영혼들. 마닐라와 상파울루 슬럼에서 TV 주변에 모여든 빈민들, 도쿄와 상하이의 휴대폰에 빠진 출근 인파, 보스턴과 뉴욕 술집에서 스포츠를 즐기던 사람들이 갑자기 들어온 속보에.....

가라, 그리하여 온 세상을 제자로 만들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하라.......

 

이야기는 바티칸의 교황이 선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재 추기경단 단장직을 맡고 있는 로멜리 추기경은 급한 연락을 받고 새벽에 교황 침실로 향해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교황과 조용히 작별인사를 하며 생각한다. 교황은 이런 삶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루하루, 한 해 한해. 무장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50평방미터의 무미건조한 공간에서의 초라한 삶을 말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동요에 휩싸이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도 막중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제 공식적으로 교황 자리가 공석이었으므로, 콘클라베를 통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로멜리 추기경은 콘클라베 선거 관리 임무를 맡게 되고, 전 세계의 118명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을 위한 비밀회의에 들어가기 위해 모여든다.

콘클라베 기간 동안 성녀 마르타의 집에 기거하게 되는 추기경들은 외부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다. 휴대폰과 컴퓨터는 당연히 금지되고, 개인 소지품 또한 철저한 확인 후 소지할 수 있다. 콘클라베는 라틴어로 콘 클라비스, 즉 열쇠를 지니다는 듯이다. 13세기부터 교회는 이런 식으로 추기경들이 결정을 내리도록 보안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식사와 잠을 제외하고, 교황을 선택하기 이전에 추기경들은 성당을 벗어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투표에 참여하는 추기경들은 누구나 교황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규범은 3분의 2에 해당하는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필요하다면 열두 날 동안 서른 번까지 계속해서 투표를 해야 하는 걸로 되어 있다. 대부분 서너 번의 투표 후에 결정이 되었지만, 무려 여덟 번의 투표 후에 교황이 선출되었던 적도 있다. 그러니 투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야 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늘 밤이야말로 콘클라베의 진짜 사업이 벌어진다. 추기경 선거인단에 '어떤 형태의 협상이나 협의, 약속이나 위임을 금하고 어길 경우 파문의 죄로 묻는다'고 교황령으로 정하고는 있으나 콘클라베는 이미 선거가 된 지 오래다. 선거는 숫자 싸움이다. 누가 79표를 가져갈 것인가?

 

개인적으로 별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시종일관 종교적 성스러움을 유지하는 분위기가 낯설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저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는 성역이나 다름없는 곳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그런지 흥미로운 부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게다가 그런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현대 정치판의 그것처럼 흘러가는 인물들의 야망과 경쟁 구도도 페이지에서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들어 주었고 말이다. 종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독자인 내가 읽기에도 이렇게 흥미진진한 걸 보면, 로버트 해리스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로버트 해리스는 지적 스릴러계의 거장, 히스토리 팩션계의 최고봉으로 불리는데, 이번 작품은 기존 스릴러에 비해 소재도 그렇지만 조금 차별적인 부분이 많아 기존 팬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72시간이 지나면 118명의 추기경들 중에 오직 한 명만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가 된다. 차기 교황으로 가장 유력시되는 추기경들 각각의 배경과 투표가 거듭되면서 점점 달라지는 판도의 변화, 그리고 여기 저기서 속출하는 비밀스런 폭로들로 인해 스토리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도 로버트 해리스가 음모와 부패 등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이렇게 맛깔나는 구성과 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해진 규칙부터 교황의 선종 및 콘클라베를 진행하는 의식, 그리고 성녀 마르타의 집에서 행해지는 추기경들의 행보, 이와 관련된 역사적 일화까지 더해져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화'가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리얼한 콘클라베를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작품 만이 가진 매력이다. 신을 믿든 안 믿는, 교회에 다니든 그렇지 않든 이 작품은 재미있게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신앙이 독실하거나 천주교의 내부 사정에 관심이 있다면 이 작품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줄 것이다. 로버트 해리스의 작품은 <폼페이> <유령작가>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의 대표작으로 <콘클라베>를 추가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홀딩, 턴
서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뭘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뭘까.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기적과도 같은 거라고. 어쩌면 평생에 단 한번, 서로의 소울 메이트를 힘겹게 찾아 헤매다 마침내 상대방을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생에 남아 있는 모든 시간을 상대와 함께 하길 바란다. 하지만 서로에게 반해 온 세상에 단 둘만 존재하는 것 같던 마법의 시간이 지나고, 결혼이라는 현실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만다. 어떤 문제는 같이 살아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하고 데이트를 자주 했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연애가 멋진 신발을 신은 사람과 같이 걷는 거라면 결혼생활은 양말도 벗은 맨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런 부분이 편안함과 친밀함을 가져올 수도 있고, 반대로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참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생활을 공유하고, 그러니까 일상의 민낯을 고스란히 만나게 되는 결혼이란 대체 뭘까.

‘홀딩, 은 스윙 댄스 용어로홀딩은 파트너와 만나 손을 잡는 동작, ‘은 돌면서 춤을 도는 동작이라고 한다. 춤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스윙 댄스의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이 되진 않는다. 다만, 나도 학창시절에 남학생들과 어색하게 포크댄스를 췄던 기억은 가지고 있어 조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춤을 추는 두 사람, '홀딩, 잠깐 정지하며 서로를 붙잡았다가 턴, 회전하는 동작.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서로를 잡았다가 빙그르 도는 순간, 그저 공중에 사라져 버리는 그 짧은 시간의 틈을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은 소소하게 쌓인 감정들이 결국 폭발해 파국을 앞두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들 두 사람이 갈등을 극복하고 홀딩,하며 살아갈지, 혹은 차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턴, 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지의 과정이 소설의 내용 전부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은 결혼 후 그들이 파국에 이르게 된 과정이나 이혼 후의 삶보다는, 현재는 그런 상태이지만 그들에게도 서로에게 오직 상대만 보이던 반짝이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이별이나 이혼 이야기라기 보다, 연애의 과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지나온 어떤 순간, 인상적인 장면을 꺼내 후후 불어 맛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이 베푼 행운임에 틀림없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는 언제든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우려먹을 수 있는 티백이 필요하다. 청춘이라 명명할 수 있는 장면과 따뜻했던 눈 맞춤, 짜릿했던 키스, 온몸과 마음이 살아 있다고 느꼈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긴 티백이어야 한다. 몸이 힘들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 그것들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가 아니고 이 삶이 완전히 실패하지 않았으며 사랑의 한복판에 서 있던 시절도 있었다는 걸 깨달으면 기운을 얻을 수 있다.

지원과 영진은 다투게 되면 일주일 동안 말을 섞지 않은 채 지내곤 했다. 그들 사이엔 아이도 없었고, 각자 거실과 서재에서 낯선 타인처럼 각방을 쓰며 지내는 것이 이제는 그들 사이의 관례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지난번 싸움에선 냉전 상태가 열흘 넘게 이어졌고, 이번에는 아직 일주일째지만 보름을 가뿐히 넘기며 장기전에 돌입할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지원은 결정을 내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그들은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처음 만났다. 영진은 공무원이었고, 닉네임조차 자기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지식하고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이 호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순간을 거쳐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둘만의 춤을 추며 사랑의 마지막 단계라고 불리는 결혼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진행되지 만은 않는 법, 애써 고른 테이블에 생활의 얼룩이 지듯 사랑은 쉽게 변형되고 천생연분이라고 믿었던 관계에 대한 회의가 점차 얼룩처럼 커진다.

결혼생활은 사랑 위에 세워지지만 어떤 문제로 감정이 상해서 대립할 때 사랑은 저 너머로 날아가버리거나 훼손 방지를 위해 다른 곳으로 피신한다.

나도 이제 결혼 3년차인데 남편과 연애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했던 부분들과 다른 점들이 어쩔 수 없이 생기기 시작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극복할 수 있는 것과 넘어가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는 것을 경험해봤기에, 더욱 서유미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이야기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극중 지원은 결혼생활 내내 누군가를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 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은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고 수많은 변수로 이루어지는데, 바로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관계 속에서 자주 길을 잃고 좌절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언제나 자신과 맞지 않은 그 부분을 고치고 싶어 하고, 자신이 달라지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단언컨대 착각이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물며 수십 년의 시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지 않나. 상대에게 맞춰주고, 포기할 수 있는 건 포기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어야 비로소 낯선 타인이 부부라는 테두리 아래 가족 관계를 유지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결혼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 버린 시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결혼을 하는 이들이 더 많다. 결혼을 인생의 완성이나 삶의 해피엔딩으로 생각하지 않는, 요즘 젊은 부부들이 이 작품을 읽으면 더 와 닿는 부분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라는 삶의 서사 속 결혼생활을 그리고 있어, 결혼을 앞두고 고민하고 있거나, 결혼 생활의 위기를 맞았거나, 이혼을 고민하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레그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범인들이 그러듯이. 그들의 특권이자 유일하게 합리적인 전략이라는 듯이. 그럼 이제 어디로 가지? 어떻게 이미 해결된 사건을 수사해서 이미 답이 나온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지? 뭘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진실을 거부하면서 진실과 싸운다? 강력반 형사로 일하면서 보았던 여느 범인들의 가족처럼 애처롭게 부정하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어!" 해리는 자신이 왜 수사를 하고 싶은지 알았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다. 그가 해줄 게 그것뿐이라서.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밥을 챙겨줘야 한다고 고집하는 주부처럼, 친구 장례식에 악기를 가져가는 연주자처럼. 생각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든 위로를 얻기 위해서든, 뭐든 해야 하니까.

해리 홀레 시리즈 그 아홉 번째 작품이다. <스노우맨>, <레오파드> 바로 다음 이야기이다. 《스노우맨》에서 손가락을 잃고, 《레오파드》에서 얼굴 절반이 찢어진 해리.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졌다. 소설 《팬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홍콩으로 떠난 해리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번에 그를 오슬로로 이끈 것은올레그였다. 라켈의 아들이자 그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던, 아들보다 더 가깝던 그 소년이 다른 소년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것. 그러나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레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경찰이자 아버지의 입장에 선 해리.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해리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레오파드> 이후 3, 마침내 돌아온 오슬로에서 그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켜야 한다. 그가 평생 사랑한 여인 라켈의 아들 올레그, 이제는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되어버린 올레그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런데, 해리는 더 이상 강력반 형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해리는 자신에게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올레그를 지켜야 한다.

해리가 평생 가장 사랑한 여인 라켈, 그녀가 아들인 올레그를 데리고 오슬로로 왔을 때 소년은 겨우 서너 살이었다. 그리고 그때 라켈과 해리가 만났고, 올레그는 해리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었다. 하지만 스노우맨이라는 소름끼치는 기억에서,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해리의 세계에서 라켈은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오슬로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열여덟 살의 다 큰 소년이 된 올레그가 교도소에 있다. 올레그가 죽인 소년 구스토는 레그를 마약의 길로 인도한, 올레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 해리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바로 죽은 구스토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일 것이다. 자신을 입양해준 한 가정을 무참히 박살낸,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마약 중독자 소년. 팬텀. 유령의 목소리. 올레그는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리는 확실해지기 전에는 누구도 유죄일 수 없다며 나름의 수사를 시작하지만, 이내 모든 증거들이 올레그가 살인을 했음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과연 올레그는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없이 유죄일까?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폭력과 마약에 찌든어두운오슬로라고 말했다. 이런 배경 덕분인지 이 작품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해리 홀레의 모습을 보여주며, 마치 이 작품이 해리 홀레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끝을 낸다. <팬텀> 뒤에 두 작품이 더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처 몰랐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시리즈의 마지막을 슬퍼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해리는 벙커 문을 밀었다. 잠겨 있었다. 터널은 벽에 끼어 있는 철판 앞에서 끝났다. 루돌프 아사예프는 말하자면 나가는 길만 만들어놓은 것이다. 터널. 그리고 해리는 왜 다른 출구를 먼저 다 열어봤는지 알았다. 그 꿈 때문이었다.

그는 좁은 터널을 응시했다. 폐소공포는 비생산적이고 위험에 대한 거짓 신호이며 극복해야 할 증상이었다. 해리는 탄창이 MP5에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지 확인했다. 유령들은 우리가 허락할 때만 존재한다.

요 네스뵈의 작품들 중에 해리 홀레 시리즈만 모아 보았다. 아마 대부분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내가 해리 홀레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의 남자, 그리고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이지만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으로 뛰어난 수사 능력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남자!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인 <팬텀>을 만나면서, 그 동안의 작품들을 돌아보니 이렇게 모아놓고 책등만 보아도 지나간 시간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했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했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렇게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였다.

 

2월에는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리디머>가 출간될 예정이다. 곧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요 네스뵈는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해리 홀레를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걸로 유명한데, 이번 작품 <팬텀>에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으로 상처받고, 사상 최악으로 망가지는 해리 홀레를 만날 수 있다. '해리 홀레의 끝, 시리즈의 정점!'이라는 홍보 문구가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말이다.

 

원래 이 시리즈는 전체 열 권으로 마무리가 되었었다. 마지막 작품 <Police>가 나온 것이 2013년이다. 국내 출간작 외의 작품들은 원서로 구매했지만, 더 이상 해리 홀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아쉬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새로운 해리 홀레 이야기가 <The Thirst>라는 작품으로 2017년 봄 다시 시작되었다!! 앞으로 스무 편, 서른 편..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감 2018-01-3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까지 모으시다니, 엄청난 팬이시군요! ^^ 원서는 생각보다 얇은것 같네요ㅎㅎ

피오나 2018-02-02 01:50   좋아요 1 | URL
ㅎㅎ 요 네스뵈의 작품들은 원서도 두툼하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판본으로 <Police>는 700페이지, <The Thirst>는 630페이지네요. ^^

G 2018-12-2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Police>, <The Thirst>한국어로 출판된 것은 없나요?

피오나 2018-12-24 22:10   좋아요 0 | URL
네. 두 작품 모두 아직 번역본은 출간 전이에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사람의 일생을 책 한 권, 문장 하나, 단어 몇 개에 전부 담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간단한 단어들에. 하지만 이 작품은 기어이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도 유려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말이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도리고 에번스는 유명한 외과의였으며 전쟁영웅으로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이었고, 전기와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지난 주에 일흔일곱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무려 오십 년의 세월 동안이나 기억의 망령에 사로잡혀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젊은 시절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일본군의 포로로 노역하다 살아남았다. 이야기는 도리고가 참전 전 젊은 숙모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던 기억과 전쟁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비참한 기억과 현재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진행된다. 과거와 현재가 예고 없이 계속 교차되다 보니 글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혼란스러운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서사와 형식 그 자체보다는 인물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바섬 고지대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수용된 전쟁포로수용소에서 대령이었던 도리고 에번스는 포로 천 명의 부사령관 역할이었다. 여기 저기 쌓여 있는 시체들, 고성능 폭약의 시큼한 악취, 죽음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농담을 주고 받던 기억, 폐허와 먼지로 변해버린 마을의 모습, 비처럼 쏟아지던 포탄들, 총알로 벌집이 된 자동차... 전쟁의 풍경들이 그에게 남긴 선연한 기억들은 그렇게 수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평생 그를 지배한다. 끊임없는 굶주림과 영양실조, 말라리아, 이질 등의 질병에 시달리던 동료들의 모습, 오래된 토사물, 배설물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들... 전쟁을 겪지 않은 이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부분들을 리처드 플래너건은 고스란히 페이지 속으로 불러 들인다. 그의 아버지는 실제로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버마 철도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어린 시절 참담하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체험을 듣고 자란 그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12년간 집필에 매달리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다섯 개의 다른 판본을 썼다고 한다. 그 모든 판본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이 작품은 매혹적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본 것 같았다. 끔찍한 공포에서 도망칠 길이 없고, 폭력이 영원한 세상. 세상이 창조한 문명보다 폭력이 더 위대하고 유일한 진실이며, 폭력만이 진실한 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숭배하는 어떤 신보다 폭력이 더 위대한 곳. 마치 인간은 폭력의 세력이 영원히 유지되도록 폭력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결코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끝나는 날까지 다른 사람들의 부츠와 주먹과 끔찍한 행동 아래에서 죽어갈 것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는 폭력의 역사였다.

이 작품은 전쟁 소설인 동시에 한 남자의 평생을 좌우하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도리고 에번스는 부대에 배치되기 전 훈련 중 휴가 때, 오래된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당시 그에게는 당연히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머리에 붉은 꽃을 꽂은 대담한 모습으로, 함께 온 남자들의 선망의 눈길을 뿌리치고 그에게 다가온 그녀에게 도리고가 한 눈에 반하거나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몇 마디 대화를 했고, 그가 그녀에게 책 속 몇 구절을 읽어 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단 두 줄의 문장으로 설명될 이 만남을 작가는 무려 열 페이지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녀의 행동에 그가 한 사소한 행동들과 그 순간 했던 생각들은 마치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 장면은 서사 문학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독자들에게 안겨준다. 단어 하나하나가 영원히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현재의 노인이 된 도리고는 여전히 전쟁포로 막사에서 잠을 자는 꿈을 꾸고, 당시의 여자친구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지독한 고독함에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야기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도리고가 우연히 고모부의 아내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가까워지는 과정과 일본군 포로로 지내던 끔찍했던 기억 사이를 오간다.

일본군 대령들이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을 종종 읊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작품의 제목 역시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의 <오쿠로 가는 좁은 길>의 영어판 제목과 같다고 한다. 리처드 플래너건은바쇼의 책이 일본 문화의 최고 정점에 있다면, 내 아버지와 전쟁포로들은 그 문화의 최저에 있던 셈이라고 말하며, 작품의 소제목들도 모두 바쇼와 잇사의 시 구절에서 따오고 있다. 하이쿠 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자부심과 그들이 철로 건설을 통해서 세계를 정복하며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리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작품 전체를 통해 어떤 은유로 보여지는 지 또한 굉장히 흥미롭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는 건데, 소문만큼이나 굉장했다. 장편소설이라기 보다 거대한 호흡의 서사시같다는 느낌이랄까. 기억과 트라우마에 대한 유려한 서사도 훌륭하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묘사와 표현들도 멋졌다. 무엇보다 산문이 안겨주는 즐거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여러 번 읽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전쟁 소설을 읽으면서 잘 쓰였다고 감탄한 적은 있어도, 공감이라는 걸 경험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평생에 걸쳐도 절대 체험해볼 수 없는 세계였으니 말이다. 작가라는 존재가 인물의 심장과 영혼 사이의 어두운 주름 속으로 다가가,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을 선사하는 사람이라면, 리처드 플래너건은 바로 그런 마법을 내게 보여주었다. 전쟁의 서사를 가지고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게, 아름다운 단어들로 삶과 사랑을 그려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현대판 오디세우스', '오스트레일리아판 전쟁과 평화'라는 평이 절대 과찬이 아님을, 모두 직접 읽고 느껴 보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